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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162화 (162/609)

00162  기적이 아니다  =========================================================================

한서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백철중이 지금 무엇을 묻는지 깨달았다. 그가 엘릭서의 존재를 인식한 것이다.

바라지 않았던 결과다. 엘릭서는 아직 세상에 공개해서는 안 되는데.

‘어떡하지?’

대답을 바라는 백철중의 강한 눈빛을 보며, 한서진은 속으로 깊이 갈등했다. 부정하고, 시치미를 떼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진정한 해답일까. 이미 상대는 분명히 알고 있는데.

한참의 번뇌를 마친 한서진은 입을 열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모든 게 기억났네.”

백철중의 눈빛은 심해처럼 깊고, 칙칙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수도 없이 섞인 채 담겨 있었다.

“자네가 준 약을 마시고 난 뒤, 한꺼번에 의식이 소급해 돌아갔네. 수술 직후 처음 의식을 되찾은 순간부터 그때까지의 모든 게, 또렷이 의식 표면으로 떠올랐지.”

“…….”

“원래부터 의식이 있던 것은 아니었네. 혼탁하고, 안개가 끼어 있는 것만 같았지. 의사가 나더러 바보가 되었다고 했던가? 그 말이 딱 맞네. 바보가 된다면 아마 이런 상태일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

“회장님.”

“신기하게도 약을 마시자 그 안개가 일시에 걷혔네. 내가 지금까지 보고 들은 게 한꺼번에 되살아났던 게지.”

수술을 마치고 깨어났을 때부터 백철중의 의식은 단단히 잠겨 있었다. 생각하는 것은 금지되었고, 보고 듣는 것조차 그저 의식의 심층에 쌓아두기만 할 뿐이었다.

엘릭서라는 해제조건을 기반으로, 잠겨 있던 백철중의 의식은 이전으로 소급하여 한꺼번에 개방되었던 것이다. 줄곧 보고 들은 기억들이 일순간 되살아나며,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미소를 지었다.

“참 신비한 경험이었어. 평생 이런 경험을 겪을 수 있는 이는 없겠지.”

한서진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는 가슴을 가라앉히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엘릭서라는 약입니다.”

“엘릭서……. 참 뭔가 여운을 남기는 이름이군. 대체 어떤 약인가?”

“이 세상에서 그 존재를 아는 건 저 혼자입니다. 저 말고 누구도 그 존재를 알지 못합니다. 이제 회장님까지 해서 두 명이 되었군요.”

“비밀을 공유하는 영광을 나눠 가진 건가.”

“이제 회장님의 결정을 듣고 싶습니다.”

“내 결정?”

갑자기 백철중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온갖 고민을 벗어던진 듯이 시원스럽고 깔끔한 웃음소리, 한서진은 왠지 마음이 놓이는 듯했다.

“이 사람아. 난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자네 편이었네. 자네의 큰 비밀을 알았다고 내가 어떻게 할 것 같았나? 이 백철중이가 그렇게 후안무치한 사람 같아 보이나?”

“그건.”

“걱정 말게. 이 약의 존재가 알려지면 얼마나 시끄러워질지 나도 잘 이해하고 있으니. 자네가 허락지 않는 한, 난 결코 이 일을 발설치 않을 걸세. 당연히 여기에는 어떤 조건도 걸지 않을 걸세.”

백철중은 온화한 미소로 말을 덧붙였다.

“자네는 내 은인 아닌가?”

“…….”

“그저 감사할 뿐일세. 정말 고맙네.”

그를 위해 비밀을 지킨다. 여기에는 어떤 조건을 첨부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짐승이 아닌 사람이라면.

백철중 회장의 깊은 진심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한서진은 미약하게 남아 있던 불안감을 완전히 덜어낼 수 있었다.

“전에 회장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지요. 성공하려면 사람을 믿어선 안 된다, 하지만 정말 성공하려면 믿어야 한다, 라고요.”

“그랬던 기억이 나는군.”

“회장님을 믿기를 잘한 것 같습니다.”

“믿어줘서 그저 고마울 뿐이네. 평생 자네를 내 생명의 은인으로 여기겠네.”

공기가 변했다. 미약하게 당겨져 있던 긴장감이 완전히 가라앉은 것이다.

갑자기 백철중의 표정에 짓궂은 감정이 떠올랐다.

“그런데 그거 사실인가?”

“예?”

“우리 하나가 좋다고 한 거 말일세. 그래서 하나와 나를 도와주는 거라고.”

“…….”

“아직 미성년자이긴 하지만 부모가 허락하면 결혼할 수 있다네. 아, 생일이 아직 안 지나서 불가능한가. 그럼 약혼만이라도 먼저 하는 게 어떤가?”

법률적 효력이 있는 약혼 역시 혼인과 마찬가지로 만 18세이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백철중은 즐거운 고민에 잠겼다.

“어차피 약혼에 법적 효력을 따질 것도 아니고, 그냥 대외적인 공표와 두 사람의 미래를 약속하는 것뿐이니 연령과는 크게 상관없지. 어떤가? 약혼이라도 먼저 해두는 게?”

“회장님. 그런 게 아니라…….”

“아니라니, 그럼 거짓말이었단 말인가? 우리 하나가 좋다던 그 말이?”

“아니, 그게 아니고요.”

“아니라면 좋다는 거 아닌가?”

“회, 회장님.”

“좋아하나, 안 좋아하나? 하나만 고르게.”

한서진은 한참 동안 진땀을 뺐다.

늦은 새벽이지만, 회장님의 호출을 받은 정상용은 급히 병실로 들어왔다. 그는 이미 병원에서 대기하고 있던 중이었다.

정상용을 보자 백철중은 웃음기를 지우고 냉엄한 얼굴로 그를 보다가, 함께 들어선 경호실장을 흘끗 돌아봤다.

“의료진과 경호원들 입단속은 단단히 하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경호실장은 진땀을 빼고 있었다. 그는 한서진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만약 송하나 관련해서 그가 입이라도 벙긋하면, 회장님의 노여움이 자신에게 쏟아질 것이다.

다행히 한서진은 입을 다물어 주었다.

“다시 말하지만, 내가 정신을 차린 건 아직 그 누구도 알아선 안 돼. 하나한테도 알리지 말게.”

“회장님. 하나는…….”

“그 아이는 아직 어려. 감정 조절을 못해서 지 언니 오빠들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안 되네.”

백철중이 정신을 차린 것은 며칠 전이었다. 시간을 따져보니 엘릭서를 마신 바로 그날이었다.

한서진은 엘릭서가 뇌 손상에는 효력이 없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백철중은 지난 며칠 간 환자인 척 연기하며, 은밀히 정상용만을 부리고 있었다.

‘아, 그래서 정상용 팀장님이…….’

한서진은 그가 백기를 들고 자신에게 연락을 해온 배경을 이해했다.

“정상용이.”

“예, 회장님.”

엄한 백철중의 음성에 정상용은 더욱 바짝 허리를 숙였다.

“한 대표한테 들었네. 호진이한테 붙으려 했다면서?”

“그것이…….”

“한 번은 용서하지. 엄밀히 말해서 배신은 아니니까.”

“가, 감사합니다.”

정상용은 지옥에서 황금 구명줄을 받은 사람처럼 감격해서 허리를 연거푸 숙였다.

백철중은 그가 오랫동안 충심으로 보필한 것, 그리고 그의 입장을 이해해서 용서를 했다.

자신이 쓰러지면 그는 충성할 대상이 사라진다. 그런 상황에서 그는 자신의 자녀 중에서 대를 이어 충성할 주인을 찾았을 뿐이다. 그것은 엄밀히 말해서 배신이라고 할 수 없다.

다만 주인의 진정한 뜻을 잘못 헤아린 과오는 분명했다. 백철중은 그 점을 잊지 않고 짚었다.

“확실히 말해두겠네. 또다시 이런 일이 생길 경우, 자네가 모셔야 할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하나 그 아이일세.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여부가 있겠냐는 듯 정상용은 씩씩하게 대답했다.

한서진은 말 한 마디로 그의 모든 것을 좌우하는 카리스마가 나름 부럽기도 했다. 자신에게는 없는 것 아닌가.

“그런데 쾌유하신 걸 계속 숨기실 생각이십니까?”

“성진그룹과의 악연을 이만 정리해야 하지 않겠나. 단숨에 쳐내려면 준비를 해야지.”

“…….”

“내 전처는 1조 원으로는 모자랐던 모양일세. 20년 전에 그 돈이면 실로 큰 대가인 것을…….”

백철중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고해성사처럼 말했다.

“하나 엄마와 부부 연을 맺은 건 전처와 헤어진 후라네. 하나 엄마 때문에 전처와 이혼한 건 아닐세. 하나 엄마가 아니었어도 난 결국 이혼했을 거야.”

“……인연이 아니었던 거지요. 이해합니다.”

“자네가 우리 하나를 불결한 관계의 과실이라 여길까 봐 못을 박아두는 걸세. 이해해주게.”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근거 없는 루머나 비방을 믿지 않습니다.”

“물론 그럴 거라 생각했네.”

백철중은 기분 좋게 웃었다.

아무래도 그는 이 기회에 꼬인 실타래를 단숨에 풀어버릴 모양이다. 자신의 쾌유 사실조차 숨기고 일을 진행하려는 것을 보면. 한서진은 그 방향성을 알고 싶었다.

“말씀드렸다시피, 하나가 이복형제들에게 경멸받는 것은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알고 있네. 나로서는 그 골을 메울 수가 없었네. 모두가 내 자식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저는 더 두고 볼 마음이 없습니다.”

“이해하네.”

백철중은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그리고 한결 단단해진 눈빛으로 말했다.

“하나한테 H통신이 그 힘이 되어줄 거라 생각했네. 내가 쓰러지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분열되지는 않았겠지.”

“…….”

“내가 매듭을 짓겠네. 분명 자네 마음에 들 거야.”

한서진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냉정한 기업가의 얼굴로 돌아온 것이다.

“그 계획을 듣고 싶군요.”

백철중의 차남 백호진은 바로 아래 남동생인 백정진을 만났다.

형제 중에서 가장 두각을 드러내고, 또 알짜배기 계열사를 쥐고 있는 두 사람이다. 만약 다른 형제들이 알았다면 피 말리는 긴장감에 신경을 곤두세웠을 것이다.

백정진은 형을 보자마자 물었다.

“왜 보자고 했습니까, 형님?”

“오늘 이 자리, 어머니께는 말씀 안 드렸지?”

“물론입니다. 그러니 편히 말씀하시죠.”

대외적으로 보면 이권 다툼을 벌이고 있는 형제 관계. 그러나 실질적으로 백호진과 백정진은 직접적으로 부딪치는 이해관계가 별로 없다.

백호진은 자동차 산업, 백정진은 조선소 산업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그 둘은 애초에 서로 겹치는 영역이 아니다. 소와 닭처럼 서로 무심하게 쳐다보기만 하는 사이인 것이다.

“너도 알겠지만 이대로는 그룹이 해체되고 만다.”

“형님은 그룹 유지와 H자동차를 지키는 것, 어느 쪽이 중요합니까? 전 하나만 고르라면 H조선을 지키는 겁니다만.”

“나 역시 마찬가지다.”

“자동차산업 관련 계열사 세 개 정도 챙기신 거 같은데, 그럼 저처럼 이만 적당히 손 떼시죠. 아시잖아요. 그룹 체제는 못 지킵니다. 해체될 수밖에 없어요.”

백정진은 차가운 조소로 말을 이었다.

“우리 형제들 사이가 언제부터 그리 좋았다고. 또 어머니와 성진그룹 문제도 있고요. 어차피 아버지가 쓰러질 때부터 이리 될 예정이었습니다.”

“어머니한테 붙으려는 건 아니지?”

“미쳤습니까. H조선은 내 겁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이 백정진이 회사란 말입니다.”

“그럼 됐다.”

이미 짐작했지만, 동생의 뜻을 똑똑히 확인한 것만으로 백호진은 만족했다. 동생 역시 자신과 똑같은 입장이었다.

그룹의 형태를 지키는 것보다, 자신이 소유한 계열사를 지켜내는 것. 이권 다툼에 발을 담근 것은 근본적으로는 그것을 위한 밑작업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 말고 다른 형제들은 다 뿔뿔이 흩어질 것 같구나.”

“어중이떠중이들이니까요. 시간 좀 지나면 결국 어머니 아래 모이겠지요. 죄다 성진그룹으로 이름 바꿔 달 테고, 그럼 성진그룹은 단숨에 재계 2위가 되려나? 어쩌면 1위를 노릴 수 있을지도 몰라요.”

“앞으로 명절 모임이 썩 유쾌하진 않겠어.”

“그래도 어머니 살아계실 때는 많이 찾아봬야죠. 엄마도 송지현 그 창녀 때문에 오죽 한이 많으셨어요. 전 이해합니다.”

둘은 모친에 대한 마음과 태도까지도 비슷했다.

백정진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아예 형님과 저 둘이서 그룹을 꾸려 봐요? 신H그룹, 뭐 이런 식으로.”

“됐다. 관심 없어. 참, 말해줄 게 있는데…… 송하나와 그 어미는 이제 그만 건드려라.”

“왜요?”

“한서진, 그 친구 때문이야.”

짧은 대답이지만, 백정진은 바로 알아들었는지 끄덕거렸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습니다, 형님. 알겠어요.”

“500억 달러가 움직이면 우리로서도 좋을 거 하나 없다.”

“아무튼 지어미 닮아서 그런지 남자 후리는 건 잘하네요.”

============================ 작품 후기 ============================

사실 백철중 회장은 원래 한서진이 출세를 위해 짓밟고 넘어가는 패였습니다.

저는 백철중을 위해서 최고급 향백나무 관짝을 준비해두었죠.

근데 지가 관짝 부숴버렸네요?

이래서 캐릭터의 자율성이란..ㅠㅠ

ps : 어제 못다한 1편을 오늘 마저 올립니다.

실탄의 ㅅ은 성실의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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