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149화 (149/609)

00149  과거와 현재  =========================================================================

개강을 앞두고, 한서진은 타르타로스와 씨름 중이었다.

“잘 안 되네.”

그는 먼저 기존 OS를 제거하고 소프트웨어 팀에서 개발한 OS를 설치했다. 하지만 설치 과정을 모두 혼자 하다 보니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다.

“그냥 대충 유닉스 같은 거 갖다 쓸 걸 그랬나?”

기존 운영체제를 이용하면 편리하긴 하다. 하지만 수퍼컴퓨터는 개별 커스터마이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렇다고 유닉스 제조사에 타르타로스의 세부 스펙을 알려주며 최적화를 부탁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타르타로스의 존재는 비밀이었으니까.

보안 유지를 위해서는 처음부터 하나하나 쌓아나가야 했다. 한서진도 하루아침에 될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무수히 개선하고, 또 수정해야 할 것이다.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겠지만, 그 투자는 훗날 달콤한 과실을 돌려줄 것이다. 현 사무소 직원들은 해외에 나가도 꿇릴 게 없는 최고의 인재들이니. 그들이 훌쩍 성장한다면 한서진은 최고의 손발을 보유할 수 있게 된다.

“됐다.”

마침내 며칠 동안 끙끙대던 설치 작업이 끝났다.

한서진은 시스템을 새로 부팅시켰다. 작업실에 연결된 수십 대의 모니터에 ‘T’라는 알파벳이 떠올랐다. 바로 타르타로스를 뜻하는 알파벳, 한서진은 왠지 뿌듯해졌다.

그는 사무소에 전화를 걸었다.

“기본 설치 완료했습니다. 바로 원격 조정 작업 시작하세요.”

꿈에서 깨어날 때마다, 왕은 미친 듯이 업무에 매달렸다. 각 지역에서 올라온 주요 보고를 직접 확인하고, 큰 지침을 잡아서 돌려보냈다.

유능하고 충직한 신하들이 머리를 맞대고 일을 잘해주고 있지만, 왕만이 조정할 수 있는 분야까지 어쩌지는 못했다.

대륙의 모든 기본을 잡아주는 것, 그것은 신하들이 감히 대리 행사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오죽하면 노신하가 왕의 건강을 염려했다.

“폐하, 업무는 잠시 내려놓으시지요. 그러다가 건강을 해칠까 두렵습니다. 지금은 저주를 해결하는 게 급선무입니다.”

“잠시 이것들만 처리하겠소.”

왕은 노신하를 쳐다보지도 않고 서류에 어새를 찍어나갔다.

그리고 다음 서류를 확인하다가 멈칫했다. 우두커니 내려다보던 왕은 소리 내어 그것을 읽었다.

“포렌 산악지대에 또다시 마수 클로비가 출현했다는군.”

노신하는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결코 편하지 않은 침묵, 이윽고 노신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왕비 전하를 처음 만나셨던 곳이군요.”

“그때도 마수 클로비와 싸웠었지.”

“카딘 기사단은 현재 부재중이니, 제가 가서 퇴치를…….”

“아니오, 짐이 가겠소.”

왕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평소라면 말렸겠지만, 노신하는 입을 다물고 잠자코 있었다.

왕비를 처음 만난 곳, 왕비 가문이 반역을 저지르지 않았으면 기분 좋은 추억으로 계속 남았으리라.

그러나 복잡한 추억을 상기하러 가는 중임에도, 왕의 표정은 그리 어둡지 않았다.

“요즘은 꿈에서 깨면 제법 기분이 좋소.”

“그러셨습니까.”

“이제는 노예라 부르기에는 살짝 민망할 만큼 달라졌소. 경도 그 모습을 봤다면 흡족해했을 거요.”

“통찰안에 이어 왕명의 권능까지 이어졌으니 당연한 일이지요.”

“아니, 왕명은 아직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오. 그 존재조차 확신하지 못하고 있소.”

왕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라졌소. 짐은 그 점이 더욱 마음에 드는군.”

한서진이 타르타로스에 설치한 OS는 사람으로 치면 주요 골격에 해당한다. 먼저 시스템의 뼈대를 잡은 뒤, 사무소에서 소프트웨어 팀이 원격으로 살을 채워나가는 방식이다.

시범 OS이기도 한 터라, 소프트웨어 팀은 하루아침에 결실을 맺을 생각이 없었다. 늦더라도 차근차근, 확실하게 시스템을 구축해나갈 계획이었다. 그게 한서진의 지시이기도 했다.

기본 시스템의 주요 내용은 크게 엄격한 보안 방화벽과 원활한 원격 조정 기능이었다.

“Z7은 역시 대단한 것 같아요.”

타르타로스의 존재를 모르는 소프트웨어 팀은, 자신들이 Z7을 커스터마이징 하는 줄 알고 있었다.

총괄부장 하정태가 사장실로 와서 보고했다.

“하드웨어팀의 설계가 끝났습니다. 예산 실행만 남았는데요, 약 600억 원이 예상됩니다. 어떻게 할까요?”

“결재 서류 이리 주세요.”

칼라 통신망 개발을 완성한 지금, 설계 사무소의 주요 업무는 타르타로스의 커스터마이징, 슈나우저와 코카 스패니얼을 이용한 새로운 수퍼컴퓨터 개발이었다.

특히 후자는 한서진이 철저하게 기초부터 시작하라고 지시를 내려놓은 상황이었다.

타사가 이미 개발한 플랫폼, 모듈을 사서 따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노하우와 기술 축적, 그것이 제일 중요했다.

훗날 타르타로스를 자유자재로 다루기 위해서라도.

“선배님이 존대하니까 영 어색합니다.”

“회사잖습니까. 이제 직원 수도 30명이 넘는데, 어떻게 후배처럼 대합니까.”

“그래도 사석에서는 이러지 마세요. 어색해요.”

“아이고, 그건 걱정 마시죠. 대표님.”

결재 서류를 돌려받으며 하정태가 피식거렸다. 그는 사장실에 아무도 없는 것을 슬쩍 확인하고는, 말투를 바꿨다.

“그러고 보니 곧 개강이지 않아?”

“벌써 그렇게 됐네요.”

“학교 계속 다닐 거야? 회사가 이제야 겨우 자리 잡혔는데, 대표가 학업으로 자주 자리를 비우는 건 좀…….”

“그래서 선배님 월급 드리는 건데요? 저 대신 잘 좀 운영하라고.”

“……졌다. 알았어.”

“사무소에서 제일 월급 많이 받으시는 분이 왜 이러실까.”

한서진은 피식거리다가 문득 물었다.

“직원들 사기는 별 문제 없어요? 아시다시피 우리 회사가 대외적으로는 매출이 0이잖아요.”

실적을 내지 못하는 회사는 의미가 없다.

특히 유능한 직원일수록 회사의 실적에 집착한다. 아무리 많은 월급을 주더라도, 내가 다니는 회사의 매출이나 실적이 별 볼일 없다면 자괴감에 빠지고 만다.

자신의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회사의 성장에 기여하고, 그 정당한 대가로 많은 보수를 받는 것. 이런 구조야말로 유능한 인재들을 위한 최고의 선순환이 아닐까.

“문제없다. 직원들은 지금 매출이 아니라 수퍼컴퓨터 개발에 더 큰 신경을 쓰고 있으니까. 지금 매출이 없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어.”

“다행이군요.”

“그리고 얼마 전에 칼라 통신망 작업 끝냈잖아. 그거 때문에 직원들 지금 분위기 장난 아니다. 칼라 통신망 사업 제대로 발주하면 회사 매출이 얼마나 나올까 하고 다들 기대 중이지.”

“보너스도 겸사겸사 기대하고요?”

“그렇지.”

“직원들 사기를 위해서라도 칼라 통신망 사업은 반드시 올해 상반기 안에 자리 굳혀야겠어요.”

“너무 서두르지 않아도 돼. 오랜 시간이 걸리는 사업이라는 건 직원들도 이해하고 있어.”

몇 십 명 안 되는 직원들이지만 하나같이 업계 최고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사무소가 차세대 기간통신사업에 큰 관여를 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한서진은 차분히 말했다.

“별로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H그룹에서 작정하고 칼을 뽑아들었으니까.”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다른 직원이 들어오자 다시금 깍듯하게 변한 말투. 한서진은 공과 사의 구분이 철저한 그의 이런 면모가 좋았다.

‘그러고 보면 하 부장님도 은근히 정 팀장님 스타일이란 말이지.’

한서진은 미지의 스코브리아늄 언어, USL 분석 작업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예전처럼 연구에 매번 직접 참여하지는 못하지만, 대신 연구팀에 연구 자금으로 500억 원을 내놓았다.

내심 한서진이 USL 연구에 소홀히 하는 듯해 서운해 하던 현진국 교수는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며, 서운한 감정을 모두 떨쳐냈다.

“죄송합니다. 제가 반도체 사업 때문에 좀 바쁘긴 하지만, 그래도 이 연구도 절대 소홀히 하지는 않습니다. 스코브리아늄, 아니 미스릴의 비밀이 담겨 있는 게 틀림없는 언어니까요.”

“허허, 걱정 마시게. 난 조금도 서운하지 않으니까. 오히려 매우 흡족하군.”

자그마치 500억의 연구비라니. 그것도 교수 한 명에게 단독으로 주어진 금액이다. 인문학에서는 그야말로 상상도 할 수 없는 거액이었다.

“자네 도움이 필요할 때가 되면 알아서 찾을 테니, 이쪽에 너무 신경 쓰지 말고 할 거 하시게.”

“배려 감사합니다.”

“자네가 밖에서 큰돈을 벌어야 연구비도 펑펑 내놓고, 그래야 연구 효율도 높아질 것 아니겠는가. 아, 그래도 박 교수는 나한테 좀 양보하고 가시게. 내가 스코브리아늄 물질 성질 같은 것은 영 알 수가 없어서, 그 사람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니.”

“여부가 있겠습니까.”

한서진은 USL을 어떻게 읽는지 그 표기와 발음법을 두 교수에게 자신이 아는 대로 남김없이 알려주었다.

USL은 단순히 그 뜻만 연구하는 게 아니라, 반도체 물질인 미스릴도 병행해서 연구해야 의미가 있다. 그래서 현진국과 박효산은 계속해서 합작 연구를 해나가기로 했다.

박효산은 이렇게 투덜거렸다.

“분명히 내가 널 갈아 넣으려고 데려왔는데, 어느 순간 입장이 바뀐 기분이다.”

“저도 매일 갈리고 있습니다, 교수님. 너무 그러지 마시죠.”

“연구비나 자주 두둑하게 내놓거라.”

“걱정 마시죠. 저 돈 많습니다.”

500억 원의 연구비, 그리고 부품 구매비로 600억 원, 연초인데 벌써 1,100억 원의 거액을 썼다. 그 돈은 작년 특허 로열티로 받은 8억 달러에서 해결했다.

슈나우저와 코카 스패니얼은 그야말로 날개 돋친 듯이 팔리고 있었다.

H반도체와 진성전자에서 찍어내는 물량은 어마어마했다. 그야말로 무차별 융단폭격 수준.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반도체는 여전히 물량 부족에 시달렸다.

여기저기서 원하는 곳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개인 모바일 장치는 물론이고 PC, 워크스테이션, 수퍼컴퓨터 제조사 등 요구하지 않는 분야를 찾는 게 더 어려웠다.

진성전자 생산능력만 연간 10억 개인데, 그런 물량으로도 고질적인 부족 현상에 시달릴 정도였다.

「주주들이 배당을 좀 했으면 하는 눈치던데.」

“배당이오?”

「작년 영업 이익의 절반 정도는 사내 유보금과 투자비용으로 쌓아두고, 나머지 절반은 배당을 했으면 하는 눈치더라.」

“팀장님은요? 팀장님도 주주잖습니까?”

1%이긴 하지만 엄연한 주주, 그것도 4대 주주 중 한 명이다.

「……실은 내가 여기 해변에 저택 하나를 봐둔 게 있는데, 음…… 나도 이제 슬슬 월세 생활은 청산하고 싶다. 배당금 받으면 어찌어찌 살 수 있을 것 같아.」

“콜. 그럼 이번에 배당하죠.”

아직까지도 월세 신세였다니. 한서진은 애처로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우리 정 팀장님, 잘 챙겨드려야지.

“근데 작년 이익이 얼마나 되나요?”

「약 900억 달러 정도?」

“헉! 그렇게나 많아요?”

SJ인더스트리는 작년에 설립된 회사다. 작년 한 해 동안 제대로 영업 활동을 한 것은 4개월도 채 되지 않는다. H반도체와 진성전자의 공장을 확보하며 생산 문제를 해결하면서 겨우 돈 좀 만질 수 있었다.

그래서 한서진도 작년 순이익은 기대 안 했다. 장사를 제대로 한 게 몇 달 안 되니까.

그런데 그 몇 달 안 되는 동안 900억 달러를 남겼다고?

「그 저택이 원래 엄청 비싼 건데 이번에 급매로 나온 거라…… 이번에 배당하면 살 수 있을 것 같아.」

“얼마짜리인데요?”

「1억 3,000만 달러던가. 대충 그쯤.」

900억 달러의 절반인 450억 달러를 배당하면, 1% 주주인 그는 4억 5,000만 달러를 받게 된다. 세금을 제하더라도 수억 달러의 현금이 생긴다.

초호화 저택을 구입하는 것이지만 한서진은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잘 됐네요. 이제 좋은 집 사서 금발의 미녀와 함께 노닥거리시겠네. 수영장은 딸렸어요?”

「그럼. 활주로도 딸렸어.」

아, 젠장.

왠지 패배한 기분인데.

============================ 작품 후기 ============================

원래 고용주보다 큰 차를 사는 게 아니라 했거늘... 심지어 저택을! 히익!

아 이건 헬반도식 관습이군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