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60 기적이 아니다 =========================================================================
“사장님 뜻대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비서의 보고에 오수현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얇은 보고서를 넘기며 만족스러워 했다.
백철중 자손들의 적은 송지현 모녀만이 아니었다. 자신이 아닌 다른 가족들이 모두 적이었다. 그들은 지금 조금이라도 많은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H그룹은 해체됩니다.”
“그래야지.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야지.”
진지하게 그룹 해체를 반대하는 자손들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그룹의 형태를 유지하는 것보다, 자신의 몫을 지키는 게 더 중요하므로.
그룹이라는 울타리에서 이뤄지는 계열사 간 시너지 효과쯤은 충분히 포기할 수 있는 것이다.
“20년을 기다렸는데.”
오수현은 진득한 미소를 지었다.
그룹을 해체한다 해서 자녀들의 유산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백철중에게는 무엇보다 뼈아픈 통증일 것이다. 자신의 손으로 일군 그룹의 결속이 깨져나가는 것이.
“일부는 성진그룹 계열사로 재흡수할 수도 있을 테고.”
그런 상황쯤 되면 H그룹은 더 이상 그룹의 형태를 유지하지 않을 테니, 일부 계열사가 성진그룹에 흡수되는 것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백철중의 패착은 자신을 대신해서 그룹을 지휘할 선장을 키워내지 못했다는 것. 그가 쓰러진 순간부터 그룹의 해체는 이미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쉬워. 그이가 반드시 회복돼서, 그 꼴을 보고 가슴이 찢어져야 하는데 말이야.”
20년을 묵힌 여자의 한. 그것은 서릿발이나 다름없다.
H그룹의 계열사 간 교통질서는 완전히 무너졌다.
처음 송지현 모녀를 공동의 적으로 삼고 대항하던 자손들은 이제 서로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항렬에 상관없이 서로를 의심하고 배척했다.
각 계열사 임원진은 저마다 주인을 찾아 줄을 서기에 정신이 없었다.
백철중은 맹호였지만, 그의 자식들은 늑대에 불과했다. 늑대는 성장해도 늑대일 뿐이다. 맹호의 빈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유일한 호랑이가 쓰러진 이상 늑대들은 서로 영역다툼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정지원조차 관심을 드러냈다.
「잘하면 계열사 몇 개를 가질 수도 있겠는데.」
“팀장님이 그런 말씀을 하실 줄은 몰랐는데요. 미국에 비하면 여기 한국 시장은 동네 시장터 수준 아닙니까?”
「골목대장놀이 하기에는 좋잖아.계열사 몇 개 있으면.」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미국물을 먹어서 그런지, 정지원의 스케일은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훌쩍 커졌다. 전용기를 운영하는 것도 그렇고.
“우습네요. 회장님 생신 때 봤던 가족들은 자기들끼리는 그래도 사이 좋아 보였는데 말이죠.”
「유산 앞에 그런 거 없다. 재벌일수록 더해.」
정지원은 냉정하게 평가했고, 한서진도 가슴 쓰라리지만 그 말에는 동의했다.
“바람 좀 잡아줄 수 있나요?”
「바람?」
“그룹 해체를 좀 더 빠르게 유도하고 싶습니다. SJ인더스트리가 조금만 바람을 일으켜주면 좋겠는데요.”
「어렵지 않지. 알았다.」
흔쾌히 승낙한 정지원은 전화를 끊기 전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골목대장놀이는 질릴 때까지 해도 괜찮을 거야.」
한서진과 송지현 모녀는 백철중이 입원한 병실을 찾았다.
VIP 전용 특실에서 엄중한 경호를 받고 있지만, 자손들은 그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미 그는 반쯤 잊힌 존재였다.
죽은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자손들이 항렬에 상관없이 유산 투쟁을 벌이고 있다. 만약 백철중이 수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가 가도 괜찮을까요?”
“상관없습니다. 지금 회장님 자손들은 회장님한테 큰 관심이 없어요. 회복이 불가능할 거라 믿기 때문이죠.”
전문 교수들이 몇 번에 걸친 정밀 검사 끝에 내린 후유증 진단이다. 백철중의 연세, 그리고 장애의 심각성을 생각하면 그가 호전될 가능성은 제로에 수렴했다.
백철중이 쓰러지고 처음으로 병문안을 가는 거라 그런지, 송하나는 얼굴에 핏기가 없었다. 긴장도 되고, 불안하기도 한 것이리라.
예상대로 백철중을 찾은 가족은 없었다. 대신 그룹 경호원들이 복도에서부터 철두철미하게 경호하고 있었다.
한서진이 앞장을 서자 경호원들은 자연스럽게 막아섰다.
“이쪽으로는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그는 한 번 보란 듯이 슬쩍 턱짓을 하며, 뒤로 시선을 던졌다.
“송하나 모릅니까? 회장님 딸입니다.”
“하지만 허락 없이는 들여보낼 수 없습니다.”
“누구의 허락이요? 딸이 아버지 병문안을 오는데 대체 누구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겁니까?”
경호실장도 어지간히 난처한 눈치였다. 그러나 그는 끝내 말을 듣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백형진 사장님의 지시입니다. 한 사장님은 몰라도, 송하나 양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송하나가 이를 작게 가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지 않아도 두 모녀의 표정이 어떨지 알 것 같았다.
한서진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서늘한 눈으로 경호실장을 바라봤다.
“딸이 아빠를 보겠다는데, 그걸 막는다라. 지금 이게 잘못되었다는 건 알고 있죠?”
“그건…….”
“박 실장님, 부탁합니다.”
한서진의 뒤를 따라온, 30대 남자가 재빨리 앞으로 나섰다. 경호실장을 비롯한 경호원들은 반사적으로 앞을 막아섰다. 그러나 박 실장이란 인물의 운동신경은 그들의 상상을 넘어선 것이었다.
“크윽!”
박 실장은 순식간에 세 명의 경호원을 모두 제압해서 바닥에 꿇렸다. 마지막으로 제압한 경호원을 위에서 누른 채, 그는 한서진을 올려다봤다.
“끝냈습니다, 대표님.”
“수고하셨습니다.”
바닥에 쓰러진 경호실장은 관절이 비틀린 고통에 신음하고 있었다. 한서진은 냉담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말했다.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는 입장인 건 이해합니다만, 그게 잘못된 지시라는 건 본인도 알고 있지요?”
“큭…….”
“얼마든지 보고하셔도 좋습니다.”
한서진은 송지현 모녀를 돌아보며 웃었다.
“들어가죠.”
“고, 고마워요.”
송지현이 먼저 앞장을 섰고, 송하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옆에 따라붙었다. 그리고 박 실장이란 사람을 힐끔 돌아봤다.
“오빠 경호원, 엄청 실력이 뛰어난 거 같아요.”
“미국에서 PMC 용병까지 했던 사람이래. 실력은 엄청 뛰어나대나.”
한서진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고는, 송지현의 뒤를 따라 병실에 들어섰다.
호화로운 VIP 특실에서 백철중은 침실에 멍하니 앉아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앉아서 창밖을 내다보거나, 혹은 누워 있거나, 둘 중 하나라고만 했다. 대소변도 가리지 못해 간병인이 모든 것을 처리해주고 있는 상황이었다.
세상을 호령하던, 천하의 재벌 총수가 어쩌다가 이런 꼴이 되었을까.
송지현은 그를 보자마자 눈물을 글썽거렸다.
“회장님……. 미안해요. 너무 늦게 왔죠.”
“…….”
“하나도 왔어요. 회장님 딸이에요.”
송하나는 천천히, 떨리는 발걸음으로 백철중에게 다가갔다. 백철중은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딸임에도 쳐다보지 않았다. 입을 반쯤 헤 벌린 채 밖을 내다볼 따름이었다.
옆에서 와이프와 딸이 아무리 흔들고, 손을 만져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을 알아볼 최소한의 지적 능력조차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흐느낌이 들리자 한서진은 조용히 병실 문을 닫았다. 그리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얼마 후 송지현 모녀가 나왔다. 송하나는 눈이 빨갛게 퉁퉁 부어 있었다.
“고마워요. 한 대표 덕분에 겨우 회장님을 볼 수 있었네요.”
“별 거 아닙니다.”
한서진은 숙연하게 고개를 숙였다.
송지현은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지만, 표정만큼은 야무지고 강인하게 빛났다.
“회장님을 보고 확실히 깨달았어요. 무기력하게 울고짜고만 있을 때가 아니란 것을요.”
“…….”
“나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을 거예요. 지금 저들은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정신이 없으니, 나도 할 수 있는 건 해볼 거예요.”
백철중과 의논한 대로 해외로 나가겠다는 생각은 아예 접어버린 모양이다. 한서진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제가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한테 이렇게 든든한 오빠가 생기니 참 좋네요.”
가벼운 미소를 머금고, 한서진은 송하나를 돌아봤다. 그녀는 아직도 울먹임에서 벗어나지 못한 얼굴이었다.
“하나야.”
“……네, 오빠.”
“걱정하지 말고, 엄마하고 나만 믿고 있어. 다 잘 될 거야.”
“……고마워요.”
“두 분은 먼저 들어가세요. 저도 회장님 얼굴 한 번 뵙고 돌아가겠습니다.”
“같이 가지 않고요?”
“조금 오래 걸릴 것 같아서요. 먼저 들어가십시오. 박 실장님, 두 분 로비까지 배웅해드리세요.”
“예, 대표님.”
박 실장은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송지현 모녀를 에스코트했다.
그룹 경호원들은 어느덧 안정을 되찾은 상태였지만, 더 이상 달려들지 않았다. 그들도 한서진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경호실장과 눈이 마주치자 한서진은 피식거렸다.
“아프죠?”
“……아닙니다.”
“아무리 지시라지만 딸이 아픈 아빠를 만나겠다는 걸 막다니, 이게 말이나 됩니까? 부당한 지시를 따른 대가라 생각하세요. 나도 이 이상의 해를 끼칠 마음은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배려에는 감사할지언정, 미안하지는 않다는 것인가. 한서진은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면서도, 희미한 경멸감이 입안에 고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병실로 들어갔다. 문을 닫고, 백철중 회장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창문을 가리듯이 그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하지만 백철중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초점이 흐릿한 눈, 반쯤 헤 벌어진 입. 그는 한눈에 보기에도 심각한 지적장애인이었다.
“회장님, 지금 H그룹은 해체되기 일보 직전입니다. 회장님 전부인이 작심하고 그룹을 뒤흔들고 있습니다. 이대로는 H계열사만 존재하고 H그룹의 형태는 남아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송지현의 백화점 사업은 궁지에 몰렸고, 형제간의 우애는 완전히 파탄이 났다.
회복 불가능한 백철중 회장은 형제들의 관심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어떡하면 조금이라도 많은 이권을 차지할 수 있는지, 거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창문에 블라인드를 치고, 한서진은 다시금 그를 돌아보았다.
“회장님은 하나를 가장 많이 사랑하시지만, 다른 자손들에게도 충분히 사랑을 주시더군요.”
그는 품에 천천히 손을 넣어, 투명한 병을 꺼냈다.
“골고루 베푸는 평등한 사랑은 아버지로서 좋은 모습이지만, 그럼 확실하게 하나를 보호하셨어야지요. 제가 그래서 심술이 조금 났습니다. 더 일찍 나설 수도 있었지만, 그거 때문에 늦었습니다.”
사파이어를 녹인 듯한 아름다운 액체가 병 안에서 찰랑거린다. 그는 천천히 마개를 돌려서 열었다.
“이복형제들이 하나를 무시하고 천대하는 건 하나한테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한테 힘을 주려고 합니다. H그룹이면 적당한 힘이 되겠지요. 물론 회장님이 아무리 하나를 사랑하신다지만, 그건 달갑지 않을 겁니다.”
한 손으로는 저항 없는 백철중의 턱을 쥐고, 다른 손으로는 엘릭서가 든 병을 그의 입에 가져다댔다.
“그래도 전 할 겁니다. 왜냐하면.”
병을 기울이자, 푸른빛을 머금은 투명한 액체가 백철중의 식도를 타고 넘어갔다.
“하나가 마음에 들거든요.”
============================ 작품 후기 ============================
이쯤에서 한서진 흑역사를 들춰 봅시다.
‘복권은 이제 당분간 곤란하고, 경마는 아예 발동이 안 되고…… 미래를 볼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렇다고 엘릭서같이 너무 대단한 것도 곤란하고……. 아, 진짜 어떡하지?’
통찰안을 이용하되, 안전하고 눈에 띄지 않는 선에서 조금씩 성공하는 방법. 대체 뭐가 있을까?
“어?”
한 로봇팔에 시선이 닿은 그는 흠칫했다.
「과잉 가동으로 인한 과다 발열. 가연성 화학 약품 접촉. 화재 발생 가능성.」
순간 로봇팔에서 불꽃이 튀며, 곧 전신이 불길에 휩싸였다. 동시에 자동 화재 경보 장치가 발생하며, 스프링쿨러에서 물이 쏟아졌다.
“이거다.”
왜 그의 부끄러움은 여러분들의 몫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