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8 과거와 현재 =========================================================================
「크흠!」
백철중은 연신 헛기침을 했다. 숨소리만으로도 그가 난처해하는 게 느껴진다.
「그런 건 전화로 함부로 이야기하는 게 아닐세. 나중에 내 집으로 찾아오게나.」
“예?”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오늘 저녁에 보는 게 어떤가?」
“아, 예.”
엉겁결에 그렇게 약속이 잡혔다.
오후가 되자 한서진은 업무를 정리하고 출발했다. 한남동으로 향하면서 송하나에게 방문한다고 미리 톡 메시지를 보냈다.
저택에 도착하자 송하나가 반겼다.
“집에 있었네.”
“오늘 마침 약속이 없거든요.”
송하나는 검은 스키니진에 흰 오프숄더 티를 걸치고 있었다. 흰 피부 위로 도드라진 쇄골이 사뭇 육감적인 느낌을 준다.
갑자기 이제 열아홉이라던 그녀의 말이 신경 쓰였다. 그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회장님은 계시지?”
“네, 이쪽으로 오세요.”
백철중은 응접실이 아닌 서재에 있었다. 안경을 쓴 채 서재에 꽂힌 책들을 훑어보는 중이었다. 그는 한서진을 보고 반색했다.
“어, 왔는가.”
“예. 또 폐를 끼치게 됐습니다.”
“아닐세. 내 집처럼 편히 있다 가게나. 저녁도 여기서 먹고 들어가게.”
“감사합니다.”
“앉게.”
송하나가 나가고, 서재에는 둘만 남았다.
평소와 달리 백철중은 묘하게 침묵이 길었다. 신중하게 말을 고르는 눈치라고 할까. 낯선 긴장감에 한서진도 입을 꾹 다물고 기다렸다.
마침내 그가 무겁게 입을 떼었다.
“재산관리에 조언이 필요하다고 했지.”
“예, 그렇습니다. 회장님은 어떻게 하시는지 궁금하기도 해서요. 아시겠지만 제가 원래 돈이 많았던 것은 아니잖습니까.”
“5nm 계약금으로 받은 500억 불은 어떻게 운용하고 있나?”
“L국의 해외계좌에 일단 묵혀두고 있습니다.”
“아, 북유럽의 그 L국 말인가?”
갑작스럽게 백철중의 안색이 밝아졌다. 큰 고민거리를 해결했다는 듯이 후련한 표정, 한서진은 어리둥절했다.
“이 사람이. 이미 잘하고 있으면서 뭘 나에게 묻나?”
“예?”
“L국이 요즘 신흥 조세회피처로 떠오르는 핫 플레이스라네. 그곳을 이용하고 있다면 다 된 거지. 더 이상 내가 조언해줄 건 없네.”
“……?”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어리둥절해하고 있는데 백철중이 마음 편히 웃으며 물었다.
“굳이 국내에 돈 들여올 것 없네. L국에 묶어놓고 그때그때 필요한 만큼만 갖다 쓰면 된다네. 아, 혹시 지금 국내에 들여온 돈은 얼마나 되나?”
“8억 달러쯤 됩니다만…….”
“어허, 제법 큰돈을 가져왔군. 반입 목적을 따로 국세청에 제출했겠지?”
“예?”
“안 했나? 그러면 자칫 그냥 일반 소득으로 분류돼서 어마어마한 세금 폭탄이 떨어질 수도 있네. 하지만 그건 회계사에 맡기면 되네. 내가 좋은 회계사를 소개시켜주지.”
이제야 이야기가 조금 통하는 것 같다. 한서진은 안색이 밝아져서 대답했다.
“바로 그거 때문에 찾아뵈었습니다.”
“응? 뭐라고?”
“재산관리팀을 꾸려서 운용을 맡겨야 하는지를 고민 중인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어서요. 그쪽으로 믿을 만한 사람을 알고 있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아, 그거 때문에 온 건가. 난 또 뭐라고.”
“그럼 뭐 때문이라고 생각하셨는지……?”
“아아, 아닐세. 아무것도 아니야.”
백철중은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연신 헛기침을 했다.
“자네 정도면 당연히 따로 개인 자산운용팀을 둬야지. 법률대리인으로 변호사 셋 정도 두고, 회계사도 세 명 정도 두면 충분할 거야. 처분권한은 적당히 제한을 두면 되고…….”
백철중은 자신의 경험을 살려 열심히 설명을 해주었다. 한서진은 그의 설명을 귀담아 들었다.
“이미 국내에 반입한 8억 달러는 따로 운용 목적을 신고하면 될 거야. 투자금으로 설정하는 게 가장 좋지. 과세 대상에서 비껴갈 수 있으니.”
“그렇군요.”
“재무팀만 꾸리면 그들이 알아서 할 걸세. 내가 믿을 만한 변호사 몇 명을 소개시켜줄 테니, 자네가 면접을 보고 한 번 고용해보게.”
“감사합니다.”
둘은 재무관리 상담을 마친 후 칼라 통신망 사업에 관한 이야기로 대화를 이어 나갔다.
“기간통신자로 선정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을 것 같네.”
“예전에는 H그룹이 너무 크다는 이유로 결격되었다고 들었습니다만.”
“괜찮네. 지금은 사정이 조금 달라졌거든. 통신료가 비싸다고 국민들 원성이 제법 높네. 3대 통신사의 잦은 담합 때문에 정부도 골머리를 썩고 있고, 그렇다고 4대 통신사 체제로 개편하기에 손실을 감수할 만한 후발주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백철중은 이 상황이 즐거운 듯했다.
“그래서 우리 그룹에서 기간통신사업에 나선다니까 미래과학부에서도 반색하고 있네. 아마 푸른집도 내색은 안 해도 기뻐하고 있을 거야.”
4대 대형 통신사 체제로 개편되면 경쟁 강화로 통신료 인하를 기대할 수 있을 테고, 정권 지지율도 덩달아 올라갈 것이다. 정부에서는 그 반사 이익을 기대하고 있는 듯했다.
백철중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전파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건 아직 모르네.”
“…….”
“그건 마지막에 가서 터트려야지. 지금 터트리면 자칫 일이 무산될 수도 있으니.”
주파수 경매로 상당량의 세수를 확보하는 정부 입장에서, 전파를 쓰지 않는 칼라 통신망은 난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백철중은 그 점을 가장 염두에 두고 있었다.
논의를 끝내고 나니 어느덧 저녁이 깊었다. 송하나가 와서 둘을 불렀다.
“식사하세요.”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
주방에는 이미 저녁식사가 마련되어 있었다. 상석에는 백철중이 앉고, 그 옆으로 송지현과 한서진이 마주보고 앉았다. 송하나는 자연스럽게 한서진의 옆에 앉았다.
“많이 들게.”
“감사합니다.”
어느 때처럼 식사는 무척 맛있었다. 집에 따로 전문 요리사를 상시 고용해서 쓰는가 싶을 만큼.
저녁식사를 마치고, 한서진은 저택을 나섰다. 송하나가 마중을 나왔다.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한서진은 왠지 아쉬웠다.
“요즘 되게 자주 보는 거 같다.”
“그래서 전 좋은데. 심심하지 않아서요.”
한서진은 피식거리며 손을 흔들었다.
“갈게. 잘 자.”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한서진은 차를 출발시켰다. 문이 닫힐 때까지, 송하나는 그 자리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한서진은 백철중이 추천한 변호사와 회계사 중 적당히 몇 명을 골라 재산관리팀을 꾸렸다. 변호사 3명과 회계사 4명, 이렇게 총 7명으로 구성된 재산관리팀은 곧바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들이 가장 먼저 한 것은 국내에 반입한 8억 달러의 용도와 목적을 국세청에 ‘올바르게’ 신고하는 것이었다.
“특별 투자금으로 신고했으니 과세 문제는 해결할 수 있습니다. 다만 앞으로는 필요한 만큼만 국내에 반입하는 게 좋겠습니다. 역시 L국이 조세회피처로는 최고의 국가죠.”
한서진은 하는 김에 설계 사무소의 회계 관리도 재산관리팀에 맡겨 버렸다.
“앞으로 돈 관리 좀 잘 부탁합니다.”
“맡겨 주십시오.”
재산관리팀장을 맡은 고문 변호사는 대형 로펌에서 사무장으로 일하고 있는 50대 중반의 남자였다. 전속은 아니었지만, 국내 운용 자산이 많지 않은 관계로 이 정도면 충분했다. 그를 제외한 다른 6명은 전속으로 고용했다.
칼라 통신망 구축 작업을 끝낸 사무소는 다시 타르타로스 OS 안정화 작업으로 돌아갔다. 하루 업무 시간은 5시간이 고작이지만, 그들은 벌써부터 큰 성과를 보이고 있었다.
“1차 버전이 완성됐습니다.”
오리엔테이션을 하루 남겨놓은 날, 김유빈이 와서 보고했다. 한서진은 반색해서 보고서와 OS가 동봉된 메모리를 확인했다.
“하드웨어팀은 우리보다 먼저 작업을 끝냈으니, 곧바로 설치 운용 테스트에 들어갈까 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이건 복사본이죠?”
“네, 그렇습니다.”
“그럼 두고 가세요. 제가 따로 확인해볼 게 있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한서진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메모리를 집어 들었다.
‘기다려라, 타르타로스.’
현재 타르타로스는 빈약하기 그지없는 기본 OS로 작동하고 있었다. 여기에 최적화로 커스터마이징한 OS를 설치하면 얼마만큼 성능 향상을 보일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대되었다.
‘내일 출발이니 일단 오티 다녀와서 해야겠네.’
다음 날.
한서진은 무슨 차를 탈까 하다가 결국 레인지로버를 선택했다. 2인승 포르쉐는 아무래도 신입생 환영 행사에 끌고 가기에는 너무 요란한 감이 있었다.
“그냥 이참에 우리 차 바꾸는 게 어떨까?”
“꿈도 꾸지 마.”
“쳇.”
한지혜는 묘한 부분에서 아쉬워했다. 어지간히 2인승 포르쉐가 탐이 나나 보다. 그러게 처음부터 스포츠카로 사지.
오리엔테이션은 공기 맑은 어느 산속의 대형 콘도로 예약을 잡았다. 한서진은 내비를 따라 그곳으로 향했다. 목적지에 도착하니 어느새 해가 서산에 가까워진 늦은 오후였다.
도착했다는 말에 조현석이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형님, 오셨습니까.”
“나 같은 아저씨가 이런 데 와도 좋을지 모르겠다. 내가 무늬만 2학년이잖아.”
“아이고, 그런 식으로 따지면 교수님들은 할아버지니까 오지 말아야 합니까? 아무 염려 마십쇼. 형님은 우리 학교가 낳은 전무후무한 대스타니까요.”
한국대학교 모든 신입생들이 모인 대강당에서는 학장을 비롯하여 각 교수들을 소개하는 자리가 이뤄지고 있었다. 교수 한 명 한 명이 일어날 때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한서진은 팔짱을 끼고 멀리서 지그시 바라봤다.
“내가 작년에 저 짓을 어떻게 했는지 참 대견하다. 보는 것만으로도 지루해 죽겠네.”
“그런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저희는 이 짓을 매년 반복하고 있는데요.”
“내년부터는 안 와야지.”
“앗, 형님. 안 됩니다. 형님이 빠지시면……!”
“지금도 회사 일 때문에 바쁜데 시간 낸 거야.”
한서진은 한 마디로 일축한 채, 교수 소개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때였다. 사회자의 목소리 톤이 갑자기 변했다.
“자, 신입생 여러분. 다음에 소개해드릴 분은…… 비록 교수님은 아니지만 우리 대학이 낳은 최대의 대스타이자, 대학 최고의 재력을 자랑하는 멋진 사나이입니다.”
“꺄아악!”
“원래 학업하랴 사업하랴 바쁘신 분인데 용케 시간을 내서 이 자리에 와주셨습니다. 지금부터 그분의 비싼 강연을 한 마디 들어볼까요? 자, 한서진 학우님! 나와 주세요!”
“한서진! 한서진!”
우렁찬 환호가 터져 나왔다. 한서진은 떨떠름해서 조현석을 돌아봤다. 그는 죄송하다는 듯이 머리를 숙였다.
“이러려고 나 불렀냐?”
“죄송합니다, 형님. 교수님들이 워낙 사정을 하셔서요. 그냥 나가서 한 마디만 해주시면 안 될까요?”
“이런 이벤트면 미리 귀띔이라도 해주던가. 원고도 제대로 준비 못했는데.”
“앗,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제가 깜짝 타임 같은 거 없이 바로바로 전달해드리겠습니다.”
갑작스러운 돌발 이벤트였지만 한서진은 별로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방에서 몰려오는 뜨거운 환호에 자신의 위명을 실감할 수 있어 기분이 좋았다.
대강당의 단상에 선 한서진은 수천 명의 신입생들을 침착하게 둘러보았다. 무수한 시선과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지만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몸에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쾌적한 느낌이 가슴을 엄습해왔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한국대학교 신입생 후배 여러분. 저는 반도체공학부 2학년, 한서진이라고 합니다.”
다시금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한서진은 침착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어려웠던 나날들, 이를 악물고 공부해서 한국대학교에 들어온 것, 회사에서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준 일, 그리고 특허권 판매로 단숨에 세계권 재벌이 된 일까지.
“최고의 대학에 들어온 것을 다시 한 번 환영합니다.”
마지막 말을 맺자 다시금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한서진이 다시 자리에 돌아오자 조현석과 학생회 멤버들이 호들갑을 떨며 맞이했다.
“와, 오빠. 말을 어쩜 그렇게 잘해요?”
“되게 멋있었어요. 갑작스러운 자리라서 엄청 당황하셨을 텐데, 엄청 자연스러웠어요.”
“담부터는 미리 말을 해줘. 준비도 못 하고 올라가서 대충 두루뭉술하게 짜깁기 썰만 풀다가 내려왔잖아.”
“근데 형님 그렇게 어렵게 사셨구나. 저 듣다가 가슴 뭉클해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걸 다 믿냐? 당연히 구라도 섞었지.”
“……쳇.”
3박 4일의 오리엔테이션이 무사히 끝났다.
그리고 개강일이 다가왔다.
============================ 작품 후기 ============================
장기자랑에 박효신 교수님 나와서 폭발적인 가창력을 선보이는 씬도 하고 싶었지만 갈 길이 먼 관계로 패스했습니다. 흙흙.
본 후기에는 오타가 존재하지 않스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