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72 정지원과 배트모빌 =========================================================================
김성일 실장은 은밀하고 재빠르게 움직였다.
이서나의 귀에 들어가지 않게끔 보안을 유지하며, 제약 연구원들을 움직여 원료 배합 조사를 시켰다.
그러나 원하는 성과를 내는 게 쉽지 않았다. 제약 연구원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원재료만으로 최종 화합물이 어떤 형태인지 알아내는 것은 어렵습니다. 적어도 화학 구조식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 이 원재료들은 애초에 특별히 중요한 제약 재료가 아닙니다. 이것으로 무엇을 했다는 건지 짐작이 안 되는데요.”
마지막 문턱에서 형편없이 막히고 만 것이다.
이용무는 진척 상황에 관해서 김성일의 보고를 들을 때마다 입맛이 썼다.
분명히 무언가가 있는데, 이제 한 발자국만 내딛으면 되는데, 혼탁한 안개는 더 이상의 접근을 허용치 않는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것이 마지막 남은 유일한 단서였기에.
그렇게 마지막 퍼즐 조각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연락이 왔다.
「오랜만입니다, 이용무 부회장님.」
“……한 대표.”
「요즘 부쩍 저에게 관심이 많으시다고 들었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평온한 목소리였지만, 이용무는 순간적으로 오싹 소름이 끼쳤다. 설마 알고 있는 것인가?
「가능한 빨리 뵙고 싶은데요.」
“……그러지요.”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할 틈도 없이 이용무는 반 공대를 쓰고 있었다.
「김성일 기조실장도 함께요.」
“그 친구는 왜입니까?”
김성일을 대동하는 것은 부담스러웠던 이용무는 최대한 발을 빼려 노력했다.
“한 대표가 그 친구를 알 리가 없을 텐데…….”
「진성제약 박현준 차장으로부터 이야기 들었습니다. 그 사람도 데리고 나오시면 좋겠습니다.」
이용무는 눈을 가만히 감았다. 좋지 않은 예감이 또렷하게 가슴을 찔렀다.
“알겠습니다. 그러지요.”
한서진은 거울을 보며, 재킷을 걸쳤다. 서랍을 열고 안에 정돈된 시계 중에서 하나를 꺼내 손목에 찼다. 옷깃을 다듬고 다시 보자 거울 속에는 말쑥한 청년 기업가가 서 있다.
이제는 낯설지 않은 당연한 일상이 된 모습. 한서진은 물끄러미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다가 등을 돌렸다.
‘진성그룹이라.’
그러고 보면 자신과 진성그룹은 참 복잡한 인연으로 얽힌 관계 아닌가.
지금은 그룹 회장 이서나와 손을 잡았고, 진성전자가 반도체 파운더리를 맡고 있지만, 첫 시작은 분명히 악연이었다.
이용무는 50조 원의 가치가 있는 기술을 겨우 1,000억 원에 사려고 했으며, 대학 연구소와도 이리저리 불협화음이 잦았다.
무엇보다 첫 직장인 진성전자에서 췌장암을 얻었다.
유독 화학물질에 남들보다 덜 노출되는 근무 환경이었다고 하지만, 노출될 기회가 있는 환경인 건 확실했으니.
‘선연인가, 악연인가.’
H그룹은 선연으로 시작해, 중간에 악연이 하나 끼어들었지만, 다시 선연으로 이어졌다. 아마 앞으로도 선연이 이어질 것임을 의심하기 어렵다.
그에 비해 진성그룹은 어떨까. 한서진은 걱정보다는 호기심이 앞섰다.
“오빠, 어디 가?”
“거래처 사람 만나러. 학교 갔다 오는 거야?”
“응. 근데 또 나가봐야 해. 오늘 술 약속 있어서.”
“작작 좀 퍼마시고 다녀라. 그러다가 공부는 언제 하려고?”
한지혜는 멋쩍은 듯 웃고는 까치발로 사라졌다.
한서진은 차를 몰고 약속장소인 진성호텔로 향했다. 여섯 명의 경호원을 데리고 스위트룸으로 향했다. 그들을 입구 복도에 세우고 안에 들어섰다.
미리 도착해 있던 이용무가 그를 맞이했다. 한쪽에는 경직된 안색의 남자가 서 있었다.
“저 분이 김성일 기조실장님인가 보군요.”
“그렇습니다.”
“그렇게 저에게 궁금한 게 많은 이유가 저 분 때문입니까.”
이용무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주인이 당황하자 김성일은 이를 악물었지만, 감히 항의할 수 없었다.
주인이 500억 불의 청년 재벌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자신 같은 일개 부하 직원은 감히 끼어들 수 없는 자리다.
“제가 어떻게 알았는지는 부회장님도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이용무는 차분히 표정을 관리했다.
박현준 차장한테 이야기를 들었다면 이미 끝났다. 김성일이 한 것처럼, 한서진도 자신이 걸어온 길을 복기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진성그룹이 뒷조사를 한다는 걸 알았을 테지.
중요한 것은 한서진이 어떤 결론에 도달했느냐다. 뒷조사를 당했다는 불쾌함 때문에 이 자리를 만든 거라면 이쪽 입장에서는 차라리 다행이었다.
“김자홍 교수는 아직 만나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뻔하겠죠. 환자 개인정보제공이 불법이라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그룹 기조실장 아닙니까.”
이용무의 눈썹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김자홍, 그 이름까지 나오다니. 뒷조사 때문에 불쾌해서 이 자리를 만든 것은 아니라는 게 확실해졌다.
한서진은 느긋하게 다리를 바꿔 꼬며, 이용무를 응시했다.
“저에게 궁금한 게 그리 많으신데, 뒷조사보다는 시원하게 직접 물어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부회장님.”
이용무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명백한 함정. 그렇다고 들어가지 않을 수도 없다.
“말기 췌장암을 어떻게 해서 낫게 한 것입니까?”
어떻게 나았느냐가 아니다. 어떻게 낫게 했느냐다. 그 뉘앙스의 차이는 또렷했다.
한서진은 기조실장의 표정까지 흘끔 확인했다. 이들이 잡은 밑그림이 어떤 것인지, 이제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부회장님이 궁금하셨던 게 그거였군요. 설마 그건 아니었으면 했습니다만, 어차피 상관은 없겠죠.”
팔짱을 낀 채, 한서진은 차분히 쐐기를 박았다.
“부정하면 그만이니까.”
“……한 대표.”
“그 부분에 관한 질문은 노코멘트입니다.”
단호한 불쾌감이 묻어나는 목소리다. 협상의 여지라고는 일말도 찾아볼 수 없다.
이용무는 김성일을 향해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목례를 한 그가 잠시 자리를 비켜 주었다. 응접실에는 이제 둘만 남았다.
“아버지를 살리고 싶은 자식의 마음을 생각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제 질문에 대답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진정으로 아버지를 살리고 싶은 겁니까, 아니면 회장 자리를 잃고 싶지 않아서입니까? 저는 후자로 보이는데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저는 노코멘트입니다.”
“……그럼 왜 이 자리를 만든 겁니까?”
“확인이 필요했으니까요.”
뒷조사를 한 건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이용무가 어떤 밑그림을 그리게 되었는지는 반드시 확인해야 했다.
그리고 확인했다. 비록 막연한 공상이지만, 그는 엘릭서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다.
‘내가 박현준 차장한테 신약 제조 같은 걸 부탁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이대로 이서나한테 밀리는 걸 두고 볼 수 없는 이용무로서는 지푸라기라도 닥치는 대로 뒤져볼 수밖에 없다. 한서진은 그런 처지를 이해했지만, 동시에 절박하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았다.
이창용 회장은 자신에게 있어 철저한 남이다. 엘릭서를 들킬 위험을 무릅쓰고 도와줄 의리도, 이유도 없다.
“부회장님. 이왕 이리 만나게 된 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5nm공정 기술의 가치가 아직도 1천억 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옛 일을 들춰낸 조롱이었지만, 이용무는 불쾌감조차 느낄 수 없었다.
자신이 1,000억에 1%를 제안했던 기술은 50조 원에 40%의 조건으로 팔려버렸다. 그 이야기만 나오면 그의 앞에서 진득한 수치심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한서진은 등을 돌렸다.
기조실장의 얼굴도 봤고, 이용무가 어떤 추론을 품는지도 확인했다. 1천억을 언급하며 조롱도 했다. 이만하면 여기 온 성과는 충분했다.
그때 뒤에서 쥐어짜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뭘 어떡하면 대답을 해줄 수 있습니까.”
문득 걸음을 멈춘 한서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부회장님.”
“말해 주십시오. 내가 뭘 어떡하면 대답을 해줄 수 있는지! 무엇이든지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주겠습니다! 내가 가진 전부를 달라고 해도 말입니다!”
절박함이 느껴지는 음성이다. 하지만 한서진의 마음에는 닿지 않는 크기였다.
시한부를 선고받고 옛 애인이 결혼한다는 통보를 받은 그 날의 고통에 비하면, 저것은 아무것도 아닌 투정일 뿐이다.
“글쎄요. 진성그룹을 전부 갖다 준다면 뭐 생각해보죠. 그게 무리라면 절반이라도 뚝 떼서 주던가.”
“…….”
거친 숨소리가 들린다. 한서진은 여전히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스위트룸을 나섰다.
호텔을 출발한 한서진은 운전을 하면서 박현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박 팀장님. 접니다.”
「아, 예. 대표님.」
전화가 두 번 울리기 전에 박현준이 부리나케 받았다. 재벌 그룹에서 오래 일한 사람의 몸에 밴 습관일까.
한서진은 박현준에게 임시로 팀장이라는 직함을 주었다. 아직 고용 계약서를 쓴 것은 아니지만, 둘 사이의 고용관계는 이미 성립되었다.
“제가 말한 그것, 앞으로 안정적으로 꾸준히 공급받을 수단이 필요합니다. 한번 방법을 찾아보시지요.”
그것은 엘릭서의 재료를 말한다. 돌려서 말했지만 박현준은 당연히 알아들었다.
「구체적으로 생각하시고 계신 예산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돈은 상관없습니다. 무제한입니다.”
「무제한이요?」
수화기 너머로 박현준이 숨을 헉 하고 들이마시는 게 들린다. 한서진은 목소리에 힘을 주어 재차 말했다.
“네, 무제한입니다. 그러니 공급수단을 확보하는데만 전력을 기울여 주세요. 그리고 알고 계시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보안입니다.”
「알겠습니다.」
박현준도 이쯤에서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그 세 가지 혼합물은 완제품이 아닌 구성품이라는 것을. 다른 특별한 첨가물이 더 있어야 완성된다는 것을.
그것은 하나일 수도 있고, 여럿일 수도 있다. 그가 알고 있는 세 가지 혼합물만으로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도 무제한이라는 것은 너무 막연합니다. 대표님 전 재산을 몽땅 여기에 쏟아 부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저는 그래도 된다는 뜻이었는데요.”
「예?」
“보안과 공급, 이 두 가지를 확실히 유지할 수만 있으면 500억 달러 전부를 다 써도 상관없습니다. 돈은 제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대표님이 얼마나 중히 여기시는 일인지는 잘 이해했습니다. 그래도 무제한이라는 것은 너무 과합니다. 현실적인 기준을 그어주시지요.」
“현실적인 기준이라…….”
잠시 정차한 채 한서진은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그는 결정을 마쳤다.
“연간 5,000억 원으로 하지요. 그 안에서는 얼마든지 자금을 운용해도 좋습니다.”
「5,000억 원…… 알겠습니다.」
그것도 무지막지한 금액이었기에 박현준은 다시 한 번 숨이 헛도는 소리를 냈다.
“자금 집행 자체는 재무팀에서 이행하니, 박 팀장님은 문서로 이행지시를 하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운용 방법은 박현준이 결정해도 현금 인출 등 집행 자체는 일곱 명으로 구성된 재무팀에서 이행한다. 만에 하나 발생할 수 있는 사고를 예방하고, 책임소재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다.
한서진은 전화를 끊고 차를 출발시켰다.
그때였다.
뒤에서부터 우렁찬 배기음이 접근해왔다. 그는 사이드미러로 후면을 확인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저게 뭐야?”
무척 특이하게 생긴 차 한 대가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다.
육중한 장갑판으로 온통 뒤덮인 차체, 굵고 거대한 전면의 두 개의 바퀴. 자동차라기보다는 마치 전차의 형태에 가까운 그것은 금방이라도 영화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배트모빌?’
한서진은 그 차를 보자마자 예전에 봤던 영화를 떠올렸다. 그 영화 속의 주인공이 타고 다니는 전용 차량이 저것과 똑같이 생겼었다.
장갑차를 닮은 차량은 우렁찬 소음을 내며 순식간에 속도를 줄였다. 투박하면서도 육중한 그 모습은, 첸테나리오와는 전혀 다른 카리스마를 뿜어내고 있었다.
첸테나리오 옆에 선 차량은 드르륵, 하고 금속이 뒤로 넘어가며 운전석을 드러냈다. 운전자를 본 한서진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 팀장님?”
“오랜만이다.”
“아니, 한국에는 대체 언제 오셨어요? 놀랐잖습니까.”
“지금 그게 궁금해?”
정지원은 의미심장하게 물었고, 한서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진짜 묻고 싶은 질문을 꺼냈다.
“그 차, 뭐예요?”
“주문 수제 수퍼카다. 배트모빌과 똑같이 만든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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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부끄러움은 람보르기니의 몫이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