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73 정지원과 배트모빌 =========================================================================
“수제 수퍼카라…… 대단하네요.”
한서진은 배트모빌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람보르기니 첸테나리오가 미래 영화에서 ‘튀어 나온 듯한’ 차라면, 눈앞의 배트모빌은 정말로 영화에서 ‘튀어 나온’ 차였다.
마치 미래의 장갑차를 본 딴 듯한 육중한 차체에, 햇살을 선명히 반사하는 무기질의 광택.
한서진은 불현듯 람보르기니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부러운 마음이 혀끝에 고였다.
“그거 비싸죠?”
“아니, 11억 밖에 안 들었는데? 첸테나리오에 비하면 반값도 안 돼.”
“가격이 중요한가요. 생긴 게 중요하지. 아무튼 엄청 좋아 보이네요.”
정지원은 피식 웃으며 클로즈 스위치를 눌렀다. 뒤로 말려 들어갔던 천장이 앞으로 내려왔다. 마치 거대한 장난감이 변신을 하는 듯한 모습에 한서진은 더욱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한서진은 힘껏 엑셀을 밟았다.
람보르기니가 출발하자 배트모빌이 바로 그 뒤를 따라붙었다. 두 차 모두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디자인이 아니었기에, 도로를 지날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한서진은 핸들을 꾹 쥐었다.
람보르기니를 몰고 나오면 늘 시선은 자신의 차지였는데, 오늘은 들러리가 된 기분이다. 사람들이 전부 뒤에 배트모빌만 쳐다보는 것 같다.
아, 오늘따라 왜 이렇게 차가 부끄럽지.
테이블에 앉자마자 한서진은 대뜸 말했다.
“그 수제 수퍼카 업체, 저도 소개시켜주세요.”
“메일로 보내놨어. 거기로 연락하면 될 거야. 업체에는 내가 이미 설명해놨으니까 너는 연락해서 이름만 대면 돼.”
“오, 그냥 제 이름을 대면 되나요?”
“어, VVIP로 받들어 모실 거야.”
둘은 어느 카페 야외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바로 옆에 있는 야외 주차 공간에 람보르기니와 배트모빌을 세워둔 채로.
분명히 아까까지만 해도 주차 공간에 외제차들이 즐비했던 것 같은데, 하나둘씩 빠져나가는가 싶더니 어느덧 주차 공간이 썰렁해졌다.
“어떻게 한국에 오셨어요? 말도 없이 갑작스럽게.”
“사주 얼굴 직접 대면하고 보고할 것도 있고, 겸사겸사 오랜만에 얼굴도 보고, 또 휴식도 취하려고.”
“얼굴 대면하고요? 뭐 중요한 거라도 있나 보죠?”
“원래 실적 자랑은 오너 얼굴 직접 보고 해야 보람이 나지 않겠니?”
당당한 말투와 태도지만, 구체적인 서열 관계를 분명하게 상기하며 말을 이어 나간다. 실적 자랑, 오너. 그 별 거 아닌 단어에서 한서진은 자신이 그의 위라는 것을 느꼈다.
살짝 쓴웃음이 나왔다. 굳이 그런 걸 짚어주지 않아도 되는데.
“그럼 들어보죠. 대체 어떤 실적이기에 오너 얼굴 보고 자랑하려고 먼 미국에서 여기까지 날아오셨습니까?”
“작년 순이익이 900억 달러였잖아. 4개월 동안.”
“그랬죠. 그중 절반은 배당했고. 그걸로 팀장님은 활주로가 딸린 집과 전용기, 수제 제작 배트모빌도 사셨고. 아, 그러고 보니 배트모빌은 대체 어떻게 가져온 겁니까? 배로 운송하려면 몇 달 걸릴 텐데.”
“전용기에 실어서 가져왔는데.”
“…….”
말문이 턱하고 막힌다. 이 분, 완전히 미국 갑부 마인드가 다 되었잖아.
정지원도 민망한지 슬그머니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작년 4개월 동안 900억 달러였다는 거고, 올해 1분기 수익이 대충 나왔어.”
“얼만데요?”
“놀라지 마. 1,050억 달러야.”
“3개월 동안에요?”
“그래, 대단하지?”
정지원은 무척 자랑스러운 표정이었다. 1,050억 달러라니, 한서진은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대단하지? 3개월 수익이 천억 달러를 넘었어. 연간 수익으로 치면 4,200억 달러, 420조 원이라고. 맥플은 우리한테 감히 비교조차 안 돼. 원래 안 됐지만 이젠 더 안 돼.”
“대단하십니다. 정말 수고하셨어요.”
한서진이 칭찬하자 정지원은 더욱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 신기한 기분이다. 인생의 지침, 선배와도 같았던 사람이 자신의 칭찬에 저리 기뻐할 줄이야.
한서진은 조금 입맛을 다셨다.
‘엘릭서 이야기를 할까?’
엘릭서의 존재를 털어놓겠다는 뜻은 아니다. 아무리 정지원을 믿는다 해도, 통찰안과 엘릭서는 자신 혼자만 안고 있어야 할 중요한 비밀이므로.
그에게 의논을 구하고 싶은 것은 단지 지금 진성그룹과 얽힌 상황이었다.
‘뭐, 상관없지. 어차피 이용무 부회장과 김성일 기조실장이란 사람도 이미 아는 건데.’
한서진은 결심을 굳혔다.
“정 팀장님.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뭔데?”
“진성그룹 일입니다.”
한서진은 덤덤하게 진성그룹, 이용무와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박현준에게 두 번에 걸쳐 의뢰를 했던 것, 자신이 췌장암 말기에서 기적적으로 부활한 것 등, 김성일 기조실장이 알아낸 사실 자체를 그대로 말했다.
어차피 이용무와 김성일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 정지원에게 말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다 듣고 난 정지원은 의외로 차분한 표정이었다. 한서진은 그 표정에서 몰랐던 진실을 읽었다.
“이미 알고 계셨던 모양이네요.”
“그 정도는 약간만 조사해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니까.”
“제 조사를 하셨어요?”
“예전에 조금 알아봤어. 남들이 너에 관해 알 수 있는 건, 나도 미리 알고 있어야 대비를 할 수 있을 테니까. 오해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지원은 덤덤하게 설명했다. 변명으로 느껴지지 않는 담백한 어조에 한서진은 오히려 신뢰가 생겼다.
“그럼 왜 저한테 물어보시지 않은 겁니까?”
“굳이 네 멘탈을 자극할 마음은 없으니까. 내가 알아본 건, 어디까지나 누군가가 너를 음해할 때를 보조하기 위한 목적이었을 뿐이야. 나도 더 자세한 건 몰라.”
“아무튼 이야기는 쉽겠군요.”
한서진은 편안한 마음으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적당한 긴장감이 입안에 텁텁하게 고인다.
자신을 쳐다보는 정지원의 눈빛이 조금 의미심장하다. 어쩌면 그는 이 일 때문에 한국에 들어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팀장님이라면 이 사실들에 관해서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어떤 생각이라니?”
정지원은 담백하게 반문했다.
“그것들을 조합한 내 추측을 묻는 거야, 아니면 이용무가 무슨 생각을 할지 그것을 묻는 거야?”
“둘 다라고 해두죠.”
“이용무라면 아마 이런 의심을 하고 있겠네. 네 병이 나은 것은 자연적인 게 아니고, 네가 진성제약 박현준 차장한테 의뢰한 화학혼합물의 힘을 빌려서라고. 그 혼합물의 효능이 어느 정도까지 생각하고 있는지는 나도 가늠이 어렵고.”
“…….”
“지금 이용무 입지가 좋지 않아.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일 거다. 만약 이창용 회장이 깨어날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으면 이용무는 뭐든지 할 거다.”
“제가 만병통치약 제조법이라도 알고 있다는 겁니까?”
“이용무는 충분히 그런 의심을 할 수 있지. 만병통치약인지, 그냥 특별한 암 치료제인지는 모르지만.”
정지원의 목소리는 여전히 덤덤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기 어려울 만큼.
한서진은 남은 커피를 단숨에 목구멍에 털어 넣고는, 다소 거칠게 잔을 내려놓았다.
“그럼 팀장님 생각은요?”
“…….”
“팀장님 생각은 어떻죠?”
정지원은 가만히 눈을 들어 한서진을 주시했다. 그가 입을 열기까지 그 짧은 순간이, 얼마나 긴장되었는지 모른다.
“정황만 보면 이용무가 충분히 그런 상상을 할 수 있다고 보여. 그렇지만 난 네가 인정한 사실만을 긍정한다.”
“…….”
“네가 말하지 않는 것을 파헤치지 않는다. 해가 서쪽에서 뜬다고 해도 네가 말한 것이라면 수긍하고 따른다. 그게 내 생각이다.”
정지원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아, 물론 너무 큰 범죄에 얽히면 안 돼. 나는 올바른 문명시민이니까, 이해해줄 수 있지?”
긴장이 깨지며, 풀썩 웃음이 나왔다. 한서진은 아무 말도 없이 한동안 혼자 큭큭대며 웃었다. 정지원은 미소를 띤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 미안해요. 팀장님을 의심한 건 아니었어요. 그저 팀장님의 생각을 알고 싶었을 뿐입니다.”
“알아.”
“이용무 부회장이 대답을 요구하더군요. 물론 전 그 대답을 해줄 마음이 없습니다. 제가 왜요? 전 제가 감춘 비밀이 드러나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이해해.”
“그럼 이제 다른 생각도 듣고 싶네요. 정 팀장님이 만약 저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네 결정을 위해 조언을 해달라는 게 아니라, 내가 너라면 어떤 결정을 할지를 묻는 거지?”
정지원은 분명히 하고 싶다는 듯이 한 번 더 확인했다. 한서진은 지체하지 않고 끄덕였다.
“내가 너라면…… 진성그룹의 큼직한 살점을 받아내는 대가로 이창용 회장을 살려준다. 물론 그게 가능하다는 전제 하에. 그룹 전체를 받아내면 좋겠지만 그건 애초에 불가능하니.”
“…….”
“물론 보안 유지는 철저히 해야겠지. 이창용 회장도 알 필요 없어. 이 거래를 아는 사람은 오로지 그룹을 물려받을 이용무 부회장, 그 한 명으로 제한해야겠지. 이게 안 되면 무효야.”
“실익을 추구하시는군요.”
“나야 실적을 추구하는 월급쟁이니까. 어디까지나 물질적인 이익만 본 거다.”
“만약 이용무 부회장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요?”
정지원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그 미소가 향한 것은 한서진이 아닌 다른 이였다.
“이용무가 제정신이 박혀 있다면…… 감히 약속을 어긴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거다.”
정지원은 한국을 방문한 김에 대대적인 일정을 소화했다.
먼저 그는 모교인 한국대를 방문했다. 당연히 학교 전체가 난리가 났다.
정지원이 누군가. 세계 최대 기업인 SJ인더스트리의 최고경영자 아닌가. 반도체공학부 출신 중 그의 위명에 비교할 수 있는 인물은 한서진 정도만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재산은 서진이 형이 훨씬 많지 않나?”
“단순히 재산으로만 비교하면 안 되지. 그냥 카테고리가 다른 거지. 서진이 형은 대박 기술 하나로 신이 되신 거고, 정지원 선배 그 분은 설계 능력과 경영 능력, 사업 수완으로 SJ인더스트리 최고경영자가 되신 거고.”
“대지신과 태양신이라고 하면 되지. 꼭 하나만 신으로 인정하란 법 있어?”
급하게 마련된 강연장에는 3만 명이 넘는 학생들이 몰려들어 정지원이 지닌 드높은 인기를 실감케 했다.
한서진도 그 자리에 올라 정지원과의 친분을 돈독히 과시했고, 학생들은 더욱 뜨겁게 열광했다.
이공계열 학생들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두 명의 신이다.
“우리는 국적을 가리지 않고 유능한 인재를 환영합니다. SJ인더스트리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뛰어난 실력과 의사소통 능력, 이 두 가지만 갖추었다면 언제든 문을 두드려 주십시오.”
쏟아지는 박수갈채, 정지원의 강연은 성황리에 끝났다.
강연으로 끝이 아니었다. 정지원은 며칠 동안 교수들을 만나러 다니며, 프로젝트 협업과 모교 후원 등 다양한 논제를 나눴다.
특히 그는 반도체공학부에 사재로 500억 원의 장학금을 후원하여, 교수진과 후배들의 뜨거운 지지를 얻어냈다.
대학 일정이 얼추 끝난 후에는, 국내에 있는 파운더리 거래처를 방문하기로 했다. 바로 진성전자와 H반도체였다.
그는 먼저 H반도체를 방문했다.
배트모빌을 몰고 나타나자 정문까지 나와서 기다리고 있던 사장 이하 임원진이 크게 환영했다. 차에서 내린 정지원은 그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환대에 감사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의외의 사람을 만났다.
“반가워요. 나 H그룹 백철중 회장입니다.”
성큼 다가오며 악수를 청한 이는, 한때 그가 다녔던 회사의 오너였다.
한쪽은 한때 H반도체의 주인, 다른 한쪽은 H반도체의 일개 설계팀장.
정지원이 퇴사 후 백철중을 다시 만난 것은 오늘이 처음이며, 그때와는 입장이 까마득하게 바뀌었다.
자연히 이 만남에 임원 등 주변인들은 숨을 죽이고 긴장해서 지켜보았다.
============================ 작품 후기 ============================
결국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딸바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응?
PS :
저는 평화가 가득한 댓글란을 원하는데, 근래 연재 주기와 업데이트 관련해서 잦은 소동이 발생하는 점이 늘 안타까웠습니다. 지향이란 단어가 제가 의도한 바와는 다르게 해석되는 점도 아쉬웠고요.
앞으로는 공지한 바와 같이 주7회 연재를 지향합니다.
그러나 집필에 투자하는 노력의 크기를 줄이지는 않을 것이며, 지금까지 했던 것 이상으로 노력해서 글을 쓸 생각입니다. 주7회 지향으로 방향을 틀었다 해서 놀지는 않을 거란 의미입니다.
쉽게 말해서 주7회 분량을 다 채웠다 해도, 저의 여력이 남는 한에서 추가적으로 더 업뎃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다만 주7회 지향이라고 하는 점은, 더 이상 연재 주기와 업데이트 시간에 관련해서 소동과 갈등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표지판을 세우는 것입니다.
잊지 마세여.
리미트리스 드림은 ‘공.식.적.으.로’ 주7회 연재를 파.괘...아니 ‘지향’합니다.
쉿.
저 두 줄에 숨은 뜻을 읽었다 해도 공론화하면 안 댐미다.
선수끼리... 알잖아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