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53 흔들리는 제국 =========================================================================
3월 2일, 개강일이 되었다.
다소 늦게 일어난 한서진은 1층으로 내려오던 중 4층 문이 열린 것을 보았다. 안에서 우당탕 하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작게 노크를 했다.
“아침부터 왜 이렇게 요란이야?”
“말 시키지 마! 바빠!”
“개강 첫날부터 엠티 가냐?”
“나중에, 나중에.”
한서진은 1층 로비로 내려왔다. 사방이 통유리로 트인 공간에는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아침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는 위쪽에 대고 다시 한 번 외쳤다.
“빨리 안 오면 내가 다 먹는다.”
“기다려!”
잠시 후 기초 화장을 마친 한지혜가 재빠르게 내려왔다. 후다닥 테이블에 앉은 그녀는 수저와 젓가락을 쥐었다.
“아침부터 무슨 해물탕이야?”
“난 밥 안 먹으면 힘을 못써.”
그녀는 투덜대면서도 식사를 시작했다. 남매는 간간이 대화를 나누며 아침식사를 했다.
“오빠, 오늘 뭐 끌고 갈 거야? 저번에 새로 뽑은 거?”
“아마도?”
한서진은 얼마 전에 차량 몇 대를 새로 주문했다. 그 중 한 대는 정말 운이 좋게도 국내에 재고가 있었고, 다른 모델들은 아직 해외에서 바다를 건너 오고 있는 중이었다.
“나 그럼 포르쉐 끌고 가도 돼?”
“학교에 포르쉐를?”
“안 돼?”
“안 될 건 없는데, 그럼 애들이랑 거리감 있지 않을까?”
“어차피 나이 먹고 대가리 굵은 애들이랑 죽마고우 못 돼. 난 굳이 서민 코스프레할 생각 없어. 평생 없이 살았으니 이제 잘난 오빠 둔 위세 좀 부리면서 살고 싶어. 안 돼?”
저런 말을 밉지 않게 하는 것도 참 재주다. 한서진은 과연 누가 동생을 데려갈지 내심 궁금해졌다.
“그래라.”
“오라버니, 아예 포르쉐를 저 주시는 건?”
“안 돼. 나도 선물받은 차야.”
“쳇.”
한서진은 냉정히 선을 그었다.
식사를 마치고, 남매는 각각 차를 탔다. 한지혜는 금빛 광택이 맴도는 올리브그린의 차체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새 차 예쁘네.”
“포르쉐가 더 비싼 거다.”
“그래도 예쁘잖아. 새 차고.”
한서진은 피식거리며 원격 시동을 걸었다.
맥라렌 2017년 1080LT 스파이더.
5,500cc에 육박하는 배기량을 자랑하는, 날씬하지만 괴물 같은 힘을 지닌 녀석이다. 처음 한서진은 이 차를 보자마자 강한 느낌이 왔고, 주저없이 구매를 결정했다.
그래봐야 8억 5,000만 원 밖에 하지 않는, 그의 재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녀석이지만.
시동을 걸자 웅장한 배기음이 오케스트라처럼 울린다. 손에 쥐어지는 핸들의 감촉은 투박하면서도 섬세하다.
그는 가볍게 엑셀을 밟았다.
입학식. 첫 수강신청. 신입생 환영 행사. 대낮부터 벌어지는 술자리와 장기자랑.
한서진은 재학생의 입장에서 작년의 반복을 느긋하게 감상하고 있었다.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저 형이야?”
“저 오빠 맞지? 우리나라 최고 부자라던.”
“와, 특허 기술 하나 팔아서 500억을 벌다니…… 대체 어떤 세상일까.”
“단위를 정확히 말해야지. 500억 달러.”
“아무튼.”
이창용 진성그룹 회장을 넘어서는 자산가. 심지어 이제 겨우 26세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 사람과 같은 대학을 다니고 있다니, 신입생들은 그저 신기했다.
“500억 불은 계약금이고, 몇 달치 특허 로열티가 8억 달러인가 또 들어왔다던데.”
“대박. 완전 대박.”
“그 정도면 교수님들도 쩔쩔 매시겠네.”
500억 불의 위엄 때문인지, 신입생들은 한서진한테서 눈길을 떼지 못하면서도 좀처럼 거리를 좁히지 못했다.
조현석이 비서처럼 옆에 따라붙었다.
“형님, 오셨습니까.”
“그래.”
“아침에 슬쩍 봤는데 차 바꾸신 거 같더라고요.”
“어, 하나 새로 뽑았어.”
“이야, 역시 대단하십니다. 형님.”
조현석은 내내 싱글벙글거렸다. 500억 불의 자산가에게 마음 편히 형님 소리를 할 수 있는 것만 해도, 그 자체로 대단한 특권이나 다름없었다.
“작년 딱 이때 기억나네요. 그때 형님이 H반도체 정지원 선배님 직장 후배라는 거 알고 얼마나 놀랐는데요.”
“그랬었지.”
“그런데 불과 일 년 사이에 이렇게 큰 부자가 되시니 참 세상이 놀랍네요. 이제는 마음만 먹으면 H반도체를 통째로 살 수도 있지 않습니까.”
“…….”
사실 이미 샀는데? 한서진은 그 이야기가 나오자 괜히 조금 민망해졌다. 지금 H반도체는 SJ인더스트리의 한국 생산기지로 전락한 상태였으니.
“전 사실 조금 신기합니다. 형님 같은 분이 왜 해외로 안 나가고 이 좁은 나라에 있는지……. 지금 형님 실력이면 스탠포드든 MIT든 다 씹어먹고도 남을 거 같은데요. 그런 대학에서 제발 와달라고 사정 안 합니까?”
“거기 가나 여기 있으나 어차피 마찬가지야.”
“그 자신감, 역시 형님답습니다. 존경합니다.”
미국, 기회의 땅인 건 맞다.
하지만 미국에 사업 기반이 있다고 생활까지 그곳에서 해야만 한다는 법은 없다. 편안히 지내기에는 여기가 좋으니. 총기 단속도 확실하고, 아는 사람도 많고, 영어 안 써도 되고.
‘지금이 딱이지.’
정지원이 SJ인더스트리 경영 잘해주고 있고, 돈은 안전한 해외에 쌓아두고, 이곳에는 생활비 정도만 송금해서 쓴다.
한서진은 지금 생활이 딱 마음에 들었다.
반도체 연구소에 들어선 한서진은 못 보던 설비를 발견하고 의아해서 물었다.
“이거 못 보던 신형이네요?”
박효산 교수가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아, 방학 동안 주문했어. 진성전자 걔들이 드디어 약속 이행했잖아.”
“다행이군요. 지저분한 싸움까지 안 가서.”
진성전자는 연구비 지원 공증까지 했음에도 이행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내부 싸움이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증이 집행 권원의 효력을 지니고 있다 하나, 일개 교수가 대기업 그룹을 상대로 법적 권리를 실행하는 것은, 그것이 정당한 권리라 해도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이서나 대표가 그룹 상속을 포기한 걸까요? 그럴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는데.”
“글쎄, 일단 이용무 부회장이 SJ인더스트리 파운더리 계약을 따낸 게 그룹 내 입지 상승에 주효했다고 봐야지. 요새는 진성물산 측이 좀 잠잠하다고 들었다.”
“한 발 물러선 거로 봐야겠군요.”
“그렇겠지. 아무튼 진성그룹 쪽 일은 이제 쳐다보기도 싫다. 프로젝트 맡기겠다는 것도 죄다 거절 중이다.”
박효산은 넌덜머리가 난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참, 현진국 교수님이 USL 표준화 작업 골격을 대충 잡았다고 하던데, 나중에 한 번 확인해봐라.”
USL 표준화. 알파벳을 닮은 스코브리아늄 언어의 기본 형태를 잡아나가는 작업이었다. 음소와 음운, 음절 등을 구분하고 나아가 문법을 정리하는 방대한 작업이었다.
이전에는 지지부진했지만, 한서진이 뜻 해독본을 알려준 이후로 분석 작업은 속도에 탄력이 붙고 있었다.
“작업이 다 끝나면 발음기호대로 읽는 건 못해도 정확한 뜻을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거라시더라. 현 교수님도 수퍼컴퓨터가 좋긴 좋다고 감탄하시던데.”
“전 인문학 교수님이 수퍼컴퓨터를 연구 작업에 자유자재로 운용하시는 걸 보고 오히려 놀랐습니다. 그 연세에 보통 그런 발상 자체가 쉽지 않을 텐데요.”
“그건 나도 그래.”
미스릴, 즉 스코브리아늄 언어의 완벽한 해독. 그 작업이 끝나면 통찰안과 그 꿈의 비밀에 한 발짝 다가갈 수 있을까. 한서진은 그 날이 손꼽아 기다려졌다.
박효산은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칼라 통신망은 어떻게 돼가고 있냐?”
“일단 H그룹에 일임했습니다만, 지금 백철중 회장님이 그룹의 사활을 걸고 이 일에 매달리고 계십니다. 올 상반기 안으로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우리나라 통신 카르텔도 장난 아닌데. 방해 작업이 만만치 않을 거야.”
“하지만 H그룹은 재계 2위죠. 재계 1위인 진성그룹은 기간통신사업을 하지 않고 있고요.”
“걱정도 되고, 기대도 된다. 너무 어마어마한 파이라서……. 미국에서는 말 없냐?”
“갑자기 미국이 여기서 왜 나옵니까?”
“아니, 보통 이렇게 파급력이 큰 기술이 등장하면 미국에서 몰래 찾아와서 이민오라고 권유하고 그러지 않냐? 영화에 보면 그런 장면 많던데.”
“없었습니다, 없었어요.”
한서진은 미국이라면 별로 걱정하지 않고 있었다.
자신의 사업기반은 미국에 있다. 즉, 미국이 보기에 자신은 건전한 미국 기업가다. 황금알을 낳는 오리에게 굳이 스트레스를 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시민권을 따두면 더 확실하겠지?’
그런 생각도 설핏 들었지만, 한서진은 굳이 시민권을 따려고 하지 않았다. 지금도 충분히 별 문제 없는데 괜히 먼저 자청할 필요는 없으니.
그때 문자가 왔다. 내용을 확인한 한서진은 쿡 하고 기분 좋게 웃음을 터트렸다.
“왜?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어?”
“구글이 모든 데이터센터 서버를 Z7B로 교체하기로 결정했답니다. 지금 계약서에 싸인 했대요.”
“오, 그거 잘 됐구나. 축하한다. 떼돈 벌겠네.”
“Z7B를 생산해줄 제조업체를 찾아야 할 것 같은데요. 지금 SJ인더스트리의 생산능력으로는 턱도 없어서요.”
Z7B.
프로토타입 수퍼컴퓨터 Z7(정확히는 Z7A)을 개조한 것으로, 대규모 데이터 서비스 제공을 위한 범용성과 확장성, 안정성에 좀 더 신경을 쓴 모델이다.
Z7A와 성능상의 차이는 크게 없지만, Z7A가 소규모 작업의 초고속 연산 처리 능력에 중점을 둔 것과 달리, Z7B는 대규모 작업의 안정적인 병렬 처리 능력에 중점을 두었다.
간단히 말해 Z7A는 핵융합 연구소, Z7B는 포털사이트 서버에서 쓰기 좋게 차별성을 갖고 있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Z7B에는 메모리 반도체인 코카 스패니얼이 엄청나게 장착돼 있다.
“작년까지만 해도 그저 머리 좋은 천재 대학생이었는데, 이제는 어엿한 글로벌 기업가가 되었구나.”
박효산이 대견하다는 듯이 말했다. 한서진은 조금 쑥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부끄럽네요. 갑자기 그런 말씀 하시니.”
“넌 좀 거만 떨어도 돼. 너무 겸손해서 탈이다.”
박효산은 팔짱을 낀 채 말을 이었다.
“올해 우리 학교 이공계 수석과 차석부터 해서, 15등까지 모두 우리 학부에서 나온 거 알지?”
“그랬어요?”
“최상위권 학생들이 K공대와 P공대 다 포기하고 우리 학교, 우리 학부에 지원했어. 명실공히 우리나라 이공계 최고 학부가 됐다. 그 애들이 뭔 바람이 불어서 하루 아침에 우리 학부에 우르르 지원했겠냐?”
한국대 반도체공학부는 작년까지만 해도 국내 ‘톱클래스’ 학부였다. 그러나 올해에는 명실공히 ‘압도적인 원톱’으로 등극을 한 것이다.
“걔들이 다 너 하나 보고 들어온 거야. 네가 우리 학부를 이렇게 끌어올렸어. 교수로서 고맙고, 대견하다.”
“닭살 돋습니다. 그만하시면 안 돼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 저녁에 신입생들 상대로 강연이나 한 번…….”
“저 바쁩니다. 이따가 회사에도 나가봐야 해요.”
“잠깐만 시간 내줄 수도 있잖냐.”
“안 돼요. 민망해서 저 그런 거 못해요.”
“왜, OT에서는 잘만 하더만.”
그렇게 끈질기게 부탁을 하고, 뿌리치고 있는데 돌연 전화가 울렸다. 발신인은 백철중 회장이었다.
“잠시만요.”
한서진은 양해를 구하고 얼른 전화를 받았다.
“예, 회장님. 한서진입니다.”
「……진성그룹에 일이 생겼네. 자네는 아직 모를 것 같아서 말해주려고.」
“예?”
「절대 매스컴에 흘러나가면 안 되네.」
백철중의 목소리는 심상치 않았다. 한서진의 표정도 돌연 무겁게 가라앉았다. 대체 무슨 일일까?
「이창용이가 쓰러졌네.」
“이창용 회장님이 말입니까?”
============================ 작품 후기 ============================
리미트리스 드림 표지가 나왔습니다.
제 빈약한 일러스트 설정에도 불구하고 400% 이상의 퀄리티를 뽑아내주신 일러스트 분께 감사를.. 아서 왕은 정말 잘생기게 나왔고 한서진은 어엿한 청년 기업가처럼 나왔군요.
작품설정에 포르쉐와 맥라렌 참조 이미지를 올렸습니다. 대충 서진이가 이렇게 생긴 차를 타고 다닌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