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66 그 환자 그 교수 =========================================================================
―공부 너무 힘들어요. 빨리 수능이 끝났으면 좋겠어요.
톡 메시지에는 엄살이 잔뜩 섞여 있었다. 차분한 인상과 달리 메시지에는 여느 여고생과 다를 바 없는 애교가 뚝뚝 묻어난다.
한서진은 차 키를 뽑으면서 답톡을 보냈다.
―조금만 참아. 수능 금방이야.
―지금 같아선 영원히 다가오지 않을 거 같아요. 이제 겨우 새학기 시작됐는데.
―금방 여름 방학 오고, 금방 디데이 100 올 거야.
―오빠도 수능 볼 때 그랬어요?
한서진은 잠시 할 말이 없었다. 직장 다니면서 수능 준비한 터라 그런 기억이 별로 없다. 게다가 실제로 수능에 쏟아 부은 시간은 몇 달 되지도 않고.
그는 대답을 회피했다.
―이제 차 내려야 될 거 같아. 공부 열심히 해.
―쳇. 알았어요.
텍스트 메시지일 뿐이지만,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한서진은 피식거리며 차에서 내렸다.
람보르기니 매장. 직원이 안에서 문을 열어주며 그를 직접 안내했다.
“어서 오십시오. 혹시 예약을 하셨습니까?”
“주문 차량 받으러 왔는데요.”
“실례지만 모델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첸테나리오 로드스터요.”
웃고 있던 직원의 얼굴이 살짝 경직되었다.
수퍼카 중의 수퍼카, 람보르기니를 취급하는 매장이다.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온갖 부호의 자제들이 이곳을 찾는다. 그래서 어지간한 부호들을 봐도 눈 하나 꿈쩍 않는다. 그런 상류층 사람들을 상대하는 게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경우가 달랐다.
“알겠습니다. 바로 확인해보겠습니다.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한서진이라고 합니다.”
“바로 확인해드리겠습니다. 잠시만 이곳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람보르기니 첸테나리오 로드스터. 차 가격만 무려 25억에 달하는 꿈의 수퍼카다. 수억대에 해당하는 ‘보급형’ 람보르기니 모델에 비할 바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직원이 정작 놀란 것은 25억이란 가격이 아니었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전 세계에서 20대만 한정 생산된 모델이다.
돈이 있다고 쉽게 가질 수 있는 차가 아니다. 한국은 이 모델을 살 만한 사람이 없다.
그렇지 않아도 그 모델이 국내에 들어온다는 사실에 대체 누가 주문을 했는지 궁금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이렇게 여기 매장을 찾아올 줄이야.
‘한서진, 한서진.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데……?’
주문 내역을 검색하면서 직원은 슬쩍 인터넷에 한서진이란 이름을 쳐다보았다. 검색 결과를 확인한 그의 눈이 뒤집어졌다.
“그 사람이구나!”
“김 대리, 무슨 일이야?”
상사의 말에 직원, 김 대리는 흥분해서 빠르게 말했다.
“첸테나리오 로드스터요, 그거 주문자가 찾아왔습니다.”
“뭐야? 정말?”
“네, 근데 고객명을 듣고 알아보니까 얼마 전에 한국대에서 잭팟 터트렸던 그 사람이에요! 무슨 기술 하나 개발한 거 아랍 왕자가 500억 달러 주고 사갔다던 그 한국대 학생!”
“저, 정말?”
상사는 까무러칠 듯이 놀랐다. 지금 고객 대기실에 있는, 얼핏 보기에는 평범해 보이는 저 청년이 그 사람이라고?
“근데 첸테나리오 지금 어디 있어?”
“우리 매장에는 없고요, 지금 항구에서 내려서 서울 올라오는 중이랍니다. 30분이면 서울 도착한다네요.”
“와, 어떻게 그걸 딱 알고 왔대?”
“본사에서 직접 관리하나 보죠. 아무튼 이럴 때가 아닙니다.”
상사는 얼른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사교적인 미소를 지으며 한서진에게 다가갔다.
“고객님,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저는 매장 관리자 최석훈이라고 합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고객님이 주문하신 차량은 약 30분 뒤면 서울에 도착한다고 합니다. 미리 전화를 주셨으면 저희가 고객님 댁으로 배송을 해드렸을 텐데요.”
“기다릴 수가 없더라고요. 빨리 받아보고 싶어서.”
“아, 그러시군요.”
그 마음, 이해한다는 듯이 최석훈과 김 대리는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 혹은 몇 시간 걸리는 배송을 기다릴 심적 여유가 없어 매장을 직접 방문하는 것, 남자라면 누구나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500억 불이라니.’
웃는 얼굴로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두 사람은 이 상황이 전혀 믿어지지가 않았다.
개인 재산만으로 치면 국내 최고의 부호,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청년 재벌 아닌가. 물려받은 것도 아니고 기술 하나로 대박을 터트렸다. 심지어 한국대 재학생이다.
‘생긴 것도 말끔하고…… 진짜 신은 불공평해.’
상류층 사람들을 주로 상대하는 일이다 보니 그들의 재력에 부러운 마음이 드는 경우는 별로 없다. 아예 안 생긴다기보다는 오래 일을 하다 보니 면역이 된 것이다.
하지만 눈앞의 손님은 달랐다.
다른 상류층 사람들과는 수준이 다른 우월한 부와 명석한 두뇌를 지닌 사람 아닌가. 최석훈은 부러운 마음이 새어나가지 않게 단단히 단속하며, 이것저것 친절하고 상냥한 설명으로 대화를 이끌었다.
“아, 도착했다고 합니다.”
“같이 가고 싶습니다.”
이미 서류 절차는 마쳐놓은 터라, 차를 양도받기만 하면 그만이다. 30분 동안 기다리면서 다른 모델을 통해 주의사항도 충분히 숙지했다.
한서진은 몸이 근질거렸다. 어서 빨리 새 차를 타보고 싶었다.
굳게 닫힌 트레일러가 열리고, 두꺼운 커버가 씌워진 차량이 천천히 내려왔다. 최석훈이 커버를 벗기기 위해 다가갔지만, 한서진이 제지하고 직접 나섰다.
“저 사진 좀 찍어주실래요?”
“예?”
“개봉기 처음부터 정리해서 동생 보여줘야 하거든요.”
“알겠습니다.”
카메라를 받아든 최석훈은 한서진이 커버를 벗기는 모습을 정성스러운 구도로 한 컷 한 컷 찍었다.
마치 SF 영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날렵하고 미래지향적인 디자인에, 한서진은 잠시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았다.
날카롭게 세운 각이 절묘하게 맞물리며 형성된 차 프레임은, 보는 것만으로 마음을 빨아들일 듯이 역동적인 모습이다.
차량 인수를 마치고, 한서진은 운전석에 올라타서 시동을 걸었다. 우렁찬 배기음이 막 잠에서 깨어난 야생의 황소처럼 사방을 뒤흔들었다.
핸들에서 느껴지는 구동감이 실로 만족스럽다. 웃음을 지어 보이던 한서진은 주머니에서 포르쉐 차 키를 꺼내 최석훈에게 내밀었다.
“제가 타고 온 차 좀 부탁합니다.”
“예, 제가 안전하게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이건 사례입니다.”
한서진은 백만 원 권 수표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최석훈은 황송해하며 수표를 받아들었다.
새 차를 몰고, 한서진은 곧바로 시내를 나왔다.
외제차의 거리라는 강남권 시내에서도 첸테나리오는 압도적인 위엄을 자랑했다. 지나가는 사람들과 운전수들이 한 번씩 쳐다본다. 심지어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하는 이도 있었다.
“좋은데.”
한껏 만족스러워 하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미국에 있는 정지원이었다.
「새 차는 인수 받았어?」
“네, 지금 몰고 집으로 가는 중입니다.”
「어때?」
“제가 무슨 대답을 할지 이미 알고 있으시잖아요.”
한서진은 정지원이 볼 수 없음에도 엄지손가락을 척 하고 세워 올렸다.
“최고입니다. 더 할 말이 없네요.”
「만족했다니 다행이다. 역시 남자는 람보르기니지.」
“고맙습니다. 미처 생각도 못했는데.”
작년 이 모델의 구매 주문이 시작되었을 때, 정지원은 미국에서 주문을 넣었다. 사주를 위한 선물이었다.
얼마 전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한서진은 조금 놀랐지만, 그가 보내온 차의 사진을 보고는 그만 마음이 빼앗겨버렸다.
눈을 뗄 수 없이 역동적인, 미래지향적 디자인. 남자라면 갖고 싶어질 수밖에 없는 차였다.
말 그대로 드림카. 꿈을 현실로 가져온 한서진은 그저 만족스럽기만 했다.
「내 선물이다. 잘 타고 다녀.」
“팀장님도 참 부자시네요. 25억이 넘는 차를 이렇게 턱턱 선물해주시다니.”
「네 덕분에 부자 된 거니까.」
“아무튼 고맙습니다. 잘 타고 다니겠습니다.”
전화가 끊어졌고, 한서진은 조금 더 속도를 내보았다. 엑셀을 살짝만 밟았을 뿐인데도 순식간에 차가 튀어나갔다. 그는 얼른 속도를 줄였다.
“이거 진짜 좋은데.”
그는 모두가 쳐다보는 짜릿한 시선을 마음껏 즐겼다.
포르쉐를 타고 다닐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시선이었다. 포르쉐도 멋진 자태의 고가 차량이었지만, 이건 디자인부터가 남달랐다. 그야말로 미래에서 튀어나온 듯한 꿈의 차가 아닌가.
그는 한지혜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해?”
「공강이라 공부하고 있어. 왜?」
“너, 포르쉐 갖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지?”
「어, 설마 주려고?」
“선물 받은 거라 완전히 주진 못하고, 오늘부터 그냥 너 몰고 다녀라. 나 이제 안 탄다.”
「와, 정말? 땡큐땡큐.」
전화기 너머로 뛸 듯이 좋아한다. 동생한테 하나 해줬다는 뿌듯함에 한서진은 그저 피식거렸다.
사거리에서 핸들을 크게 꺾으며, 그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거 진짜 좋네.”
용의 우리.
왕족의 용이 휴식을 취하는 보금자리를 말한다. 우리를 관리하는 책임자는 재상급에 준하는 품제를 갖고 있다. 그만큼 용을 보살피는 일이 중요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용은 왕국의 가장 큰 재산 중의 하나이며, 전략 품목이었으니까.
초룡 타르온.
용 중에서도 으뜸이라는, 초룡이라는 영광된 호칭을 부여받은 용이다. 온몸이 황금빛 비늘로 덮여 있고, 크기 또한 다른 용의 4배가 넘을 만큼 장대하다. 가진 힘의 크기도 다른 평범한 용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당연히 타르온은 왕만이 탈 수 있는, 오롯한 왕의 용이었다.
오늘따라 왕은 하루 종일 타로온 앞에서 떠나질 않았다. 평소와는 다른 모습에 용의 우리를 관리하는 이들도 걱정했다.
“폐하.”
노신하가 들어서며 조심스럽게 왕을 불렀다. 왕은 그의 목소리를 듣고 퍼뜩 돌아보았다.
“어인 일로 타르온을 그렇게 들여다보고 계십니까.”
“별 거 아니오.”
“불충하지만 슬쩍 보았는데, 폐하께서 타르온을 보시는 눈빛이 평소와 너무 달랐습니다. 처음 타르온을 만났을 때 기뻐하시던 그 모습을 전혀 느낄 수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아니오. 짐이 설마 타르온에게 실망하거나 아쉬울 게 있겠소?”
“뭔가 아쉬운 게 있으시군요.”
그 말에 반응하듯이, 눈을 감고 있던 타르온이 슬쩍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돌렸다. 왕은 헛웃음을 지으며 타르온의 뺨 비늘을 쓰다듬었다.
“그런 게 아니란다, 타르온. 진정하거라.”
―크르르…….
“어허, 이 녀석이. 짐이 너에게 아쉬울 게 뭐가 있겠느냐. 대륙 최강의 초룡이 바로 너 아니겠느냐.”
왕이 거듭되게 안심시키자 타르온은 눈을 슬쩍 감으며 다시 잠을 청했다.
“어서 갑시다.”
왕이 앞장을 섰다. 노신하는 조심스럽게 왕의 뒤를 따랐다.
오랫동안 모셔왔기에 왕의 표정만 봐도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지금 왕은 타르온에게 뭔가 아쉬움을 느끼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불현듯 왕이 말했다.
“꿈속 세상 말이오.”
“예, 폐하.”
노신하는 조금 긴장했다. 이제 왕이 이렇게 가라앉아 있는 까닭을 들을 수 있는 것인가.
“아주 멋진 탈것이 있더군.”
“탈것…… 타르온보다 더 멋지단 말입니까?”
“……그렇소.”
왕은 아쉬운 마음을 내보이는 게 조금 창피한 듯 보였지만, 슬쩍 한 마디를 더하는 걸 잊지 않았다.
“진짜 좋은 거요. 경도 보면 이해할 거요.”
“……그렇군요.”
노신하는 왕이 왜 저러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람보르기니는 꿈과 현실, 현대와 마법 대륙을 초월한, 그저 사랑입니다.
작품 설정에 사진을 올려놓았습니다.
노예를 부러워하는 왕의 마음이 납득되실 겁니다.
...근데 이제는 노예라고 하기에는 좀 애매해졌지요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