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75 정지원과 배트모빌 =========================================================================
“자, 마시게.”
거하게 취한 백철중은 무척이나 즐거워하며 술을 따랐다. 정지원이 두 손으로 공손히 잔을 받았다.
백철중은 정지원에게 스스럼없이 하대를 했다. 정지원이 먼저 말을 편히 해달라고 요청을 한 것이다. 백철중도 처음에는 거부했지만 정지원이 진심으로 간곡히 요청하자 결국 말을 편히 하게 되었다.
“비록 밖에서는 사업 파트너지만 사적으로는 제가 서진이 대학 선배입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편히 대해 주십시오.”
“허허, 이렇게 시원시원한 친구가 내 회사에 있었는데 왜 몰라봤을까.”
“그간 서로 얽히기에는 위치가 멀지 않았습니까.”
“그게 참 아쉬워. 그래도 이렇게 사업 파트너로서 다시 만나지 않았나. 이래서 인생은 모른다는 거네. 돌고 돌아서 다시 만나는 거지.”
백철중과 정지원은 어느새 친해져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술잔을 나눴다. 백철중은 오히려 한서진보다 더 기꺼워하며 그와 술잔을 부딪쳤다.
덕분에 한서진은 꿔다 논 보릿자루 신세였다. 두 사람이 자신을 놔두고 친분을 다지는 게 조금 서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였다.
‘정 팀장님이 별일이네.’
H그룹을 별로 안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백철중 앞에서는 태도가 스스럼이 없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쿡쿡.
옆에서 송하나가 어깨를 가볍게 찔렀다. 눈이 마주치자 손가락으로 밖을 가리킨다. 일어서자는 뜻인가 보다.
한서진이 일어서겠다고 말을 하려는데, 송하나가 손가락을 세워서 ‘쉿’하고 말렸다.
‘그냥 나가요.’
송하나가 입모양으로 그렇게 말했다. 한서진은 두 사람을 흘끔 살폈다.
이미 취할 대로 취한 두 사람은 이쪽을 전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자기들끼리 술을 따르고, 마시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엔지니어가 기술을 개발하면 뭐 합니까! 그 과실은 오너 일족이 다 따먹는데! 한 거라고는 없는 것들이 자리 꿰차고 앉아서 숟가락질만 해대니 발전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미련 없이 미국으로 간 거란 말입니다.”
“미안하네.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한눈에 보기에도 둘 다 많이 취했다. 자리를 비켜주는 게 두 사람을 위한 길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한서진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송하나는 현관문 쪽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까치발로 다가간 그는 조그맣게 재촉했다.
“나가자. 얼른.”
“네.”
송하나가 조용히 문을 열고, 둘은 까치발로 응접실을 나왔다.
아직 이른 봄, 저녁은 제법 쌀쌀했다.
송하나는 무릎 위까지 올라오는 연노란색 테니스 스커트, 달라붙는 흰 면티를 입고 그 위에 민트색 가디건을 걸친 상큼한 차림이었다.
“안 추워?”
“가디건 입어서 괜찮아요. 오빠는요?”
“난 별로 안 추워.”
둘은 테라스 난간에 나란히 섰다. 정원을 타고 온 바람이 귓불을 스친다.
“오빠, 그거 알아요?”
“뭘?”
“아빠, 오빠 만나고 나서 많이 부드러워지셨어요. 그전에는 무척 엄하기만 하시던 분인데. 사실 아빠는 정말 즐거운 자리가 아니면 소주 안 꺼내시는데, 요즘 자주 드시더라고요.”
“은근히 술 입맛은 서민적이신 거 같더라.”
“엄마 말로는 젊은 시절이 생각나서 그러는 거래요. 힘들지만 보람찼다고 하시더라고요.”
팔짱을 낀 채 난간에 앞으로 기댄 송하나는 슬쩍 돌아보며 배시시 웃었다.
“이번에 저와 엄마 도와주신 거, 정말 고마워요.”
“아냐, 뭘.”
“오빠가 아니었으면 더 많이 힘들었을 거예요. 진짜 고마워요.”
“괜찮아, 괜찮아. 친한 동생인데 그 정도도 못해줄까.”
“저, 친한 동생이기만 한 거예요?”
“응?”
그 순간 향긋한 체향이 기습적으로 품에 파고들었다. 따스하면서도 보드라운 감촉이 가슴에 와 닿으며, 두 팔이 등을 껴안는다. 송하나가 품에 와락 뛰어든 것이다.
“어…… 하나야?”
“진짜 고마워요, 오빠.”
“…….”
한서진은 입을 다물었다. 두근거리는 그녀의 심박수가 가슴을 통해 또렷하게 느껴진다. 과연 누구 심장이 더 빠르게 뛰고 있을지. 그리고 먼저 들킬지.
온통 세상이 정지한 듯한 잔류감에 취한 채,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송하나가 슬쩍 떨어졌다. 한서진은 순간 분위기가 어색해지면 어쩌나, 그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기우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송하나는 밝게 웃으며 말했다.
“저 진짜 공부 잘해서 한국대 꼭 들어가고 싶어요. 그럼 오빠랑 같이 학교 다닐 수 있잖아요. 오빠, 저 안 떼어놓고 잘 이끌어주실 거죠?”
“아, 그거야 물론이지.”
그녀의 밝은 미소가 유독 가슴에 깊이 남았다.
“공부 진짜 열심히 할게요.”
“이제 와?”
본채 1층에 들어서는데 마침 나와 있던 한지혜가 슬쩍 보더니 물었다. 그녀는 가벼운 옷차림으로 소파에 뒹굴거리며 잡지를 읽고 있었다.
“술 먹었나 보네.”
“어, 하나 아버님이랑 같이 마셨어.”
“하나 아빠랑 되게 자주 보네. 아무리 거래처라지만…… 오빠, 진짜 흑심 있는 거 아냐?”
“있다면 어쩔래?”
“알지? 내년까지 참아.”
한서진은 피식거리며 맞은편에 걸터앉았다.
“너, 이번 주 토요일에 시간 비워 놔.”
“갑자기 왜?”
“벚꽃이나 보러 가자고.”
한지혜는 곧장 인상을 썼다.
“지금 나더러, 4월의 마지막 벚꽃을 친오빠랑 구경하러 가라는 말이야?”
“하나도 같이 갈 거야. 셋이서 놀러 가자.”
“지금 나더러, 4월의 마지막 벚꽃을 커플에 낑겨서 구경하라는 말이야?”
“커플 아니라고 했다.”
“됐어. 싫어. 둘이서 놀러 가.”
“하나가 너 꼭 보고 싶대. 그냥 와.”
한지혜는 기가 막히다는 듯이 눈을 치켜뜨고 노려봤다. 답답하다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오빠는 그 말을 믿어?”
“몇 번이나 강조했어. 너도 꼭 데려오라고.”
“아이고, 이 답답아. 몇 번이나 강조한 건……. 아니다. 알았어. 갈게. 가면 되지?”
한지혜는 더 이야기하기 싫다는 듯이 손을 휘휘 저었다.
한서진도 나름 어이없었다. 그야 자신도 단둘이 놀러가고 싶지만, 꼭 데려오라고 몇 번이나 다짐을 받지 않았던가. 한두 번 그런 말을 했으면 예의상으로 한 말이라 생각하겠는데, 그게 아니니 말이다.
토요일은 금세 찾아왔다.
외출 준비를 마치고 내려온 한서진은 한지혜를 찾았다. 그러나 집에 보이지 않았다. 그는 전화를 했다.
“너, 지금 어디야? 오늘 벚꽃놀이…….”
「나 지금 소개팅하러 가. 급약속 잡혔어.」
“소개팅?”
「그럼, 봄인데 나도 데이트나 해야지. 어쨌든 난 좋은 명분 만들어줬어. 이제부터 오빠가 알아서 해.」
그러고 전화를 뚝 끊어버린다.
한서진은 어이가 없었지만, 결국 송하나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했다. 갑작스러운 소개팅 때문에 못 온다는 말에 송하나는 몹시 아쉬워하면서도 이해하는 눈치였다.
「어쩔 수 없죠. 그럼 우리끼리 놀아요.」
왠지 동생한테 고마운 마음이 드는데. 이래도 되는 걸까.
한서진은 차를 몰고 약속장소로 향했다. 송하나는 저택 근처 사거리에 미리 나와 있었다.
멀리서부터 그녀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차를 세운 그는 잠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만큼 충격적이었고, 신선한 느낌이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요?”
송하나는 부끄러운 듯이 배시시 웃었다.
무릎까지 오는 흰색 쉬폰원피스, 분홍빛 그라데이션이 새겨진 주름치마 아래로 드러난 다리는 가늘고 길었다.
어깨에 걸친 얇은 가디건이 풍만한 볼륨감을 살짝 덮고 있다. 이보다 더 4월이 잘 어울리는 여자가 있을까.
“너, 옷이…….”
“마, 많이 이상해요? 벚꽃 보러 가는 거라 나름 신경 쓴 건데.”
“아니야. 엄청 예뻐.”
“옷이요, 제가요?”
이 아이, 이렇게 말문을 막히게 하는 재주도 있었구나.
송하나는 대답을 재촉 않고 얼른 조수석에 탔다.
벚꽃축제 장소는 그리 멀지 않았다. 교통문제로 한서진은 근처 호텔 옆에 차를 주차하고, 송하나와 함께 나란히 걸어서 축제장소로 향했다.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이 늘어났다. 모두 자신들처럼 벚꽃을 보러 가는 사람들이었다. 연인, 친구, 가족 등 다양한 사람들의 얼굴에는 비슷한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행복감.
은근히 쏟아지는 남자들의 시선을 느끼고, 한서진은 괜히 가슴이 뿌듯해졌다.
‘짜식들. 이쁜 건 알아가지고.’
같은 남자라서 그런 시선을 더 귀신같이 느낄 수 있었다.
남자라는 놈들이 한 번씩 송하나와 자신을 훑는다. 어떤 이는 대놓고 부러움과 질시 가득한 눈으로 보기도 했다.
“근데 주말인데 공부 안 하고 이렇게 놀아도 되는 거야? 한국대 꼭 오고 싶다며.”
“걱정 마세요. 오늘 논 만큼 꼭 보충할 거니까.”
“떨어지면 안 돼.”
“반드시 붙을 거예요. 안 되면 재수라도 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송하나는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 표정에 안심이 되었다.
그날 특별히 뭔가를 한 기억은 없었다.
돗자리를 깔아놓고 만개한 벚꽃을 구경하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침묵이 길 때도 있었지만, 어색하지는 않았다. 그런 침묵조차 자연스러운 고요로 느껴질 만큼 편안한 시간이었다.
저녁식사는 차를 주차한 근처 호텔에서 했다.
‘이러니까 꼭 데이트 같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한서진은 곧장 동생의 당부를 떠올렸다. 아직 8개월은 더 이르다!
“재밌었어요. 언니가 안 와서 정말 아쉽다.”
“그러게. 조심히 들어가.”
“네, 오빠도 들어가세요.”
집까지 태워다주고 차를 돌리는데,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럴 때 어떻게 할까.
정지원은 꽤 오래 한국에 머물렀다. 상당히 한가한 듯해서 의아했으나, 한서진도 모처럼 그가 한국에 오래 있어서 좋았다.
“근데 회사를 이렇게 오래 비우셔도 돼요?”
“회사를 비우는 게 아니라 엄연한 해외 출장이지. 조금 더 있다가 돌아가도 돼. 어차피 내가 회사에 꼭 붙어 있어야 할 정도로 큰일은 없어. 자잘한 업무는 여기서 지시하면 되고.”
정지원은 슈나우저가 들어간 신 태블릿 컴퓨터를 보란 듯이 툭툭 두드렸다.
“글로벌 시대가 좋다는 게 뭐냐. 이거 한 대면 어디서든 업무를 볼 수 있지.”
“그렇긴 한데, 이번엔 좀 오래 있으시네요.”
“오너의 오른팔로서 신임을 다져놔야 하지 않겠니? 몸이 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인데.”
“안 그러셔도 되는데. 정 팀장님 믿는 제 마음은 늘 그대로입니다.”
“그래도 오른팔 입장에서는 가끔 신임을 확인받지 않으면 불안해서 말이지.”
말하는 내용과 달리 목소리는 아무렇지 않은 톤이다. 한서진은 작게 피식거렸다.
지난 시간 동안, 정지원은 정신없이 바쁜 일정을 소화했다.
학교의 초청 행사 등에 참가하는 것은 물론, SJ인더스트리 최고경영자로서 H반도체를 둘러보았다. 진성전자 이서나 회장도 만나서 사업 비전에 관한 조율도 했다.
심지어 재계의 초청을 받아 행사에도 참가했다. 다만 호의적인 내심을 품은 건 아니었다.
“여기 물은 여전히 썩어 있네. 나아질 기미가 없어.”
행사를 다녀온 날, 정지원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한때는 어쩔 수 없이 눌러 살아야 하는 웅덩이였지만, 지금은 다시 물 마실 일 없는 곳이다. 이제 그의 조국은 미국이었고, 직장 역시 그곳이므로.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한국대 반도체 연구소에도 방문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박효산 교수님한테 들었는데, 너 요즘 날씨 예보 프로그램 돌린다며?”
“아, 그거요? 외부에 공개하지는 않고 혼자 시뮬레이션 작업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100%의 예측율을 보이고 있어요.”
“100%? 그거 정말 대단한데.”
정지원은 몹시 놀라워하다가 물었다.
“혹시 며칠 뒤까지 예측할 수 있어?”
“글쎄요. 일주일을 넘겨서까지 계산해본 적은 없는데. 이왕 생각난 김에 한 번 최대한 뒤까지 계산해볼까요?”
한서진은 스마트폰으로 느긋하게 타르타로스를 작동시켰다.
“처음에는 한일중 기상 자료만 썼는데, 요즘에는 전 세계 기상 통합 데이터를 갖다 쓰고 있어요.”
“개인 민간인한테는 잘 안 주려고 할 텐데.”
“그래서 한국기상청한테 받고 있죠. 어디 보자. 어? 웬 긴급 경보가…….”
한서진은 흠칫했다. 계산 도중 갑자기 타르타로스가 긴급 경고를 나타낸 것이다.
“아직 5월인데 이거 결과가 이상하네요.”
“무슨 일인데?”
“그게……. 열흘 뒤에 매미급 태풍이 부산에 상륙한다고 나오는데요.”
정지원도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웃었다.
“에이, 그게 뭐냐. 이 시기에 무슨 태풍.”
============================ 작품 후기 ============================
너희는 아마 다음 편에서 태풍을 예고했다고 놀라워하고, 경악하고, 기뻐하고, 뿌듯해하겠지.
하지만 아서 왕은 그런 너희를 보면서 암이 걸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