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51 과거와 현재 =========================================================================
「오빠는 만나지 마. 내가 해결할게.」
“네가?”
「오빠 옛날부터 그 여자한테 유독 물렀잖아. 지금도 봐봐. 엄마라 부르지 말고 생모라 부르기로 나랑 약속했으면서, 또 엄마라 부르고.」
“…….”
「오빠는 그 여자한테 물러서 안 돼. 그 여자가 눈물 좀 짜고 하면 또 마음 약해져서 홀라당 넘어갈 거야. 아예 원천 차단하는 게 나아.」
“지혜야. 나 그냥 한 번 볼게, 생모.”
「오빠.」
“돈 줄까봐 걱정은 하지 마. 네 허락 없이는 만 원짜리 한 장도 안 줄 테니까.”
「…….」
“그냥 확실히 하는 게 나을 것 같아. 괜히 이상한 미련만 남을까 봐 그래.”
「정말 보기만 하는 거지? 처리는 나한테 맡길 거지?」
“당연하지.”
수화기 너머로 크게 한숨을 내쉬는 게 들린다. 한서진은 덤덤히 동생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오빠, 나한테 지금 용돈 얼마까지 줄 수 있어?」
“얼마나 필요한데?”
「그냥 최대한 많이 줄 수 있는 만큼. 나 지금 용돈 꼭 필요해.」
“바로 쏴줄게.”
갑자기 왜 그런 요구를 하는지 의아했으나, 한서진은 두 말 않고 승낙했다. 카드 말고 현찰이 필요한 일도 있으리라.
망설이다가 한지혜가 다시 말했다.
「그리고 오빠, 당장은 만나지 마. 일주일만 시간을 끌어. 내가 좀 알아볼 테니까…….」
“알았어.”
한서진은 전화를 끊었다.
가만히 앉아 있으니, 불현듯 아까 걸려왔던 모친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살짝 쉰 듯한, 힘이 빠진 채로 면목이 없어서 어쩔 줄 몰라 하던 음성이.
―서진아, 미안해. 엄마가 그땐…… 정말 잘못했어.
이상하리만치 가슴이 잔잔하다.
예전, 췌장암 말기였을 때는 만약 모친을 다시 찾으면 하고픈 말이 참 많았었다. 원망, 미움, 그리움, 분노 등등.
그러나 지금은 그때의 자신이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그래서 궁금했다. 만약 직접 모친의 얼굴을 보게 되면, 그때는 다를까?
죽었던 옛 감정이 다시 되살아날까? 아니면 죽은 채로 묻히게 될까?
그는 전화기를 들었다.
“하나야. 지금 시간 좀 내줄래?”
한서진은 약속장소인 라테백화점 인근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저쪽에서 익숙한 차 한 대가 다가왔다. 차도 이쪽을 알아본 듯 속도를 줄이며 정차했다.
뒷좌석에서 내린 송하나가 총총걸음으로 다가와 조수석 문을 열고 탔다.
“오빠. 많이 기다렸죠.”
“아니야. 나도 방금 도착했어.”
“그런데 웬일로 저한테 옷을 사자고 하세요?”
“왜, 몇 번 같이 사고 그랬잖아.”
“그래도 오빠가 같이 가자고 먼저 말 꺼낸 건 이게 처음이잖아요.”
“그랬나?”
송하나는 밝게 웃으며 물었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어요? 혹시 곧 개강이어서?”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 내가 이만큼이나 잘 살고 있다는 모습을.”
그 순간 거짓말처럼 송하나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러나 한서진은 미처 보지 못한 채, 가라앉은 표정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나도 정확히 무슨 감정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는데…… 일단은 보여주고 싶어. 내가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를. 옷으로라도.”
“혹시…… 전 애인이에요?”
“아니, 생모야.”
“아아. 그렇구나.”
목소리 톤이 미묘하게 활기를 띠었다. 그러나 한서진은 그 작은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옛날 우리 집, 정말 가난했거든.”
“지혜 언니한테 대충 들었어요.”
“가난하지만, 그래도 어느 가정보다 화목하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내 착각이더라.”
아들이 힘들게 모은 예금 전부를 인출해서 잠적한 모친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저리다.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겨우 사천만원에 모자지간을 포기했다는 그 선택 때문에.
송하나가 손을 뻗어 가만히 어깨를 짚었다. 그는 슬쩍 옆을 돌아봤다. 활발하고 상냥한 미소에 마음이 조금 녹아내렸다.
“걱정 마요. 제가 오늘 최고로 근사하게 코디해줄게요. 이런 잘난 아들을 내가 왜 버렸을까 하고 땅을 치고 후회할 만큼.”
“……부탁 좀 하자.”
“그럼 차부터 돌려야겠어요. 백화점은 안 돼요.”
“왜?”
“백화점 말고, 전문 디자이너 매장을 찾아가야죠. 일단 청담동으로 가요.”
생긋 웃는 미소가 참으로 예뻤다.
“제가 아는 분들 좀 있어요.”
“중요한 건 디테일이에요.”
파리에서 무슨무슨 패션 수상을 밥 먹듯이 했다는 디자이너는 의외로 살집이 두둑한 30대 남자였다. 그런데 둔해 보이지 않고 오히려 친근감이 든다는 점이 신기했다.
“명품? 나 명품이오 하고 팍팍 티를 내는 것들은 죄다 천박한 스타일이죠. 그거 알아요? 진짜 돈 많은 사람들은 명품 로고가 안 보이게 해서 입는다는 거. 로고 보여주는 걸 매우 싫어해요. 천박하거든.”
“아, 네.”
“그냥 딱 봤을 때 아리까리한 거, 어디 브랜드인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좋아 보여, 디테일이 살아 있어, 그런데 아무리 자세히 봐도 어디 껀지는 잘 모르겠어, 이렇게 입는 게 진짜 잘 입는 거지.”
“얀 선생님, 우리 오빠 좀 잘 부탁해요.”
“하나 쏭, 아무 것도 걱정하지 마. 내 손끝에 모든 걸 맡기기만 하면 돼.”
나른한 듯 졸린 듯한 목소리. 그런데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하나 쏭, 언제까지라고?”
“오빠, 언제 입을 거예요?”
“약속 날짜가 일주일 뒤니까…….”
“5일 뒤에 찾으러 와요. 하나 쏭이 올 거야?”
“같이 올게요.”
“라져 댓.”
미스터 얀이라는 디자이너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한서진의 이곳저곳을 치수를 쟀다. 마치 음악을 지휘하듯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손길이다. 둔해 보이는 몸집과 달리 몸놀림은 조금도 둔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송하나가 잠시 다른 진열품 구경을 하러 간 틈을 타서, 치수를 재며 미스터 얀이 물었다.
“하나 쏭 애인이에요?”
“아, 아닙니다. 그런 건.”
“그래요? 하나 쏭이 남자 데리고 오는 건 처음 보는데. 난 또 애인인 줄 알았어요. 둘이 잘 어울려서.”
“그냥 친한 동생이에요.”
“이해해요. 원래 다 그렇게 시작하니까.”
“…….”
“잊지 마요. 중요한 건 디테일이에요, 디테일.”
미스터 얀은 치수를 재던 줄자를 접으며, 덧붙였다.
“디테일이 명품을 만드는 거죠. 옷이든, 사람이든.”
약속한 날이 되었다.
아침이 되자 한서진은 송하나와 함께 청담동 매장에서 찾아온 옷을 꺼내 들었다. 먼저 바지를 입고, 셔츠를 입었다. 그 위로 재킷을 걸치자 말끔한 정장이 완성되었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다소 낯설다. 누가 봐도 근사한 청년 기업가의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화려한 디자인은 아니었다. 오히려 얼핏 보면 단출하고 간결한 라인이다.
그러나 조금 가까이에서 보면 감출 수 없는 우아한 질감이 시선을 빨아들인다. 멀리서는 보이지 않은 세심한 디자인이 촘촘하게 그 위로 박혀 있다.
안목이 뛰어난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알아봤다는 만족감을 줄 것이고,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는 숨어 있는 은은한 화려함에 압도당하는 느낌을 줄 것이다.
한서진은 포르쉐 키를 집어 들었다.
약속장소는 한강 근처에 위치한 진성호텔 레스토랑이었다. 식사 1인분에 수백만 원을 넘어선다고 했던가. 이제 그에게는 먼지와도 같은 돈이었지만.
모친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아마 길을 헤매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서진은 매니저의 안내를 받아 예약석에 앉았다.
한강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고 조용한 룸이었다. 한서진은 턱을 괸 채 멀리 한강을 지그시 주시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서진아.”
귀에 익은, 하지만 낯설게 느껴지는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한서진은 사색에서 깨어나 그쪽을 돌아봤다.
신기하게도, 심장의 맥박은 평소와 다름없는 고요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잘…… 지냈어?”
모친은 어색하게 말했다. 한서진은 차분하면서도 빠르게 모친의 위아래를 훑었다.
나름 신경 써서 차려 입은 듯하지만, 실오라기 하나하나마다 각인처럼 박힌 찌든 삶의 자취를 숨길 수가 없다. 오랫동안 가난을 공유했었기에, 성공한 지금 더 잘 느낄 수 있었다.
숨길 수 없는 가난의 향취, 그 지긋지긋함을.
그는 태연히 말했다.
“앉으세요.”
인사 대신 앉으라는 권유. 그 안에 담긴 거리감을 읽었는지 모친은 조금 움찔했다.
“식사는 제가 미리 시켰습니다. 고기 좋아하시잖아요.”
“어, 응.”
“여기 가게는 저도 처음 와 보는데, 아는 여동생이 소개해주더라고요. 맛 괜찮고 서비스도 좋다고. 다음에는 지혜랑 한 번 와보려고요.”
“그래. 가게가 참 고급스럽네.”
모친의 얼굴에서 어색함이 조금씩 지워지며, 그 자리에 대견한 감정이 떠올랐다.
“우리 서진이가 이렇게 성공할 줄 누가 알았겠어.”
“근데 제가 성공했다는 건 어디서 들었어요?”
모친은 잠시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대답했다.
“네 아버지 고향에서 어쩌다가 다리 건너서. 네 이야기 들었어. 그래서 염치가 없지만…….”
“아아, 그렇구나.”
기사를 통해 안 건 아닌가 보다. 하긴, 한서진이라는 이름이 어디 한둘인가.
성묘하러 갈 때 수억 짜리 레인지로버를 타고 갔으니, 그걸 알아본 고향 어른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어찌어찌 소식이 모친에게 닿은 모양이다.
‘그럼 500억 불은 모를 수도 있겠네.’
어쩌면 작은 사업을 하다가 성공한 정도로만 알고 있을 수도 있었다. 한서진은 왠지 김이 샜다. 자신의 진면목을 알고 찾아왔다면 더 극적인 자극을 기대할 수 있었을 텐데.
식사가 나왔다. 모친은 평생 구경도 못해본 코스 요리를 보고 연신 감탄했다.
“여기 밥, 정말 맛있네. 진짜 고급스럽구나.”
“그래요? 난 그냥 먹을 만한 정도인데.”
“우리 서진이가 원래 입이 고급이잖니.”
모친은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그러나 한서진은 딱 한 번만 손을 댔을 뿐이었다. 유쾌한 식사자리가 아니었다.
“제가 궁금한 게 있는데.”
“응.”
“그때 왜 그랬어요?”
“…….”
모친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한서진은 팔짱을 낀 채 지그시 주시했다.
그 눈길에 담긴 냉엄함을 읽은 것일까. 모친은 입술을 깨물며 두 주먹을 꾹 쥐었다.
“미안해. 그땐 내가 너무 힘들고 외로워서…….”
“우리 빚도 없었고, 지혜랑 저도 열심히 일해서 돈 벌고 있었잖아요. 더 이상 힘들어질 것은 없었는데, 왜 그랬어요?”
“…….”
“그 남자는 지금도 같이 살아요?”
“…….”
“같이 사나 보네. 혹시 그 남자가 그러자고 하던가요? 내 돈 들고 도망가서 가게라도 하나 하자고?”
“…….”
모친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인 채로, 눈물을 조금씩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찾으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어요. 꼭 경찰에 신고 안 해도, 나 이제 그 정도 힘은 있으니까. 근데 내가 여태 왜 안 찾은 건지 알아요?”
“…….”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안 찾았어요.”
“서진아. 내가 그땐…….”
“엄마한테, 아, 지혜가 이렇게 부르지 말랬는데. 아무튼 그렇게 도망갔지만 엄마가 마지막 부모 도리는 해줄 거라고 기대했거든요.”
“……도리?”
“겨우 사천만 원에 천륜 끊고 도망갔으면, 다신 제 앞에 나타나지 말았어야죠. 그래도 부모라면 부끄러워서라도 그 정도 도리는 해줄 거라 믿었는데, 기어이 이렇게 절 찾으셨네요.”
스스로도 놀랄 만큼, 가슴이 전혀 끓어오르지 않는다.
한서진은 바르르 떨고 있는 모친을 지그시 주시하며 말을 이었다.
“하긴, 그런 도리가 있는 분이라면 애초에 그런 식으로 잠적하지도 않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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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파트 역시 참 전개와 연출에 관해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 고민의 결실을 이제 수확할 때가 됐군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