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58 흔들리는 제국 =========================================================================
“정상적인 업무 복귀는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의료진은 백형진 형제들 앞에서 고개를 조아렸다. 그들은 보이지 않게 떨고 있었다.
최선을 다했다고 하나 백철중 회장의 두뇌에 영구적인 후유증을 남겼다. 환자가 다른 이도 아니고, 재계 2위의 재벌 총수이지 않은가. 병원 한두 개쯤 날아가는 건 일도 아니었다.
배우자라도 되는 듯, 자손들과 함께 줄곧 병원을 지킨 오수현이 차갑게 물었다.
“정확히 어떤 후유증이죠?”
“대뇌피질 일부에 영구적인 손상이 남았습니다. 수술 자체에 문제는 없었으나 워낙 출혈 부위가 민감한 곳이고, 또 고령이시다 보니…….”
“짧게. 결과만.”
“……퇴행성 장애를 얻으셨습니다. 운동 기능과 생명에는 정지장이 없지만 사고 능력과 언어 능력이 영구적으로 저하되었습니다. 지금 회장님은 사고 능력이 3살 이하의 아동과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회복될 가능성은?”
“…….”
의료진은 차마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 침묵에 실린 무게를 이해한 오수현은 오히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추궁하듯이 재차 물었다.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그저 절망적이라고만…….”
“알았어요.”
오수현은 냉정한 눈으로 병실 침대를 내려다봤다. 눈을 뜬 백철중 회장이 알아듣지 못할 신음을 내며 몸을 이리저리 비틀고 있었다. 언뜻 보면 지루함을 참지 못하는 어린아이처럼 보인다.
지금은 남이지만, 오래 전에는 한 이불을 덮던 사이.
20여 년 전, 1조 원의 재산 분할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지만, 오수현 그녀도 본래 재벌가의 여식이었다. 재산을 노리고 안방을 차지한 누군가와는 혈통부터가 다른 것이다.
손을 뻗어 주름진 백철중의 손등을 잡아 본다.
몇십 년 만에 잡아보는 손일까. 그녀는 차가운 미소를 머금은 채, 예전의 카리스마는 찾아볼 수 없는 전남편에게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20년을 기다린 보람이 있네요.”
“재계 1, 2위 총수 둘이 동시에 쓰러지다니, 참 올해는 시작부터 다사다난하네요.”
야무진 표정으로 이서나가 입을 열었다.
의식불명의 이창용을 대신해 신임 회장으로 등극한 그녀는 온몸에서부터 자신감이 넘치고 있었다.
“모바일 사업부 양도 작업이 스톱 상태라고 들었습니다.”
“내가 딴 마음을 먹은 게 아니에요. 한 대표도 알죠?”
“…….”
“우리 쪽은 언제든 밀어붙이면 그만인데 H그룹 쪽에서 모든 게 멈춰버려서. 어쩔 수가 없네요.”
이서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모바일 사업 이전이 일시 중지 된 것은 H그룹 사정이지, 백철중의 위기를 빌미로 그녀가 딴마음을 먹어서가 아니었다.
애초에 이서나는 다른 생각을 품을 수 없는 처지였다. 그룹 내에 이용무 라인은 건재했고, 신임 회장의 입지는 아직 많이 불안했다.
그녀가 신임 회장이 될 수 있었던 것도 5nm공정 기술의 특허료 조정 덕분이다. 만약 그녀가 배반하면 한서진은 ADSC를 움직일 것이고, 그녀는 취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이용무의 공격을 받고 끌어내려올 수도 있었다.
“백철중 회장님, 소문대로 정말 위독한가요?”
“…….”
“한 대표도 머리가 많이 아프겠어요. H그룹은 우리 진성그룹과 또 상황이 많이 다르니.”
이서나의 말투는 의미심장했다.
한서진은 그 안에 담긴 숨은 뜻을 알아차리고 그저 쓴웃음을 지었다. 별 것 아닌 한 마디에서 상대의 의중을 간파하는 것, 자신에게는 아직 익숙하지 않은 경험이었다.
“진성그룹의 그 일체 문화가 이럴 때는 부럽기도 합니다.”
“H그룹은 그런 게 없죠. 그룹이야 어찌 되든, 내가 더 많은 살점만 차지할 수 있으면 그만이라는 사람들이니까.”
이창용이 쓰러졌지만, 진성그룹은 여전히 하나 된 제국으로서 건재했다. 다만 누가 제국을 승계하느냐, 그 후계권을 놓고 다툼이 벌어졌을 뿐이다.
1차전에서 패배한 이용무는 호시탐탐 다음 기회를 노리고 있다. 아예 그룹에서 분리해 나갈 수도 있음에도, 그런 선택을 하지 않는 것이다.
승자든 패자든 하나 된 진성그룹의 위세와 힘을 유지하여 재계 1위의 자리를 굳건히 다지는 것, 그것이 진성그룹 후계자들의 공통된 합의였다.
그러나 H그룹은 다르다.
“그쪽 형제들은 자기 욕심만 중요하죠. 내가 뻔한 예측 하나 할까요? 이대로 가면 H그룹은 더 이상 그룹의 형태를 유지하지 못해요. 각 계열사가 각개별로 찢어지게 되겠죠.”
“모바일 사업 이전도 위험해지게 되겠군요.”
“분명히 말했듯이 난 약속을 지킵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내 손을 떠났어요. 스위치는 지금 H그룹이 쥐고 있어요.”
이서나는 서늘한 눈으로 주시하며, 똑똑히 덧붙였다.
“스위치를 누를 사람이 없다는 게 큰일이군요.”
이서나와 헤어진 한서진은 한남동으로 향했다. 송지현 모녀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운전 중에 웹 기사를 검색했다. H그룹 관련 기사가 좌르륵 떠올랐다. 벌써부터 언론과 여론은 H그룹의 미래를 두고 난리법석이었다.
―H그룹이라는 거대 범선을 조종할 만한 선장이 없다는 게 가장 치명적.
신랄한 비판 기사도 잇따랐다. 한서진은 쓴웃음을 짓다가 불현듯 눈에 거슬리는 기사 몇 개를 발견했다.
―H백화점, 입점 매장에 대한 백화점 갑질로 곤혹 치러.
―입점 브랜드와 불공정한 계약 관행적으로 이뤄져.
―임원급 인물의 직장 내 성희롱 문제, 경영측은 오랫동안 대수롭지 않게 여겨.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수 있을 법한 수준의 기사들이었다. 그러나 한서진은 그것들이 몹시 거슬렸다.
‘느낌이 안 좋은데.’
어느덧 차는 한남동에 도착했다.
저택의 분위기는 침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집 주인의 상태가 심각하니 그럴 수밖에.
송지현은 비교적 차분한 태도로 그를 맞이했다.
“와줘서 고마워요. 덕분에 의지가 되네요.”
“하나는…….”
“방에 있어요. 잠시 후에 나올 거예요. 한 대표 오는 거 알고 있으니까.”
한서진은 소파에 앉으면서 흘끔 그녀를 살폈다.
비록 아버지뻘의 나이지만 엄연한 남편이다. 그런 사람이 대수술을 받고, 또 영구적인 후유증이 남았는데 병문안조차 가지 못한다. 과연 지금 그녀는 어떤 심정일까.
“오다가 눈에 걸리는 기사 몇 개를 봤습니다. H백화점 관련 기사였는데…….”
“아아, 그거요? 벌써 시작됐나 보네요.”
“시작이요?”
“회장님 쓰러진 게 그분에게는 절호의 기회니까요. 조금도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은가 봐요, 그 분은.”
송지현은 씁쓸히 웃었다.
“20년을 넘게 기다렸으니 이제는 단 하루도 기다리기 힘든 거겠죠. 같은 여자로서 조금은 이해되네요.”
두루뭉술한 표현, 하지만 한서진은 그녀의 말뜻을 대번에 이해했다.
전처 오수현이 자손들을 움직여 작정하고 나선 것이다.
그룹 내에서 송지현 모녀를 쳐내고, 그녀의 자손들이 온전히 그룹의 모든 것을 차지할 수 있도록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아마 그들은 작은 살점 하나조차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H백화점까지 뺏을 셈일까요?”
“그럴 수도요. 회장님이 제게 주신 사업체지만, 이제 와서 그게 중요하진 않죠.”
엄연한 타인의 소유물, 하지만 H그룹과 성진그룹이 힘을 합치면 백화점 사업체 하나 거덜 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한서진은 자기 일처럼 부아가 치밀었다.
“사모님, 이대로 당하고 계시기만 할 수는 없습니다. 반격을 하시지요.”
“반격이라, 어떻게요?”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회장님도 이미 예측하신 일이에요. 성진그룹과 다른 자손들이 힘을 합치면, 저와 하나 힘으로는 절대 못 이겨요.”
송지현은 처연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걱정 말아요. 백화점 사업체는 어차피 위장이니까.”
“위장이요?”
“회장님이 몰래 따로 준비해주신 게 있어요. 백화점은 다른 자손들의 마음을 달래주고, 시선을 빼앗을 제물일 뿐이에요.”
“…….”
“적당히 얻어맞는 척하다가 도망치는 것처럼 해외에 가서 살 거예요. 이미 예전에 회장님과 의논을 했어요.”
새삼 백철중의 배려가 느껴졌다.
황제라 해도 사후에 벌어지는 일은 통제할 수 없다. 아니, 강한 힘을 가진 황제이기에 더더욱 통제가 불가능하다. 백철중은 그 점까지 감안해서 송지현 모녀의 미래를 준비해두었던 것이다.
“회장님 상태는 어떤가요? 정말로 다시 회복될 가능성은 없나요?”
“……의료진은 일단 그렇게 말했습니다.”
“문안이라도 가고 싶은데.”
송지현은 우울한 듯 중얼거렸다.
목이 살짝 메어서 바라보는데, 위층에서 송하나가 터덜터덜 내려왔다. 그녀는 평소와 달리 힘이 없었다. 어깨도 축 늘어졌고, 눈시울도 붉었다.
“오빠, 오셨어요.”
“어, 응.”
“아빠는 아직도 그대로죠?”
“…….”
“한국, 떠나기 싫은데.”
송하나는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이미 자신의 미래를 예감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한서진은 노기를 차분히 누르고, 그녀를 위로했다.
“걱정하지 마. H그룹이든 뭐든, 해코지하는 거 내가 다 막아줄 테니까.”
“오빠가요?”
“내가 H그룹을 사들여서라도 다 막아줄 테니까, 해외로 뜰 생각은 안 해도 돼. 사모님도 절대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말만이라도 든든하네요. 고마워요.”
“말로만 하는 게 아닙니다.”
한서진은 굳은 눈빛으로 약속했다.
“약속드립니다. 제가 무조건 막아드리겠습니다.”
그의 말에 담긴 진심을 읽은 것일까. 송지현의 표정이 한결 차분해졌다. 그녀는 조금은 밝아진 미소를 짓고 대답했다.
“그럼 한 번 믿어볼까요.”
“이런 건 속전속결로 처리해야 돼.”
오수현은 자녀들을 다그치며, H그룹이라는 거대한 공룡을 쉴 새 없이 채찍질했다.
“만에 하나 니들 아버지가 다시 정신을 차리더라도 아무것도 못하게끔, 모든 걸 끝내놔야 한다.”
“하지만 의료진은 가망이 없다고 했잖아요.”
“그래도 빨리 처리해야 돼. 안 그럼 그 발칙한 년들이 어떻게 나올지 알고?”
20년을 넘게 칼을 갈고 기다린 여자의 분노는 실로 무서웠다. 모든 것을 태우지 않을까 우려가 될 만큼.
백형진 형제들은 피성년후견인(금치산자) 신청을 하는 한편, 백철중의 권리를 대리 행사해 그룹을 움직여 나갔다. 대리권에 흠결이 있겠으나, 어차피 당사자가 회복될 가망이 없으니 의미 없는 일이었다.
“그년들이 단 돈 1억이라도 너희들 아버지 재산을 가져가는 걸 두고 볼 수 없다.”
오수현의 의지는 강경했으며, 백형진 형제들도 모친의 뜻에 동의했다.
그들에게 송지현은 아버지를 유혹한 창녀였고, 송하나는 그 창녀의 핏줄일 뿐이었다. 절대로 그 존재를 용납할 수 없는 더러운 찌꺼기들이었다.
백철중은 생명에는 지장이 없으나, 정상적인 회복은 가망이 없는 상태였다.
이리 되자 백철중 개인에게 충성하던 임원들도 자기 살 길을 찾아 나섰다. 백철중의 자녀 중에서 충성할 주인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인정받기 위한 충성 경쟁이 이어졌고, 그것은 백철중이 직접 챙기던 그룹의 큼직큼직한 비밀들이 오수현과 자녀들에게 넘어가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 중 가장 큰 비밀 하나의 존재가 드러났다.
“기간통신사업?”
“예. 회장님께서 은밀히 추진하시던 사업입니다. 정상용 팀장이 전두지휘해서 맡은 거로 알고 있습니다.”
“기간통신사업이면 레드오션 중의 레드오션일 텐데, 아버지가 왜 그걸?”
백호진은 이해가 되지 않아서 갸웃거렸다.
초기에나 매력적인 사업이지, 3대 통신사가 굳건하게 자리 잡은 지금 기간통신사업은 H그룹 같은 대기업에는 큰 매력이 없었다. 오히려 막대한 투자만 하고 이익은 제대로 건지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자세한 건 저희로서는…… 다만 이 사업체를 송하나 양에게 주려고 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나, 그 기집애한테?”
백호진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아버지가 늦게 얻은 배다른 막내동생을 얼마나 애지중지하는지는 가족 내에서 매우 유명하다. H반도체를 알짜배기 사업체로 키워서 물려주려다가 무산된 일은 아직도 안줏감으로 두고두고 회자된다.
그런데 통신 사업체를 송하나에게 물려주려 했다고?
“그렇다면 그냥 빈껍데기 사업은 아니란 소린데. 이 부분 확실히 알아봐야겠어.”
“예, 사장님.”
백호진은 차갑게 덧붙였다.
“정상용이 그 친구, 나한테 바로 데려오고. 형님이나 다른 동생들은 알지 못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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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방사능이 든 홍차야! 마, 마시면 안 돼...!
ps : 어제 미처 수거를 못다한 딱지도 마저 챙겨갑니다...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