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69 그 환자 그 교수 =========================================================================
회사 생활이라는 게 참 더럽다. 대기업일수록 더하다.
단순히 일을 잘해야 하는 것뿐만 아니라 인맥 관리도 신경 써야 하고, 사내 정치에도 몸을 던져야 한다. 그렇게 청춘과 몸을 불살라도 정년 보장은 되지 않는다. 50이 되기 전에 보통 다 잘려나간다.
요즘은 40대에도 잘려나간다고 했던가.
힘들고 더러운 직장 생활이지만, 그래도 박현준은 꾹 참고 회사를 다녔다. 자기 하나만 바라보는 가족들을 위해서였다.
35억이라는 거액이 생겼을 땐 당장이라도 회사를 때려 치고 싶었다. 속 시원하게 사표를 던지고 나가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았던 것은, 회사를 나가서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어설프게 창업해서 돈을 까먹느니, 월세 받는 기분이라 생각하고 회사를 다닌 것이다.
자연히 마음가짐도 달라졌다.
‘참다 참다 안 되면 때려 치는 거지, 뭐.’
든든한 도피처가 생긴 덕분에, 박현준은 그전보다 마음 편안히 회사를 다닐 수 있었다.
예전과는 다른 각오로 사직서를 품에 넣고 다녔다. 예전에는 칼을 입에 문 심정이었다면, 지금은 피날레를 장식하기 위해 들고 다닌다.
‘어차피 증거는 없어. 기조실장이라고 해봐야 그만두면 이웃집 아저씨일 뿐이야.’
원자재 수량이 비는 거? 폐기로 확실하게 처리했고, 그 양도 얼마 되지 않으며, 중요한 원자재도 아니다. 깔끔하게 처리했는지 몇 번이나 확인했다.
오너 일가의 심기가 뒤틀어진 것도 아니고, 출세에 목매는 하수인의 눈에 띈 것뿐이다. 박현준은 불안감을 떨쳐냈다.
밟힐 꼬리는 없다.
‘이 새끼가 날고 기어도 못 잡아내.’
박현준은 피날레 무대가 임박한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저절로 마음이 든든해졌다.
아직도 24억 정도 되는 돈이 남아 있다. 100세까지 이 직장을 다닌다 해도, 그 돈의 반이 모을 수 있을까?
그는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그게 뭐가 문제라는 겁니까?”
“……뭐라고요?”
박현준의 태도가 변한 것을 느낀 김성일 실장의 안색도 굳었다. 그는 틈을 주지 않고 말했다.
“폐기해야 할 품질이라 폐기를 했고, 그 수량도 얼마 되지 않아서 얼마든지 제 재량권으로 가능했습니다. 중요하고 값비싼 원자재도 아니고, 항정신성류처럼 취급에 민감한 종류도 아니고요. 폐기해야 할 걸 폐기한 게 그렇게 잘못된 겁니까?”
“박 차장님.”
“제가 좋은 집 좀 샀다고 동료들이 질투 좀 한 모양인데, 리베이트 받고 그런 거 없습니다.”
“그럼 그 돈이 어디서 났습니까?”
“그걸 내가 왜 소명해야 하죠?”
대놓고 들이박는다. 김성일의 얼굴이 더욱 차가워졌다.
그러나 박현준은 조금도 쫄지 않았다.
“여기가 회사지, 무슨 검찰청입니까? 나더러 개인 재산 내역까지 소명을 하라니, 내가 어이가 없어서. 내가 원래 있던 돈으로 집 산 것까지 회사에 소명해야 합니까?”
“말했습니다. 리베이트 문제라고.”
“아, 그럼 뒤져봐요. 털어서 먼지 나오나 안 나오나, 그럼 되잖습니까.”
박현준은 품에서 사직서를 꺼낸 뒤, 김성일 실장의 얼굴에 그대로 던졌다. 미처 대비하지 못하고 사직서를 얼굴에 맞은 김성일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했다.
“애초에 작정하고 하나 걸려란 심정으로 터는 거잖아요, 지금. 내가 그거 모를 줄 압니까? 나도 더럽고 치사해서 회사 그만둘 테니까, 어디 뒤지든 말든 알아서 해요. 리베이트의 리 자라도 나오나.”
“박 차장.”
“왜, 김 실장?”
“…….”
“안 그래도 직장 생활 더러워서 못해먹겠어서, 입에 칼 문 심정으로 다녔어. 근데 이제 못 참겠네. 당신이 내 상사는 아니지만 사표 수리 알아서 하든가 말든가 해.”
퇴사를 하는 데에도 절차와 예의라는 게 있다. 본래 사람은 우물을 떠나기 전 침을 뱉지 않는 법이다.
박현준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우물에 침을 뱉고 싶어졌다. 갈증으로 죽는 한이 있어도 이 우물에서는 다시 물을 길지 않을 거니까.
지금 침을 뱉지 않으면 영영 기회가 없을 것이고, 나중에 왜 그때 병신같이 얌전히 떠났을까 하고 후회할지도 모른다.
“기분 나빠요? 그럼 없는 죄라도 만들어서 괴롭혀 보시던가. 근데 나도 가만 안 있을 거니까, 신중하게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당신 경력에 흠집 내고 싶지 않으면. 당신 오너 일족은 아니잖아?”
“…….”
“사표 수리는 알아서 해.”
박현준은 김성일 실장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아까 실장실에 들어설 때만 해도 가슴이 떨렸는데, 지금은 조금도 그가 무섭지 않다. 오히려 애처롭고 한심해 보였다.
그룹 본부를 나온 박현준은 진성제약으로 돌아갔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일제히 자신을 쳐다본다. 그룹 기조실에 다녀온 이야기가 이미 퍼진 모양이다.
“박 차장, 기조실 다녀왔다며?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상사인 김 차장이었다. 같은 차장이지만 그는 5년 먼저 입사한 선배였다. 얼마 전에 또 부장 승진에서 누락되기도 했고.
박현준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만약 기조실에 자신을 찌른 용의자를 한 명만 꼽으라면, 그는 주저 없이 김 차장을 고를 것이다.
‘어차피 다 소용없다.’
박현준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쪽을 쳐다보는 동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는, 일부러 다 들리도록 크게 말했다.
“동료 중에서 누가 저 내사 고발했답니다. 제가 얼마 전에 집 산 게 배 아픈 사람이 있었나 봐요. 이거 리베이트 받은 거 아니냐고요.”
“바, 박 차장! 목소리가 왜 이렇게 커?”
“제가 그래서 그랬죠. 제 직급과 업무에서 리베이트 받을 건덕지가 없다고. 아니, 거래처와 연결고리도 없고, 제가 해줄 수 있는 것도 별로 없는데, 리베이트를 무슨 재주로 받습니까. 그래서 더러워서 그만 둔다고 말했지요.”
“박 차장!”
“사표는 기조실장 얼굴에 던지고 왔으니, 이제 짐 싸서 나가보려고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그러면서 박현준은 정말 자기 사무실에서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김 차장은 당황해서 그의 옆에 따라붙었다.
“아니, 이 사람아. 이런 식으로 나가면 어떻게 해? 인수인계는 어떻게 하고?”
“지금 리베이트, 배임으로 사람을 의심해놓고 인수인계를 원하는 것도 웃긴 상황 아닙니까?”
“그래도 유종의 미를 거둬야지! 이런 식으로 퇴사해서 소문나면 다른 회사 재입사가 가능할 거 같아?”
“재입사는 생각도 안 하고, 당분간 그냥 놀 겁니다. 로또 당첨됐는데 뭐 하러 회사 다녀요?”
“로, 로또?”
“그럼 제가 어디서 돈이 나서 그 집을 샀겠어요? 지금까지 힘들게 일만 하며 살았으니, 남은 시간은 맘 편히 하고 싶은 거 하면서 내 인생 살아보려고요.”
동료들이 일은 안 하고 이쪽만 쳐다보고 있다. 박현준은 보란 듯이 당당하게 짐을 싸고, 김 차장을 똑바로 주시했다. 그는 적지 않게 당황하고 있었다.
“김 차장님, 혹시 김 차장님이에요?”
“뭐, 뭐가?”
“기조실에 저 꼰지른 거요. 김 차장님인가요?”
“큰일 날 소리를! 내가 왜 그런 짓을! 사람을 어떻게 보고!”
“아니면 됐습니다. 부장님한테 말해서 퇴직금 잘 처리해달라고 하세요.”
“정말 이렇게 나가려고?”
“기조실장 얼굴에 사표 던지고 나왔다고 말했잖습니까.”
박현준은 사무실 입구에서 잠시 등을 돌렸다. 불안하고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동료들을 주시했다.
청춘을 담았던 회사를 한순간 어이없게 뜨게 되었다. 그러나 아쉽거나 복잡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속이 후련했다.
“모두 그동안 고마웠어요. 송별주라도 사고 싶은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힘들겠고, 건강히 잘 지내기 바랍니다.”
“차, 차장님. 정말 이대로 가시는 거예요?”
“혹시 집 사더라도 동료들한테 자랑하지 말고요. 안 그럼 내 꼴 날 수 있으니.”
마지막 인사를 마치고 박현준은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회사를 나서는 발걸음이 깃털처럼 가벼웠다.
이렇게 쉬운 것을, 왜 그동안 미련하게 살았을까 하는 후회가 생겼다.
‘아니지, 이게 내 힘 덕분은 아니지.’
박현준은 핸드폰을 꺼내 전화번호부를 확인했다.
그러고 보니 전화번호만 알지, 그의 이름은 뭔지 모른다. 그래서 번호는 ‘35’란 이름으로 저장되어 있다. 35억이란 뜻이 담긴 이름이다.
‘말해줘야 하나?’
그는 잠시 망설였다. 35억은 제조 의뢰 외에 기밀 유지 의무도 포함된 대가다.
물론 아무런 증거는 없다. 기조실이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 해서 없는 증거를 만들어낼 수도 없다. 기조실장은 조금 뒤져보다가 결국 덮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혹시라도 그 청년에게 해가 된다면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았다. 자신이 떳떳하게 사직서를 던지고 뛰쳐나올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그 덕분 아닌가.
‘일단 말해주자.’
그는 결심을 굳히고, 전화를 걸려고 했다.
바로 그 순간 그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
그가 전화를 했다는 것은 또 ‘의뢰’가 필요하다는 것. 박현준은 망연자실해졌다. 갑자기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김 차장 그 개새끼! 한 달만 더 늦게 찌르던가!’
그는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박 차장님, 오랜만입니다.」
“아, 네. 그렇군요.”
「제가 전화 드린 이유는 짐작하시겠죠?」
짐작하고말고. 박현준은 아까워서 죽을 지경이었다. 십, 이십억이 이렇게 눈앞에서 날아가는가.
“저기, 죄송한데 제가 더는 부탁을 들어드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실은 그 의뢰 관련해서 약간의 문제가 발생하는 바람에 제가 회사를 그만둔 상태입니다. 지금 짐싸서 회사 막 나섰습니다. 안 그래도 혹시나 해서 전화를 드리려 했는데, 이렇게 마침 전화를 주시는군요. 그게…….”
박현준은 자세한 사정을 설명했다. 혹시라도 이 일이 그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는 마음에서다. 물론 진성그룹이 그에게 책임을 묻거나 할 수 있는 근거 따위는 없지만, 그래도 35억을 준 은인 아닌가.
다 듣고 난 상대가 잠시 후 말했다.
「일단 직접 만나죠. 지금 시간 되십니까?」
“아, 네. 물론입니다.”
「그럼 제가 알려드리는 곳으로 오세요. 문자 넣어두겠습니다.」
사직서로 얼굴을 얻어맞았다. 김성일 실장은 분노에 잠겼으나 곧 가라앉혔다. 그리고 침착히 생각했다.
‘뭔가 이상한데.’
정황을 보면 리베이트가 분명한데, 너무 당당하다. 일개 회사원이 저렇게 앞뒤 생각 안 하고, 사표를 지를 수가 있나?
진성제약에서 리베이트가 의심된다며 내부고발이 올라왔을 때, 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서나가 회장이 된 판도를 공격할 수 있는 카드였기 때문이다.
그는 이용무 라인이었다. 지금은 취임 초기라서 놔두고 있지만, 이서나는 조만간 자신을 쳐내고 자기 사람을 이 자리에 앉힐 것이다.
어차피 밀려날 몸, 어떻게 해서든지 이서나를 공격할 빌미를 찾아야 한다. 리베이트는 좋은 구실이었다.
리베이트가 정말 벌어져도 좋고, 아니어도 상관없다. 마지막까지 이용무를 향한 충성심을 보여주는 게 중요했다. 그래야 좌천되더라도 훗날을 기약할 수 있으니. 무력하게 가만히 앉아서 밀려날 수는 없지 않은가.
헌데 이 반응은 전혀 뜻밖이었다.
‘만약 정말 리베이트가 아니라 해도…….’
뭔가 커다란 냄새가 난다.
김성일은 조사를 해볼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난데, 아까 나간 그 박현준 차장이란 친구, 다시 한 번 처음부터 끝까지 싹 뒤져 봐. 그리고 사람 붙여서 감시하고, 뭐 하는지 일일이 다 보고해.”
============================ 작품 후기 ============================
예전이라면...
"엘릭서를 들켜버렷! 재벌들이 날 노려버렷! 내가 위험해져 버렷!"
하지만 지금은...
"하악... 내 이 반짝이는 엘릭서를 들켜버렷!"
안 그래도 자랑? 갑질? 하고 싶어 몸 근질근질거리는 사람이다...
그냥 두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