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164화 (164/609)

00164  기적이 아니다  =========================================================================

H그룹은 성진그룹을 고발했다.

오수현이 그룹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저지른 불법 개입을 물고 늘어진 것이다.

H그룹이 재계 2위라지만 성진그룹도 순순히 당하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두 그룹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고, 남은 것은 지루한 법정공방과 끊임없는 사업적 공방전뿐이었다.

20여 년 전, 오수현과 백철중의 이혼으로 나빠졌던 이후로 두 그룹은 다시 원수지간이 된 것이다.

“내가 너희들을 왜 불렀는지 알겠지?”

백호진과 백정진은 마른침을 삼켰다. 부친 몰래 서로 눈빛 교환을 할 틈도 없었다. 그만큼 지금 부친이 뿜어내는 압도감은 엄청났다.

평생 부친이 이렇게 분노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옛날 송하나가 자기보다 나이 많은 조카들에게 놀림 받고 울며 돌아왔을 때도 저러지는 않았다.

“죄송합니다.”

“뭘 잘못했느냐?”

백철중이 차갑게 물었다. 다행히 두 형제는 다른 친척들처럼 어리석지는 않았다. 백철중이 무엇을 추궁하는지 포인트를 분명히 짚었다.

“맡고 있는 계열사를 지키는 것에만 급급한 나머지 그룹의 해체를 방관했습니다.”

“그래도 뭘 잘못했는지는 아는구나. 다른 녀석들은 말귀를 못 알아듣던데 말이다.”

두 형제는 다시금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 자리는 심판대였다. 사형선고를 받느냐, 마느냐가 부친의 결정에 달려 있었다.

이미 많은 형제, 친척들이 재벌 일족으로서 사실상 사형 판결을 받았다. 제주도로 쫓겨 내려간 것이다.

그들은 현재 백철중의 사유지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일반인은 상상도 못할 고급 주택 등의 시설이 갖춰져 있지만, 서울에서 화려한 재벌의 생활을 누리던 이들에게는 유배지나 다름없는 생활이었다. 더 이상 재벌로서 살 수 없다는 사형 집행이나 마찬가지였다.

해외가 아닌 제주도로 내려 보낸 것 역시 유배의 의미였다. 시야 안에 가둬두고 감시하겠다는 것이다.

‘그건 안 돼.’

백호진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절대로 그 꼴이 될 순 없었다.

“그동안은 너희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려 했다. 자기 딸만한 여자를 새어머니랍시고 데려왔으니, 얼마나 복장이 터질지 그 심정 이해하려 했다. 그래서 일부러 가급적 얽히지 않게 중재를 해왔다.”

화제가 바뀌자 두 형제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룹 해체 사태의 책임을 논하지 않는 것 같아 다행스럽기는 한데, 여기서 갑자기 송지현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몰랐다.

“하나야, 엄마 모시고 나오너라.”

위층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송하나가 사라졌다. 잠시 후 그녀는 송지현을 데리고 내려왔다.

두 모녀를 보는 형제의 눈빛이 흔들렸다. 백철중은 잠시 여유를 준 뒤 차갑게 말했다.

“사죄하거라.”

“……아버지.”

“너희가 원망해야 하는 것은 하나와 하나 엄마가 아니라 바로 나다. 이 둘은 아무 잘못도 없고, 너희 원망을 받아야 할 죄인도 아니다. 그러니 사죄하거라.”

“…….”

백정진은 입안에 가득 차오르는 모멸감에 잠시 머뭇거렸다. 머리로는 사과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는데, 몸이 그에 반응하지 않고 있었다.

백호진의 행동이 조금 더 빨랐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형?”

“무조건 잘못했습니다. 앞으로는 절대 언행을 조심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새어머니.”

“새어머니라 부를 필요는 없다.”

백철중이 분명히 선을 그었다. 송지현은 눈시울이 조금 붉어진 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백정진도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잘못했습니다.”

“입에 발린 사과지만, 됐어요. 내가 두 분 같았어도 나 같은 여자는 싫었을 테니까.”

쌀쌀맞은 대답은 두 모녀와 형제 사이에 놓인 강의 깊이를 분명히 알려주는 온도였다.

백철중 역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과나, 감동에 눈물 젖는 화해 따위를 바란 게 아니었다.

서열 정리.

지금 형제들에게 사죄를 시키는 것은 가족 내의 서열을 분명하게 바로잡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요식행위인 것이다.

“제주도로 내려 보낸 다른 녀석들에게는 사과조차 시키지 않았다. 무슨 의미인지 알겠느냐?”

“……예, 알고 있습니다.”

백호진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이미 부친이 서열을 바로잡은 이상 항거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나중에야 몰라도, 지금은 그저 납작 엎드려야만 한다.

그룹 내에서 쫓아낸 이들에게 서열 정리를 시킬 이유는 없다. 방금 백철중의 한 마디로 확실해졌다. 그들이 다시 그룹으로 돌아오는 일은 없다는 것을.

“그 녀석들, 평생 먹고 사는 것은 문제없게 해줄 것이다. 그래도 내 피붙이들이니. 하지만 그룹에 발을 붙이는 것은 허락할 수 없다. 내가 죽은 이후에라도.”

“……명심하겠습니다.”

“상벌을 분명하게 하는 것도 오너의 의무다. 너희 역시 이번 사태에 책임이 있다. 그러나…….”

백철중의 말이 잠시 끊어지자 두 형제는 속이 타들어갔다. 무슨 말이 나올지 대충 짐작하면서도, 살이 떨리는 듯한 긴장감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룹에서 축출될 정도는 아니다.”

“가, 감사합니다. 아버지.”

“지금까지처럼 호진이는 자동차를, 정진이는 조선을 맡아라. 하지만 유언장은 고칠 것이다. 너희 둘에게 주기로 한 자동차와 조선의 지분, 하나에게 주는 걸로.”

“아버지!”

백정진은 놀라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유언장을 고친다? 경영은 지금까지처럼 맡되, 지분은 물려주지 않겠다니? 그리고 송하나에게 주겠다니?

“고개를 내려라. 너도 기어이 제주도로 내려가고 싶은 거냐?”

살벌하기 그지없는 눈빛. 백정진은 이를 악물며 결국 고개를 숙였다.

이 한 마디로 부친의 뜻이 무엇인지 명백해졌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백철중은 그 자리에서 전속 변호사를 불러 유언장을 개정하고 공증까지 마쳤다.

개정된 유언장의 내용은 간단했다.

부동산과 빌딩, 현금 등 예금 채권, 귀금속과 미술품 등은 기존처럼 모든 자녀들에게 골고루 나눠준다. 단, 제주도에 내려가 있는 자녀들은 백철중의 허락 없이 제주도를 벗어날 수 없다.

만약 허락 없이, 혹은 긴급하고 합당한 이유 없이 제주도를 벗어날 경우 모든 상속 재산을 제외한다는 내용이 추가된 것이다.

“유류분 청구든 뭐든 마음대로 해보라고 해라.”

백철중이 싸늘하게 덧붙인 말에 백호진 형제는 그저 고개를 떨어뜨리기만 했다.

결정적인 조항은 백철중이 현재 보유한 모든 계열사의 지분을 송하나에게 상속한다는 내용이었다.

본래 백호진과 백정진에게 물려주기로 한 자동차, 조선의 지분까지 당연히 포함된 것이다. 말 그대로 모든 보유 지분이었으니까.

이에 백호진과 백정진은 크게 반발했지만, 감히 그런 마음을 드러낼 순 없었다.

부친의 뜻은 확고했다.

“그룹은 하나에게 줄 것이다. 어떤 이견도 받지 않는다.”

이제까지 부친은 송하나에게 어떤 회사 지분도 물려줄 마음이 없었다. 그 대신 충분한 현금과 부동산을 상속 재산으로 정했고, 사실혼 관계인 송지현에게는 백화점 사업체를 미리 증여했다.

다른 자녀들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한 배려였다. 그러나 이번 사태로 그것을 모두 뒤집어버린 것이다.

감히 이견을 제시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제주도로 귀양을 가야 할 판이니.

“깔끔하게 정리했네.”

총체적인 그룹 감사와 후속 조치까지 마치고, 백철중은 한서진을 저택으로 불러 술자리를 가졌다.

한서진은 백철중의 조치에 만족했다.

“그럼 이제 하나가 그룹 회장이 되는 건가요?”

“그렇지. 원래는 경영에 일절 참여시키지 않으려 했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으니.”

백철중 회장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

“사실 그동안은 하나에게 경영권을 주고 싶어도 줄 수가 없었네. 아무래도 입장 차이가 있었으니까.”

“이해합니다.”

만약 백철중의 자녀들이 그룹을 잡고 있는 와중에 경영에 참가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온갖 합공에 시달리다가 끝내 피폐해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그룹 경영진에 오너 일가는 백호진과 백정진 둘만 남았고, 그마저도 월급 사장이다.

백철중의 모든 지분을 물려받게 되면 아무도 송하나를 건드릴 수 없다. 벌써부터 임원들은 송지현에게 줄을 서기 위해 안달이라고 했다.

“오수현, 그 여자와 그리 된 것은 모두 내 과오이니, 가급적 재산만이라도 공평하게 분배하고 싶었지만…… 그게 뜻대로 되지 않는군.”

“욕심이 끝이 없는데 공평이란 게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알고 있네. 알지만…….”

백철중은 못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진지하게 말했다.

“내가 왜 하나에게 회장을 물려줄 결심을 했는지 아나?”

“그야, 이제 그룹에는 백호진 사장과 백정진 사장만이 남아 있으니…….”

“비단 그것 때문만은 아닐세.”

“그럼요?”

“바로 자네 때문이지.”

한서진은 입을 다물었고, 백철중은 깊은 눈빛으로 뚫어져라 그를 주시했다.

“자네가 하나를 아끼기 때문일세.”

“회장님. 그건…….”

“아닌가?”

“…….”

아니라고 하기에는 너무 찔린다. 그렇다고 순순히 긍정하기에는 뭔가 그의 페이스에 휘말리는 느낌이다. 그 말, 킵해뒀다가 내년에 해주면 안 되나? 걘 아직 미성년자인데…….

“아무튼 하나를 그룹 회장으로 삼는 게 그룹 발전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하네. 자네가 하나를 아끼는 만큼, 그룹의 발전에도 도움이 될 테니.”

“하나는 친한 동생이니 많이 도와줄 겁니다. 하지만 그룹은…….”

“아아, 우리 너무 뒤의 미래는 아직 발설하지 마세나.”

“너무 뒤의 미래요?”

“듣고 싶나? 자네와 하나가 결혼하면 그룹은 결국…….”

“회, 회장님! 하나 내려옵니다!”

한서진은 다급히 그의 말을 잘랐고, 백철중은 정말로 송하나가 위층에서 내려오는 걸 확인하고 아쉽다는 듯 말문을 닫았다.

“아무튼 아비로서, 그리고 재벌 총수로서 내린 합리적인 결정일세. 그러니 주주들도 반대하지 않을 거야. 제주도에 내려 보낸 녀석들이야 입에 거품 물겠지만, 지들이 자초한 일이니 어쩔 수 없지.”

“그럼 평생 제주도에 묶어두실 겁니까?”

“시간이 지나면 거주 제한은 풀어줄 걸세. 하지만 그룹에 다시 들이지 않겠다는 내 뜻은 변함이 없네. 현금과 부동산, 그게 그 녀석들이 가질 수 있는 상속 재산의 전부일세.”

백철중의 표정은 단단했다. 절대로 뜻을 바꿀 마음이 없어 보였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지. 죄에 걸맞는 벌을 주는 것도 오너의 의무이자 책임일세.”

그때 송하나가 다가와서 자연스럽게 한서진의 옆에 앉았다.

“무슨 이야기 하고 있었어요?”

“네가 성년이 되면 알려주마. 엄마는 이미 알고 있다만.”

“네?”

“인석아, 아직은 일러. 내년에 말해주마.”

송하나는 자기가 그룹 회장으로 내정되었다는 것을 아직 알지 못한다. 백철중은 임원들에게도 분명한 함구를 지시했다. 그들은 송하나에게 유언장 내용이 알려지지 않도록 조심할 것이다.

“자네한테는 정말 고맙네. 자네가 아니었으면 어찌 되었을지…….”

“전 그냥 중간에 조금 개입했을 뿐입니다. 회장님이 깨어나셔서 모든 걸 수습하신 겁니다.”

“그렇긴 해도, 그게 참…….”

송하나 앞이라 엘릭서 이야기를 할 수 없는 백철중은 아쉽다는 듯 웃기만 했다.

“성진그룹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가만히 둘 순 없지. 하지만 성진그룹이 우리 그룹에 비해 작다 해도 엄연한 재벌 그룹일세. 사자라 해도 들소의 숨통을 쉽게 끊을 순 없네.”

“…….”

“끝없는 공방전과 소송이 계속되겠지. 십 년도 더 넘게 걸릴 거야. 하지만 난.”

백철중은 차갑게 선언했다.

“절대 중지할 생각이 없네. 끝까지 갈 걸세.”

============================ 작품 후기 ============================

요렇게 또 하나의 사건을 정리했습니다.

덤으로 경영권에서 쩌리였던 하나 쏭의까지 후계구도를 공고히 다져놨습니다.

실탄은 정리정돈을 잘하는 노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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