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52 과거와 현재 =========================================================================
“서진아. 엄마 말도 좀 들어 봐.”
모친이 입을 열려고 했다. 그러나 한서진은 손바닥을 내밀며 제지했다.
“지혜가 이제 곧 올 거예요. 거의 다 왔대요.”
“지, 지혜가?”
“그래도 딸인데 보고 가셔야죠. 안 그래요?”
또각거리는 굽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럴수록 모친의 낯빛도 파리하게 변했다. 한서진은 벗어둔 재킷을 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고 싶은 말 참 많았는데, 생각만큼 잘 안 되네요. 지혜랑 마저 식사하시고, 일어나세요.”
“서, 서진아.”
“오빠, 나 왔어.”
모친이 막 한서진을 붙잡으려는 찰나, 한지혜의 상큼한 목소리가 분위기를 깨뜨렸다. 모친은 손을 뻗는 자세 그대로 굳었다가 천천히 한지혜를 돌아보았다.
모녀의 눈이 허공에서 부딪친다. 한지혜는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작게 손을 흔들었다.
“진짜 오랜만이네, 엄마.”
“…….”
“오빠는 그만 가 봐.”
한서진은 조금 망설였으나, 뒤돌아보지 않고 그 자리를 떴다. 마무리를 동생에게 맡기겠다는 것, 그게 약속이었으니까.
한지혜는 겉옷을 벗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래도 꽤 많이 드셨네. 마저 들어. 오늘 아니면 평생 언제 이런 음식 먹어보겠어?”
“지혜야.”
“일단 밥부터 먹자. 응?”
한지혜는 웃으며 말했고, 모친은 결국 다시 자리에 앉았다.
“오빠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
“하긴, 경찰서에 물어보면 그냥 다 알려주지 참. 우리나라는 그놈의 유교사상 때문에 개인정보 보호고 뭐고 없다니까. 쯧쯧.”
“한지혜. 너 왜 이래.”
“그러는 엄마는 왜 이러는데?”
“…….”
“대체 무슨 꼴 기대하고 찾아온 거야?”
모친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이런 반응을 예상했다. 자신이 낳은 딸이기에 누구보다 그 속을, 성정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가급적 딸은 마주치지 않기를 바랐던 건데…….
“지혜야. 오해가 있겠지만, 난 그냥…….”
“그런 거 없어. 이미 다 알아보고 왔으니.”
한지혜는 핸드백에서 태연히 서류 봉투를 꺼내 내밀었다. 모친은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내용물을 꺼냈다.
돈 같은 것은 들어있지 않았다. 몇 장의 사진과 A4 용지 더미가 들어있을 뿐이었다.
사진에 찍힌 중년 남자의 모습을 본 모친의 얼굴색이 변했다.
“일주일 동안 좀 알아봤는데, 나름 잘 살고 계시던데? 아들 돈 훔쳐서 도망간 인생 치고는 꽤 깔끔하시던데. 그 아저씨랑 가게 장사하는 거, 그럭저럭 먹고 살 만큼은 매출 나오는 거 같고.”
“…….”
“그 아저씨는 아나? 엄마가 자기 아들 돈 훔쳐서 왔다는 거. 아니면 그 아저씨가 부추겼나?”
“한지혜.”
“더 자세히 알아볼 수도 있었는데 기분만 더러워질 것 같아서 관뒀어. 아무튼 무슨 거짓말을 해도 안 통해. 빚을 졌다느니 누가 죽는다느니 뭐니. 이미 다 알아보고 왔으니까.”
상쾌하면서도 차갑기 그지없는 목소리. 딸이 이런 표정일 때는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내가 엄마 딸이라서 엄마 잘 알지. 더 잘 먹고 잘 살고 싶어서 왔잖아. 돈 좀 달라고. 응?”
“그런 거 아니야. 난 그냥, 미안해서…….”
“씨알도 안 먹히는 거 알면서 왜 이러실까. 아무튼.”
팔짱을 낀 채 지그시 바라보던 한지혜는 지갑에서 수표 한 장을 꺼내 자신의 앞에 놓았다. 수표에 적힌 숫자를 확인한 모친의 눈동자가 평정심을 잃고 흔들렸다.
무려 50억. 가난한 서민에게는 꿈도 꿀 수 없는 거액이다. 그야말로 인생을 바꿀 수도 있는 금액.
“너, 그 돈이 어디서…….”
“오빠가 며칠 전에 준 용돈.”
“…….”
“주려는 건 아니니까 착각은 말고.”
한지혜는 두 손으로 턱을 괸 채, 싸늘한 눈으로 모친을 주시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이 돈, 엄마를 위해서 전부 쓸 수도 있어.”
모친은 굳은 얼굴로 바라봤다. 긍정적인 의미에서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은,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내 성격 잘 알지? 이 돈, 평생 엄마를 괴롭히는 데 쓸 수 있단 뜻이야.”
“…….”
“예를 들어서 그 아저씨한테 눈 휘둥그레질 만큼 돈 많이 줄 테니까 엄마 버리고 떠나라고 하면 어떨까?”
“지혜야. 그러지 마.”
“응, 안 그럴 거야. 엄마 하는 거 봐서.”
꾹 다문 입에서 괴로운 숨소리가 비집듯이 새어나왔다.
“내가…… 어떡하면 되겠니?”
“지금까지처럼 우리 인생에서 없는 사람 돼줘. 아니, 오빠 인생에서 없는 사람 돼줘.”
“…….”
“오빠와 얽히려고 하지 마. 오빠 앞에 나타나지도 말고, 연락도 하지 마. 어떤 식으로든 오빠 흔들려고 하지도 마. 날개 펴고 훨훨 날려는 사람, 발목 잡고 매달리지 말란 소리야.”
“한지혜. 내가 찾아온 건 돈 때문이 아니라…….”
“돈 때문이잖아. 내가 엄마를 몰라?”
한지혜는 차갑게 조소하며 말을 이었다.
“엄마 원래 옛날부터 이기적이었어. 오빠만 바보같이 몰랐을 뿐. 아, 나도 좀 설마 하긴 했다. 그래도 자기 아들 돈 훔쳐서 잠적할 정도로 막장은 아니라고 생각했거든.”
드라마 같은 반전은 없었다. 자녀 대신 남자를 선택한 모친은 딱 그만큼의 수준으로 살고 있었다. 적당히 생활비 걱정하고, 적당히 쓴맛에 시달리며, 적당히 가난한 인생.
도박 빚에 시달리는 인생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들딸 버린 만큼 잘 먹고 잘 사는 것도 아니다.
“이건 딸로서 부탁하는 게 아니라, 오빠 가족으로서 보내는 마지막 경고야. 그러니 무시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지금 기분 같아선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거든.”
“…….”
“혹시 알아? 내가 나중에 마음이 풀리면, 말년에 늙어서 엄마 거동도 못하고 그럴 때 요양원 정도는 넣어줄지도 모르잖아. 안 그래?”
한지혜는 전화번호가 적힌 포스트잇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나중에 요양원 들어가고 싶을 때 연락해. 그때에는 내가 마음이 풀려 있기를 기도하고.”
돌려 말했지만, 한서진에게는 연락하지 말란 소리다. 할 말 있으면 무조건 자기를 통하라는, 분명한 경고.
한지혜는 잊지 않고 수표를 챙겨 넣으며 등을 돌렸다.
“계산은 오빠가 했으니까, 마저 들고 일어나.”
―기다려. 나도 곧 나가.
포르쉐에 타서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는데, 한지혜로부터 톡이 왔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주차장에 있다고 답톡을 보냈다.
잠시 후 운전석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눈이 마주친 한지혜는 피식 웃고는, 조수석에 얼른 탔다.
“울고 있으면 어쩌나 했는데, 안 그러네?”
“내가 미쳤다고 우냐.”
“오빤 엄마 앞에서 언제나 호구였잖아. 그래서 가슴 아파서 몰래 울고 있을 줄 알았지.”
“이젠 안 그래.”
한지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마 이제 오빠한테 연락 안 할 거야.”
“네가 한 성격하긴 하지.”
“오빤 정말 아무렇지 않은 거지?”
한서진은 피식거리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초라하고 볼품없던 모친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럼에도 아무런 동요가 없던 아까의 감정이 기억났다.
신기했다. 이런 반응은 상상도 못한 것이었다.
“되게 아프거나, 아니면 화가 날 줄 알았어. 그런데 어느 쪽도 아니더라.”
“…….”
“서영이 다시 만났을 때랑 비슷한 기분이었어. 그냥…… 내 안에 엄마 자리는 더 이상 없더라고. 그거뿐이야.”
모친이 다시 연락 왔을 때는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혹시 무슨 사정이 있지 않았을까? 자식까지 버리고 도망을 갈 수밖에 없었던 만큼.
마찬가지로, 염치없지만 다시 찾아올 만큼 중대한 사정이 생긴 것은 아닐까?
그러나 직접 마주치고, 분명히 깨달았다.
자신은 더 이상 모친의 그런 사정이 알고 싶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별로 궁금하지도 않을 만큼,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별로 걱정되지도 않을 만큼, 어느덧 모친은 낯선 존재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왜 버리고 도망갔는지 궁금하지 않았고, 어떤 염치로 다시 나타난 건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일방적으로 할 말만 내뱉고 일어섰던 것이다.
“오늘 엄마 만나기 잘한 것 같아.”
“또 엄마란다. 그런 사람이 무슨 엄마.”
“안 만났으면 계속 몰랐을 거 아니야. 내가 이렇게…… 엄마한테 아무 감정이 없다는 사실조차도.”
그 말에 안심이 되었는지, 한지혜는 소리 없이 웃었다.
“근데 돈은 어디에 쓰려고 받아갔어?”
“엄마 뒷조사 좀 한답시고. 그냥 별 거 없더라. 딱 우리가 상상하는 그만큼대로 살던데. 아, 엄마 앞에서 남은 돈 보여주면서 자랑도 좀 했어. 아마 지금쯤 속이 뒤집어졌을 거야.”
“많이 남았겠네.”
“절대로 안 돌려줄 거야. 용돈 가지고 그러는 게 어딨어.”
“달란 말은 안 했다.”
한서진은 피식거리며 차를 출발시켰다.
주차장을 나서는데, 문득 저 멀리 눈에 익은 모습이 보인다. 초라하고 쓸쓸한 그 뒷모습은 모친을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한서진은 굳이 누구인지 확인하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게 핸들을 꺾으며, 반대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마음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다.
그저 여느 때처럼 덤덤했고, 이런 자신이 신기했다.
그날 저녁.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고 있던 송하나는 문득 핸드폰이 진동하는 것을 보았다. 톡 메시지를 확인한 그녀의 입가에 함박웃음이 어렸다.
그녀는 곧 겉옷을 뒤집어쓰듯이 꿰입으며 방을 나섰다. 현관문을 나서서 정원을 걷는 동안, 그녀의 미소는 어느새 새침하게 변해 있었다.
정문 옆의 쪽문을 살짝 열고 나가자, 익숙한 은색 포르쉐가 보였다. 그녀는 얼른 조수석 문을 열고 탔다.
“오빠. 웬일이에요? 갑자기 찾아오시고.”
“그냥. 왠지 네 생각이 나더라.”
“오늘 일은 잘 되셨어요?”
“나름 잘 된 것 같아.”
“다행이에요.”
배시시 웃는 송하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한서진이 입을 열었다.
“너 이제 열아홉이랬던가.”
“네. 어휴, 지옥의 고3이 시작됐어요. 내 인생에 그런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생각해둔 학교는 있어? 전공은?”
“학교야 성적 맞춰 가는 거고, 전공은 아마도 경영이나 경제 쪽 가지 않을까 싶어요. 아빠도 그런 쪽 원하시고.”
“의외네. 난 네가 패션 같은 거 관심 있을 줄 알았는데.”
“패션 사업을 하려면 경영을 배워야지요. 어차피 제가 디자이너를 할 건 아니잖아요.”
“그렇구나.”
송하나는 생각만 해도 끔찍한지 한숨을 내쉬었다. 입시지옥은 재벌 막내딸이라 해도 별다르지는 않은가 보다.
“그래도 고액 과외 같은 거 할 거 아냐? 그럼 좋은 대학은 쉽게 갈 것 같은데.”
“과외 한다고 다 되나요. 선생이 잘 가르쳐야지요. 그리고 전 공부가 영 적성이 아니라……. 좋은 대학 갈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좋은 대학이면, 어떤 대학?”
“사실 저도 한국대 가는 게 꿈이거든요.”
송하나는 또 한 번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지금 성적으로는 꿈도 못 꾸니까……. 과외 선생님들이 잘 가르치는 편도 아니고. 고민이 많아요.”
“음…… 그럼 내가 가르쳐줄까?”
“네? 오빠가요?”
송하나는 놀랍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서진은 멋쩍게 머리를 긁으면서도 말을 이었다.
“나도 밑바닥부터 공부 시작한 거라 가르치는 건 잘 할 수 있을 것 같거든.”
빈말이 아니었다. 통찰안의 힘을 빌리면 과외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을 테니까.
송하나는 배시시 웃으며 끄덕였다.
“저야 그래주시면 좋죠. 그럼 만약 제가 한국대 붙으면 오빠랑 선후배 되는 건가요?”
“재밌겠네, 대학생활.”
“저도 재밌을 것 같아요. 꼭 한국대 가야지.”
과외 일정이라든가, 근황이라든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40분이 훌쩍 지났다. 송하나는 아쉬워하면서 작별 인사를 했다.
“이만 들어가 볼게요. 공부하다가 나온 거라.”
“그래. 열심히 해.”
“네, 약속 잊지 말아요.”
“어.”
포르쉐가 멀어지는 것을 배웅하고 난 송하나는 사뿐사뿐 집으로 들어갔다. 현관문을 들어서자 마침 1층 거실을 지나가던 송지현이 물었다.
“뭐 하느라고 밖에서 이렇게 오래 있어? 이 추운 날씨에.”
“집 앞에서 친구 잠깐 만났어. 아, 나 다음 주부터 친구랑 둘이서 외부 과외 받기로 했어. 엄마도 그렇게 알아.”
송지현은 의아한 듯이 눈을 크게 떴다.
“너, 과외 안 받아도 어차피 전교 1등이잖아. 과외는 질색을 하던 애가 웬일로 과외 타령이니?”
“과외 받아야 좋은 대학 가잖아. 그래도 고3인데.”
송하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후다닥 위층으로 올라갔다.
송지현은 딸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학교에서는 수시로 한국대 충분히 간다고 했는데……. 설마 이제 와서 정시라도 볼 생각인가?”
============================ 작품 후기 ============================
암마 파트는 이렇게 일단락했습니다.
사실 좀 고민이 많았습니다. 굳이 엄마를 등장시키지도 않아도 되는데.. 또 달리 생각하면 언젠가는 찾아올 수밖에 없고. 아무래도 주인공이 유명하다 보니까요.
사실 저는 독자분들의 멘탈을 좀 더 저열하게 자극하는 방식으로 전개를 할 수도 있었습니다만...-_- 제가 글은 못 쓰는데 그런 건 또 잘합니다.;
근데 안 그래도 갈 길이 먼데 굳이 그런 식으로 분량을 늘리고 싶지 않았고, 또 깔끔한 걸 좋아하는지라 이렇게 일단락을 지었습니다.
청량한 사이다를 못 드린 건 죄송하지만... 큰 사이다에는 큰 고구마가 따르는 법이라, 먹다가 체하시는 분이 있을지도 몰라 이 정도로만...ㅎㅎ;;
잊지 마세여.
큰 사이다에는 큰 고구마가 따릅니다!
사이다를 먹어도 되는 건 고구마를 씹을 준비가 된 사람뿐이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