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179화 (179/609)

00179  예고된 태풍?  =========================================================================

이재민을 위해 5,500억 원의 새 주택 건설비를 지원하겠다는 발표는 여론을 크게 뒤흔들었다.

“모든 공사는 H건설에서 주관합니다. 건설업계가 관행적으로 떼먹는 비용이 많은 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선사업의 취지를 철저히 살리기 위해, 이번 공사에서는 단 100원도 허투루 쓰지 못하게 감시하겠습니다. 회장의 이름으로 국민 여러분께 약속합니다.”

백철중이 힘차게 약속했다.

공사비에는 보통 땅값이 포함된다. 그러나 이 경우는 집만 새로 지어주는 것이기에 공사비가 획기적으로 절감된다.

건축 전문가들은 H건설이 주관하고, 관행처럼 이뤄지는 공사비 착복만 없앤다면, 28평형 빌라를 짓는데 6,000만 원 선에서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계산했다.

자선사업이기에 건설사 마진까지 건너뛴다면, 약 1만 가구에 저택을 공급할 수 있는 계산이 나온다. 집을 잃은 가구 숫자의 10%에 달하는 물량이다.

통 큰 기부에 여론이 반전했다.

진성그룹의 100억 원 기부를 칭송하던 목소리가 사그라지고, H그룹을 찬양하는 목소리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백철중 회장 통 큰 건 진작 알고 있었지만, 정말 대단하다.”

“울산 자동차 공단으로 H그룹도 엄청난 피해를 봤을 텐데, 이재민들을 위해서 수천억을 내놓겠다니.”

“H그룹이 부담하는 금액은 정확히 500억 원이고, 나머지는 SJ인더스트리에서 내는 거야. 태풍으로 일본 선물 시장에서 번 돈을 전액 기부하는 거래.”

“개쩐다. SJ인더스트리 정말 양심 있는 기업이네.”

“처음부터 태풍 피해 성금으로 내놓으려고 선물 시장에 투자한 거라더라. 정말 대단하지 않냐?”

한서진과 정지원의 이름은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대신 SJ인더스트리의 이름이 H그룹과 함께 전면으로 나섰다.

물론 좋은 목소리만 있는 건 아니었다.

남은 태풍으로 불행에 처했는데, SJ인더스트리는 그걸 이용해 돈을 벌었다는 비난도 있었다.

그러나 투자는 정지원이 개인적으로 했다는 점, 그리고 투자 이익 전액을 성금으로 내놓았다는 점 덕분에, 그런 비난은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태풍을 이용해서 투자 수익 낸 게 뭐? 애초에 태풍 피해자들 도와주려고 돈을 번 거잖아?”

그동안 SJ인더스트리는 국내에서 반도체로 유명한 외국 기업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기부로 SJ인더스트리는 국내 소비자들의 확고부동한 지지를 얻었다. 다른 기업들이 합친 것보다 훨씬 많은 성금을 선뜻 내놓았으니.

“진성도 참 쪼잔하다. 시시하게 100억이 뭐야?”

“진짜 너무한다. 누가 SJ인더스트리처럼 5천억씩 내놓으라고 했나? H그룹도 회장 사재로만 무려 500억을 내놨는데, 재계 1위 대기업이 겨우 100억이 뭐야?”

“이창용 회장 쓰러지고 진성도 참 많이 쫀쫀해졌네.”

큰마음 먹고 100억을 투척한 진성그룹은 오히려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백철중 회장은 약속을 지켰다.

H건설의 주관 하에 이재민들 새 주택 제공 사업을 곧장 시작했다. 전용 홈페이지를 만들고, 건설단가와 건설 과정 등을 투명하게 공개했다.

누수 되는 공사비가 단 100원도 없게 하라는 회장의 엄명에, 그룹 전체가 바쁘게 돌아갔다.

단 한 푼도 마진을 챙기지 않는 사업이지만 H그룹은 500억 원 이상의 무형적 이익을 얻었다. 소비자들이 기업에 가지는 이미지가 비약적으로 좋아진 것이다.

그 마케팅 효과를 생각하면 H그룹은 무엇보다 값진 이익을 얻었다고 볼 수 있다.

“백철중 회장님이야말로 진짜 사나이다.”

“20년 전 재산분할만 아니었어도 지금 재계 1위는 여전히 H그룹이었을 텐데.”

“진성그룹은 째째해서 안 된다니까. 이창용 회장 쓰러지고 이제 저무는 태양 다 됐네.”

진성그룹은 여전히 동네북이었다. 국내 기업 성금 규모에서는 2위인데도.

H그룹에서는 아예 한술 더 떠서, 공개적으로 공사비 모금을 시작했다. 기존 5,500억 원 외에 국민들이 내놓는 성금을 보태어 공사 규모를 늘리겠다는 것이다.

“회장직을 걸고, 반드시 투명한 집행이 되도록 감시하겠습니다. 단 100원도 허투루 쓰지 않겠습니다.”

원래 비밀주의가 강한 재벌 회장은 좀처럼 매스컴에 얼굴을 비추지 않는다. 하지만 백철중은 두 번이나 직접 얼굴을 내밀고 국민들에게 약속했다.

울산 H자동차 공단이 큰 피해를 입은 와중에도, 이재민들을 먼저 생각하는 태도에 국민들은 큰 감동을 받았다. 그 감동은 쭉쭉 불어나는 성금 액수로 나타났다.

태풍은 심한 상처를 남겼지만, 그 자리에는 더 큰 희망이 새살로 자리 잡았다.

‘타르타로스.’

한서진은 저택 5층 보안방의 타르타로스 주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다. 벌써 몇 시간째 계산 로그를 들여다보고 있는지 모른다.

“왜 계산 결과가 다른 걸까…….”

그는 작게 신음하며, 시뮬레이션 로그를 하염없이 살폈다.

타르타로스가 원래 최초로 예측한 결과는 태풍 메기가 나흘 간 체류 후 서울까지 북상한다는 시나리오였다. 그러나 그것을 자체적으로 폐기하고, 나흘 간 체류 후 동해로 방향을 튼다는 다른 결과를 내놓았다.

‘처음에 계산 결과를 폐기한 정확한 이유가 없어.’

심각한 오류로 폐기를 했으면 당연히 알려야 할 것이다. 하지만 타르타로스가 보관한 계산 기록에는 ‘오류’ 표시가 없었다.

계산 오류로 폐기를 했으면 그런 표시가 되어있어야 하는데,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설마 진짜로 오류가 아니라…….”

그때도 떠올렸던 바보스러운 공상. 혹시 타르타로스가 태풍의 움직임에 개입한 것은 아닐까.

“말도 안 돼.”

한서진은 스스로를 세뇌하듯이 강하게 중얼거렸다.

말도 안 되는 공상이다.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다.

하지만 어째서 자꾸만 그런 의심이 드는 것일까?

‘에테르의 움직임을 읽을 수 있다는 건, 반대로 에테르의 움직임에 개입할 수도 있다는 건데…….’

한서진은 이미 슈나우저를 통해 본 적이 있다.

Z7에 장착된 반도체 집단이 에테르의 힘을 광휘로 뿜어내던 모습이. 기존 실리콘 반도체로 설명되지 않는 놀라운 성능은, 바로 에테르를 이용한다는 비밀에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도 슈나우저, 코카 스패니얼은 에테르를 이용해서 성능을 증폭하고 있잖아?’

에테르는 자연계에 존재하는 힘이다.

태풍에 얽힌 에테르를 움직일 수 있다면, 태풍도 조절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가정을 하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증거는 없다. 그러나 왠지 그럴 것이라는 확신을 떨쳐낼 수도 없다.

‘나비 효과…… 만약 타르타로스가 태풍에 개입하려 한다면 가능한 초기에 나서는 게 훨씬 제어가 쉽겠지. 그래서 최악의 결과를 미리 막을 수 있었던 거고. 그리고 마지막까지 계속 개입해서, 결국 태풍을 사흘 만에 쫓아내 버린 거라면?’

손에 저절로 땀이 쥐어진다.

아직은 증거도, 설득력도 없는 상상일 뿐이다.

‘그게 맞다고 가정해도, 타르타로스가 왜 그런 짓을 하지? 나는 태풍을 억제하라는 명령을 입력한 적은 없는데.’

처음에 그는 태풍의 경로와 규모를 예측하려고만 했을 뿐이다.

그럼 타르타로스가 멋대로 태풍을 억제하려고 한 것일까? 자신의 진짜 속마음을 이해하고?

말도 안 된다.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컴퓨터라니.

‘잠깐, 타르타로스는 에테르의 흐름을 읽을 수 있잖아? 사람한테도 에테르가 있고. 그렇다면 설마?’

무서운 상상이 거듭해서 솟아난다.

한서진은 고개를 돌려 보안 프레임의 보호를 받고 있는 타르타로스를 주시했다.

자신만이 볼 수 있는 푸르스름한 에테르의 폭풍. 그 선이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잘 보이지도 않는다.

그때였다.

「지직, 지직…… 지지직…….」

주모니터에 요란한 잡음이 나타났다. 화면이 일그러지며 지독한 노이즈가 가득 뒤덮였다.

동시에 타르타로스를 감싼 에테르의 흐름이 폭풍처럼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도 일찍이 본 적 없는 요란한 흔들림이었다. 마치 타르타로스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처럼 보였다.

뚝.

노이즈가 사라졌다. 동시에 주모니터에 푸른 하늘이 나타났다. 창공 아래 펼쳐진 드넓은 비옥한 대지와 맑은 강, 거대한 나무로 가득한 숲과 황금빛 곡식이 가득한 들판.

아름답기 그지없는 광경에 한서진은 그만 시선을 빼앗겼다. 정신없이 화면을 응시했다.

비옥한 땅과 강은 마치 끝이 없는 것처럼 펼쳐져 있었다.

곳곳에 군락을 이룬 마을이 보이고, 그 뒤로 다시 커다란 도시가 나타난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도시는 한서진이 아는 어떤 도시와도 닮지 않았다.

고급 전원주택이 끝없이 이어진 대도시. 문득 이상한 위화감이 들었다.

‘아!’

한서진은 순간 위화감의 이유를 깨달았다.

도로가 잘 정비된 깨끗한 도시지만, 고층 건물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저렇게 큰 도시에 단 한 대의 자동차도 보이지 않았다.

‘이건 영화인가?’

도시 모습과 규모를 보면 잘 발달된 문명국가다. 하지만 현대 선진국의 어디를 가도, 차량 한 대 없는 곳은 찾지 못할 것이다. 이게 어떻게 된 것일까.

그때 시야가 돌아갔다.

저 멀리, 황금으로 반짝이는 성이 보인다. 화면은 그곳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한서진은 경악했다.

그것은 정말 아름다운 황금 궁전이었다. 서울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넓었고, 가장 중심의 성은 하늘을 찌를 듯이 우뚝 솟아 있었다. 어떤 고층빌딩도 저보다는 높지 않으리라.

한서진은 문득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건…… 그 꿈속에서 봤던 그 성이잖아!’

화면은 빠르게 성안으로 침투했다. 바쁘게 성을 돌아다니는, 수많은 사람들의 사이를 스쳤다. 그들은 이쪽 시선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듯 자신의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성안에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마치 투명인간이 된 듯한 심정으로, 한서진은 모니터가 보여주는 주변을 낱낱이 살폈다. 전혀 짐작되는 바가 없는 궁전이었다.

유럽의 어떤 왕궁도 이보다 크고 화려하지는 않으리라.

시야가 다시 이동했다.

주변 사람들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며, 어느 곳을 향해 맹렬하게 달렸다. 한서진은 불현듯 드디어 목적지로 내닫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손에 저절로 땀이 쥐어졌다. 모니터에서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타르타로스. 지금 뭐 하는 거냐?’

이건 대체 뭘까.

왜 타르타로스는 이런 것을 보여주는 것일까.

어느 넓은 홀이 나타났다. 마치 황제가 거처하는 집무실처럼 화려하고 웅장한 대실이다.

붉은 돌로 만들어진 바닥과 갖가지 황금으로 치장된 벽의 장식들. 바라보는 것만으로 입이 벌려지고, 자신도 모르는 탄성이 흘러나온다. 그 웅장함에 그저 압도될 뿐이다.

높은 왕좌에는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옅은 금발에 황금관을 쓰고, 붉은 색과 금색으로 치장된 옷을 입고 있다. 한 나라를 통치하는 군주만이 입을 자격이 있는, 위엄이 가득한 옷이다.

남자는 눈을 감고 있었다.

시야는 남자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한서진은 마치 자신이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심장이 세차게 쿵쾅거렸다.

그때였다.

남자가 눈을 번쩍 뜨고, 이쪽을 똑바로 주시했다. 마치 이쪽의 존재를 알아차린 것처럼, 단단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 위엄 가득한 눈동자와 시선이 부딪친 순간, 한서진은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 작품 후기 ============================

“응답하라, 슬레이브.”

“응답했... 네, 뭐라고요?”

“수신감도 양호.”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