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174화 (174/609)

00174  정지원과 배트모빌  =========================================================================

“SJ인더스트리 CEO, 로건 정이라고 합니다.”

정지원은 친절한 태도로 손을 내밀어 악수에 응했다.

임원들은 긴장해서 두 사람의 조우를 지켜봤다.

H반도체의 지분 51%를 보유한 S드론이 에스코너가 설립한 사모펀드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정지원은 H반도체에서 일개 직원으로 근무했다가, 사실상 에스코너의 대리인으로서 금의환향한 것이다.

반면 백철중은 H반도체의 오너에서 일개 대주주로 전락했다. 이런 두 사람이 만난 터라, 주변인들은 저도 모르게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귀하의 활약은 진작 귀담아 듣고 있었어요. 이렇게 만나게 돼서 정말 반갑게 생각합니다.”

“저 역시 회장님을 다시 뵙게 돼서 기쁘군요. 가장 마지막으로 H반도체 직원 연설 자리에서 뵀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는 왜 귀하 같은 유능한 인재를 몰라봤는지, 내 눈이 다 한심하군요.”

“원래 높은 곳에서 바닥에 있는 돌의 생김새를 일일이 구별하기란 어렵지 않습니까.”

현재 H반도체에 H그룹의 흔적은 없다. 현 경영진은 H반도체의 최대주주인 에스코너에서 선임한 전문 경영진이다. 그렇다 해도 정지원과 백철중의 충돌은 부담스럽다.

다행스럽게도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잔뜩 긴장하고 있던 경영진은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같이 둘러보시겠습니까, 회장님?”

“그래도 됩니까?”

“물론이지요. H그룹 역시 H반도체의 대주주 아닙니까.”

백철중은 쓴웃음을 지었다.

말이 대주주지, 51%를 가진 에스코너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지분율이다.

그럼에도 정지원은 자신을 존중해주고 있었다. 철저한 사업가 마인드인지,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H반도체 공장을 둘러보았다.

“SJ인더스트리는 제대로 된 양산시설을 갖추지 못해, 그간 슈나우저 생산에 여러 모로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에 비해 H반도체의 제조능력은 무척 뛰어나죠.”

“진성전자와 비교하면 어디가 더 낫나요?”

의미심장한 질문이지만, 정지원은 어렵지 않게 대응했다.

“물량은 진성전자를 따라갈 수 없습니다만, 파운더리에서 H반도체의 품질 관리는 최고 수준이죠. 세계 제일이라 해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허허…….”

백철중의 얼굴에 잠깐 웃음이 어렸다. 그래도 자기 손으로 일궈낸 회사가 칭찬을 받는 게 기분 좋은 모양이다. 지금은 자기 것이라고 할 수 없게 됐지만.

진성전자에 빗대 칭찬을 한 덕분인지 분위기가 좀 더 부드러워졌다.

“아까 로건 정이라고 소개를 했는데, 이제 한국 이름은 쓰지 않는 거요?”

“가족이나 정말 친한 지인 관계에서만 씁니다. 그 외는 로건 이란 이름을 쓰지요. 저는 미국인이니까요.”

“이민이라, 쉽지 않은 결심이었을 텐데.”

“세상에 태어나서 두 번째로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럼 첫 번째 선택은 뭔가요?”

“제 평생의 고용주를 결정한 거지요.”

“…….”

백철중은 잠시 멈칫했다.

평생의 고용주, 아마도 에스코너의 오너를 뜻하는 것이리라. 에스코너의 설립 자본이 한국에서 흘러나갔다는 것은 이미 재계에서 알 만한 사람은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다만 그게 누구인지, 한국인인지, 혹은 출처 세탁을 위해 그저 한국을 거쳐 갔을 뿐인지, 등등은 알려져 있지 않았다.

정지원은 아마 알고 있겠지만, 물어도 말해주지 않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로건 정도 대단히 큰 사람인데, 그런 귀하를 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지닌 그릇은 과연 어떨지 상상이 가질 않는군요.”

“아주 큰 그릇을 지닌 분입니다. 그러나 그 그릇이 얼마나 큰지 정작 본인은 잘 모르고 있죠.”

“호오, 그렇습니까. 언제 한 번 꼭 만나보고 싶군요.”

“언젠가는 만나볼 수 있을 겁니다. 그분도 회장님을 뵙고 싶어 하니까요.”

“그게 정말입니까? 이거 빈말이라도 기쁘군요.”

백철중은 허허 웃었고, 정지원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빈말이 아닙니다.”

한서진은 시내에 차를 세워둔 채, 등을 기대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레인지로버를 끌고 나와서 그런지 별로 쳐다보는 사람이 없다.

‘배트모빌이었으면 죽여줬을 텐데.’

문득 그런 생각을 했던 한서진은 퍼뜩 놀랐다. 아무리 탐이 나도 그렇지, 대학 선배의 차를 갖고 싶다고 생각하다니.

툭, 하고 가벼운 손길이 뒤에서 어깨를 쳤다. 돌아보니 송하나가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배시시 웃었다.

“오래 기다렸어요?”

“아니야, 방금 왔어.”

“근데 괜찮아요? 일 때문에 많이 바쁘실 텐데.”

“괜찮아. 이 정도 시간은 낼 수 있어. 어서 타자.”

한서진은 송하나를 차에 태우고 출발했다. 목적지는 그녀의 집이었다.

“어머니는?”

“백화점 가셨죠. 지금 집에 아무도 없어요.”

“아아, 그래.”

위험하다. 저런 말에 두근거리면 안 되는데.

“그럼 시작할까?”

송하나 방에 들어간 한서진은 준비해온 교재를 펴며 말했다. 송하나는 교복을 입은 채로 다리를 옆으로 모아 앉았다. 치마가 짧은 건 아니지만, 워낙 다리가 길다 보니 덕분에 살결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한서진은 작게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저번에 어디까지 했더라?”

“여기요.”

송하나가 몸을 숙이며 가리켰다. 향긋한 체취가 코끝을 스친다. 향수는 아니고…… 샴푸 냄새인가?

한 시간이 조금 넘게 과외를 했다. 한서진은 책을 덮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앞으로도 이렇게 중요한 개념만 잡을 거야.”

“네, 고마워요. 오빠 덕분에 정말 이해가 잘 돼요.”

“꼭 한국대 왔으면 좋겠네.”

“저도 오빠랑 같이 학교 다니고 싶어요.”

송하나는 수줍게 웃었고, 한서진은 흐뭇해서 바라봤다.

병실에서 눈이 빨갛게 부어 나오던 모습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아프다. 그녀가 다시 되찾은 미소에 한서진은 그저 마음이 포근했다.

“오빠, 혹시 주말에 시간 돼요?”

“주말에?”

“지혜 언니랑 셋이서 같이 놀러 가요.”

“너 고3인데 괜찮아?”

“고3이라고 맨날 공부만 하나요. 아직 5월도 안 됐으니까 괜찮아요. 초반에 너무 달리면 후반 가서 오히려 퍼져요. 조금 쉬엄쉬엄하는 것도 중요해요.”

“놀러간다면, 어디 가고 싶은 데는 있어?”

“지금 한창 벚꽃 철이잖아요. 셋이서 같이 벚꽃 보러 가요.”

“지혜한테 한 번 물어볼게. 아마 걔도 별 일은 없을 거야.”

“꼭 셋이 같이 가야 돼요. 꼭이요.”

“알았어.”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서는데 왠지 아쉽다는 마음이 들었다.

방을 나서자 송하나가 배웅을 위해서 따라왔다. 그러고 보니 아직도 교복 차림이다.

내년이면 더 이상 이 모습을 못 본다 생각하니,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쉽다.

“하나야. 어, 이건 그냥 하는 말인데. 졸업해도 교복 기부 같은 거 하지 마.”

“네? 왜요?”

“아니, 내가 교복 기부하고 나중에 생각하니까 좀 많이 아쉽더라고. 추억할 거 하나가 줄어드는 거라서.”

“아하, 그렇구나.”

“크흠. 지혜도 내 충고 듣길 잘했다고…….”

그때였다. 현관문이 열리면서 백철중 회장이 들어섰다.

한서진은 불장난을 하다 걸린 아이처럼 깜짝 놀라서 바라봤다. 백철중 회장은 뜻밖에도 혼자가 아니었다. 그도 아는 얼굴이 뒤따르고 있었다.

“정지원 팀장님?”

“어, 너 왜 여기에 있어?”

정지원도 뜻밖의 만남이었는지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서진은 엉거주춤해서 말을 돌렸다.

“그게 일이 있어서…… 근데 팀장님은 어떻게 된 겁니까? 두 분이 아는 사이셨어요?”

“오늘 같이 H반도체 공장을 돌면서 친해졌네. 자네도 내 성격 알지 않은가? 친해진 사람이랑 술 한 잔 하는 거.”

“아, 네. 잘 알지요.”

모를 리가 있나. 언제나 그 습관에 감사하고 있는데.

“그러고 보니 둘이 아는 사이라고 했지. 어떤가, 자네도 같이 한 잔 하는 게?”

“그게…… 저는…….”

왠지 이곳에서 빠져나가야 할 것 같다. 그래서 한서진은 거절하려고 했다.

그때 뒤에서 송하나가 소매 끝을 손가락으로 툭툭 잡아당겼다. 흘끔 돌아보니 말없는 눈빛이 압박을 주고 있다.

‘한 잔 하고 가세요.’

이렇게 말이다.

결국 한서진은 졌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도 끼워 주십시오.”

“잘 생각했어. 오늘 즐겁게 놀아 보자고.”

“이거 오랜만에 하나 솜씨 좀 보겠네요.”

“응? 우리 하나는 요리 못…….”

“아빠. 어서 앉으세요.”

송하나는 백철중의 어깨를 잡고 반 강제로 앉혔다. 한서진과 정지원도 좌우로 마주보고 앉았다.

“제가 술 먼저 가져올게요. 보드카면 되죠?”

“부탁하마.”

송하나는 지하에 있는 술 저장고로 쪼르르 달려갔다. 뒷모습을 바라보던 정지원이 칭찬하듯 말을 꺼냈다.

“놀랐습니다. 따님이 아주 미인이십니다.”

“허허, 내 보물이라오. 이름은 하나라고 하지.”

“정말 귀한 보물을 가지셨군요.”

그러면서 뭔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한서진은 속으로 뜨끔했다. 설마 눈치 챈 건 아니겠지?

“근데 서진이 넌 왜 여기에 있었어? 회장님도 안 계시는 집에서 따님이랑 단둘이서?”

“아, 별일 아닙니다. 서진 군이 요즘 우리 하나 과외를 해주고 있어서요.”

“과외요?”

의외라는 듯이 정지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서진은 얼른 말을 얼버무렸다.

“아, 그냥 조금 봐주고 있어요. 별 거 아니에요.”

“너도 회사 다니고, 학교 다니고 하려면 바쁠 텐데. 과외까지 해주고 있구나.”

“시간 조금 쪼개서 하는 거라 괜찮습니다.”

“많이 친한가 보네.”

친한가, 라는 부분에 왜 묘한 악센트가 실린 기분이 들지? 단순한 착각인가?

“하나가 술을 못 찾나 보네. 여기서 둘 다 기다리고 있어요. 내 금방 다녀오지.”

백철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 둘이 남게 되자 정지원의 눈빛이 더욱 의미심장해졌다. 분위기가 거북해진 한서진은 얼른 다른 화제를 꺼냈다.

“그 며칠 전에 팀장님이 조언해준 거 있잖습니까.”

“어. 그게 왜?”

“좀 매정한 거 같지만 그냥 전 모른 체 하려고요. 이용무 부회장과 좋은 사이도 아니고, 더군다나 이창용 회장은 일면식도 없고. 굳이 제가 유출 위험을 무릅쓰긴 그런 거 같아서요. 일단은 관망할 생각입니다.”

“그렇게 해. 네 선택이라면.”

“H반도체 공장은 어쩌다가 같이 돌아보신 거예요?”

“회장님이 공장까지 찾아와서 기다리고 계시더라고. 그래서 같이 돌면서 이야기를 나눴지.”

“회장님이랑 대면하는 건 처음이셨죠?”

“그렇지. 생각했던 것보다는 호탕한 양반이더라.”

“그럼 남은 일정은…….”

한서진은 생각나는 대로 최대한 질문을 퍼부었다. 어떻게든 이 어색한 분위기, 저 의미심장한 눈빛을 떨쳐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정지원이 선수를 쳤다.

“네가 H그룹을 도운 게 백철중 회장님 때문이 아니었구나. 오늘 확실히 알겠더라.”

“무, 무슨 소립니까? 하나 쟤는 아직 고등학생이라고요!”

“내년이면 대학생이지. 올해도 이제 8개월도 안 남았어.”

“…….”

“설마 설마 했는데 진짜였네. 역시 직접 얼굴을 봐야 알 수 있다니까.”

한서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설마했다니요? 그게 무슨 뜻이죠?”

“미국까지 소문 다 났어. 너랑 백철중 회장 막내딸이 열심히 썸 타는 중이라고.”

“썸 타는 거 아니라니까요! 그리고 그게 뭐 대단하다고 미국까지 소문이 나요? 말도 안 되잖아요.”

“크렘 회장이랑 칼 루이스가 널 얼마나 예의주시하는지 알면서 그러냐. 그 사람들뿐만 아니라 월가와 실리콘밸리에서도 모두 널 주시하고 있어. 에스코너는 묻어두더라도, 대외적으로 5nm공정 기술의 개발자잖아?”

“어, 그렇게 제가 유명해요?”

“물론이지.”

한서진은 뭔가 기분이 묘했다. 머나먼 미국 땅, 실리콘밸리에서 자신이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라니. 정작 자신은 그곳에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정지원이 부드럽게 말했다.

“온 사방에 너한테 관심 있는 사람들뿐이다. 네가 얼마나 유명한지, 정작 너만 모르고 있어.”

============================ 작품 후기 ============================

교복 버리면 통찰안이 매우 슬퍼할 겁니다.

근데 왜 버리지 말라고 했을까요?

공식적으로 말씀드리자면, 학창 시절을 추억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외에 다른 게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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