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170화 (170/609)

00170  그 환자 그 교수  =========================================================================

박현준은 차를 몰고, 청년이 알려준 주소로 향했다.

아마도 회사로 부른 것 같은데, 어떤 곳인지 내심 두근거렸다.

쓸모없는 제약 의뢰를 위해 35억을 아무렇지 않게 써버린 사람이다. 심지어 나이도 서른에 훨씬 못 미친다. 아마 자신의 상상을 초월하는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김성일 기조실장을 비할 수는 없으리라.

“여긴 어디지?”

목적지는 도심 공원인 듯한 곳이었다. 울타리가 넓게 쳐져 있고, 안에는 인공 숲과 거리, 호수 등이 잘 가꿔져 있다.

언뜻 보기에도 7,000세대 이상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조성해도 될 법한 면적이다.

아무리 봐도 이건 공원이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돌아다니는 사람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박현준은 의아해하면서도 입구 가까이 차를 댔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경비원이 물었다. 나이 많은 아저씨가 아니라 건장한 체격에 젊고 반듯한 인물이다.

“그게……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이곳에서 어떤 분과 만나기로 했습니다.”

“혹시 진성제약 박현준 차장님이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몇 시간 전까지는 그랬죠.”

“신분증과 명함을 확인할 수 있을까요?”

조금 과한 절차로 느껴졌지만, 박현준은 두 말 않고 신분증과 명함을 내밀었다. 경비원의 기도에서 심상치 않은 예감이 느껴졌던 것이다.

이곳이 공원이 아니라면, 설마…….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바리케이드가 열렸지만, 박현준은 엑셀을 밟지 않고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저어, 근데 여기가 어디입니까? 공원처럼 생겼는데, 사람이 하나도 안 보이네요. 혹시 사립 미술관이나 박물관인가요?”

“개인 자택입니다.”

“네? 뭐라고요?”

“여기는 대표님의 개인 자택입니다.”

박현준은 멍해졌다.

자택, 개인 집이라는 뜻이다. 그 사이 국어사전이 변질된 게 아니라면 말이다.

“여, 여기 전부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여기 전부가 대표님의 자택입니다.”

박현준은 머리가 아득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세상에, 이 넓은 공원 전부가 한 개인의 집이라고? 국내 최고 재벌이라는 이창용 회장 저택도 이 정도는 아닐 것이다.

그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길을 따라 차를 몰았다.

차도는 싸구려 아스팔트가 아닌 하얀 돌로 깔끔하게 정비돼 있었다. 저 멀리 으리으리한 본채가 보인다.

본채 앞에는 넓은 잔디 마당이 펼쳐져 있고, 곳곳에 멋들어진 정원수가 있다. 한쪽에는 다채로운 꽃밭이 보이고, 조그마한 연못도 있다. 연못에서 나오는 물줄기는 저 멀리 호수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말 그대로 영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저택이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야외 테이블 앞에 느긋하게 앉아 있던 청년이 일어섰다. 편안한 옷차림이지만 범접하지 못할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재작년, 그리고 작년에 봤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김성일 기조실장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위압감이 느껴진다.

박현준은 떨리는 턱을 겨우 열었다.

“자택에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근사한…… 아니, 아름다운 집입니다.”

“원래 도심 공원을 휴양지로 개조하려다가 매물로 나온 거라는데, 아는 분이 선물해주시더라고요. 그래서 잘 살고 있습니다.”

“하하…… 그, 그렇군요.”

들을수록 점입가경이다. 땅값만 해도 2조 원은 거뜬히 넘을 것 같은데, 그런 집을 아무렇지 않게 선물로 주고받는다?

박현준은 기조실장한테 뻣뻣하게 대한 것을 잘했다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만약 기조실장한테 다 불어버렸으면, 이런 대단한 청년을 척지는 셈이 아닌가.

‘대체 어떤 사람이지?’

박현준은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진성그룹 회장도 이런 대저택에 살진 못한다. 심지어 나이도 젊다. 국내에 저런 젊은 대부호가 있었단 말인가?

‘잠깐?’

문득 짚이는 사람이 생각난 순간, 상대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제 이름은 한 번도 안 알려드렸지요. 한서진이라고 합니다. 혹시 들어보셨을지도 모르겠군요.”

박현준은 아찔해지며, 다리에서 힘이 풀릴 뻔했다.

분명 한서진이라고 했다. 더 들어볼 것도 없이, 자신이 아는 그 한서진이 틀림없었다.

“혹시, 한국대 반도체공학부에 재학 중이신…….”

“맞습니다.”

“어억! 여, 영광입니다!”

박현준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500억 달러의 청년 재벌, 이창용도 감히 상대되지 않는 국내 최고의 대부호가 바로 눈앞에 있다니. 그리고 자신과 인연이 이어졌다니.

“일단 앉으시고, 다시 한 번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아, 네. 그러니까 그것이…….”

박현준은 겨우 자리에 앉고, 흥분을 필사적으로 가라앉히며 이야기를 꺼냈다. 이미 전화로 했던 이야기이지만, 아까 덧붙이지 못한 자세한 물밑 사정까지 모조리 탈탈 털어놓았다.

“흐음, 그렇군요.”

다 듣고 난 한서진의 얼굴은 별다른 동요가 없었다. 무심한 듯 흘러넘치는 여유, 박현준은 기조실장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거대한 격차를 느꼈다.

‘이거 만약 지금 있는 엘릭서 재료가 다 소진되면 다른 루트를 알아봐야 하는 건가.’

한서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금 있는 물량은 엘릭서 수십 개를 제조할 수 있을 양이다. 얼마 전에 백철중 회장에게 한 개를 사용해서, 그만큼 수량을 채워놓으려고 했다.

그런데 박현준이 회사를 그만뒀다니.

‘아는 사람을 더 늘리고 싶지는 않은데.’

박현준은 엘릭서의 존재를 모른다. 자신이 제조한 의약이 어디에 사용되는지도 모른다. 한서진의 혈액이 없으면 그것은 쓸모없는 화학혼합물일 뿐이다.

하지만 비밀을 아는 사람을 늘리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그 사람을 과연 믿을 수 있느냐도 의문이다.

‘외국 첩보원이 내 주변을 감시하고 있을 수도 있고.’

정지원은 미국 정부가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다고 분명히 알려주었다. 그들은 다만 미국에 해가 되지 않기에 굳이 접근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엘릭서 재료를 새로운 사람에게 부탁한다면, 자칫 의혹의 눈길을 추가할 수도 있었다.

한서진은 결심을 굳혔다.

“회사를 그만 두셨다고 하셨죠?”

“아, 네. 그렇습니다.”

“그럼 앞으로는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얼마 전에 괜찮은 집을 샀는데 아직도 24억 가까이 남아 있습니다. 그 돈이면 뭔들 못하겠습니까. 사업을 하기에는 지쳤고, 그냥 유유자적하게 남은 생을 즐길 생각입니다.”

박현준은 마음 편하게 웃었다.

“그 돈이면 일 년 이자만 오천입니다. 앞으로 평생 돈 걱정 없이 살 것 같습니다.”

한서진은 가만히 미소를 짓고 바라보다가 찔러 넣었다.

“한 번 저를 위해서 일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네? 저, 정말입니까?”

박현준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반문했다. 설마 그런 제안을 받을 줄은 몰랐다.

“대우는 서운치 않게 해드리죠. 제약 쪽으로 몇 가지 일을 믿고 맡길 사람이 필요한데, 박 차장님이 가장 적합하군요. 어떻습니까?”

“그, 그것이 너무 갑작스러워서…… 저는 이제 일에서 은퇴하려고…….”

“강요하는 건 아니니 천천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적어도 이자보다는 훨씬 많은 보수를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

박현준의 눈빛이 단단하게 변했다. 잠시 생각을 하고 난 그는 무겁게 끄덕였다.

“대표님을 위해서 일하겠습니다.”

진성그룹 기획조정실은 박현준의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파악했다. 가족관계 및 재산내역, 리베이트 가능성, 그리고 퇴사 이후의 동태까지 남김없이, 철저히 훑었다.

“일단 리베이트 가능성은 0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그런 쪽 연관은 전혀 없습니다. 왜 특정한 제약 원료만 작년, 재작년에 폐기했는지는 원인이 불명합니다.”

유능한 기획조정실 직원들은 며칠 지나지도 않아서 정밀한 보고서를 가져왔다.

“최근 큰돈이 갑자기 생긴 것은 사실입니다. 일단 확인된 액수만 10억 정도입니다. 박 차장이 퇴사 전 동료들에게 로또가 당첨됐다는 이야기를 하긴 했습니다만, 신빙성이 떨어집니다.”

“로또는 아니라 이건가?”

“적어도 국내로또는 아닙니다. 해외로또 가능성도 열어두고 조사 중입니다만, 그 부분은 계좌기록을 조사하기 조금 까다로워서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습니다.”

“자네 얼굴은 로또 같은 우연스러운 일확천금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데.”

“정말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박 차장은 퇴사 직후 곧바로 어떤 사람을 찾아갔는데, 그게 누군지 알면 놀라실 겁니다.”

“그걸 제일 먼저 말했어야지. 누군데?”

김성일 실장은 짜증스럽게 물었다. 부하 직원이 평소에 쓰지 않는, 사람 애간장 태우는 화법을 사용하니 답답했다. 이놈이 더위를 먹었나?

“놀라지 마십시오. 바로 한서진 대표입니다.”

“한서진? 잠깐, 설마 그 한서진?”

“네, 해외계좌에 500억 달러를 쌓아두고 있는 그 한서진 대표, 한국대 반도체공학부에 재학 중인 그 사람 말입니다.”

김성일은 의자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사실이었다.

박현준이 그 사람과 연결이 되어 있다니?

“퇴사 직후 바로 찾아갔다면 그때 임시 보고를 했어야지. 왜 이렇게 며칠씩이나 걸렸나?”

“파고들다 보니 이상한 점이 여럿 나와서 최대한 정리한 다음에 보고하려고 그랬습니다. 일부러 지연한 게 아닙니다.”

“그래, 그 여럿 나왔다는 이상한 점이 뭔가?”

김성일은 필사적으로 흥분을 가라앉혔다.

원래는 이용무에게 자신의 충심을 보여주기 위해 시작한 사정 작업이었다.

이서나와 연관이 깊은 진성제약의 리베이트를 적발하면 이용무는 반격 카드 하나를 쥐는 셈이고, 이서나의 그룹 조정에 좌천되더라도 이용무의 그늘로 안전하게 안착할 수 있으니.

그런데 자신이 상상한 월척 잉어 대신 향유고래가 그물을 찢어놓은 흔적만 있다. 가슴이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과연 그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일단 한서진 대표의 행적을 조사했습니다.”

“들키지 않았겠지? 상대는 거물이야. 만약 눈치 채면 답이 없어.”

“걱정 마십시오. 조심스럽게 조사를 했으니 알아차리지 않았을 겁니다. 주로 지난 행적 위주로 알아봤습니다.”

“어서 말해보게.”

“일단 한서진 대표는 작년까지 H반도체에 다니는, 평범한 우수 직원이었습니다. 한국대 반도체공학부에 수석 입학한 점이 이례적이지만 특별히 주목할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작년 2학기에 500억 불의 잭팟을 터트렸지요.”

“그건 나도 알고 있네.”

“그런데 한서진 대표가 2년 전까지 우리 진성전자 생산라인에 근무하셨던 것은 아십니까? 그것도 4년이나 근무했습니다.”

“진성전자에 4년이나?”

김성일은 크게 놀라워했다. 향유고래의 냄새가 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H그룹이 우리를 견제하느라 언급하지 않았지만, 한서진 대표는 고교를 졸업하고 진성전자 반도체 생산라인에서 4년 동안 생산직으로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퇴사 후 몇 달 뒤에 H반도체에 재입사한 겁니다.”

“혹시 산업스파이?”

“정황상 그건 아닙니다. 애초에 생산직원이 빼갈 수 있는 정보는 없고요. 퇴사 이유를 들으시면 더 놀라실 겁니다.”

“뭔가?”

“췌장암 말기입니다.”

김성일은 소름이 쭈뼛 돋았다. 뭔가 있다.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이 짙은 안개 너머에 거대한 뭔가가 있다. 기조실장 자리에 올라오기까지 겪은 무수한 고생, 그 경험으로 얻은 감이 강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직원은 기조실장이 느끼는 바를 짐작한다는 듯이 힘을 주어 말했다.

“박현준 차장이 재작년 특정 원자재를 폐기 처리한 게 공교롭게도 바로 이 시기입니다. 한서진 대표가 췌장암으로 퇴사하고, 말끔한 모습으로 H반도체에 입사한 그 사이죠. 그리고 이 시기에, 한서진 대표는 고액 즉석복권에 연달아 당첨돼 20억 가까운 당첨금을 수령했습니다.”

“한서진 대표가 췌장암 진단을 받은 곳이 누구지? 담당 의사는?”

“참 공교롭게도 우리 진성의료원의 김자홍 교수입니다.”

“박현준이가 빼돌린 원자재 종류와 수량, 다시 한 번 정확하게 파악해.”

김성일의 미소가 차갑게 빛났다. 그는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반도체공장 돌고 김자홍 교수 만나고 올 테니까, 그동안 전부 끝내 놔.”

============================ 작품 후기 ============================

손에 땀을 쥐는 긴장감이 느껴지게 해드리고 싶은데, 거기서 고구마를 삭제하니까 뭔가 실탄색 맛이 돼버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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