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59 기적이 아니다 =========================================================================
백호진은 제대로 냄새를 맡았다.
칼라 통신망의 존재까지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백철중이 구상하던 사업의 일부 스펙을 알게 되었다.
“초당 1테라바이트의 무선 전송 기술이라고?”
백호진은 눈을 부릅뜨며 놀랐다.
그는 백씨 형제 중에서 사업적인 수완이 가장 뛰어났다. 그래서 가장 규모가 큰 H자동차를 맡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초당 1테라바이트의 무선 전송 기술이라는 사실에서 이 사업이 가진 가치를 알아보았다.
“예, 워낙 보안이 철저해서 그것도 간신히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현재 3대 통신사가 서비스 중인 무선 통신 기술의 스펙이 어느 정도지?”
“이론상 초당 최대 25메가바이트를 전송할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이론상 최고 속도입니다.”
구체적인 숫자를 접하자 백호진은 더욱 놀라워했다.
“잠깐, 그럼 대략 42,000배가 빠르다는 소리인가? 지금 내가 단위를 잘못 이해한 건 아니겠지?”
“아닙니다. 제대로 알고 계십니다.”
비서는 고개를 조아렸고, 백호진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반문했다.
“이게 현실적으로 서비스 가능한 기술인가?”
기술은 계속 발전하고, 한계를 성급히 정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다. 그러나 한순간에 42,000배가 더 빠른 기술을 보급한다는 것은 상식 밖이지 않은가.
“제 상식에서는 말이 안 되는 기술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회장님이 비밀리에 밀어붙이신 사업입니다. 사업 개요를 보면 올 상반기 안으로 정부 최종 승인을 받고, 곧바로 서비스 개시를 시작한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기술 자체는 이미 완성됐다는 소리 아닌가?”
“그렇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백호진의 얼굴이 굳어졌다.
기존 무선 통신 기술 한계치보다 42,000배나 빠른 신기술. 백철중은 아무도 모르게 그 사업을 준비하고 있었고, 그것을 송하나에게 물려주려고 했다.
어딘가에 분명한 실체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H백화점 따위나 압박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어.”
보복에 눈이 먼 모친은 성진그룹과 H그룹의 모든 힘을 동원해 송지현 모녀를 공격 중이었지만, 지금 그런 시시한 백화점 사업체에 신경을 쓸 때가 아니었다. 백호진은 본능적으로 이 사업의 중요함을 알아차렸다.
앞으로 H그룹의 미래는 이 사업이 좌지우지 할 것이다.
“첨단 IT 사업에 그렇게 목을 매시더니, 기어이 이런 걸 일궈내셨군. 아버지, 참 대단합니다.”
그것은 칭찬인지 조롱인지 본인도 알 듯 말 듯한 말투였다.
“이런 걸 그 아이한테만 홀랑 주시려 하다니…… 참 너무하시군요. 저희도 아버지 자식인 것을.”
굳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그는 고개를 들어 비서를 주시했다. 차갑게 날이 선 눈빛, 비서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이 사업, 내가 가져야겠네.”
“알겠습니다.”
“정상용이를 협박하든 회유하든 뭘 하든, 무조건 내 앞으로 가져오게.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게. 다른 형제들이 알기 전에 속전속결로 끝내야 하네. 알았나?”
“예, 맡겨 주십시오.”
비서는 허리가 부러질 듯이 고개를 숙이고, 사장실에서 나갔다.
백호진은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비서가 놓고 간 보고서를 다시 한 번 살폈다.
“H통신이라……. 이런 값진 유산을 마련해두셨을 줄이야.”
문득 모친으로부터 자주 듣던 말이 생각났다. 자신을 가장 많이 닮은 것은 바로 너라던 그 말.
지금처럼 그 말이 기분 좋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백호진 사장측이 눈치를 챘습니다. 이미 사업 지분을 자기 명의로 옮기는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어떻게 들킨 거죠?”
「정보가 샌 모양입니다. 죄송합니다.」
“바로 송하나 명의로 돌리면 안 됩니까?”
「H통신은 회장님 사재로 설립한 거라, 백호진 사장이 작정하고 나서면 제가 어찌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백호진 사장 역시 법정대리인이니까요.」
한서진은 탄식하고는 다시 물었다.
“어디까지 눈치 챈 겁니까?”
「칼라 칩 자체는 아직 모르고, 초당 1테라바이트의 무선 전송 서비스가 가능하다는 것까진 알아낸 것 같습니다. 백호진 사장은 사업적인 안목이 뛰어납니다. 그래서 무조건 이 사업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사업적인 안목이 뛰어나다. 달리 말하면 돈이 될 만한 것은 귀신같이 알아본다는 의미이다.
중개소가 전혀 필요 없고, 주파수를 쓰지 않아 기존 통신망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이 더 큰 장점이다. 하지만 백호진에게는 초당 1테라바이트의 무선 전송이 가능하다는 하나만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모든 것을 걸고 이 사업을 잡아먹겠다는 야심을 가지기에는.
“만약 이대로 회장님이 못 깨어나면 어떻게 됩니까?”
「H통신을 백호진 사장이 먹게 되겠죠. 그건 어떻게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룹 내부의 일이니까요.」
“그럼 사업 자체를 폐기해야겠군요.”
「…….」
정상용이 이를 악물고 신음하는 게 느껴졌다.
정부와의 협상 등 구체적인 사업 실무는 백철중이 맡았지만, 사업의 핵심은 칼라 네트워크다. 백호진이 사업체를 가져가도 한서진이 칼라 네트워크 제공을 중지하면 무용지물이 된다.
한서진으로서는 손해 볼 게 없지만, H그룹으로서는 엄청난 손실이다.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 정상용이 설득을 시도했다.
「사업 개시는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일단 사업을 시작하고, 차후에 백호진 사장과 협상을 하면 안 되겠습니까?」
“백호진 사장에게 지분을 양보하란 말입니까?”
지분 분산은 한서진과 백철중, 그리고 정부가 각각 51:34:15의 비율로 가지기로 최종 합의가 된 상태였다.
그 34%를 백호진이 집어삼키는 걸 두고 보라고? 한서진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였다.
「34% 전부를 주는 건 당연히 말도 안 됩니다. 하지만 일부, 예를 들어 10% 정도를 양보하는 선에서 백호진 사장의 협조를 받아내면 무사히 사업을 궤도에 안착시킬 수 있습니다. 어차피 회장님 몫에서 떼어주면 그만입니다. 한 대표님은 손해 보실 게 전혀 없습니다.」
“일단 계속 말해보세요.”
「회장님이 저 상태인 지금, 어차피 오너 일족 실권자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조금을 떼어주고 백호진 사장의 전폭적인 협조를 끌어내면, 무사히 사업을 개시할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한서진은 정상용의 심정을 이해했다.
그는 백철중의 측근이자 H그룹의 사람이다. 백철중에게 충성하는 인물이지만, 백철중이 저 상태인 지금 대를 이어 충성을 바칠 대상이 필요할 것이다.
“백호진 사장한테 회유된 겁니까, 아니면 정 팀장님이 직접 결심한 겁니까?”
「…….」
날카로운 일침이었을까.
순간적으로 정상용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한서진에게는 그 짧은 침묵만으로 충분했다.
「저는 다만, 그룹의 미래를 위해서…….」
“충분히 이해합니다. 팀장님의 입장.”
「……감사합니다.」
백철중 회장이 믿고 일을 맡긴 인물. 그러나 그는 한서진이 H그룹과 통신 사업을 추진하기로 한 진정한 배경까지는 알지 못했다.
한국 칼라 통신 서비스는 칼라 네트워크의 성능을 시험하는 시제품이며, 동시에 송하나를 위한 선물이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정상용이 백호진을 지지한다 해서 섣불리 비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팀장님도 제 입장을 이해해주셔야지요.”
「무슨 말씀이신지……?」
“백철중 회장님이 H통신을 송하나한테 주려고 했다는 것은 알고 계시지요?”
정상용이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가 이런 선택을 한 것은, 아직 주인이 정해지지 않은 유산이고, 또 백철중이 회복될 가망이 없기 때문이다.
“왜 회장님이 H통신을 송하나에게 주려고 했는지, 혹시 그 이유를 생각해보신 적은 있습니까?”
「사전 유산 배분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만.」
“그것도 있지만, 제가 회장님께 사업 제의를 하면서 내건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송하나에게 주라고요.”
「…….」
“H통신은 처음부터 주인이 정해져 있었고, 그것은 회장님의 의사만이 반영된 결과가 아닙니다. 이렇게까지 말씀드렸으면 이제 알아차리셨을 겁니다. 저, 하나와 무척 친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거기까지는 미처…….」
“그런데 백호진 사장에게 떼어주다니요.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정상용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문득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혹시 송하나와 자신의 사이를 오해하고 있을까?
“만약 무산되면, 차라리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다시 저 혼자 사업을 추진할 겁니다.”
「제, 제가 백호진 사장님을 설득해 보겠습니다.」
위기감을 느꼈는지, 정상용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한서진의 얼굴에 떠오른 조소가 짙어졌다.
“어떤 식으로 설득을 한다는 거죠? 사업적인 안목이 뛰어난 사람이 이미 H통신의 가치를 알아버렸는데, 과연 순순히 물러날 거라 생각하십니까?”
「그, 그것은…….」
“H통신은 하나를 위해 제가 준비한 선물입니다. 난 우리 귀여운 하나를 벌레 보듯 하는 그런 사람들에게 단 1주의 지분도 양보할 마음이 없어요. 회장님이 이대로 회복되지 않는다면, 그냥 모든 걸 없던 일로 할 겁니다.”
「한 대표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전화를 끊으려 하는 것을 느낀 것일까. 정상용의 목소리가 더욱 다급해졌다. 한서진은 그가 얼마나 절박한 표정을 짓고 있을지 그다지 궁금하지 않았다.
“유감이군요. 백호진 사장을 다음 주인으로 선택하기 전에 저한테 의논이라도 했으면 좋았을 것을.”
한서진은 전화를 끊었다.
본격적인 왕자들의 난이 시작되었다.
백철중의 회복 불능이 확실시되자 조금이라도 그룹의 많은 것을 차지하려고 이권 다툼이 벌어진 것이다. 오수현도 그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오수현이 자녀들을 부추기고 있다는 말까지 나오는 판이다.
송지현이 자조적으로 말했다.
“20년 넘게 백철중 회장님께 칼을 갈아온 분이에요. 경영 수단도 뛰어나고, 성정도 매우 차가워요. 자녀 단속 실패 같은 말도 안 되는 실수로 이런 사태를 야기했을 리가 없어요.”
“그래서 뭘 노리는 거죠?”
“그룹에서 백철중 회장님의 존재감을 지워버리는 걸 수도 있어요. 회장님께는 훌륭한 복수가 될 테죠. 그리고…….”
“조만간 사모님과 송하나한테도 칼끝을 돌리겠군요.”
정확히는 이미 난도질을 시작한 상황이지만.
H백화점은 날이 갈수록 거센 공격을 받고 있었다. 언론은 H백화점의 불투명한 장래성, 열악한 근무 환경, 분식회계 의혹 제안 등 다방면에서 공격을 퍼부었다.
“정말 방법이 있는 건가요? 한 대표가 돈이 많은 건 알지만, 이 상황에서 H그룹 자체를 움직이는 것은 아무래도…….”
“걱정 마세요. 여차하면 돈을 다 털어 H그룹을 사버리는 일이 있더라도, 두 분한테 피해가 가게 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우리한테 그렇게까지 해주다니, 정말 고마워요.”
송지현은 처연히 웃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등을 돌렸는데. 애초에 편이라고 할 만한 사람도 없었지만.”
“잠시 하나 좀 보고 오겠습니다.”
“그래요. 자기 방에 있을 거예요.”
한서진은 몸을 일으켰다.
이층, 송하나의 방문 앞에 도착한 그는 가볍게 노크를 했다. 잠시 후 송하나가 문을 열어주었다.
“들어오세요.”
“어, 고마워.”
송하나는 방과 연결된 발코니로 갔다. 아직은 쌀쌀한 봄바람을 맞으며 먼 하늘을 주시했다. 한서진은 조용히 그녀 옆에 섰다.
“오빠. 제가 재벌 딸 아니어도, 오빠 동생인 건 맞죠?”
“당연하지.”
“유산 같은 거 없어도 상관없는데, 오빠언니들은 왜 그렇게 저를 경계하는지 모르겠어요.”
한서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정확히는 경계하는 게 아니라 미워하는 것이다.
난간에 팔을 기댄 그는 먼 곳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문득 그런 의문이 들더라. 사실 회장님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이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어. 근데 왜 이렇게 됐는가, 하고. 그러자 답이 보이더라.”
“뭔데요?”
“회장님은 정이 많으신 분이야. 하나 널 가장 사랑하시는 분이지만, 다른 자녀들과 손주들도 충분히 사랑하시지.”
“…….”
“너 하나만 행복하게 해주자고 모든 것을 몰아줄 수는 없었던 거지. 덕분에 지금 이 꼴이 된 거고.”
송하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이답지 않게 조숙하고 깊은 눈빛은, 그의 말을 어렵지 않게 이해한 듯이 보였다.
한서진은 가만히 두 손을 뻗어, 그녀의 양쪽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눈을 똑바로 주시했다.
“근데 나는 아니거든.”
“……오빠?”
“나한테는 그 사람들, 망해버려도 전혀 상관없는 남일 뿐이거든. 그래서 이 사태, 내 뜻대로 수습해보려고 해. 아마 회장님한테는 몹시 마음에 들지 않을 거야.”
입가에 걸린 미소는 따스하면서도, 냉정했다.
“그래도 상관없어. 난 백철중 회장이 아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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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전 사이다가 뭔지 모릅니다.
요즘 사이다, 사이다 하는 말이 많던데 대체 그게 뭔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