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154화 (154/609)

00154  흔들리는 제국  =========================================================================

이창용 회장.

현 진성그룹의 정체성이나 다름없는 시대의 아이콘이다. 과감한 반도체 사업 투자로 지금의 진성전자를 일궈냈으며, 진성그룹이 다국적기업으로 거듭나게 만든 중심인물이다.

한국의 재계, 나아가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

그런 이가 쓰러졌다는 것은 한국 증권가가 뒤흔들릴 만한 비상사태였다.

「아무튼 대외비이니 자네도 조심하게.」

“많이 위급합니까?”

「원래 심장도 안 좋았고, 이것저것 문제가 많았던 모양이야. 이창용이도 내년이면 여든이니 어쩔 수 없지.」

“그렇군요.”

한서진은 수긍하다가 퍼뜩 생각났다.

“두 분 연세가 같지 않았나요?”

「크흠. 나야 평소 운동도 열심히 하고, 건강관리에 힘을 쓰지 않는가. 원래 건강체질이기도 했고.」

과연 건강체질이어서일까, 어린 와이프가 있어서일까.

아무튼 같은 나이인데 이렇게 차이가 난다는 게 조금 신기했다. 백철중은 도저히 70대로는 보이지 않을 만큼 정정한데.

「이창용이 일은 안 됐지만, 그 놈이 쓰러진 지금 진성그룹은 불안정한 상태일세. 서나 고년 야심도 만만치 않거든.」

협력관계를 요구하던 이서나를 떠올리며, 한서진은 조용히 쓴웃음을 지었다.

「다시 못 일어날 수도 있네.」

“그 정도로 심각합니까?”

「원체 지병이 많고, 나이까지 있으니. 지금 진성그룹은 단단히 비상이 걸려 있네.」

백철중은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방에서 진성그룹을 주시하고 있을 거야. 자네도 이 기회를 놓치지 말게.」

“…….”

「우리 그룹 역시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네.」

이창용의 부재는 어떤 식으로든 그룹의 분열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 호시탐탐 그룹의 승계권을 탐내는 이서나와, 후계자의 자리를 지키려는 이용무는 필연적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으니.

한서진은 불현듯 진성전자를 떠올렸다.

세계 제일의 반도체 생산능력을 자랑하는 공장. 비록 지금은 SJ인더스트리를 위해 설비를 돌리고 있다지만, 엄연히 SJ인더스트리의 소유는 아니다.

‘이번 기회에 잘하면?’

백철중의 은근한 목소리는 은연중에 그런 유혹을 자극했다.

증권가는 그 어느 때보다 빠르고, 민첩하게 돌아갔다.

진성그룹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감지한 증권가는 단숨에 이창용 회장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 거 아니냐는 추론에 도달했다. 물론 아직까지는 물적 근거가 없는 의심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작은 의심은 도미노의 첫 블록을 넘어뜨리기에 충분했다.

진성그룹 관련주가 일제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룹 관련주가 하한가로 도배될 정도는 아니었지만, 조심스럽게 하락을 점치는 매도 움직임이 일었다.

“해성의료원 분위기 장난 아니던데. 이창용 회장 신변에 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어.”

“진짜로 죽은 건 아니겠지?”

“설마 그럴 리가.”

고령에다 평소 지병에 시달리는 사람이다. 무슨 일이 생겨도 이상할 것은 없다.

문제는 그 범위가 어느 정도냐는 것이다. 일시적인 병환인지 아니면 그룹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떼어야 하는 정도인지.

“언론 확실히 틀어막고, 새어나가지 않게 조심해요.”

“알겠습니다.”

진성그룹은 상상 이상으로 큰 비상이 걸렸다.

이창용 회장은 갑작스러운 심장 발작으로 현재 코마 상태에 빠져 있었다. 의료진은 조금만 처치가 늦었어도 뇌사에 이르렀을 것이라 했다. 다행히 심장 문제는 해결했지만, 의식이 돌아올 기미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주주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서라도 회장이 위급하다는 사실은 최대한 틀어막아야 했다. 일단 필사적으로 정보 통제를 하고 있지만 언제까지 유효할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최악의 상황도 대비를 하셔야 합니다.”

의료진의 조심스러운 권고였다. 하지만 이용무는 불길한 소리 말라며 역정을 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만큼 부친의 상태가 위중하다는 뜻이었으니.

이서나도 모든 업무를 중지하고 급히 해성의료원으로 달려왔다.

“아버지는?”

“직접 확인해.”

이용무는 차갑게 대답했다. 이서나는 아무렇지 않게 그를 지나쳐서 의료진과 대화했다.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어렵습니다.”

좋지 않은 대답. 이서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아버지는 생전에 이미 확고한 승계 구도를 굳혀놓았다. 이대로 돌아가시면 그룹 승계는 동생 이용무에게 유리하게 돌아갈 뿐이다.

‘겨우 약점을 잡았는데.’

SJ인더스트리에서 따온 파운더리 계약.

제품을 생산할 때마다 2달러씩 손해를 보는, 투자자들이 알았다면 기함을 토할 만한 계약이다. 그 단서를 잡고, 증거도 확보했다.

이제 제때에 터트려 그룹을 흔들고, 아버지와 이용무를 압박하는 일만 남았는데, 하필 이런 일이 터지다니.

지금 터트려봐야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꼴이다. 이서나로서는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한 대표가 도와주면 좋은데.’

마지막으로 제안한 후, 한 번도 한서진과 연락한 적이 없었다.

그가 좋은 대답을 주지 않는데 이쪽에서 더 먼저 연락하는 것도 모양새가 아닌지라, 이서나는 자제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돼버린 이상, 그녀가 쓸 수 있는 카드는 제한돼 있었다.

‘그런데 이 판국에 한 대표가 큰 도움이 될까?’

도와주면 좋겠지만, 과연 이 사태를 뒤집을 만한 도움을 그가 줄 수 있을까?

이서나는 그저 답답했다.

지금으로서는 일단 부친이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한서진은 그날 저녁, 급히 약속을 잡고 백철중 회장을 만났다.

백철중 회장은 그를 보자마자 단언했다.

“심각한 상태인 게 확실하네. 우리 그룹의 정보실이 총 역량을 동원해서 알아낸 사실이야. 증권가에서도 이미 냄새를 맡았어. 진성그룹에서 언론을 통제하고 있지만, 곧 세간에 흘러나가는 것도 시간문제야.”

“정확히 상태가 어떻습니까?”

“심장 질환으로 코마상태에 빠진 거 같은데…… 일단 뇌사까지는 아닌 것 같네.”

백철중은 이창용의 건강보다는 그의 부재가 끼칠 부수 효과에 더 큰 관심이 있는 듯이 보였다.

한서진은 가만히 생각했다.

‘엘릭서라면 치료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췌장암 말기를 단숨에 치료한 엘릭서라면 이창용 회장의 노환도 치료할 수 있을지 모른다.

‘대신 진성전자를 달라고 하면 어떻게 되려나.’

엘릭서에 관한 비밀만 확실히 지킬 수 있다면, 엘릭서를 주고 진성전자를 받는 것도 나쁘지 않은 거래처럼 보인다.

정확히 탐나는 것은 진성전자 그 자체가 아니라 바로 제조공장이다. 어차피 진성전자의 지분은 전 세계에 쪼개져 있기에, 회장이 마음먹는다고 회사 자체를 통째로 줄 수는 없다.

그러나 제조공장만 인수하는 식이라면 저렴한 비용으로 가능할지도 모른다. 주주들의 반발이야 이창용 회장이 알아서 처리해야 할 몫이고.

‘문제는 약속을 제대로 지키냐는 건데.’

보안도 보안이지만, 기사회생한 후 이창용이 약속을 정말 지킬지를 장담할 수 없다. 제조공장을 넘긴다는 것은 이창용으로서도 모든 것을 걸어야 할 위험한 거래니까.

주주들은 물론이고 그룹 내에서도 온갖 반발이 뒤따를 것이다. 노인네가 죽다 살아나서 노망이 든 거라는 말이 나돌 수도 있는 일이다.

원래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갈 때 마음이 다르다고 했다. 아무리 자신이 500억 달러의 자산가라지만, 이창용 회장이 순순히 약속을 지킬까?

아니, 그가 약속을 지키려고 해도 과연 주변에서 그것을 가만히 두고만 볼까?

“잘하면 이번에 모바일 사업부를 가져올 수도 있겠어.”

“모바일 사업부요?”

의외의 말에 한서진은 살짝 놀랐다. 백철중은 새삼스럽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칼라 통신망 사업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는 모바일 사업부를 가져오는 게 유리하지.”

“아, 그렇군요.”

동상이몽이라고 할까. 자신은 반도체 제조공장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백철중은 휴대폰 제조공장을 탐내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미 흔들기에 들어갈 준비는 마쳤네. 서나 고년이 움직이기만 하면 바로 작업을 할 수 있을 텐데…….”

“이서나 진성물산 대표 말씀이시군요.”

“고년이 분명 이 일을 그냥 두고 보지 않을 거란 말이야. 만약 창용이가 깨어나지 않는다면, 고년한테는 그룹 승계를 노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니까.”

“두 분이 별로 친하지 않으신가 봅니다.”

“친할 리가 있겠나?”

백철중은 차갑게 말했다. 수십 년을 이은 두 재벌 총수의 불화는, 아무래도 정당한 라이벌 경쟁의식 수준을 오래 전에 초월한 모양이다.

“이창용, 그놈의 안위 따위는 관심 없네. 어떡하면 이 기회에 진성그룹을 흔들 수 있을까 생각 중이지.”

“음……. 사실 전 반도체 제조공장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반도체를?”

백철중은 의아하다는 듯이 눈을 치켜떴다.

“아무래도 관련 업종이니 그 심정은 이해되지만, 자네 사무소는 설계 위주 아닌가? 굳이 반도체 제조 공장이 필요한가?”

“있으면 괜찮을 것 같아서요.”

“진성 반도체 제조공장은 덩치가 불필요하게 크지 않나? 적당히 시제품 생산 설비를 갖추는 것으로 충분할 텐데?”

한서진이 SJ인더스트리의 소유주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백철중으로서는 당연히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 이거 너무 찔리네.’

언제까지 SJ인더스트리의 주인이라는 것을 숨겨야 하는지. 한서진은 양심이 찔렸지만, 선뜻 털어놓을 용기가 안 났다.

오랜 숙원 사업이던 H반도체를 SJ인더스트리에 빼앗기다시피 했는데, 사실대로 털어놓았다가는 왠지 그 다음날부터 송하나와 격리될 것 같아서다.

‘일단 칼라 통신망 사업부터 제대로 된 다음에…….’

적어도 빼앗긴 것보다는 큰 것을 선물로 안겨줘야 이실직고도 마음 편하게 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도 갖고 싶은데, 방법이 없을까요?”

“음……. 그건 불가능해.”

“역시 그럴까요?”

“진성전자는 지금 SJ인더스트리의 파운더리 계약으로 겨우 기사회생했는데, 그 핵심인 제조공장을 절대로 외부에 넘길 일이 없지. 서나 고년이 그룹 승계에 미쳤다고는 해도 제조공장을 건드리진 않을 거야. 진성전자는 그룹의 전부나 마찬가지고, 제조공장은 그런 진성전자의 핵심이니까.”

“그렇군요.”

한서진은 아쉬운 마음을 눌러야 했다.

백철중은 계속 말했다.

“하지만 모바일 사업부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지. 이서나도 그룹 내에 자기 라인이 제법 있으니까, 잘 꼬드기면 모바일 사업부를 가져오는 건 충분히 가능해.”

“순순히 줄까요?”

“이건 비밀인데.”

백철중 회장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진성전자가 SJ인더스트리에서 수주 받은 파운더리 계약, 그거 진성전자에 일방적으로 불리한 계약일세.”

“…….”

“제조원가가 터무니없이 낮아서, 반도체 하나를 찍어낼 때마다 오히려 2달러씩 손해를 보는 구조라네. 물론 그 정도 손해로 공장을 계속 돌릴 수 있다는 건 현재 진성전자로서는 나쁠 게 없지만, 이 일이 알려지면 타격이 제법 크지.”

매우 중대한 비밀이라도 되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말하는 백철중 앞에서, 한서진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아, 이럴 때는 무슨 표정을 지으면 좋은지 모르겠어.

“그 점을 공략하면 결국 모바일 사업부를 넘길 수밖에 없을 거야. 아, 이건 아직까지 우리 그룹만 알고 있는 중요 기밀이니까 절대로 발설하면 안 되네. 자칫 미리 새어나가면 효과를 볼 수 없어.”

“……걱정 마십시오, 회장님.”

“자네만 알고 있어야 하네. 꼭.”

============================ 작품 후기 ============================

이건 비밀인데.. 너만 알고 있어. 알았지?

아서가 황제가 아니라 왕인 이유는 대륙의 유일무이한 군주이기 때문입니다.

왕이 여럿 존재한다면 황제가 있을 수 있겠지만, 레노지안의 왕은 아서 하나뿐입니다.

인구는 250억 정도 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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