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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163화 (163/609)

00163  기적이 아니다  =========================================================================

거대한 황금빛 물결이 꿈틀거린다. 황금가루를 묻힌 붓이 창공에 큰 획을 긋듯이 밝은 금빛 섬광이 자취를 남겼다.

그것은 하늘을 누비는 황금빛 용이었다.

용의 머리 위에는 황금 정복을 두른 왕이 타고 있었다. 왕은 고삐를 쥔 채 서두르지 않고 용을 인도했다.

왕이 탄 용의 뒤로, 두 마리의 붉은 용이 뒤따랐다. 근위기사 둘이 부지런히 왕의 뒤를 쫓았다.

어느 순간 황금빛 용이 멈췄다.

“여기인가.”

눈에 익숙한 풍경이 까마득한 발아래 펼쳐졌다.

끝도 없이 펼쳐진 거친 산악지대. 그 뒤를 덮은 푸른 산림. 십자 방향으로 협곡을 꿰뚫듯이 유유히 흘러가는 거대한 강.

바로 어제처럼 익숙한 풍경에 왕은 한참동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정지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폐하.”

근위기사 한 명이 조심스럽게 왕을 불렀다.

“아니다. 마수 클로비는 어디 있지?”

“이곳에서 동쪽입니다. 그리 멀지 않습니다. 지금은 얌전히 낮잠을 자고 있는 중입니다.”

“알겠다, 가자.”

왕은 고삐를 당겨, 용의 머리를 동쪽으로 틀었다.

불현듯 십자로 얽힌 강 물줄기가 보인다. 폭포 아래에서 부서지는 하얀 물방울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변함없이 여전히 그대로였다.

왕비와 처음 이곳을 여행했던 그때와.

H그룹의 구조는 크게 H생명을 지주회사로 한 수많은 계열사가 순환출자 구조로 묶여 있고, 그 외에 별도의 계열사가 독자적으로 운영된다. H그룹 계열사이기는 해도 다른 계열사처럼 강한 결속력으로 묶인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H반도체, H자동차, H조선 등이 이에 속한다. H그룹이란 이름을 쓰고 있지만, 순환 출자의 고리에서 반쯤 비껴나 있는 계열사들이다.

그중 H반도체는 지금은 순환 출자의 고리에서 완전히 벗어나다시피 해서, 대주주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다른 이름으로 갈아탈 수도 있는 위치였다.

아무튼 그런 구조를 가진 그룹의 지주회사, H생명의 주주총회가 열렸다.

안건 내용은 바로 현 회장인 백철중을 해임하고, 장남인 백형진을 선임한다는 것이었다.

회장으로 선임되면 백형진은 자동차와 조선 등 일부 계열사를 제외한, 다른 모든 계열사를 손가락 하나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총수가 된다.

주주총회에는 이서나와 이용무도 참석했다. 각자 자신이 보유한, 혹은 대리권을 행사할 수 있는 H생명 주주로서의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서였다.

대리인을 보내도 되는 일이지만 두 남매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직접 참석했다.

그 이유는 바로…….

“참 공교롭게도 재계 1, 2위 그룹이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길을 가는구나. 그렇지 않니?”

나란히 앉은 이서나가 자연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용무의 눈빛이 일순 흔들렸지만, 그는 덤덤하게 말을 받았다.

“첫째가 그룹을 물려받는 것까지 비슷하네, 누님.”

“결과까지 완전히 같진 않네. 껍데기뿐인 그룹을 물려받는 셈이니까.”

“형진이 형이 들으면 서운하겠어. 그래도 껍데기라고 할 정도는 아닌데.”

H그룹은 H자동차와 H조선, 그 둘이서 그룹 전체 매출의 60%를 차지하고 있다. 단일 계열사로는 1, 2위를 다투는 대기업인 것이다.

백형진이 과연 그 둘을 장악할 수 있을까? 누구도 가능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백호진과 백정진의 경영 능력과 야심은 백형진에 비할 바가 아니었으니. 심지어 순환 출자의 고리에서도 반쯤 벗어나 있지 않은가.

다른 계열사만 추려도 매출의 40% 가까이 된다고 하지만, 재계 2위 서열이라는 규모에 비하면 한없이 초라하다.

빈껍데기라는 이용무의 표현이 다소 과장되었을지언정, 크게 기뻐하며 받아들 성적표는 아닌 것이다.

“적어도 앞으로는 우리 진성이 독주할 수 있겠는걸.”

“호시탐탐 뒤를 노리던 맹수가 오늘로서 사라지니까.”

이용무는 덤덤히 말을 받았다. 이서나와 여전히 적대관계지만, 진성그룹의 일원으로서 오늘 이 자리가 기분 좋은 것은 어쩔 수 없다.

진성은 재계 1위지만, H그룹과 압도적인 차이로 벌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진성이 휘청하고 H그룹이 도약하면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는 차이였다.

그러나 이제 그런 구도는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오늘 이 주주총회를 통해 H그룹은 이제 감히 진성을 쳐다보지도 못할 초라한 그룹으로 전락할 테니.

“참 여자의 한이라는 게 무서워. 그렇지 않니?”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립니까?”

“어머, 찔리는 게 있나 봐? 우리 이용무 사장님.”

이서나는 눈을 마주치고 생긋 웃었다. 승자의 여유로운 웃음, 이용무는 속이 뒤틀릴 것 같았지만 꾹 눌러 참았다.

그렇게 주주총회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갑자기 한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웅성거림은 곧 경악으로 변해, 이서나 남매가 있는 곳까지 들불처럼 번졌다. 두 남매는 무슨 일인가 하고 고개를 들다가 흠칫 놀라고 말았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백철중 회장님?”

놀랍게도 백철중 회장이 들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휠체어를 탄 것도 아닌, 자기 발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열 명이 넘는 수행원들이 그림자처럼 뒤를 따르는 모습은, 카리스마 넘치던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총회 개시 전에 발언을 요청합니다.”

말이 요청이지 일방적인 통보였다. 백철중은 진행자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단상으로 올라갔다.

착각일까. 정정한 것을 넘어서 예전보다 더욱 젊어진 듯한 느낌마저 든다. 피부는 혈색이 넘쳤고 주름도 옅어진 듯했다.

“나, 우리 H그룹 백철중 회장입니다.”

장내는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다들 숨소리마저 죽인 채, 백철중이 뿜어내는 기세에 그저 압도당하기만 했다.

“최근 간단한 수술을 받은 터라 병실에 좀 누워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틈을 타서 많은 이들이 대리권 행사랍시고 내 의사표현을 날조해서 이런저런 일들을 저질렀더군요. 오늘 이 총회도 그런 식으로 벌어진 거고 말입니다.”

“…….”

“이미 열린 주총을 무효할 순 없지요. 그러나 내 의결권을 대리한다는 것, 그건 모두 무효입니다. 이 점은 분명히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백철중은 그 말만을 하고 단상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총회를 빠져 나갔다. 총회 결과 따위는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이서나는 반사적으로 저쪽에 앉은 오수현을 살폈다.

그녀는 큰 충격에 빠졌는지 굳어버린 채로 미동조차 하지 못했다. 백철중의 이런 등장은 그녀에게도 뜻밖이었던 것이다.

본래라면 껍데기를 쥔 광대들을 위한 축제가 되어야 할 자리. 그러나 샴페인은 모조리 바닥에 쏟아진 뒤였다.

당연한 일이지만, 안건 의결은 형편없는 결과로 부결되었다.

백철중은 단숨에 일선으로 복귀했다.

그는 비상구조조정실이라는 임시 본부를 만들고, 그 수장에 자신의 사람을 앉혔다. 그리고 그에게 그룹 전체를 감사할 수 있는 사정의 권한을 주었다.

어검을 받아든 금부도사는 거침없이 그룹 내를 휘저었다. 백철중이 쓰러져 있던 동안 벌어진 갖가지 부정과 불법 행위를 뒤지고 다녔다.

의사무능력자였던 백철중의 권한을 법원의 허락 없이 대리행사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흠결로 범벅될 수밖에 없다.

만약 백철중이 끝내 의식을 차리지 못했으면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조용히 사장될 흠결이었다. 그러나 백철중이 정신을 차린 지금, 그것은 대숙청의 증거물이 되었다.

“이 결재서류에 상무님의 승인이 들어가 있더군요.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그, 그것이…….”

“이걸 승인할 수 있는 건 회장님뿐입니다. 백형진 사장한테 적법한 권한이 있다고 보십니까?”

인정 없이 휘둘러지는 사정의 칼춤. 백철중이 쓰러졌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비상이 걸렸다.

그룹 전체가 숨을 죽인 채 비상구조조정실만을 쳐다보며, 조금이라도 칼날이 비껴가기를 기도했다. 백철중의 형제, 그리고 자녀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혈족이기에 오히려 더 사정없는 철퇴를 맞아야 했다. 그들이 이 사태의 주범이기 때문이다.

“사장님, 지금이라도 회장님께 모든 것을 털어놓고 용서를 구하시지요. 이미 회장님은 꼬리 몇 개 자르고 넘어가는 수준으로 무마하실 마음이 없으십니다. 자기 피붙이라 해도 이 사태에 관여돼있다면 가차 없이 쳐내실 겁니다.”

장남, 백형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측근의 충정 어린 조언이 아니었다.

구조조정실장이라는 새파란 애송이가 자신을 찾아와서 내던진 통보였다.

아버지의 신임과 막강한 사정의 권한을 떠나, 장남인 자신에게 이런 태도를 보일 수 있다는 것은 명백했다. 자신은 그룹 후계자에서 영영 밀려난 것이다.

일말의 승계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이 녀석이 이런 건방진 태도를 보이지는 않을 테니까.

어검을 쥐었다 해도, 다음 왕좌를 차지할지도 모르는 왕자를 함부로 대하는 신하는 없다.

“늦을수록 더 회장님이 진노하십니다. 성진그룹과 오수현 사장에 얽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증거를 바치십시오. 그리고 용서를 구하십시오.”

“아버지가…… 그렇게 분노하고 계시나?”

“회장님은 쓰러져 있던 시절에 보고 들은 모든 것을 기억하고 계십니다.”

“…….”

“더 늦어진다면 사장님을 형사 조치할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회장님의 뜻은 강경합니다.”

결국 백형진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부친을 찾았다.

큰 결심을 하고 왔지만 부친은 그에게 눈길조차 제대로 주지 않았다. 그는 다짜고짜 부친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저쪽 위층에서 내려다보는 송하나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모멸감이 들 겨를도 없었다. 지금은 아버지의 마음을 돌리는 게 중요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회복되지 않을 거라 여겨 제가 어리석은 짓을 범했습니다.”

“무엇이 어리석다는 거냐? 네 입으로 한 번 말해 봐라.”

“그룹 총수를 차지하려 했던 것…….”

“아니다.”

“하, 하나와 새어머니를 공격했던 것…….”

“그것도 아니다.”

백철중은 냉정한 눈으로 장남의 등을 노려보았다.

“내가 회복 가망이 없으니 장남인 네가 그룹을 이끌겠다는 것은 틀린 결정이 아니다. 하나와 지현이한테 무례를 저질렀지만…… 그것은 엄밀히 말해 네 잘못이라기보다는 내 원죄고, 책임이다.”

송지현 모녀를 향한 자녀들의 증오는 자신과 오수현의 원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송지현과 송하나는 그들을 미워할 수 있어도, 자신은 그들을 비난할 수 없다.

“네가, 그리고 네 형제들이 저지른 진짜 잘못은 그룹의 위기를 극복하려 하지 않고, 우리 H그룹을 산산조각내서 성진그룹에 갖다 바치려 한 어리석음이다.”

“…….”

“알겠느냐? 네 진짜 죄가 뭔지.”

백형진은 고개를 숙인 채 눈을 질끈 감았다.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조금의 자비도, 따뜻함도 없었다. 경영하면서 큰 실수를 저질러도 관대하게 봐주려 했던 분인데, 그런 마음이 조금도 와 닿지 않는다.

절절하게 느껴졌다. 지금 부친의 마음이 완전히 돌아섰다는 것을.

“성진그룹의 불법행위를 고발할 것이다. 시간과 비용이 얼마가 됐든 끝을 볼 것이다. 넌 네 어미가 개입한 모든 증거를 내놓은 뒤, 바로 제주도로 내려가거라.”

제주도. 그 말의 뜻을 깨달은 백형진은 창백해졌다.

백세완처럼 그룹에서 완전히 내치겠다는 의미다. 재벌 일족으로서 사실상의 사형 선고나 다름없다.

“아버지!”

“먼저 내려가서 기다리거라. 네 삼촌과 고모, 그리고 다른 형제들도 조사해서 그만한 잘못이 있다면 따라 내려 보낼 테니.”

백철중의 눈빛은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없을 만큼 단단했다.

“이만 꺼지거라. 꼴도 보기 싫으니.”

============================ 작품 후기 ============================

"형님.. 그래도 여기 제주도도 나름 살만 해요.. 흐끄그그그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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