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165화 (165/609)

00165  그 환자 그 교수  =========================================================================

“요새 통 학교에 안 오셔서 많이 걱정했습니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가 하고.”

입학식 이후로 거의 처음으로 학교에 갔다.

한서진이 학교에 왔다는 말에 조현석이 두 발에 불이 나도록 달려왔다. 어지간히 그를 기다렸던 모양이다.

“개인적으로 일이 좀 많았어. 학교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제가 형님 들으시는 과목 수강 개요 여기 따로 정리했습니다. 필요하실지 모르지만 받아주세요.”

“그래, 고맙다.”

조현석은 깔끔하게 정리된 A4 용지를 내밀었다. 한서진은 아무렇지 않게 그것을 받아들며, 고마움을 나타냈다.

H그룹 일로 학교를 계속 빠진 터라 수업을 어떻게 따라가야 할지 나름 막막했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해결된 것이다. 남들이 보기에는 우습지도 않은 고민이겠지만.

“요새 사업 때문에 많이 바쁘신가 봅니다. 학교도 거의 못 나오시는 거 보면.”

“그런 것도 있고, 개인적으로 일도 좀 있었고.”

“무슨 일입니까?”

“대외비야, 인마.”

한서진은 피식거리며 말을 아꼈다.

그는 자신이 수업을 듣는 교수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인사를 했다. 수업에 못 들어가서 죄송하다는 간단한 인사였는데, 교수들은 그가 놀랄 만치 적극적인 반응을 보여 주었다.

“허허, 사업에 바쁜 사람이니 그럴 수도 있지. 너무 큰 신경을 쓰진 말게나.”

“작년에 박 교수가 도입한 B코스 제도, 개인적으로 자네 같은 우수한 인재를 위해서 널리 퍼져야 한다고 생각하네. 이번에 내 수업에도 전부 B코스 도입했으니, 자네가 학점을 따는데 큰 지장은 없을 거야.”

석박사 수준의 논문을 제출하면 학점을 챙겨주는 제도.

학부 과정을 극도로 간소화한 것이지만, 실력을 잣대로 평가하기에 공정함을 잃었다는 비난을 받을 일도 없었다. 교수들로서도 부담을 덜기 좋은 제도였던 것이다.

“감사합니다.”

한서진은 교수 한 명 한 명을 찾아다니며, 수업에 들어가지 못한 것에 사죄를 표했다. 물론 이번 학기에 수업을 듣지 않는 교수는 따로 찾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런저런 말이 나올 수도 있으니까.

사실 그가 교수들에게 현금을 뿌린다 해서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일반 부잣집 학생이 돈을 주면 청탁이 되지만, 그가 돈을 뿌리면 후원이 된다.

500억 달러의 자산가 아닌가. 학생들은 그런 사람이 왜 학교를 다니나 의아해하는 의견이 많았고, 그런 인물과 같은 시절을 캠퍼스에서 보낸다는 것을 행운이라 여기는 이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편이었다.

“단서를 잡아가고 있네. 조만간 USL과 미스릴 연구에 있어 유의미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거야.”

현진국 교수 프로젝트도 제법 잘 돌아가고 있었다. 수백억의 연구 자금을 투척한 것이 주요했다.

현진국 교수는 한서진이 이 연구를 얼마나 중요시하게 여기는지 인식했고, 늙은 몸에도 열과 성을 바쳐 매달리고 있었다.

“진성전자 말인데, 아무래도 다른 돌파구를 찾고 있는 것 같다.”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왔냐는 타박을 마친 뒤, 박효산 교수가 그렇게 이야기를 꺼냈다.

“다른 돌파구요?”

“SJ인더스트리 때문에 만년 하청업체 신세잖냐. 아무래도 반전을 준비하고 있는 모양이다.”

“교수님께 아직도 매달립니까?”

“아니, 예전에는 정말 연구 제휴 요구로 사람을 귀찮게 했는데 요즘에는 싹 다 없어졌어.”

박효산은 쓴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

“서진이 네가 이 연구소에 있잖아. 아무래도 그거 때문인 듯하다.”

“제가 SJ인더스트리 사주인 건 모를 텐데요.”

“5nm공정 특허권자인 건 알고 있잖아. 아마 그거 때문에 보안 유지를 하는 듯 싶어. 네가 SJ인더스트리와 친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한서진은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지원과 자신의 친분은 알 만한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는 유명한 이야기니까.

게다가 5nm공정 기술과 ADSC를 통해 SJ인더스트리와 공식 비즈니스 관계가 성립되었으니, 진성전자가 반전을 위한 필살기를 준비 중이라면 한국대 반도체 연구소를 경계하는 것도 납득이 갔다.

“근데 반전을 준비한다면, 역시 새로운 반도체를 개발했을까요?”

“그럴지도.”

“슈나우저와 코카 스패니얼을 초월하는 제품을 만들겠다는 걸까요? 자만하는 건 아니지만, 당분간은 불가능할 텐데…….”

슈나우저와 코카 스패니얼은 농담 삼아 오버 테크놀로지가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로 뛰어난 성능을 갖고 있다. 기존 제품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격차가 있다.

진성전자가 단시간 내에 그것을 돌파할 수 있을까? 한서진은 걱정되기보다는 궁금했다.

“메모리 분야라면 어찌어찌 희박한 가능성이 있을지 몰라도…… 비메모리는 확실히 아닐 거야. 그 녀석들, 그 부분은 충분한 기초 기술 축적이 안 되어 있어.”

박효산이 한서진을 괴물 천재로 취급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윈텔 같은 회사도 수십 년 동안 천문학적인 자금과 인재들을 투입해서 축적한 설계 노하우를, 한서진은 일 년도 되지 않아 단숨에 뛰어넘었으니까.

“새로운 반도체라…… 뭔지 궁금하네요.”

“반도체가 아닐 수도 있지. 아무튼 두고 보면 결과가 나올 거다.”

박효산은 별로 걱정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래봐야 SJ인더스트리는 못 건드려.”

“학교는 어때?”

저녁 식사를 하며 한서진이 문득 물었다. 한지혜는 수저를 들다 말고 쿡 웃었다.

“왜 웃어?”

“아니, 참 빨리도 물어본다 싶어서. 내 어메이징한 캠퍼스 라이프를 자랑하려고 입이 근질근질했는데, 개강하고 나서 오빠와 얘기도 거의 못했잖아.”

“H그룹 일 때문에 바빴잖아.”

“알아. 이제 정리는 된 거야?”

“응. 대충.”

한지혜는 한서진에게 들은 것을 통해 그룹이 개판으로 돌아갔다는 사정은 알고 있었다.

더불어 백철중 회장이 뇌출혈로 쓰러졌다가 기적적으로 회생한 것도. 언론에서 대서특필할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였으니 모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회장님이 정신 차리셨으니 끝난 거지. H그룹은 백철중 회장님의 카리스마로 운영되는 기업이니까.”

“소문에 듣자니, 아들이고 딸이고 뭐고 간에 전부 제주도로 쫓아버렸다면서?”

“전부는 아니고, 그룹 해체를 방조한 사람들만. 두 명은 살아남았어. 자동차와 조선.”

“운 좋네.”

“그런 셈이지. 아무튼 쫓겨난 사람들은 아마 그룹에 다시 못 들어올 거야.”

“회장님 돌아가신 다음에나 기대할 수 있겠네.”

“아니, 회장님 돌아가셔도 마찬가지야. 자기 사후에도 불가능하도록 회장님이 철저한 수를 쓰셨거든.”

한지혜는 질렸다는 얼굴로 반문했다.

“피붙이한테 그렇게까지 할 정도면 회장님이 엄청 분노하셨나 보다.”

“그렇지, 뭐.”

그러고 보니 한지혜는 송하나가 재벌가 딸임을 모른다는 게 생각났다. 심지어 이번에는 H그룹 상속녀까지 되었는데.

이걸 말해줘야 하나?

“오빠 차 타고 다니니까 아주 그냥 죽여 줘. 선배고 동기고 뭐고 간에 꼼짝을 못해. 부잣집 아가씨인 줄 아는 거지.”

“이제 부잣집 아가씨 맞잖아.”

“오빠 딸로 태어났어야 했어. 그래야 시집가서도 이 집에서 두고두고 살 수 있을 텐데.”

“그럼 남편 데리고 여기서 살던가. 나야 솔직히 상관없지. 남편이 주눅 드는 게 문제지.”

“그럴까? 데릴사위로 찾아볼까?”

한지혜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밝은 표정을 보니 한서진도 마음이 편했다. 생각보다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는 모양이다. 오랜만에 재입학을 한 거라 힘들어하면 어쩌나 조금 염려했는데.

“공부는?”

“열심히 하고 있어. 근데 나, 정말 변리사 해야 돼?”

“왜? 회사라도 하나 사서 줬으면 좋겠어?”

“솔직히 말해서, 응.”

한지혜는 멋쩍게 웃었다.

“내가 좀 속물이지? 이해해, 평생 없이 살아서 이래.”

“사업 맡기는 건 어렵지 않은데…… 난 기왕이면 네가 특허 관련 사업을 좀 맡아줬으면 좋겠어. 아무래도 내가 특허 설계 위주로 일하고 있잖아.”

“알았어. 무슨 말인지.”

목표 의식을 충전해주자 한지혜는 힘이 나는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진성그룹, 이창용 회장은 여전히 의식불명이었다.

언제 깨어날지 기약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의료진은 심장 질환으로 인한 혈액 공급 문제로 뇌에 손상이 가해졌을 가능성을 짚었다. 그래서 의식을 차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뇌파 상태를 보면 뇌사는 분명 아니지만, 코마에서 깨어날 만큼 긍정적인 상황은 아니다.

진성병원은 최고의 의료진을 갖추어 이창용 회장을 케어했지만, 언제 깨어날지는 신만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고 보면 진성그룹과 H그룹이 참 비교되지 않습니까.”

의료팀 일원인 박 교수가 회진을 마치고 넌지시 말을 꺼냈다.

“뭐가 말입니까?”

“여러 모로 대비되잖아요. 쓰러진 시기도 비슷하고, 그룹 내 다툼이 일어난 것도 비슷하고. 하지만 그 결과는 완전히 달랐죠.”

진성은 경영권 다툼은 있을지언정 그룹 해체 조짐은 없었다. 왕권 후계자들끼리 왕관을 놓고 다툰 것이다. 반면 H그룹은 각 지방을 쪼개서 다스리던 왕족들이 뿔뿔이 찢어져서 독립하려고 했다.

또한 이창용은 여전히 의식불명이지만, 백철중은 정상적으로 회복되었다. 그 차이도 무척 컸다.

이서나가 차기 회장으로 선임되었지만, 그녀의 경영능력은 이창용에 비해 꾸준히 비교될 수밖에 없다. 그녀를 선택한 주주들조차도 그녀가 백철중의 경영 능력을 따라가지 못한다며 비관적이었다.

“기적은 그쪽 집안에만 찾아오고, 불공평하군요.”

“기적이라니요?”

“그쪽 병원 통해서 이야기 들었는데, 백철중 회장님 사실 영구적인 뇌 손상 후유증이 남았답니다. 그래서 심각한 지적 장애를 얻었고요.”

“하지만 지금은 멀쩡하지 않나요?”

“그러니까 기적이라는 거죠. 그쪽 의료진 측도 크게 놀라워하고 있습니다. 진짜로 기적이 일어났다고요.”

다른 이도 아니고 H그룹 총수다.

병원에서 얼마나 철두철미하게 검사를 했을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구 장애 진단, 그리고 회복 불가 판정을 내렸다면 그만큼 심각한 상태였다는 뜻이다.

그것을 하루아침에 떨치고 일어났으니, 세간이 백철중을 보는 시선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기존 주주들은 예전보다 더욱 굳건하게 백철중을 신뢰하고 있었다.

“소문에는 십 년은 더 젊어지셨다는 말까지 있더군요.”

“젊어져요?”

“주름도 좀 줄어든 것 같고, 몸도 무척 건강해졌다고 합니다. 쉬쉬하면서도 다들 불로초라도 먹은 거 아니냐는 농담이 나돌고 있습니다.”

“불로초는 모르겠고, 기적이 일어난 건 맞죠. 그 연세에 영구 뇌 손상을 극복하다니…… 참 그분은 신이 사랑하는 인간인가 봅니다.”

최 교수가 농담처럼 대화를 마무리했다.

“김자홍 교수님, 두 시간 후에 이서나 회장님이 병문안을 오실 것 같습니다. 브리핑 좀 준비하셔야겠는데요.”

박 교수가 넌지시 말을 꺼내자 차트를 뒤적이던 김자홍 교수는 끄덕이며 돌아봤다.

“알겠습니다. 준비해놓죠.”

“그럼 부탁합니다.”

박 교수와 최 교수가 나가고, 김자홍은 다시금 차트 확인에 빠져 들었다.

문득 조금 전에 셋이서 나눈 대화가 귓가를 맴돌았다.

‘기적적인 회복…….’

절대 회복될 수 없는 병세. 기적적인 치유. 그것도 단기간.

그는 이미 그와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다. 벌써 해가 두 번이나 바뀌었다.

시한부 선고를 받을 때 절망하던 한 청년의 주눅 든 얼굴이 불현듯 생각났다. 그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기적이라…….”

============================ 작품 후기 ============================

한 교수가 그대를 살앙합니다~♬

그 교수는 당신을 기다립니다~♪

ps :

저는 프리미엄으로 전환하고 단 하루도 연재를 빼먹은 적이 없습니다. 최대한 속도를 내기 위해 일일 2연재를 지향했고, 그게 힘들면 하루에 1편이라도 반드시 올렸습니다.

연재 시간은 지금까지처럼 특별히 정하지 않을 겁니다.

연재 시간 정해두고 쓰면 강박감만 더 커지고, 컨디션만 해칩니다.

또한 아예 휴식을 하고 비축분을 만드는 것도 하지 않을 겁니다.

전 라이브 연재 스타일이고, 이렇게 몇 년을 써왔습니다. 비축분 연재? 해봤자 의미없습니다. 비축분 금방 다시 없어집니다. 아마 하루도 안 걸릴 겁니다.

저건 저에게 맞지 않는 옷입니다.

연재 일정을 기다리기 힘드신 분은 그냥 매일 밤 11시 59분에 한 번 확인하시길 권해드립니다.;;;

그날 편수는 적어도 그 시간 전에는 올라와있을 겁니다...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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