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78 예고된 태풍? =========================================================================
사흘 만에 태풍이 물러갔다.
태풍 메기는 건국 이래 최대의 피해를 남겼다. 최고 풍속 60m/s의 위력으로 사흘 내내 남해안 지역을 때려댔으니, 그 흔적이 엄청났다.
1차로 집계된 피해만 19조 원 가량이었다. 거제, 부산, 울산 등 직접적인 태풍의 영향권에 노출된 지역은 마치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참혹했다.
거리마다 부서진 잔해들이 가득했으며, 침수된 저지대는 흙탕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30만 명이 넘는 이재민이 발생했고, 남해안의 도시들은 행정 기능을 완전히 잃었다.
특히 부산의 항만물류가 막힌 것 때문에 수출입 물자 운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태풍의 영향권 밖 지역도 간접적인 경제 피해를 입어야 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태풍은 시작부터 진행 과정, 그리고 최후까지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고 입을 모았다.
“지금까지 이런 태풍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갑작스럽게 위력이 커진 것도, 이동 경로가 기이하게 틀어진 것도, 그리고 사흘 내내 한 지역에 머물면서 위력이 전혀 감소하지 않았다는 것도, 전부 다 이상합니다.”
“마치 태풍의 신이 작정하고 한반도를 때리기 위해서 빚어낸 작품 같습니다. 아무런 전조 없이 갑자기 일본으로 방향을 틀어버린 것도 이상하고요.”
동해로 방향을 튼 태풍 메기는 그대로 일본 서부 해안으로 향했다. 갑작스러운 경로 변경에 일본은 난리가 났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는 하고 있었지만, 태풍이 그대로 서부로 돌진한다는 시나리오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안 그래도 흔들리던 일본 주식 시장과 선물 시장은 오르락내리락하며 롤러코스터를 탔다.
그렇게 열도 전체가 기겁하며 태풍의 상륙을 지켜보던 중 기적이 벌어졌다. 해안 지역에 상륙하자마자 태풍이 사그라지며 사라진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무런 전조 없는 소멸이었기에 일본 기상청은 매우 당황했다. 혹시 기상 설비가 고장 난 건 아닌가 하고 의심했을 정도다.
그러나 태풍은 완전히 소멸했고,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있던 일본 기상청과 정부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검은 백조(블랙 스완)는 존재한다.”
블랙 스완. 도저히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가리키는 말.
과거 경험칙상 탄생부터 이동, 위력, 소멸까지 이해할 수 없는 형태를 보여준 태풍 메기는 타이푼 블랙 스완이란 별명을 얻었다.
태풍이 할퀴고 난 상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물류 마비, 침수, 시설 파괴 등 모든 방면에 걸쳐 피해가 발생했지만, 그중 가장 뼈아픈 통증을 느낀 건 당장 살 집을 잃은 이재민들이었다.
최소 10만 호 가구 이상이 대대적인 수리 없이는 거주가 불가능할 정도로 손상을 입은 것이다. 그 중 대다수가 아예 집을 새로 짓는 게 나을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
한서진은 백철중을 찾아갔다.
“태풍 메기 때문에 왔습니다.”
“아, 나도 이야기는 들었네. 자네가 실은 태풍을 예측했었다면서?”
“기상청 쪽에서 들으신 모양이군요.”
“자네가 나흘 내내 태풍이 그 자리에 있을 거라고 경고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네. 하루 더 빨리 떠나긴 했지만, 덕분에 재해대책본부도 조금이나마 면상을 펼 수 있었네. 그 친구들은 10시간 정도 괴롭히다가 벗어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 건가요.”
“많은 도움이 됐네. 덕분에 예상 피해를 좀 더 줄일 수 있었어.”
백철중은 쓴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
“뭐, 워낙 피해가 커서 그런 것도 별 의미가 없어 보이지만.”
정지원이 사전에 남해 지역행정부에 태풍 경고를 했고, 한서진은 태풍이 나흘까지 체류할 거라고 언질을 주었다.
두 사람의 말이 지닌 무게감이 적지 않다 보니, 재해대책본부에서도 신중하게 대처를 했다. 덕분에 예상 피해를 줄일 수 있었지만, 피해 지역 광경을 보면 그다지 의미가 없어 보인다.
“H그룹에서는 혹시 구호 활동을 할 계획이 있나요?”
“당연하지. 그룹 차원에서 성금을 내놓을 걸세. 한 백억 정도 생각하고 있네. 성금과 별도로 인력을 써서 이재민들에게 식료품과 식수, 의류를 제공할 거야.”
백철중은 이미 구호 활동 계획을 수립해둔 모양이었다.
한서진은 생각보다 금액이 적다는 느낌이 들었다.
“실은 저도 구호 성금을 좀 내려고 하는데요.”
“자네가? 자네는 우리처럼 일반 소비자를 상대하는 기업도 아니니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될 텐데. 혹시 이미지 관리가 아니라 순수한 자선 활동인가?”
“뭐, 그렇습니다. TV 보니까 좀 마음이 그래서요.”
“어쨌든 간에 자선 활동을 한다는 건 좋은 일이지. 얼마나 낼 생각인가?”
“직접 돈을 주는 건 좀 그래요. 요즘 말이 많잖아요. 그런 성금이나 기금을 헤쳐 먹는 사람들이 있다고요.”
백철중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라에 도둑놈이 좀 많긴 하지. 자네가 걱정하는 마음은 이해하네. 그래서 어떻게 하려고?”
“H건설을 통해서 성금을 쓰고 싶어서요. 회장님이 신경 쓰시는 구호 활동이라면 감히 임직원들이 착복하지는 못할 거 아닙니까.”
“H건설? 왜 하필 H건설인가?”
“10만 가구가 넘는 사람들이 집이 부서졌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참에 아예 새 집을 지어주고 싶어서요. 물론 집을 잃은 사람 전부에게 지어줄 순 없지만, 구호 성금으로 낼 1천억 원 한도 내에서는 집을 지어주고 싶습니다.”
백철중은 무릎을 탁 쳤다.
“오, 그거 아주 좋은 일이야. 정말 우리 H건설을 통해서 지어주려는 건가?”
“네, 그게 실질적인 도움일 듯 싶습니다. 생필품 지원 같은 것은 어차피 정부나 다른 기업들도 할 거 아닙니까.”
“좋아, 그럼 나도 사재로 오백억 원을 보태겠네. 그룹 차원에서 시행하는 구호건설사업이니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감시하지. 중간에 착복해먹는 것만 때려잡아도 건설비를 획기적으로 절감할 수 있을 테고, 더 많은 사람들이 새 집을 가질 수 있을 거야. 원래 건설 쪽이 좀 헤쳐 먹는 게 많다네.”
“감사합니다.”
한서진은 자신이 자선사업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태풍의 경로를 미리 알았으면서 피해를 막지 못한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자신의 책임은 아니지만, 구호 성금으로나마 마음에 얹힌 돌을 빼려는 것이다.
어차피 천억 원은 부담되는 돈도 아니다. 5nm 공정기술의 한달치 로열티 정도 될까.
‘그러고 보니 7월 달에 로열티 또 들어오겠네.’
ADSC는 분기마다 실적을 내고, 그때 수익을 계산해서 로열티를 지급한다. 월급 개념이 아니고 수익을 나누는 방식이다 보니 일 년에 네 번에 걸쳐 지급한다.
“좋은 일하네. 나도 보탤게.”
H그룹과 합작으로 이재민들에게 새 주택을 지어주는 구호 사업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자, 정지원은 흔쾌히 동참을 약속했다.
“오너가 좋은 일을 하는데 임원으로서 가만히 있을 순 없지. 숟가락이라도 보태야지.”
“저 때문에 하시는 거라면, 안 그러셔도 되는데.”
“아니야. 사실은 원래 구호 성금 내려고 했어. 어떡하면 누수 되는 돈 없이 쓸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잘 됐네. 나도 H건설에 맡기면 되겠어.”
“얼마나 쓰시려고요?”
“일본 주식시장과 선물시장에서 번 돈 전부.”
쾌활한 답변에 한서진은 살짝 놀랐다.
“수익 전부를요?”
“처음 베팅할 때부터 얼마를 벌든 전부 구호 성금으로 낼 생각이었어.”
정지원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말을 이었다.
“누구는 태풍 때문에 모든 걸 잃는데 나는 태풍 덕분에 돈을 벌어서 사치하면 보기 안 좋잖아. 마음도 안 좋고.”
“어차피 일본에서 버신 거잖아요.”
“그래도 그렇지. 이런 돈 없어도 어차피 전용기와 배트모빌 굴리는 데는 아무 문제 없다. 나도 돈 잘 벌잖아.”
한서진은 마음이 욱신거렸다. 이 상황에 할 생각은 아니지만, 배트모빌 이야기가 나오니 초라한 람보르기니가 떠올라 가슴이 아프다.
“얼마나 버셨어요?”
“한 4천억쯤?”
“……예?”
수익을 많이 냈다기에 한서진은 끽해야 몇 백억 정도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4천억이라니?
“일본 시장이 얼마나 큰데. 주식이고 선물이고 태풍으로 수익 날 만한 건 다 때려 박았다. 환차익도 좀 했고. 역시 돈 놀이가 아주 재미가 쏠쏠해.”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말한다. 한서진은 그저 놀랍기만 했다. 그런 큰돈을 단숨에 벌었으면서, 그리고 선뜻 성금으로 내놓겠다니.
“아니, 그래도 어떻게 열흘 사이에 4천억을 법니까?”
“실탄도 확실하게 퍼부었고, 태풍 경로를 100% 미리 알고 있었으니까. 말 그대로 눈먼 돈이 바닥에 넘쳐나니, 그냥 쓸어 담기만 하면 됐어.”
한서진은 눈앞의 정지원이 몹시 대단해 보였다. 자신은 기껏해야 태풍의 이동 경로에 관해서나 고민하고 있을 때, 그는 이런 준비를 해놓았을 줄이야.
“……언제나 그 이상의 것을 보여주시는군요.”
“난 네가 더 대단한데. 컴퓨터만으로 날씨를 완벽하게 예측한 것 아니냐. 나로서는 도저히 흉내 낼 수도 없어.”
“에이, 이게 뭐 대단하다고요.”
“그렇지 않아. 날씨를 완벽하게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은 현대에서도 대단한 힘이다. 아니, 현대이기에 오히려 더욱 강한 파워를 발휘할 수 있지. 만약 세계 기후를 자유자재로 예측할 수 있다면…….”
정지원은 상상만으로도 흥분되는지 주먹을 불끈 쥔 채 부르르 떨었다.
“말 그대로, 세계를 지배할 수도 있어.”
“너무 오버하십니다.”
“오버하는 거 같아?”
정지원은 피식거리며, 선언처럼 말했다.
“그 기상 예보 프로그램, 제대로만 완성하면 넌 반도체 사업과는 비교도 안 되는 돈을 벌 수도 있을 거야.”
20군데가 넘는 지역이 특별재해지역으로 선포되었다.
30만 명이 넘는 이재민들을 수용할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체육관을 비롯한 대규모 공공수용시설을 모두 내주었지만, 많은 수의 이재민들이 텐트나 천막을 치고 생활해야 했다.
그 텐트와 천막조차 턱없이 부족해서 비닐로 대충 가리고 생활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재민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건 주거 문제도 생필품 부족도 아닌, 바로 식수였다.
대규모 폭우와 침수, 상수도 고장 등으로 인해 수도 공급이 원활하지 않았다. 먹을 물을 확보하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재해본부팀에서 트럭으로 실어 나르는 생수통과 생수병, 그것만이 유일한 식수 공급처였다.
30만이 넘는 이재민들이 매일 소모하는 식수를 공급하는 작업도 여의치가 않았다. 아무리 실어 날라도 먹을 물이 부족했다. 씻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기업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팔을 걷어붙이고 구호 활동에 나섰다. 직원들을 동원해서 천막과 텐트를 공급하고, 생필품과 식수를 매일같이 트럭으로 실어 날랐다.
진성그룹은 식수 공급 등 구호 활동에 열심인 한편, 100억의 구호성금을 내놓겠다고 밝혀 화제가 되었다.
“와, 100억이라니. 미쳤네.”
“역시 진성이다. 통이 크네.”
아무리 진성그룹이라 해도 100억은 작은 돈이 아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진성의 구호 활동을 칭찬하고 있을 때, H그룹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 회견장에는 백철중뿐만이 아니라 SJ인더스트리의 최고경영자인 정지원도 참석했다.
둘은 나란히 단상에 서서 공동발표를 했다.
“우리 H그룹은 이번에 집을 잃은 이재민 분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표하며, 총 5,500억 원의 건설비를 들여 그분들에게 새 주택을 지어주는 구호 사업을 실시합니다.”
5,500억이란 폭탄 발언에, 100억은 순식간에 잊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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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전화 ARS 성금 모금에 응한 것뿐입니다.
오백 원, 천 원, 사천 원.
다만 글자 하나가 빠졌을 뿐이죠. 억 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