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57 흔들리는 제국 =========================================================================
백철중 회장은 응급 수술 중이었다.
정상용의 안내를 받아 막 병원에 들어서려는데, 저기 눈에 익은 차가 급히 오는 걸 볼 수 있었다. 송하나가 알아봤다.
“엄마 차예요.”
과연 차가 정지하자마자 송지현이 헐레벌떡 내렸다.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왔는지 그녀는 옷차림이 다소 흐트러져 있었다.
“엄마!”
“하나야?”
급히 들어가려던 송지현은 그제야 송하나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너도 왔구나. 어서 들어가자.”
송지현의 안색은 창백했지만, 생각 외로 침착해 보였다. 그녀는 한서진도 발견하고 인사했다.
“한 대표도 왔군요. 고마워요.”
“어서 들어가시죠.”
정상용이 그들 셋을 급히 안내했다. 그러나 수술실 근처에 이르러 그들은 멈칫했다.
건장한 경호원 여럿이 수술실 복도를 지키고 있었다. 비관계자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엄중한 분위기다.
경호원의 벽 너머로 고급 정장을 입은 중년 남자와 여자들이 다수 보였다. 백형진 등 백철중의 자녀와 손주들이다.
그들은 갈색 롱 코트를 길게 걸친 어떤 늙은 여인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걸 발견한 송지현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런…….”
“왜 그러시죠?”
“아무래도 좋지 않은 꼴을 볼 거 같은데요.”
송지현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담담하지만 뭔가를 크게 각오한 듯한 표정이었다.
한서진은 대강 짐작했다. 저들에게 있어 송지현은 아버지의 첩에 지나지 않는다. 송하나는 어디서 굴러온 배다른 형제이고. 당연히 이 상황이 달갑지 않으리라.
“그래도 회장님 수술은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는 게 맞는데, 과연 그럴 수가 있을지…….”
설마 수술실 입구에 못 다가오게 할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문득 저쪽에서 이쪽을 발견했다.
자녀들의 중심에 있던 늙은 여인이 이쪽을 발견하고 또각또각 다가왔다. 한서진은 순간 그녀가 백철중의 여자 형제인가 하고 생각했다.
늙은 여인은 송지현을 잠시 쏘아보더니 차갑게 말했다.
“천한 것 주제에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왔니?”
“…….”
송지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송하나는 시선을 피했다.
“네가 있을 자리 아니다. 집에 가서 얌전히 기다려. 수술 결과 나오면 통보해주던가 할 테니까.”
“저는 돌아가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는 회장님 딸이니 여기에 있게 해주세요.”
“돌아가라고 한 말, 못 들었니?”
일말의 여지도 없이 차갑게 통보한다. 음색에 실린 카리스마가 제법 무겁다. 수많은 사람들을 오래 통솔해본 자만이 지닐 수 있는 위엄이다.
송지현은 입술을 깨물며 바르르 떨다가, 결국 힘들게 돌아섰다.
“가자, 하나야.”
“엄마. 아빠는…….”
“알잖니? 여기 있어 봤자 소란만 커져.”
“…….”
“그건 아빠를 위해서도 좋은 게 아니야. 가자.”
송하나는 분했는지 늙은 여인을 노려보았다. 그녀는 코웃음을 치며 송하나를 지그시 주시했다.
“얘야, 너 지금 날 노려보는 거니?”
“하나야. 어서.”
송지현이 결국 잡아끌다시피 해서 그 자리를 벗어났다.
‘뭐야? 이 여자는 뭔데?’
한서진은 어이가 없는 눈으로 바라보다가 급히 송지현 모녀를 쫓아나갔다.
병원 로비를 나온 송지현은 우두커니 서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뒷모습이 바르르 떨리는 걸 보니, 감정 동요가 적지 않은 듯하다.
한서진은 조심스럽게 불렀다.
“저, 사모님. 아까 그 여자는 누굽니까?”
“아, 한 대표. 미안해요. 추태를 보였네요.”
송지현은 천천히 돌아보았다. 붉어진 눈시울에는 눈물이 조금 맺혀 있었다.
그녀 대신 송하나가 성대를 쥐어짜는 듯한 음색으로 말했다.
“아빠 전부인이에요.”
“……그랬구나.”
그제야 한서진은 그 기묘한 분위기가 납득이 갔다. 어쩐지 백철중의 여자 형제치고는 위화감이 컸다.
백형진 등 다른 자손들이 그 여자를 중심으로 모여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생모이자 할머니이기 때문이었으리라.
‘1조 원을 떼어줬다 했나?’
거의 20년 전 기준으로 1조 원의 재산 분할을 해줬으니, 그 여자도 아마 엄청난 재력가이리라.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송하나가 다시 말했다.
“성진그룹 회장님의 여동생이기도 하죠.”
“성진그룹이면, 재계 5위 안에 든다는 그?”
“네, 맞아요.”
한서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수술실 복도를 차지하고 있던 갈등 관계가 눈에 보였다. 오래 전에 이혼한 전처이지만, 자녀들에게는 든든한 모친이다. 재계 5위 그룹 회장의 여동생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녀 자체는 백철중에게 아무 권리가 없지만, 자손들은 그녀를 중심으로 단단히 뭉쳐 있을 것이다.
한서진은 송지현이 이제껏 얼마나 외로운 싸움을 해왔는지 알 것 같았다.
‘만약 이대로 회장님이 돌아가시면?’
송지현은 법적으로 부부가 아니다. 송하나는 자녀로서 상속 지분이 있지만, 저들이 과연 호락호락하게 내줄지도 의문이고.
송지현이 갖고 있다는 백화점 사업체도 마찬가지로 위험하다. 성진그룹과 H그룹의 다른 자손들이 모두 힘을 합치면, 연매출 2조 원의 백화점 사업체가 몰락하는 것은 시간문제라 할 수 있으니까.
“한 대표, 부탁이 있어요.”
어느덧 감정을 가라앉힌 송지현이 진지한 얼굴로 말을 꺼냈다.
“회장님 곁을 지켜줘요.”
“제가요? 하지만…….”
“저나 하나는 저쪽 견제가 워낙 심해서 수술실 근처도 가기 힘들어요. 회장님이 힘든 수술 받고 있는데 소란스럽게 만들고 싶지도 않고요. 하지만 한 대표는 다르잖아요.”
“…….”
“우리 대신 회장님 곁을 지켜줘요. 한 대표가 시간 나는 동안만이라도 좋아요.”
한서진은 송하나를 바라봤다. 이 두 모녀 옆에 있는 게 더 좋지 않을까?
눈이 마주치자 송하나가 천천히 끄덕였다. 엄마 말대로 해달라는 뜻이다. 그녀도 한서진이 옆에 있는 것보다는 백철중 곁에 있는 것을 원했다.
“알겠습니다.”
“어려운 부탁해서 미안해요. 한 대표가 여유 되는 만큼만 있어줘요.”
“걱정 마시죠. 회장님도 저에게는 남이 아닙니다. 수술 끝날 때까지 지키고 있겠습니다.”
“고마워요.”
한서진은 송하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위로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곧 일어날 수 있을 거야.”
“……네. 부탁해요, 오빠.”
두 모녀를 배웅하고 난 한서진은 다시 병실로 돌아갔다.
수술실로 접근하자 경호원들의 그의 앞을 막았다. 그는 냉담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난 회장님이 인정한 친구고, 중요한 사업 파트너입니다. 회장님 곁을 지키고 싶으니, 이만 비켜 주시죠.”
경호원들은 조금 당황해서 눈짓을 교환했다.
차남 백호진이 분위기를 파악하고는 다가왔다. 그는 차분히 한서진을 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아버지가 위급할 때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송지현 모녀는 안 되지만, 자신은 된다는 것인가.
한서진은 차가운 조소를 머금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회장님께서는 잘 견뎌내실 겁니다.”
“고맙습니다. 이쪽으로.”
백호진은 복도 끝에 있는 VIP 가족 대기실로 안내했다. 간이침대와 편안한 가죽 소파, 그리고 TV 등이 마련되어 있었다. 호사스럽지는 않으나 딱딱한 복도 의자에 앉아 수술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나았다.
VIP 대기실에 들어서자 일제히 시선이 꽂힌다.
저들도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것이리라. 나아가 송지현 모녀와 친밀하다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
한서진은 그중 제일 강한 시선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이를 알아차렸다. 바로 백철중의 전처이자, 여기 있는 모든 이들의 직계존속이었다.
‘오수현이라고 했던가.’
송지현 모녀와 헤어지고 잠시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봤다.
이름은 오수현. 백철중 회장보다 두 살 연하인 77세.
성진그룹 회장의 친동생이며, 현재 성진유통 사장을 맡고 있는 사람이었다.
오수현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은 마치 메두사를 연상케 할 만큼 차가웠다. 그녀도 자신에 관해서 충분히 들었으리라.
한서진은 가만히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리고 눈을 감으며, 백철중 회장의 수술이 무사히 끝나기를 기원했다.
길고 긴 수술이 드디어 끝났다.
수술 의료진이 나오자 백형진 형제는 우르르 몰려갔다. 선두에 선 백형진이 급히 물었다.
“수술 결과는? 아버지는 어떻습니까?”
“일단 수술은 무사히 끝났습니다.”
“아아, 고맙습니다.”
백형진 형제 사이로 기쁜 감정이 번져 나갔다. 한서진은 멀리서 차분히 지켜보았다.
“다만 호전 정도는 앞으로 경과를 지켜봐야 합니다. 수술 자체는 잘 됐지만, 원체 고령이시고 또 출혈 부위가 워낙 깊숙한 곳이었던 터라…… 예전처럼 100% 돌아간다고 현재로서는 장담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분위기가 크게 술렁인다. 한서진은 반사적으로 오수현 쪽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지는 것을, 그는 놓치지 않고 잡아냈다. 저도 모르게 주먹이 꾹 쥐어졌다.
그는 일단 송하나에게 톡 메시지를 보냈다.
―수술 끝났어. 수술 자체는 잘 됐지만, 경과는 더 지켜봐야 한대.
―정말요? 아, 다행이다. 엄마한테 말하고 올게요.
텍스트 너머로 송하나가 크게 기뻐하는 게 눈에 보인다. 한서진은 조금 망설였으나, 결국 나쁜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했다.
언론은 백철중 회장이 쓰러진 사실을 대서특필했다. 이창용 회장이 쓰러졌을 때와는 전혀 달랐다.
병원을 찾은 정상용은 그룹 본부에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책임이라고 슬쩍 귀띔해 주었다.
“아무래도 진성그룹 측 2세분들이 좀 더 신중한 면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돌려 말했지만, 결국 백철중 자식들이 보안 유지를 제대로 신경 못 썼다는 것 아닌가. 한서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회장님이 쓰러지신 것 때문에 현재 모든 사업 계약이 올스톱 상태입니다. 일단 회장님이 일선으로 복귀하셔야 합니다.”
“현재 상황이 어떻죠?”
“진성 모바일 사업 인수는 계약을 체결한 상태고, 기간통신사업은 정부 최종 승인만 남았습니다.”
그저 손에 쥔 낫을 휘두르기만 하면 알곡을 거둘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필 이 중요한 때에 백철중이 쓰러진 것이다.
“오수현 사장은 대체 왜 병원에 와 있는 겁니까? 이미 오래 전에 이혼했으면서.”
“회장님이 원체 고령이시니 만일의 사태를 철저히 대비하겠다는 거죠. 만약 이대로 잘못되시기라도 한다면, H그룹은 어쩌면…….”
정상용은 말을 흐렸다.
그가 우려하는 것은 성진그룹이 오수현을 내세워 H그룹을 장악하는 것이리라. 최악의 경우 오수현이 백철중 다음 회장으로 등극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회장님이 정신을 차리셨습니다!”
그때 병실에서 희소식이 들려왔다. 한서진은 놀라서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상용도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한서진은 회복실로 달려갔다. 경호원은 물론이고 백씨 일가도 그를 막지는 못했다.
송지현 모녀가 미운 것은 미운 것이고, 한서진은 백철중이 매우 아끼는 친우 아닌가. 게다가 500억 불의 자산가, 그들로서도 섣불리 심기를 건드릴 수는 없었다.
“아버지, 정신이 드세요?”
“할아버지!”
우르르 병실에 몰려든 자손들은 깨어나는 백철중 회장만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백철중 회장의 반응이 이상했다. 간신히 눈을 뜬 그는 자손들을 바라보다가 힘들게 입을 열었다.
“어, 어어, 버어어…… 므어…….”
뒤틀리고 어눌한 발음. 초점이 또렷하지 않은 눈동자.
백형진 형제들의 얼굴은 창백하게 굳었고, 오수현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백철중은 무사히 의식을 회복했다.
그러나 영구적인 장애가 뇌에 남았다.
============================ 작품 후기 ============================
자, 딱지 사장님들.
쇤네가 정성스럽게 쪄온 이 고구마를 드셔보시지요.
이거 안 드시면 디저트가 없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