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55 흔들리는 제국 =========================================================================
라테호텔.
검은 세단이 정문 앞에 와서 정지했다. 정복의 직원이 급히 달려와서 뒷문을 열었고, 선글라스를 낀 이서나가 내렸다.
차분히 주변을 둘러본 그녀는 도도하게 걸음을 내딛었다. 두 경호원이 자연스럽게 뒤를 따랐다.
약속한 비즈니스룸에 도착한 이서나는 차분히 벨을 눌렀다. 잠시 후 문이 열렸다.
“어서 오너라.”
백철중 회장이 직접 그녀를 맞이하러 나왔다. 그녀는 두 경호원을 밖에 놔두고 혼자 들어섰다.
“의외네요. 회장님이 직접 절 보자고 하실 줄은 몰랐어요.”
“창용이는 좀 어떠냐?”
이서나는 순간 멈칫했으나 곧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백철중을 돌아봤다.
“벌써 아신 거예요?”
“H그룹 정보력도 상당하지.”
“해성의료원, 안 되겠네요. 환자 정보 하나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고.”
“앉거라. 너도 할 이야기가 많지 않느냐.”
백철중은 조금 냉담하게 분위기를 전환했다.
이서나와 백철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그녀는 차분히 백철중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굳이 이렇게 비밀스럽게 볼 필요가 있나요?”
이곳으로 오는 내내 이서나는 그 점이 궁금했다. 백철중 회장이 따로 연락을 한 점도 놀라웠지만, 이렇게 남들 눈을 피해 만날 일이 뭐가 있는지 신경 쓰였다.
“네가 진성그룹을 차지하도록 우리가 도와줄 수 있다.”
이서나는 속으로는 흠칫하면서도 겉으로는 태연함을 유지했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백철중이 이렇게 발 빠르게 움직일 줄은 몰랐지만.
“의외네요.”
“뭐가 말이냐?”
“전 회장님께서 직접 이 일을 챙기실 줄은 몰랐거든요. 형진이 오빠나 호진이 오빠를 보내시지 않고, 이렇게 나서실 줄은 생각도 못했네요.”
“소개해줄 사람이 있어서다.”
“소개요?”
이서나는 불현듯 조금 전 ‘우리’라고 한 말을 떠올렸다. 그게 H그룹을 뜻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단 말인가.
“이만 나오게.”
이서나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닫힌 방문이 열리며, 한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도 잘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한서진 대표?”
“오랜만에 뵙는군요, 이서나 대표님.”
“우리라고 한 게…… 두 분을 뜻하는 말이었나요?”
이서나는 조금 당혹스러운 눈으로 백철중을 돌아봤다. 그는 팔짱을 낀 채 가볍게 끄덕였다.
“왜, 한 대표가 이 자리에 참여하기에는 무게감이 적다고 느끼는 거냐?”
“아니요, 그건 아니죠. 다만 두 분의 조합은 당황스러워서…….”
“이상할 것 없다. 한 대표가 H반도체 출신이니, 나와 적지 않은 인연이 있지.”
한서진은 빈자리에 앉았다. 삼각으로 둘러앉은 세 남녀 사이로 진중한 공기가 흘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이서나였다.
“그렇다면, 두 분께서 저를 돕겠다는 건가요? 제가 그룹을 차지할 수 있도록?”
“그렇지.”
“한 대표는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이 자리에 나온 건가요?”
이서나는 한서진을 빤히 쳐다봤다. 조롱이나 의심이 아니다.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그는 천천히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저와 회장님은 이미 뜻을 모았습니다. 남은 건 이서나 대표님의 결정이죠.”
“음…… 작년 그 일 이후로 연락이 없어서 나는 한 대표가 용무를 좋게 보는 줄 알았는데.”
“나설 구실이 없어서 가만히 있었을 뿐이죠. 그때는 진성그룹이 굳건하게 돌아가고 있었으니까요.”
“지금은 빈틈투성이다, 이건가요?”
의미심장한 반문. 하지만 불쾌함은 담겨 있지 않았다. 오히려 한서진에 대한 호감, 그리고 미래에 대한 적당한 기대감이 담겨 있었다.
백철중이 입을 열었다.
“창용이 놈이 그리 된 건 안 된 일이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그룹을 불안하게 놔둘 순 없지 않느냐. 그건 창용이도 바라는 일이 아닐 게다.”
“역시 오랜 지기라서 아버지를 잘 아시는군요.”
“그놈이랑 지기였던 적은 없다.”
이서나는 가만히 피식거렸다.
이창용과 백철중의 오래 된 악연은 재계에서도 유명하다. 특히 굳건한 1위였다가 이혼 재산 분할로 2위로 떨어진 이후, H그룹과 진성그룹의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물론 그것은 이창용과 백철중 사이에 한해서일 뿐, 자녀 대에서는 썩 사이가 괜찮았다. 이서나도 백형진 등 백철중의 아들딸들과 친하게 지내는 편이고.
이서나는 즐거운 듯이 두 남자를 번갈아 돌아보다가 차분히 다리를 꼬았다. 나이든 백철중 회장 앞에서 다소 건방져 보이는 몸짓이지만, 이상하게도 잘 어울렸다.
“제가 뭘 드리면 되나요?”
“모바일 사업부.”
“그거면 되나요?”
“그거면 됐다.”
백철중은 힘 있게 대답했고, 한서진도 그렇다는 듯이 끄덕였다. 이서나는 잠시 고심하다가 다시 눈을 들었다.
“20, 아니 30%의 프리미엄을 받는 선에서는 사업부 매각이 가능할 거예요.”
“프리미엄까지 받겠다고?”
“아시잖아요. 손해까지 보면서 넘기면 제 그룹 입지가 흔들린다는 거. 그래서야 의미가 없죠.”
“……음.”
“원래라면 100%의 프리미엄을 준다 해도 넘기지 않을 사업이라는 거, 잘 아시잖아요.”
이서나는 도도하게 말했다. 백철중은 턱을 쓰다듬으며 깊은 고민에 잠겼다.
“대신 확실하게 매듭지어드리죠.”
“……좋다.”
백철중은 결국 수락했다. 이미 예상한 범위 안에서의 제안이었는지,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럼 이제 말씀해주세요. 두 분이 어떻게 저를 도와주시겠다는 건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짐작 가는 게 너무 많아서 탈이죠.”
이서나는 백철중과 한서진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싱긋 웃었다. 자신감이 넘치는 미소였다.
“재계 2위의 H그룹 총수, 그리고 500억 불의 청년 재벌. 그 두 분이 손을 잡고 저를 도와주신다는데, 얼마나 방법이 무궁무진하겠어요.”
그야말로 최고의 조합 아닌가. 영향력이면 영향력, 현금이면 현금. 그 무엇 하나 부족할 게 없는 지원 사격이다. 이용무가 이 일을 안다면 불안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한서진은 백철중과 눈빛을 교환한 뒤 입을 열었다.
“SJ인더스트리에서 수주한 반도체 파운더리 말입니다.”
“……겨우 그거요?”
이서나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반문했다.
“그 일은 나도 이미 알고 있어요. 설마 그 정보를 도움이라고 주려는 건 아니겠죠? 그럼 실망인데.”
“반도체를 찍어낼 때마다 2달러씩 손해 보는 계약, 이용무 사장의 입지에 조금 피해는 줄 수 있어도 결정적인 한 방은 되지 못하죠. 그렇게 해서라도 공장을 돌리고 회사를 운용하는 게 당시로서는 최선이었으니까요.”
“잘 알고 있군요. 나도 그래서 지금 섣불리 터트리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약간의 피해는 줄 수 있을지언정, 결정적인 타격은 주지 못한다. 오히려 폭로한 쪽이 그룹 내의 반발에 노출될 수 있었다.
“2달러의 적자를 2달러의 흑자로 바꿀 수 있습니다.”
“어떻게요?”
이서나는 소스라치게 놀랐으나, 필사적으로 감정을 눌렀다. 근거를 떠나서 정말 그게 가능하다면, 판을 뒤엎을 수 있는 강력한 카드가 된다.
“현재 진성전자는 5nm공정기술을 이용해서 슈나우저, 코카 스패니얼을 생산하고 있죠. 그래서 제조원가 중에는 ADSC에 지급하는 특허 로열티가 상당하고요.”
“잠깐, 설마……?”
“제가 ADSC에 이야기해서 한시적으로 로열티 조정을 해줄 수 있습니다. 2달러의 적자가 2달러의 흑자로 바뀌게 되는 거죠. 이서나 대표님의 뛰어난 협상 능력으로 말입니다.”
이서나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거다! 이거야말로 부친이 의식불명인 지금 이용무를 보내버릴 수 있는 강력한 한 방이다.
2달러 적자 계약을 따올 수밖에 없었던 동생의 무능함을 강조하고, 뒤를 이어 자신의 활약으로 그것을 흑자로 돌려놓는다면? 주주들은 무조건 자신의 편이 될 것이다.
이서나는 벅차오르는 가슴을 겨우 눌렀다. 붉게 상기된 얼굴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게 정말 가능한가요?”
“네, 5nm공정기술의 특허권자가 바로 저니까요. 그 정도 조율은 가능합니다.”
“하지만 한 대표가 보는 로열티 손해야 그렇다 쳐도, ADSC가 보는 손해는 어떡하려고요? 그들이 순순히 손해만 보고 물러나려 하지는 않을 텐데.”
기브 앤 테이크. 그들이 본 손해는 반드시 다른 식으로 보전을 해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거래는 성립되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한서진이 입김이 강하다 하더라도.
“그래서 한시적인 로열티 조정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아.”
이서나도 경영으로 잔뼈가 굵은 몸이다. 그 간단한 설명에서 모든 것을 이해했다.
그녀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양보한 4달러만큼 나중에 다시 가져가겠다는 거군요.”
“어쩌면 5달러가 될 수도 있지. 이자도 생각해야 할 거 아니냐.”
옆에서 백철중이 냉담하게 한 마디 했다. 한서진은 입을 다문 채, 차분히 이서나를 바라보았다.
전혀 주눅 든 눈빛이 아니다. 오히려 어떻게 할 거냐며,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이서나는 차분히, 아까와는 다른 웃음을 지었다.
“한 대표, 이미 내가 무슨 결정을 할지 알고 있군요.”
“중요한 것은 왕좌를 건 전쟁에서 일단 승리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요, 패자에게는 영원히 기회가 없죠. 승자만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법이니.”
승리해서 그룹을 가지면 된다. 그 후에 ADSC에 양보하는 적자는 얼마든지 다른 부분에서 보전할 수 있다.
지금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승계권을 쥐는 것. 그것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 출혈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녀는 팔짱을 끼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
“모바일 사업부와 5nm 로열티 조정. 제가 감당할 리스크는 그 두 개가 전부인가요?”
“그렇다.”
“예.”
“어차피 로열티 조정은 ADSC가 양보한 만큼 다시 돌려주는 것이니 애초에 리스크도 아니군요. 좋아요. 이 거래, 하겠습니다.”
백철중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잘 생각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이 도움은 잊지 않겠습니다.”
악수를 마치고 이서나는 한서진을 돌아보았다. 잔잔한 미소를 띤 얼굴은 조금의 불쾌함도 담겨 있지 않았다. 오히려 짙은 호감에 가까웠다.
“한 대표, 이제는 어엿한 재계 인사가 되었군요.”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칭찬 맞아요. 그것도 진심이죠.”
이서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잘해 봐요, 우리.”
“서나가 자네가 마음에 든 모양이더군.”
이서나가 돌아가고, 백철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서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까도 그랬지만, 칭찬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당연히 칭찬이지. 겨우 일 년 사이에 자네가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 아나? 지켜보는 입장에서 그저 대견하다네.”
백철중은 입맛을 다시며 덧붙였다.
“조금 아쉽고, 불안하기도 하고.”
“불안하다니요?”
“아아, 그런 게 있다네.”
외부에는 절대 공개할 수도 없고, 문서로 증거를 남길 수도 없는 빅딜이 이뤄졌다. 하지만 어느 쪽도 이 약속을 어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강자간의 신뢰였다.
“그룹 총수가 될 수만 있다면 손해를 감수하겠다는 것…… 사실 잘 이해가 되진 않습니다.”
“권력이란 게 원래 그렇다네. 음…… 아마 자네는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겠군.”
백철중은 보드카를 따며 기분 좋게 웃었다.
“아무튼 우리로서는 베스트 아닌가. 한 잔 하세.”
============================ 작품 후기 ============================
감기 걸렸나 봐여 머리가 아픔미다.ㅠㅜ
아픈 몸에 골골대면서도 딱지 닦으러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