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171화 (171/609)

00171  그 환자 그 교수  =========================================================================

김성일은 진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찾았다.

기조실장의 권한을 내세워 과거 한서진이 일했던 파트의 동료들을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한서진의 근로 태도, 동료들의 평가, 집안 사정 등.

“정말 성실한 친구였어요. 4년 동안 지각 한 번 안 한 노력파 청년이었죠.”

“자기 일에 언제나 열심이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편이 잘 펴지 않아서 안타깝더라고요.”

“퇴사 이유가 췌장암 말기라고 들었어요. 그게 재작년이니, 부디 좋은 곳으로 갔으면 좋겠는데.”

공장의 옛 동료들은 한서진이 500억 불의 잭팟을 터트린 청년 재벌과 동일인물이라는 것은 모르고 있었다. 하긴, 한서진이란 이름이 유일한 것은 아니니까.

“박해철 과장?”

“예. 한서진 직원을 4년 동안 직속 관리한 친구입니다. 퇴사할 때 산재 청구 못하게 합의를 중재하기도 했었고요.”

“호오, 지금 이 친구 어디 있습니까?”

“그만뒀습니다. 좀 오래 됐습니다.”

“혹시 연락 가능합니까? 한서진 그 직원에 관해서 물어볼 게 몇 가지 있는데.”

공장장은 난처한 얼굴로 대답했다.

“연락 않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무척 안 좋게 퇴사했거든요. 얼마 전에 합의금 주고 간신히 마무리했습니다.”

“합의금?”

“사고로 손가락 두 개를 잃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김성일은 아쉽지만 박해철은 포기했다.

손가락 두 개를 잃었고, 무척 안 좋게 퇴사했으며, 얼마 전에 겨우 마무리했다. 이 말만 들어도 상황이 그려진다. 박해철은 지금 진성전자에 이를 갈고 있을 것이다.

그룹 기조실장이 옛날 일을 물어본답시고 찾아가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다. 순순히 대답해주지도 않을 테고.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충분히 확인하고, 김성일은 진성의료원으로 향했다.

그룹 산하 병원이니, 기조실장의 이름이면 교수 한 명쯤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병원 측은 그룹 내에서 감사가 떨어진 것은 아닌가 벌벌 떨었다.

“내가 김자홍입니다. 무슨 일입니까?”

“아, 교수님. 반갑습니다. 기획조정실을 맡고 있는 김성일이라고 합니다.”

“알아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그룹 감찰이라고.”

“하하, 그 정도는 아닙니다. 그저 그룹 계열사 간의 전체적인 교통을 조율하는, 회장님 직통 부서지요. 일차 내사나 감사를 병행하기도 합니다만.”

김성일은 잊지 않고 은근한 압박을 주었다. 지금쯤 김자홍은 리베이트에 얽힌 게 없나 내심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병원 교수에게 있어 리베이트 혐의는 떼어놓고 가기 힘든 것이니까.

“다름이 아니고 제가 직원 하나를 조사하고 있습니다.”

“직원?”

“정확히는 전 직원입니다. 4년 간 우리 그룹 반도체공장에서 일하고 퇴사한 직원이죠. 그 행적에 의문점이 있어 현재 조사 중입니다.”

“그걸 왜 나한테…….”

“한서진이라고 하는데, 혹시 아십니까?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김자홍의 얼굴에 놀란 빛이 떠올랐다. 김성일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나타났다가 지워졌다.

“환자의 정보 공개는 불법입니다.”

“기조실에서 직접 사원 하나의 행적을 조사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

“합법적인 루트를 통하기에는 너무 시간이 걸리고, 또 일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병원 전체가 떠들썩해지는 건 교수님도 바라지 않을 텐데요? 전 교수님과 병원을 배려해드리기 위해, 일부러 이렇게 어렵게 돌아가는 겁니다. 더 쉽게 갈 수 있는 길도 많은데도요.”

“…….”

“협조 좀 해주시죠.”

김자홍의 태도에서 김성일은 확신했다. 그 역시 한서진이 지금 어떤 사람인지는 알지 못한다. 이름만 같은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김성일에게는 더 잘 된 일이다.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알아볼 수 있으니.

진성의료원에 재직 중인 교수라서 다행이었다. 기조실장의 권한을 백분 발휘할 수 있으니.

한참을 고민하던 김자홍은 결국 김성일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털어놓았다.

“차트를 보여주진 못합니다. 하지만 정황 정도는 설명해드릴 수 있을 겁니다.”

“협조 감사합니다. 그럼 가장 궁금했던 것부터 물어보겠습니다.”

김성일은 차갑게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한서진 직원이 췌장암에 걸린 게 사실입니까? 정확히 어떤 상태였습니까?”

“말기 췌장암이었고, 간과 위장 등에도 이미 상당히 침윤된 상태였습니다. 도저히 손을 쓸 수가 없었죠. 기적이 아니고서는 살아난다는 게 불가능했습니다. 전 반 년도 살지 못할 거라고 봤습니다.”

“그런데 완쾌했군요.”

“……예, 믿을 수 없게도.”

“짐작 가는 게 있습니까?”

“…….”

김자홍 교수는 또다시 망설였다. 적지 않은 부담감이 그의 눈빛에서 느껴졌다. 김성일은 강하게 압박하지 않고, 차근히 그를 재촉했다.

“어디까지나 그룹 내사의 일부입니다. 교수님께 큰 그림을 보여드릴 수는 없지만, 그저 절차를 생략하고 협조하는 거라 생각하십시오.”

“그게…… 면역 효소의 일종으로 짐작되는 어떤 물질이 검출되었습니다.”

“면역 효소요?”

“처음 보는 효소였는데, 아니 호르몬일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그 물질이 미량 검출되었는데, 다른 환자의 암 조직에 떨어뜨리자 암세포만 죽고 정상세포만 살아남았습니다. 그건 마치 병마의 원인만을 골라서 공격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짜릿한 감각이 척추를 타고 온몸으로 흘러나간다.

자신의 감이 정확했다는 뿌듯함, 그리고 해냈다는 성취감.

김성일은 보이지 않게 주먹을 불끈 쥔 채, 부르르 떨었다.

월척 잉어 그물을 찢어놓은 향유고래, 그 그림자가 또렷이 보이기 시작했다.

“혹시 관련 연구를 한 게 있습니까?”

“없습니다. 남아 있는 물질도 전혀 없습니다. 협조 요청을 했지만 한서진 환자가 강력하게 거부해서…….”

“교수님 의견은 어떻죠?”

“처음에는 선천적으로 체내에서 합성된 효소라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만약 정말 그렇다면 그 지경까지 암이 악화되지는 않았겠지요.”

“새로운 신약을 투약했을 가능성은요?”

“그것도 가능성이 낮습니다. 만약 그런 약이 있다면 노벨생리학상을 받았을 겁니다.”

이 순간 김성일은 진성제약의 박현준 과장을 떠올리고 있었다.

박현준 과장이 특정 의약 원료를 빼돌린 시기와, 한서진이 완쾌한 시기와 놀랍도록 정확히 일치한다. 다만 여전히 삐걱대는 연결고리가 있다면…….

‘즉석복권을 어떻게 연달아 그렇게 당첨되지?’

그런 의문을 품으며, 김성일은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만약에 그런 약이 있다 가정하고, 그 약을 지금 회장님께 사용한다면 어떨 거 같습니까?”

김자홍은 흠칫 놀란 눈으로 김성일을 바라보았다. 지금 질문에서 무언가를 느낀 것일까, 그는 당했다는 눈빛이었다.

김성일은 아무렇지 않게 시선을 받아냈다. 이제 와서 그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예상대로 김자홍은 반쯤 체념한 듯이 대답했다.

“정말 존재한다고 가정해도 사람 일은 모르는 거지요. 제가 그 물질의 정확한 효능을 아는 것은 아니니까요.”

조심스럽게 떨리는 음색은 희미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김성일에게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협조 감사합니다.”

처음 박현준이 거액의 리베이트를 받은 것 같다는 내부고발이 들어왔을 때, 김성일은 간단히 생각했다.

회장인 이서나를 공격할 수 있는 카드를 주인인 이용무에게 쥐어주고, 자신은 그의 신임을 얻는다.

그래서 파고들었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결과가 속속들이 쏟아져 나왔다.

박현준은 한서진과 인연이 있었고, 특정 제약 원료를 빼돌린 정황이 있다.

한서진은 췌장암 말기를 진단받았으나, 박현준이 원료를 빼돌린 시기에 기적적으로 암이 완치가 되었다.

김자홍은 한서진의 쾌유가 체내에서 합성되었거나, 외부에서 투입된 효소의 작용으로 추정하고 있다. 적어도 그 미지의 효소 물질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나하나를 놓고 보면 별 것 아닌 현상이다. 그러나 그 현상들을 정교하게 엮어내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그림자가 느껴진다.

‘바보 같은 공상이지만.’

김성일은 오랫동안 고민했다.

박현준, 횡령, 한서진, 췌장암, 기적적인 치유, 미지의 치료 효소.

이것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폐기해야 하는가, 아니면 보고를 올려야 하는가.

‘최소한 횡령 건수만큼은 물고 늘어질 수 있다. 어차피 지금 부회장님은 한 자루라도 더 많은 칼이 필요해.’

결정을 마친 김성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료를 챙겨들고, 은밀히 이용무 부회장을 찾았다.

“부회장님, 보고 드릴 게 있습니다.”

“뭔가?”

심각한 김성일의 표정을 보고 이용무의 눈빛도 덩달아 차갑게 가라앉았다.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느낀 것이다.

김성일은 보고서를 내밀고, 최대한 덤덤한 어조로 현상만을 늘어놓았다. 자신의 추정은 감히 덧붙이지 않았다.

이런저런 일이 있었다. 또 다른 일들도 있었다.

이런 설명만 했을 뿐이다. 그 현상들을 어떤 모양으로 엮을 수 있는지, 어떻게 엮으면 좋을지 등 자신의 생각은 전혀 곁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용무에게는 그 정도만 해도 충분했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이용무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게 사실입니까?”

“이 보고서에 적힌 것들은 모두 사실입니다. 제가 직접 뛰며 사실관계를 확인했습니다.”

“한서진 대표가 우리 공장에 근무했었던 것은 알았지만, 설마 그런 사연까지 있었을 줄은…….”

“옛 동료들은 한서진 대표가 지금 어떤 사람인지 아무도 모르는 눈치더군요. 이름만 같은 사람으로 여기는 듯합니다.”

그들이 알던 한서진과 지금의 한서진은 그 위상이 달라도 너무 다르니, 그럴 수밖에. 게다가 한서진의 사진은 아직 공개된 적이 없다. 사진 공개를 꺼렸기 때문이다.

초라한 생산직 일만 하다가 췌장암 말기로 쓸쓸히 사라진 전 동료의 뒷모습에서, 특허 기술 하나로 500억 불의 재력가가 된 최고대학 수재의 모습을 어떻게 연상할 수 있겠는가.

불현듯 이용무의 팔이 부르르 떨렸다.

“무섭군.”

“부회장님.”

“지금 나는 아주 무서운 상상을 하고 있습니다.”

“…….”

“믿어지지 않는 무서운 상상이군요. 맥락도 안 맞고, 그저 억지스러워요. 하지만 그거 말고는 이 보고서의 인과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부회장님.”

김성일은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어쩌면 이용무는 자신과 비슷한 가정을 전제하고 있을지 모른다. 자신은 그 부담감을 이기지 못하고 속으로만 눌러놓은 상상. 이용무는 과연 그것을 입 밖으로 구체화할 수 있을까.

“박현준 차장이라는 친구가 폐기했다는 원료 말입니다.”

“예, 부회장님.”

“모두 알아내세요. 그 화합물이 어떤 작용을 하며 어떤 성질이 있는지, 의약으로서 가치가 있는지. 최고의 연구자들을 시켜 철저히 파헤치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이 일이 누님 귀에 알려지면 절대 안 됩니다. 기조실 직원들 입단속을 단단히 시켜요.”

“걱정 마십시오, 부회장님.”

“이만 가보세요.”

김성일 실장은 정중히 인사를 하고 물러갔다.

이용무는 보고서를 구길 듯이 강하게 쥔 채, 하염없이 글자를 들여다보았다. 거대한 그림자가 머릿속에 똬리를 튼 채 떠나지를 않는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고, 말이 될 수도 없는 상상. 그러나 그 상상의 그림자는 머릿속에서 사그라지기는커녕 점점 그 크기를 불려가고 있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한 대표, 당신은 대체 어떤 사람이지?”

============================ 작품 후기 ============================

“날 놀라게 해야 여기서 나갈 수 있다면서요. 말해봐요. 당신이 누군지.”

“그걸 들으면... 후회할 텐데요.”

“괜찮아요, 말해 봐요.”

“소설..속이요.”

“당신이... 소설 속에서 왔다고요?”

“아뇨, 여기가 소설 속이라고요. 제가 보는 소설이요.”

“그, 그럼 저는 이 소설의 주인공...”

“아뇨, 내가 주인공이고 너는 엑스트라. 쩌리.”

.....속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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