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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156화 (156/609)

00156  흔들리는 제국  =========================================================================

“앞으로의 일을 대비하셔야 합니다.”

측근들의 간곡한 권유에 이용무는 입을 꾹 다물며 끄덕였다.

부친의 의식 불명은 이제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언론을 최대한 통제하고 있지만, 이미 증권가에는 파다하게 퍼진 뒤였다.

진성그룹 관련주는 하한가를 쳤다가 다시 상승하기도 하는 등, 5분 뒤를 예상할 수 없을 만큼 역동적으로 춤을 췄다.

이창용은 코마에서 깨어날 기미가 없었다. 희망을 놓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룹의 미래 역시 대비해야만 했다.

감성만으로 그룹을 운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이서나 사장님 쪽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측근의 심각한 보고에도 이용무는 예상했다는 듯 큰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누님은 원래 야심이 큰 사람이니까. 마지막 기회를 쉽게 넘기고 싶지는 않겠지.”

부친은 생전에 이미 후계 구도를 공고히 해두었다.

이서나는 부친이 건재할 때 갖가지 경영 실적을 쌓아 부친의 인정을 받고 싶어 했다. 만약 부친이 이대로 깨어나지 못하면 그룹의 후계자는 자동으로 자신이 된다.

그것을 용납하기 어렵다면 이서나는 어떤 식으로든 행동에 나설 것이다. 지금이 아니면 그룹의 대권을 노린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니까.

“누님이 준비한 카드가 뭔가요?”

“그게…… 아무래도 SJ인더스트리 반도체 파운더리 수주 계약건을 물고 늘어질 것 같습니다.”

“겨우 그거요?”

이용무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피식거렸다. 그 철두철미한 누나가 준비한 것치고는 너무 형편없는 카드가 아닌가.

위탁생산 계약은 반도체 하나를 찍어낼 때마다 2달러씩 손해를 보는 구조지만, 그런 식으로라도 공장을 돌리지 않으면 반도체 사업 폐기로 더 큰 손해를 떠안았을 것이다.

개당 2달러의 적자로 일단 공장을 돌리고, 시간을 벌었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부친인 이창용도 그래서 크게 뭐라고 하지 않은 것 아닌가.

“겨우 그 정도로는 주주들의 공감을 끌어내기 어려울 텐데요. 오히려 폭로전으로 주가만 떨어뜨렸다고 주주들의 반발만 사고 말 겁니다.”

“그렇긴 합니다만, 뭔가 다른 노림수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봤자지요. 아무튼 누님도 다급하긴 한 모양인데요. 뻔히 보이는 자충수를 두려고 하다니.”

적자를 보는 수주 계약이지만, 당시로서는 그게 반도체 사업과 기업 가치를 지키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흑자 계약인 것 마냥 숨긴 것은 잘못이지만, 만약 사실대로 말했으면 주가가 떨어졌을 것이다. 주주들은 그런 이용무의 입장을 이해해줄 것이며, 이서나의 폭로 때문에 주가가 하락하면 오히려 그녀를 미워하게 될 것이다.

이용무는 그런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경악스러운 소식이 전해졌다.

“뭐라고!”

그날도 부친의 용태를 확인하러 병원을 방문했던 이용무는 측근이 전한 급보에 펄쩍 뛰듯이 놀랐다.

“왜 ADSC가 누님 손을 들어준단 말인가요!”

“그, 그것이…….”

“당장 전화 돌려요! 내가 직접 주주들에게 설명하겠습니다!”

이서나는 진성전자 대주주들을 기습적으로 모아놓고, 긴급 발표를 가졌다.

파운더리 계약의 불리한 점을 터트린 것까지는 이용무측도 예상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ADSC와 로열티 조정에 성공하여, 차후로는 개당 2달러의 흑자를 볼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폭로에 그쳤다면 대주주들은 흔들리지 않았겠지만, 2달러의 흑자라는 반전에는 그들도 마음이 끌릴 수밖에 없었다. 자본주의는 철저한 이익의 논리로 흘러가니까.

심지어 이서나 역시 이창용의 핏줄 아닌가. 그녀를 선택한다 해서 진성그룹을 배반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ADSC로부터 성공적인 협상 결과를 이끌어낸 그녀를 지지하지 않는 것이, 진성그룹을 배반하는 거나 마찬가지 행위인 것이다.

이용무 측은 발 빠르게 대항하려 했지만, 이서나 측은 단단히 작심하고 움직였다. 그들이 저항할 틈도 주지 않고 사정없이 칼을 휘둘렀다.

미리 예고된 임시주총이 열렸고, 이서나가 할 수 있는 게 없을 거라며 안심하던 이용무 측은 쓰라린 패배를 맛봐야 했다.

주주들은 경영 불능 상태에 빠진 이창용 회장 대신 이서나를 신임 회장으로 선임했다.

ADSC의 공식 대리인이 로열티 조정을 위해 내건 공식적인 요구가 이서나의 회장 선임이었기에, 대주주들은 두말할 것 없이 그녀를 선택했던 것이다.

“……축하합니다, 누님. 기어이 아버지를 몰아내셨군요.”

“어머, 난 언제까지나 회장 자리를 공석으로 둘 수 없었을 뿐이야.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었니?”

승리의 트로피를 거머쥔 날, 이서나는 화사하게 웃는 얼굴로 이용무를 대했다.

“앞으로 잘해 봐요, 이용무 부회장님.”

“으, 어려워요. 이해가 잘 안 돼요.”

송하나는 머리를 북북 긁어댔다. 한서진은 차분하게 다시 설명했다.

“여기 이 수식을 적용하고, x값에 3을 넣으면…….”

한 번 더 차분히 설명하자 송하나는 드디어 이해했는지 술술 해답을 풀어냈다. 한서진은 대견하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잘 하네.”

“그래요?”

“응. 이 정도면 자주 오지 않아도 되겠는데. 아주 잘해.”

“아니에요. 오빠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주셔서 그런 거예요. 오빠 아니었으면 이렇게 쉽게 못 풀었어요.”

송하나는 당치도 않다는 듯이 그렇게 말했다. 한서진은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저 한국대 갈 수 있을까요?”

“당연히 갈 수 있을 거야.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는데.”

“하아, 얼른 수능이 끝났으면 좋겠어요. 공부하는 거 너무 힘들어요. 빨리 대학 가서 놀고 싶다.”

“음…… 내가 아는 동기와 후배들은 오히려 대학에서 더 열심히 공부하던데.”

“정말요? 대학 가면 얼마든지 놀 수 있다고 했는데.”

“그건 다 거짓말이더라고.”

“쳇, 어른들은 다 나빠.”

송하나는 가볍게 툴툴거렸다. 조숙한 외모지만, 그러고 있으니 진짜 어린 학생처럼 보였다.

문제지 한 면을 다 풀고 난 송하나는 턱을 괸 채 한서진을 지그시 올려다보았다. 사람이 빨려 들어갈 듯한 시선에 그는 가슴이 갑자기 두근거렸다.

“오빠, 사업은 잘 돼요?”

“사업?”

“아빠와 같이 하는 사업 있다면서요. 잘 되나요? 우리 아빠가 오빠 곤란하게 하거나 그러진 않아요?”

“아아, 그거.”

한서진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순풍에 돛 단 듯이 잘 되고 있지.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을 정도야.”

“다행이에요. 아빠가 오빠 속 썩이면 어쩌나 했는데.”

“왜 그래? 회장님이 얼마나 능력 있으신 분인데. 회장님 아니었으면 이 사업 이렇게 잘 될 수 없었어.”

빈말이 아니라 H통신 사업은 순풍을 탄 배처럼 쾌적한 항해 중이었다.

코마 상태에 빠진 이창용 대신 이서나가 진성전자 회장이 되었다. 아직 그룹 전체를 통솔할 만큼의 역량은 아니지만, 곧 그렇게 될 것이다. 진성전자의 주인이 곧 그룹의 주인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이서나는 분명히 약속을 지켰다. 회장에 취임하자마자 적자 사업을 정리한다며 모바일 사업부 매각을 추진한 것이다.

H그룹은 얼마 전에 설립한 새 계열사, H통신을 내세워 진성모바일 사업부 양도 계약을 체결했다.

H통신은 아직 100% 백철중 회장의 지분으로 되어 있었다. 정부로부터 기간통신사업을 승인 받은 뒤에 지분을 넘기기로 되어 있었다.

처음부터 한서진이 통신 사업에 개입했다는 게 알려지면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길 수 있다. 그래서 H그룹이 단독 추진하는 것으로 위장한 것이다.

“중요한 고비는 거의 다 넘겼어. 이제 수확만 하면 돼.”

“정말요?”

“응. 회장님이 정말 많은 부분에서 신경을 써주셨지. 난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말이지.”

빈말이 아니라, 주요 전략은 백철중 회장이 대부분 짰다. 정부를 상대로 한 기간통신사업의 협상도 H그룹에서 전적으로 맡았다.

한서진이 한 것이라고는 ADSC에 로열티 조정에 관한 의사를 전달한 것뿐이었다. 당장은 손해지만 장기적으로는 이득인 로열티 조정이었기에 ADSC도 흔쾌히 승낙했다.

말 그대로 결실을 따기만 하면 되는 상황. 한서진은 요즘 백철중과 통화할 때면 마음이 가벼웠다.

송하나가 배시시 웃었다.

“오빠 사업이 잘 된다니 다행이에요.”

“음…… 하나야. 혹시 회장님한테 아무런 이야기 못 들었니?”

“무슨 이야기요?”

“이번 사업에 관해서, 아무 이야기도 못 들었어?”

“네. 왜 그러세요?”

송하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갸우뚱거렸다. 아직 백철중 회장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은 모양이다.

한서진은 조금 망설였다.

‘내가 이야기해도 될까?’

H통신은 송하나를 위한 선물이다. 그것은 처음부터 백철중 회장과 이야기를 마친 거래였다.

백철중 회장 대신 자신이 이야기를 꺼내도 될까? 한서진은 그 점을 놓고 고민했다. 마음 같아서는 으스대듯이 알려주고 점수도 따고 싶지만, 백철중 회장이 일부러 타이밍을 재고 있는 걸 수도 있기에 섣불리 나서기도 뭐했다.

“회장님이 조만간 너한테 큰 선물 하나 주실 거야.”

“선물이요?”

“응, 자세히 말할 순 없는데 회장님이 널 위해서 뭔가 준비하는 게 있으시대. 그러니 너무 깜짝 놀라지 말고, 기대하고 있으라고.”

“아, 그렇게 말씀하시니 너무 궁금해요. 뭔지 살짝 귀띔해주면 안 돼요?”

“나도 그런 마음 굴뚝같은데, 회장님의 즐거움을 뺏을 수는 없지. 이해해주라.”

“쳇.”

그때였다. 송하나의 스마트폰이 갑자기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눈빛으로 양해를 구하고 폰을 쥐었다.

동시에 한서진의 스마트폰도 미친 듯이 울리기 시작했다.

‘뭐야?’

하필 같은 타이밍에 전화가 오다니. 석연치 않은 우연에 한서진은 살짝 불길한 느낌이 스쳤다.

‘정상용 팀장님이? 왜?’

H통신 사업 추진을 총괄하는, 백철중이 믿고 맡긴 책임자가 전화를 건 것이다. 한서진은 왠지 좋지 않은 예감에 사로잡혔다.

“여보세요.”

「큰일 났습니다.」

불길한 예감을 느낀 것은 자신뿐만이 아니었을까. 한서진은 순간 저도 모르게 송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수화기 너머로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그녀의 표정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한서진은 분명히 느꼈다. 이 순간, 자신도 그녀와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라고.

「회장님이 쓰러지셨습니다.」

「하나야, 아버지가 쓰러지셨어.」

한서진은 송하나가 그렇게 새파랗게 질린 것을 처음 보았다. 표정이 완전히 무너진 그녀는 반쯤 넋이 나간 채였다.

그는 급히 그녀를 부축해서 병원으로 차를 몰았다. 달리는 차안에서 송하나는 내내 무릎 위에 두 주먹을 올려놓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괜찮아. 별 일 없을 거야. 회장님이 얼마나 정정하신 분인데.”

“…….”

송하나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간신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을 뿐이다. 무너진 표정은 어느 정도 수습되었지만, 눈빛은 여전히 뒤죽박죽이었다.

부친이 쓰러졌다는 소식이 그녀에게 어지간히 큰 충격이었나 보다. 한서진은 마음이 좋지 않았다. 굳이 이런 식으로 그녀가 어리다는 것을 실감하지는 않아도 되는데.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정상용이 마중을 나왔다. 그는 한서진을 보자마자 고개를 숙였다.

“어떻게 된 겁니까?”

“뇌출혈입니다. 의료진 말로는, 아무리 정정해도 회장님 연세에는 언제 발생해도 이상하지 않은 질환이라고…… 그런데 상태가 꽤 심각한 것 같습니다.”

“지금 회장님 상태는 어떻죠?”

“응급 수술에 들어가셨습니다.”

한서진은 순간 아차 싶었다. 옆에서 송하나가 듣고 있는데.

“괜찮을 거야.”

“…….”

“회장님 이 정도에 쓰러지실 분 아니야. 걱정하지 마. 아무 일 없을 거야.”

송하나는 힘들게 고개를 끄덕였다.

============================ 작품 후기 ============================

땡!

흔들리는 제국은 진성그룹이 아니라 H그룹이었습니다!

PS :

걱정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사실 몸이 심각하게 아픈 건 아닙니다. 근데 제가 워낙 고질적인 저질 체력이고... 전 최상의 컨디션이 아니면 글이 잘 안 나오는 타입입니다.  구상이 안 떠오르고 문장이 안 써지는 걸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 양해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관해서 가당치도 않은 칼날을 던지는 분들... 그냥 없는 셈 치고 무시하겠습니다.

아무튼 걱정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이따가 또 연재를 무사히 할 수 있어야 할 텐데... 일단 지금은 다시 자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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