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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161화 (161/609)

00161  기적이 아니다  =========================================================================

“회장님은 이런 절 이해하실 거라 믿습니다. 아니, 이해해주셔야 합니다.”

백철중은 멍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독백 같은 말을 남긴 채, 한서진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등을 돌렸다.

‘부디…….’

엘릭서는 말기 암을 낫게 해달라는 그의 기원에 통찰안이 응답하듯이 인내한 길. 정확한 효능은 그도 알지 못한다. 뇌에 가해진 영구적인 손상까지 치유할 수 있는지, 아니면 단순히 암 극복에 국한된 것인지.

지금 할 수 있는 건 그저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해외 자본이 참전을 선언했다.

H그룹 일가는 엉덩이에 불이 붙은 듯 화들짝 놀랐다. 자기들끼리 치고 박고 정신이 없는데, 해외 자본까지 이 진흙탕 싸움에 가세한 것이다.

JP모건 등 월가의 금융 자본이 참전하자 국내 증권가는 혼란의 도가니로 변했다. 주가 변화는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을 만큼 정신없이 널뛰기를 반복했다.

개인 투자자들은 울부짖었고, 국민들은 이러다가 국내 대기업을 해외에 뺏기는 거 아니냐고 술렁거렸다. 정부에서 심각하게 개입 타이밍을 재고 있다는 보도도 심심찮게 흘러나왔다.

백철중의 차남, 백호진은 이 어지러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두가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고만 있으니, 쯧쯧.”

H자동차는 국내 최대의 자동차 제조업 회사다. 미국, 유럽에도 오래 전에 진출했고 중국에서는 시장 점유율 1위를 자랑하고 있는 글로벌 기업이다.

H자동차의 경영권을 단단히 쥔 백호진은 지금의 진흙탕 싸움에서 한 발 비껴나 있는 상태였다.

다른 형제들이 진흙탕에서 나뒹굴고 있다면 그는 한 발 정도만 담그고 있는 수준이다. 언제든 미련 없이 발을 뺄 수 있는.

“하나같이 천박하군.”

그는 혀를 차며 비서를 돌아보았다.

“정상용이는 지금 어디 있지?”

“이틀 전부터 연락이 되질 않습니다.”

“설마 형님한테 붙은 건가?”

“그건 아닌 듯합니다. 백형진 사장님 측에서는 지금 그룹 이권 다툼에 온힘을 쏟아 붓고 있습니다.”

“형님도 참, 이 와중에 그룹 회장직이 그리 탐나시는 건가.”

백호진은 어처구니없다는 웃음을 흘렸다.

“이미 계열 분리 수순에 들어갔는데 말이지.”

부친이 쓰러졌을 때부터, 그는 이런 상황을 반쯤 예상하고 있었다.

H그룹은 각 계열사 간의 결속력이 약하다. 적어도 진성그룹에 비할 바는 못 된다.

그러나 H그룹이 지금까지 한 밴드로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부친의 강력한 카리스마가 있었기 때문이다. 산업발전 시대부터 두 주먹으로 지금의 그룹을 일궈 낸, 시대의 영웅.

때문에 백호진은 부친이 가망 없다는 통보를 받자마자 H자동차의 경영권을 최대한 확보하는데 우선했다. 겸사겸사 남은 여유를 이용해 더 취할 그룹의 이권을 찾고 있었다.

“H통신을 꼭 먹어야하는데.”

그는 테이블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초당 1테라바이트의 무선 전송 기술. 이미 뚜렷한 실체가 있는 사업이지만 그 핵심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직 모른다. 정상용을 좀 더 구워삶아야 할까.

‘이 놈이 다른 생각을 하는 건?’

원래 송하나에게 주려던 사업이라고 들었다. 하지만 정상용이 지금의 송하나에게 붙는다? 이건 말이 안 되는 가정이었다.

“어쨌거나 이참에 잔챙이 계열사도 정리되고, 한결 가뿐해지겠어.”

백호진은 차갑게 중얼거렸다.

지금의 진흙탕 싸움은 형제들 간의 욕심이 불거진 것도 있지만, 좀 더 근원적인 이유에는 모친의 부추김이 있었다.

아마 이 참에 성진그룹은 소규모 계열사 몇 개를 흡수해서 덩치를 키울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백호진은 그다지 모친을 탓하고픈 마음은 없었다.

H자동차라는, 자신의 왕국은 어차피 건재하니까. 그 정도야 아버지의 외도로 오랫동안 고통 받은 모친을 위한 작은 위로의 선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때였다.

“회장님, 정상용 실장이 찾아왔습니다. 그, 그런데…….”

“정상용이가?”

백호진은 눈을 치켜떴다. 이틀 전부터 연락이 안 된다던 녀석이 갑자기?

“근데 얼굴이 왜 그러나?”

“혼자가 아닙니다. 한서진 대표도 함께입니다.”

“한서진 대표?”

백호진의 낯빛이 더욱 차가워졌다.

부친이 아끼던 500억 불의 청년 재벌. 재산만으로 치면 자신의 백배가 넘는 사람이다.

친해지면 두고두고 좋을 인물. 그리고 절대로 적대해서는 안 될 사람.

‘정상용이가 한서진과 함께?’

불길한 느낌이 드는 조합이다. 그는 생각을 빠르게 마쳤다.

“바로 올려 보내게. 아니, 내가 직접 마중 나가지.”

백호진은 급히 사장실을 나섰다. 한서진과 정상용은 막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참이었다. 백호진은 활짝 웃는 얼굴로, 과장스럽게 그를 맞이했다.

“어서 와요, 한 대표. 반갑습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건강해 보이시는군요.”

“무슨 일로 왔는지 궁금해서 이렇게 버선발로 달려 나왔습니다. 자자, 일단 안에 들어가시지요.”

백호진은 직접 에스코트하듯이 그를 사장실로 안내했다. 자리를 권하고 자신도 상석이 아닌 맞은편에 앉았다.

웃고 있지만 머릿속은 열을 내며 빠르게 돌아갔다. 대체 왜 둘이 함께 왔을까?

‘혹시?’

“제가 갑작스럽게 왜 찾아왔는지 의아하실 건 압니다. 정상용 팀장님도 함께이니, 더 이상하시겠지요.”

“조금 그렇습니다.”

“실은 제가 회장님과 함께 공동으로 비밀리에 추진하던 사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회장님이 쓰러지셔서 소통 창구를 잃었지요.”

백호진의 얼굴이 급격히 굳었다. 역시 그거였구나!

한서진은 태연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요즘 H그룹 내부 상태가 말이 아니더군요. 마치 내전 중인 중동 국가를 보는 듯합니다. 성진그룹 역시 H그룹의 외가라는 점을 내세워 개입하고 있고요.”

백철중은 성진과 아무 상관이 없지만, 자녀들에게는 엄연한 외가였다.

“정 팀장님한테 들었습니다. 기간통신 사업에 사장님이 관심이 있으시다고.”

“…….”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통신사업은 송하나, 그 아이 것입니다. 처음부터 회장님께 약속받은 게 그 조건이었습니다.”

백호진은 뜻밖의 상황에 충격을 받았지만, 쉴 새 없이 머리를 움직였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이윽고 그는 자신이 얻은 결론을 꺼냈다.

“핵심 통신 기술이 혹시 한 대표가 개발한 겁니까?”

“그렇습니다.”

“…….”

“그래도 회장님을 제외하고 가장 말이 잘 통할 사람이 백호진 사장님인 듯해서 찾아온 겁니다.”

수많은 하이에나 떼. 그 중에서 백호진은 그나마 늑대라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백철중에 비하면 여러 모로 부족하지만, 형제 중에서는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던 것이다.

백호진은 빠르게 마음을 결정했다.

“제가 뭘 해드리면 됩니까?”

“하나와 사모님은 이제 그만 괴롭히시지요. 남의 가족 일이라 그간 말을 못했을 뿐, 지켜보면서 사실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습니다.”

“혹시, 하나와…….”

“정말 친합니다.”

“…….”

듣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말이다.

백호진은 상류 생활로 잔뼈가 굵은 몸이었다. 송하나는 비록 천박한 핏줄이지만, 대여배우의 피를 이은 탓에 남달리 뛰어난 외모를 가졌다. 심지어 재계 2위 재벌 회장이 애지중지하는 외동딸이다.

눈앞의 청년 역시 500억 불의 자산가이자 남자. 얼마든지 이성적인 관계가 성립될 수 있는 구도 아닌가.

“만약 백화점 사업체가 계속 힘들어지면…….”

“또 한 명의 후발 주자가 H그룹의 경영권 다툼에 뛰어들 수도 있겠지요. 적어도 500억 달러 이상은 동원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분명한 경고이자 협박. 백호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백화점은 진흙탕에서 열외시키지요. 그 정도 교통정리는 가능합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도 뭔가 이득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시겠지만 제 자산 대부분은 해외에 있습니다. 국내에 들여오지 않은 것만 해도 충분한 대가가 아닐까요?”

“……그렇군요.”

혹시나 기간통신사업에 숟가락 하나 얹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찔러봤는데, 조금도 들어갈 기미가 없다.

한서진은 아쉬워하는 그를 보며 작게 피식거렸다. 그리고 작은 포장 사탕 하나를 꺼냈다.

“H그룹을 위해 배정한 통신 사업 지분은 전부 송하나 겁니다. 여기에 양보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통신 사업은 아무래도 그 규모가 매우 방대하죠.”

“그렇지요.”

“협력업체를 모집해야 할 분야도 매우 넓습니다. 어쩌면 그 부분에서 사장님을 위해 배려해드릴 수 있을 듯하군요.”

“좋습니다.”

백호진은 시원스럽게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한서진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천히 그의 악수에 응했다.

“회장님은 아직도 그대로입니까?”

한서진이 묻자 정상용은 고개를 조아렸다.

“예, 회복 기미가 여전히 없으시다고…….”

“그렇군요.”

한서진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엘릭서는 뇌 손상에는 작용하지 않는 건가? 그냥 암에만 국한되는 치료제였나?

‘방법을 찾아야 해.’

통찰안을 이용하면 뇌 손상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문제는 외부에 들키지 않고 조용히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요원하다는 것이다. 백철중 회장을 어디 개인시설에 몰래 납치라도 해야 할까?

“그나저나 정 팀장님이 다시 절 찾을 줄은 몰랐군요.”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다시 한 번 사과드립니다.”

정상용은 허리를 꾸벅 숙였다.

그에게서 전화가 왔을 때, 한서진은 의외라 생각했다. 그렇게 면박을 주었으니 얼굴을 들이대지 못할 거라고 봤는데.

그는 회장님의 뜻에 따라 송하나를 물심양면으로 지지하겠다고 했고, 그래서 이 자리에 함께 온 것이다.

“일단은 한 번 더 믿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저, 그런데…….”

정상용은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잠시 망설이다가 끝내 입을 다물었다.

“왜 그러시죠?”

“아무것도 아닙니다.”

백호진에게 보낸 채찍과 당근이 주요했는지, 백화점을 향한 공세는 즉각 멈췄다. 언론과 유통업체는 더 이상 백화점을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매출에서 적지 않은 타격을 입은 터였다. 당분간 송지현은 영업 정상화에만 매달려야 할 판이었다.

H그룹 형제간의 이권 다툼은 슬슬 정리가 되어 가는 분위기였다. 승자도 패자도 없었다. 각자 자기가 먹을 수 있는 최대한의 이권을 뜯어내서 뿔뿔이 흩어지는 모양새였다.

하이에나 떼의 이빨에 해체된 물소 부스러기처럼, H그룹의 자잘한 사업체만 만신창이가 된 채 방치되었다.

H반도체는 이 모든 폭풍에서 완전히 비껴난 채, 느긋하게 진흙탕 싸움을 감상했다. 오너 일가의 지분도 얼마 되지 않고, 이름만 H그룹인 덕분이었다.

한서진도 재무팀을 통해 상당한 양의 H그룹 지분을 확보했다. H자동차 등 주요 알짜배기 사업의 지분만 확보했다. 다만 그 양은 그리 많지 않았다.

‘H통신이 문제인데.’

백철중 회장이 없으니 정부 승인 과정이 자꾸 지지부진하게 된다. 새삼 이 나라에서 인맥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진료 기록을 조용히 확보해야 해.’

엘릭서를 얻었을 때처럼, 백철중의 진료 기록을 확보해야 치료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확보 자체는 어렵지 않으나 철저한 비밀을 유지할 방법이 마땅히 없었다.

“벌써 11시네.”

늦은 밤까지 사무소에 혼자 남아있던 한서진은 몸을 일으켰다.

그때 정상용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한서진 대표님, 회장님께서 지금 몹시 찾으십니다.」

“회장님이 저를?”

정수리에 짜릿한 충격이 일었다. 설마 정신을 차린 것인가?

그는 서둘러 사무소를 뛰쳐나가 병원으로 향했다. 한달음에 병실에 들어선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어서 오게.”

차분한 목소리가 그를 맞이했다. 백철중은 홀로 병실 침대에 앉아 있었다. 꼿꼿한 허리와 또렷한 눈빛, 힘 있는 표정. 누가 봐도 맑은 정신을 찾은 사람이었다.

한서진은 기쁜 마음을 억누르며, 천천히 다가갔다.

“회장님, 정신을 차리셨군요.”

“그간 일은 나도 들었네. 그리고 그룹 꼴이 지금 어떻다는 것도.”

“…….”

“그래도 천운이 도왔다네. 이런 기적이 내게 찾아올 줄 누가 알았겠나.”

“정말 다행입니다.”

백철중은 과거를 회상하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어려운 환경에도 굴복 않고 최고 대학에 입학한 청년…… 참으로 기특해서 아끼던 차 한 대를 선물했었지. 그 작은 선물이 이런 기적으로 되돌아올 줄, 그때는 상상이나 했겠는가.”

“……회장님?”

한서진은 당황해서 불렀고, 백철중은 천천히 눈을 떴다.

“나한테 준 게 대체 뭔가?”

============================ 작품 후기 ============================

연의.

"귀공을 놓아주는 건 과거 적토마를 나에게 준 답례요."

자신을 놓아보내준 관우를 향해 조조는 감사를 표했습니다.

"그때 귀공에게 준 말 한 마리가 오늘날 내 목숨을 구했구려."

이에 관우는 힘있게 대답했습니다.

"귀공이 내게 준 건 겨우 말 한 마리가 아니라, 남자의 자존심입니다."

현대 버전으로 재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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