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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146화 (146/609)

00146  그리고 신년  =========================================================================

백철중 회장쪽 테이블을 바라보는 시선이 심상치 않았다.

“정말이야? 저 사람이 그 사람이라고?”

“그렇대. 이름이 한서진이랬어.”

“그래서 저 자리에……. 어쩐지 말이 안 된다 했어.”

“처음 보는 얼굴인 게 이제야 납득이 가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연회장 분위기가 술렁이고 있었다. 오너 일가와 임원들은 비로소 한서진이 누군지 알아봤다.

500억 불의 청년 재벌.

그 위명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이는 이 자리에서 오로지 백철중 회장뿐이리라. 오너 일가라 해도 각 개인의 재산은 1조 원에도 훨씬 미치지 못한다.

백철중 회장을 제외하면, H자동차 차남 백호진이 2,500억 원으로 이곳에서 가장 큰 부자다. 한서진과는 무려 200배에 달하는 재산 차이다.

한서진을 보는 장남 백형진의 눈빛은 심상치 않았다.

“이거 단단히 꼬이겠는데.”

“아버지께서 이유 없이 저 사람을 이 자리에 데려왔을 리는 없을 테고.”

“정말 송하나 약혼자인 건 아니겠지?”

“진현이 말로는 송하나와 보통 친한 사이가 아닌 것 같다던데. 이거 정말로…….”

한서진이 송하나의 바로 옆에 앉아 있다는 점이 그들을 매우 거슬리게 했다. 비록 송하나가 미성년자이지만, 재벌 일족에 있어 그것은 큰 의미가 없다.

“어차피 내년이면 성년이고. 아니, 올해 생일만 지나면 당장 결혼도 가능한 나이잖아.”

그간 송하나는 그룹 내에서 입지가 거의 없었다. 백철중이 아무리 감싸도 돌아봐야 후처에게서 얻은 딸일 뿐이다.

전처에서 얻은 자녀는 모두 네 명이었고, 그들은 이미 그룹 내에서 단단한 입지를 구축했다. 심지어 모두 장성한지 오래 된 자식들이다.

백철중이 늦둥이가 귀엽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것을 떼어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500억 달러의 청년 재벌과 결합하면 이 모든 상황이 바뀌고 만다.

H그룹에서 가장 큰 H자동차의 시가총액이 39조 원이다. 한서진 혼자서 H자동차 전체를 사들일 수도 있는 것이다.

“ADSC를 생각하면, 아랍 오일 머니를 얼마든지 끌어들일 수도 있을 테고. 겨우 500억 불이 전부가 아니야.”

“듣기로는 5nm공정기술 로열티도 40%나 된다던데.”

“왜 저런 남자가 하필이면 송하나와?”

이미 유산이 문제가 아니었다.

한서진이 마음먹기에 따라 그룹 실권이 송하나에게 넘어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만약 둘이 정말 맺어진다면, 한서진은 송하나를 대리 회장으로 내세워 그룹 전체를 집어삼키려 할 수도 있으리라.

막내를 애지중지하는 백철중 회장이 그런 야심을 지지한다면, 그리고 500억 불의 실탄이 더해진다면, 그들이 우려하는 최악의 상황이 도래할 수 있었다.

“잠시 실례하지.”

백철중은 다시 테이블을 비웠다. 오늘 연회의 주인공이다 보니, 한곳에만 진득하게 머무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한서진은 이쪽을 향해 쏟아지는 시선을 느꼈다. 처음보다 한층 따가워진 느낌이다.

저들이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보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한서진은 쏟아지는 시선을 즐긴다는 게 이렇게 짜릿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일까. 유독 술이 달았다.

“와주셔서 고마워요. 덕분에 심심하지 않았어요.”

송하나가 차분히 말했다. 송지현도 웃는 얼굴로 고마워했다.

“다들 이제 한 대표가 누군지 알아본 눈치네요. 이쪽 테이블을 보는 시선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그런가요.”

“오늘은 부담스러운 시선이 덜해서 좋군요. 한 대표 덕분이에요.”

한서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송지현은 아무렇지 않게 ‘부담스러운 시선’이라고 돌려 말했지만, 어떤 건지 알 것 같다. 백진현이 했던 말을 보면, 평소 이런 자리에서 다른 가족들이 어떤 눈으로 바라봤을지 훤히 알 수 있었다.

“그런 시선이 싫으시면 회장님께 말해서 참석하지 않는 게 어떻습니까.”

“그럴 순 없죠.”

송지현은 야무진 목소리로 거부를 나타냈다.

“약해보일수록 더 잡아먹히는 거예요. 이럴수록 끝까지 당당하게 자리를 지켜야 해요. 그래야 하나가 얻을 몫을 뺏기지 않아요.”

“…….”

“난 백화점 사업체면 충분해. 엄마나 욕심 그만 부려.”

송하나가 툴툴거리며 말하자 송지현은 한숨을 쉬었다.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아. 지금이야 회장님 정정하시니 아무도 못 건드리지만, 회장님 없으면 사방에서 견제가 들어올걸? 백화점 꼴랑 몇 개 있는 거, 순식간에 말아먹는 건 금방이란다.”

“…….”

“아무리 유산 다툼에 흥미 없어도 먹고 살 방도는 마련해 놔야지. 안 그러니?”

송하나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지 시선을 돌렸다.

한서진은 송지현이 무엇을 염려하는지 알 것 같았다.

저 둘 모녀는 그룹 내에서 실권이 없다. 그리고 백철중 회장은 젊어 보이지만 상당한 고령이다.

오너 일가가 송지현 모녀에게 품은 미움은 상당한 수준이다. 백철중 회장이 일선에서 물러나면, 그들은 본격적으로 이빨을 드러낼 것이다.

“사모님, 너무 걱정 마시죠. 만약 그런 일이 생기면 제가 최선을 다해서 하나를 보호하겠습니다.”

“어머, 정말 고마워요. 우리 한 대표가 있으니 내가 참 듬직하네.”

송지현은 싱긋 웃으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약속하는 거죠?”

어린 아이도 아니고, 새끼손가락을 걸어달라는 것인가? 이 많은 사람들이 다 보고 있는 자리에서?

한서진은 조금 민망했지만, 생글거리는 송지현의 미소 앞에서 결국 손을 내밀었다. 새끼손가락을 건 그는 굳게 말했다.

“약속합니다.”

마치 그룹 창립기념행사 같았던 생일 파티가 드디어 끝났다.

한서진은 따로 백철중을 찾지 않고, 송하나와 조용히 호텔을 빠져 나왔다.

“저도 오빠와 같이 먼저 갈래요.”

송하나가 그렇게 원하자 송지현도 승낙했고, 덕분에 둘만 빠져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다리 춥겠다.”

“괜찮아요.”

두꺼운 코트를 걸쳤다지만, 다리가 드러나는 원피스인지라 추워 보였다. 아직 1월인데.

야무진 표정으로 바라보던 송하나가 불쑥 말했다.

“이제 그룹 친척들이 오빠를 집요하게 괴롭힐지도 몰라요.”

“왜?”

“그 사람들은 오빠와 저 사이가 불안할 테니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저들의 눈에 자신은 500억 불의 청년 재벌이다.(재벌이라는 표현이 옳은지는 의문이지만) 심지어 백철중도 자신에게 큰 신뢰를 갖고 있다.

그런 자신이 송하나를 도운다면 그룹 후계 구도가 흔들릴 수도 있을 테니, 저들 눈에는 그저 불안해 보일 것이다.

“괴롭혀봤자야. 어차피 해코지는 못해.”

“그런 뜻이 아닌데. 오빠를 귀찮게 한다는 의미였어요. 넌덜머리가 날 만큼.”

“여태 많이 당했나 보구나.”

“…….”

“걱정하지 마. 잔챙이한테 당하기에 이미 나도 꽤 몸집이 커졌거든.”

“전 오빠가 그 사람들한테 시달리다가 저까지 귀찮아질까 봐…….”

“그럴 일은 없어.”

“그럼 다행이구요.”

송하나는 배시시 웃었다. 어느덧 호텔 직원이 둘 앞으로 차를 몰고 왔다. 한서진은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

“춥겠다. 어서 타.”

“네.”

술을 먹은 터라 한서진도 뒷좌석에 탔다. 대리운전을 맡은 직원이 차를 출발시켰다.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백철중 회장 저택에 도착했다.

“정문 앞에 세워주세요. 여기서 그냥 들어갈게요.”

“추울 텐데. 주차장까지 들어가서 내려줄게.”

“아니에요. 괜찮아요. 오빠도 늦었는데 집에 빨리 가셔야죠.”

“알았어. 조심히 들어가.”

차에서 내린 송하나는 그 자리에 선 채,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며칠 뒤.

회사에 출근한 한서진은 오전 11시 경, H그룹 인물의 방문을 받았다.

“정상용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그는 한서진을 보고 깍듯하게 머리를 숙였다.

“H통신 사업 추진 책임을 맡고 있습니다. 앞으로 회장님께서 저를 통해서 일을 진행하실 겁니다.”

“그렇군요. 회장님께 연락은 받았습니다.”

“통신망 기술 자체는 이미 완성 단계이니, 이제부터 속전속결로 사업을 추진하겠습니다. 올 상반기가 가기 전에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는 게 목표입니다.”

“속도를 내는 건 좋지만, 지나치게 서두를 것은 없습니다. 무엇보다 전 확실한 게 좋습니다.”

“알겠습니다.”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정상용은 매우 유능한 인물로, 백철중도 그를 크게 믿고 이번 일을 맡겼다. 그는 다른 백씨 일가의 입김이 일절 닿지 않은, 오로지 백철중 회장 개인에게 충성하는 인물이었다.

“사업 추진에 필요한 모든 자금은 회장님 사재에서 출자하며, 그룹 내 지분은 송하나 양에게 주어질 겁니다. 이미 모든 공증을 끝냈습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다른 친척들이 크게 반발하지는 않겠죠?”

“회장님께서 유언장으로 송하나 양에게 약속하신 유산이 1,150억 원입니다. 그것을 이번 사업에 모두 쏟아 부을 예정이니, 다른 가족들이 반대할 명분이 없지요. 그리고 아직 우리 팀 외에 이 프로젝트를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1,150억이라……. 하나도 상당히 금수저네요.”

“회장님의 총자산이 약 4조 1,000억 원인데, 송하나 양까지 합쳐서 자녀는 5명뿐입니다. 본래 받아야 할 몫에 비하면 터무니없는 금액인 거죠.”

정상용은 그렇게 냉정히 말했다.

“현재 미래과학부와 면밀하게 교섭 중입니다. 물론 이통3사는 아직 이 일을 알지 못합니다. 결국 조만간에는 그들도 알게 되겠지만, 그 때에는 이미 쌀이 익은 뒤겠죠.”

“벌써요? 추진력이 상당한데요.”

“회장님은 이 일에 큰 기대를 걸고 계십니다.”

정상용은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심도 깊은 의논을 한 뒤 돌아갔다. 사업 추진에 관한 것은 모두 그가 직접 백철중과 한서진에게 보고를 할 것이라 했다.

정상용을 보내고 나니 피로가 몰려왔다. 한서진은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때 전화기가 진동했다. 발신인을 확인하니 한지혜였다.

「오빠, 뭐해?」

“일하고 있지. 왜?”

「설에 성묘하러 갈 거지?」

한서진은 눈두덩을 지그시 매만지며 대답했다.

“일 년에 겨우 두 번인데 당연히 아버지 뵈러 가야지.”

「오빠가 이렇게 잘 될 줄 알았으면 아빠도 그렇게 급하게 가시진 않았을 텐데. 그치?」

“그래서 부모는 자식을 기다려주지 않는다고 하나 봐.”

「기왕이면 부모라 하지 말고 아빠라 하자.」

동생의 밝은 목소리에 보이지 않게 서린 날을 느낀 한서진은 쓰게 웃었다.

“알았어. 그럼 아빠라 하지, 뭐.”

「같은 차 쓸래? 아니면 따로 갈래?」

“같이 갔다가 같이 오지 뭐. 차는 네 꺼 쓰자. 기왕이면 오프로더가 편하지.”

「그러자. 성묘 음식은 내가 준비할게. 내일 바로 출발하자.」

전화를 끊고, 한서진은 창가에 섰다. 어느덧 하늘에서 소복소복 눈이 내리고 있었다.

벌써 설인가. 시간이 참 빠르다.

‘잘 되어야 할 텐데.’

그는 문득 칼라 통신망 사업의 미래를 생각했다.

박효산도, 정지원도 모두 칼라 통신망의 파급력이 너무 거대한 점을 우려했다. 한서진이 보기에도 너무 사기적인 기술이기는 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크게 걱정이 들지는 않았다.

‘안 되면 잘 되게 만들어야지.’

한서진은 창밖을 내다보며 주먹을 꾹 쥐었다.

발아래 펼쳐진 복잡한 서울 도심. 천만의 인구가 거주하는 한국 최대의 도시가 이상하리만치 작아 보였다.

손을 뻗으면 한손에 전부 움켜쥘 수 있을 것만 같아, 한서진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내밀며 꽉 쥐어 보았다.

============================ 작품 후기 ============================

여러분들의 충실한 딱지닦이가 왔습니다 헤헤...

PS : 한지혜 연체대를 수정했습니다. 연체대 안 다니고 그냥 평범한 인서울 사립대 다녀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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