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7 과거와 현재 =========================================================================
안타까움.
아버지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감정이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 번도 풍족한 적이 없던 사람. 아니, 가난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해야 더 정확할 것이다.
치열하게 산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느슨하게 살지도 않았다. 나름대로는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던 것 같지만, 언제나 결과는 시원치 않았다.
어린 시절 이혼을 했던 것도 가난 때문이었다. 그러면 최소한 정부지원금 요건은 됐으니까.
직접적인 사망 원인은 갑작스러운 심장마비였다. 평소 안 좋던 심장이 발작을 일으켜, 손 쓸 수도 없이 죽은 것이다.
장기 영양실조 때문에 그리 된 것 같다는 말에는 얼마나 허탈했는지. 성공한 지금은 더욱 안타까운 마음을 지울 수 없다.
“그러고 보니 그 여자와 고향이 같다고 하지 않았나?”
조수석의 한지혜가 불쑥 꺼낸 말에 한서진은 끄덕였다.
“맞아. 외가 쪽 사람들은 지금 고향에 아무도 없는 것 같지만.”
“그럼 혹시라도 마주칠 일은 없겠네.”
“생모가 먼저 우리를 피할 걸.”
생모. 그 여자라고 부르기에는 아직 부담스러웠던 한서진이 타협한 호칭이다.
“아쉬워. 한 번쯤은 마주치고 싶었는데.”
“언제는 꼴도 보기 싫다더니.”
“몇 억씩 하는 차 타고 딱 마주친다고 생각해봐. 그 여자가 후회하는 얼굴 떠올리면 짜릿하지 않아? 당신이 버리고 간 자식들이 이렇게 잘 됐다, 뭐 그렇게 쏘아붙이면 카타르시스가 쩔 것 같은데.”
“뭔가 이상하다. 잘 된 건 나 하나잖아.”
“에이, 원래 가족은 세트 메뉴인 거 몰라?”
아버지의 묘는 고향 시골에 있었다. 읍내에서 약 10km 이상 떨어져 있어, 수도관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깡촌 마을이다. 물은 마을에서 공동 지하수를 뚫어서 쓴다.
“아버지 생가가 아직도 남아 있으려나?”
“글쎄. 할아버지 돌아가신지가 언젠데.”
둘은 아버지가 태어난 생가를 찾았다. 몇 년 만인지 까마득할 정도였다.
“아, 아직 남아 있다. 와, 되게 신기하네.”
“그러게.”
폐가나 마찬가지인 기와집이 남아 있었다. 방 두 칸에 부엌 하나, 그리고 재래식 화장실도 아직 뼈대는 남아 있었다. 20년 이상 넘게 흐르는 동안 아무도 손을 대지 않은 듯했다.
한지혜가 키득거렸다.
“진짜 귀신 나올 것 같다. 아빠가 여기서 살았었다니 되게 신기하네.”
“여기 이 집……. 우리가 살까?”
“뭐 하러?”
“그냥, 아빠와 마지막 추억이잖아. 어차피 얼마 하지도 않을 건데.”
땅값이래 봐야 평당 천 원이나 할까? 한서진에게는 정말 먼지 같은 금액이었다.
“오빠가 하고 싶으면 그러던가. 아, 맞다. 우리가 공동상속인으로 등기돼 있지 않을까? 그래도 여기 원래 할아버지 땅이었잖아.”
“그러고 보니 나 몇 번 재산세 내라고 날아온 거 본 거 같아. 천 원도 안 되는 돈이라서 그냥 무시했었는데.”
“나중에 한 번 확인하자.”
두 남매는 부친과 조부의 묘를 찾았다. 술과 음식을 그 앞에 놓고, 절을 했다.
한지혜는 부친 묘를 내려다보며 씁쓸히 말했다.
“재산이 500억 달러인데, 아버지는 영양실조로 죽었다니. 참 드라마감이다, 그치?”
“…….”
한서진은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그냥 입을 다물었다.
문득 사람을 써서 꾸준히 묘지 관리를 좀 해야겠다 싶었다. 황량한 묘지를 보니 마음이 안 좋았다.
성묘를 마치고 둘은 산을 내려왔다. 남은 음식과 술을 다시 차에 실으면서 한지혜가 물었다.
“바로 서울 갈 거지?”
“그래야지. 여기 뭐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옛날에 할아버지 계실 땐 그래도 여름에 냇가에서 수영도 하고 그랬는데.”
“냇가도 물 다 말랐네. 수량이 줄긴 줄었나 보다.”
“바다는 해수면 높아진다고 그 난리인데 여긴 왜 이런대.”
차의 트렁크를 닫고, 막 탑승하려는 때였다.
“저기 혹시…… 삼밭집 댁 손주들 아닌가?”
50, 60은 되어 보이는 시골 남자가 호기심을 품고 물었다. 한서진과 한지혜는 동시에 눈이 마주쳤다. 그들이 모르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한지혜는 생가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희 할아버지 댁이 저기 저 폐가이긴 했는데, 혹시 저희 아세요?”
“아아! 그렇구만! 그쪽에서 내려오는 거 보고 혹시나 했는데, 역시 삼밭집 손주들이었어. 그럼 네가 서진이고, 네가 지혜냐?”
대번에 이름까지 알아맞힌다. 하긴, 50호도 채 되지 않는 깡촌 마을이니 이웃 주민들의 인적사항을 훤히 꿰는 건 일도 아니리라.
“나여, 나. 니들 여름에 올 때마다 전기 지짐이로 물고기 잡아서 매운탕 끓여줬던 장씨 아저씨.”
“아아!”
그제야 둘은 기억났다. 한지혜는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와, 되게 오랜만이에요. 아저씨, 건강하시죠?”
“그럼. 건강하지. 지혜는 완전히 어엿한 숙녀가 다 됐구만. 그땐 워낙 천방지축이어서 이거 나중에 커서 시집이나 갈지 걱정이었는데.”
“아이고, 아저씨.”
한지혜는 킬킬거리며 즐거워했다.
어느새 그 자리에 서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세상 살아온 이야기를 했다.
“엄마는 건강하시냐? 그러고 보니 니들 엄마 마지막으로 고향 방문한 게 언젠지 기억도 안 나네.”
“그게…… 뭐 건강하세요.”
한지혜는 대충 얼버무렸다. 장성한 자식 돈 훔쳐서 도망갔다는 이야기를 굳이 할 필요는 없었으니.
“지금 서울에서 살고 있지?”
“네.”
“서울 인생 바쁜 건 알지만 그래도 할아버지랑 아버지 성묘는 자주 하러 오고 그래라. 내가 가끔 잡초 쳐주기는 하는데 풀 금방금방 자란다. 잡초 수북한 거 보면 내 마음이 다 안쓰러워.”
“그럴게요. 그동안은 좀 여유가 없었어요.”
“그랴, 올라들 가거라.”
“네, 건강하세요.”
고운 추억의 한 자락을 우연찮게 맞닥뜨린 것 때문일까. 두 남매는 서울로 돌아오는 길이 그저 즐거웠다.
“누구예요, 아버지?”
“아아, 삼밭집 손주들. 내가 어렸을 때 고것들 엄청 귀여워해줬는데. 물고기도 많이 잡아다 주고.”
“아아, 걔들이요.”
장씨는 한서진 남매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아쉬워했다.
도시에서 살고 있는 아들은 뭔가 이상하다는 눈으로 갸웃거리다가 말했다.
“서울에서 돈 엄청 벌었나 보네요. 경호원까지 데리고 다니는 거 보면.”
“뭔 경호원?”
“같이 온 검은 승합차 있잖아요. 슬쩍 봤는데 아무래도 개인 경호원 차량 같던데.”
“에이, 개들이 무슨 돈이 있다고 경호원을 데리고 다녀. 니가 잘못 본 거겠지. 그냥 잠시 같이 들린 친구들 아냐?”
“아닌데. 제가 제대로 봤거든요. 그리고 걔들 타고 온 차 못 봤어요?”
“그 봉고차가 왜?”
아들은 아버지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이 풀썩 웃었다.
“그거 일반 봉고차 같은 게 아니구요. 3억 가까이 하는 외제차예요.”
“뭐라고? 그게 3억이나 한다고?”
“누가 그 나이에 그런 차 몰아요. 그리고 검은 승합차도 걔들한테 맞춰서 뒤따르던데, 친구들이 왜 그렇게 움직여요?”
“허……. 정말 크게 성공했나 보네.”
농사짓고 사는 가난한 깡촌 사람들에게 있어 수 억짜리 외제차는 그야말로 다른 세상 이야기다. 게다가 시골은 폐쇄된 사회이니만큼 소문이 빠르다.
한서진 남매가 수 억짜리 차를 타고 다닐 만큼 돈을 많이 벌었다는 이야기는 날개 돋친 말처럼 마을 주민들 사이로 퍼졌다.
서울에 돌아온 한서진은 집사 최수한을 찾아 조상 묘 관리와 생가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최수한은 바로 그 자리에서 패드컴퓨터로 등기부를 확인하고, 대답했다.
“생가 땅은 두 분이 공동상속자로 되어 있군요. 묘지는 따로 사람을 써서 정기적으로 관리하겠습니다. 그 지역에도 그런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업체가 있을 테니까요.”
“잘 부탁합니다.”
“생가는 어떻게 하고 싶으신 건가요? 현 상태로 오래 보존하는 방법이 있고, 멀쩡하던 시절의 모습을 복원해서 보존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런 게 가능합니까?”
“완벽히 똑같을 순 없겠지만, 옛날 사진과 지금 상태를 보고 역으로 추론해서 최대한 비슷하게 복원하는 겁니다. 해외에는 그런 걸 전문으로 하는 업체들이 제법 있습니다.”
한서진은 잠시 생각한 뒤 대답했다.
“복원 작업은 여기 저택에 해주세요. 생가는 그곳에서 지금 상태 그대로 오래 가도록 보존해 주시고요.”
“알겠습니다.”
생가를 허물고 다시 똑같이 지어봤자, 그것에 추억이 담긴 것은 아니다. 추억은 지금 폐가가 다 된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외부인이 접근하지 못하게 보안 장치도 확실하게 갖추도록 하겠습니다.”
“부탁합니다.”
최수한에게 일을 맡기자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한서진은 이래서 서양 귀족들이 집사를 두는구나, 하고 감탄했다.
회사에 출근해서 업무를 보는데, 학과 사무실에서 전화가 왔다. 조현석이었다.
「형님, 혹시 이번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안 가십니까?」
“오리엔테이션?”
「예, 다들 형님께서 한 번만 참석해주십사 하고 목을 빼놓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전무후무한 우리 학교 최고의 대스타 아니십니까. 꼭 좀 부탁드립니다.」
“일 때문에 바쁜데……. 알았어, 하루 정도는 시간 내서 따로 가보도록 할게.”
「정말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으니 묘한 감정이 밀려왔다.
늦깎이 신입생으로 입학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2학년이 되었다니.
심지어 작년하고는 천지차이의 인물이 되었다. 회사에서 입학 선물로 받은 10억짜리 포르쉐를 타고 다녔던 신입생에서, 학과 전체에 포르쉐를 돌릴 수도 있는 재력가가 되었으니.
“아, 그러고 보니 로열티도 제법 들어왔겠네.”
한서진은 로열티 지급용 계좌를 ADSC에 따로 알려주었다. ADSC는 5nm공정기술로 번 수익의 40%를 그에게 지급하는 게 특허 독점 라이센스의 조건이었다.
반쯤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얼마나 들어왔을까? 한서진은 계좌가 있는 K은행에 접속했다.
숫자를 확인한 그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놀랐다.
“8억 달러?”
그의 몫이 40%이니, 총 수익은 그 두 배가 넘는다는 소리다. 믿을 수가 없는 수치였다. 몇 달 사이에 이만한 수익이 어떻게?
실감이 나지 않는 숫자에 살짝 멍해졌다. 해외 계좌에 500억 불이 있다지만, 이건 또 그것과 다르지 않은가. 특허 수익이 단기간에 이렇게나 많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아, 이거 세금 신고해야 되나? 번거롭게 됐는데. 그냥 한꺼번에 해외 계좌로 받을 걸 그랬네.”
에스코너 지분, 특허 라이센스 계약금 500억 달러 등 그의 재산은 대부분 해외에 있었다. 특허 로열티를 괜히 국내 계좌로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리하는 게 번거로워질 텐데.
“앞으로는 로열티 다른 계좌로 받을까? 일단 이 돈은 국내에 놔두고, 국내용 자산관리팀을 따로 둬야겠네.”
어차피 생활비는 필요하니, 8억 달러 정도는 국내에 놔두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한서진은 자산관리팀을 어떻게 구할까 하다가 결국 스마트폰을 꺼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신호가 가고, 잠시 후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회장님, 저 한서진입니다.”
「어, 설은 잘 지냈나?」
“예, 염려해주신 덕분에요. 전화를 드린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개인 재산관리팀을 따로 두고 싶은데, 회장님은 보통 어떻게 하시는지 궁금해서요.”
「재, 재산관리 말인가?」
뭔가 아픈 데를 찔린 듯한 말투에 한서진은 의아했다.
왜 그러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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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 그걸 그렇게 물어보시면 어떡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