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5 그리고 신년 =========================================================================
“언제부터 그렇게 회장님 주변에 관심이 많았니?”
송하나가 살짝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백진현은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아, 그냥 처음 보는 얼굴이라 궁금해서.”
“네가 궁금하다고 다 설명해줘야 하는 건 아니잖아.”
“좋은 날에 처음 보는 분이니 인사 좀 하자는 건데, 하나 고모 너무 까칠한 거 아니야?”
“그러게. 하나야, 이건 네가 예민한 것 같다.”
송지현이 옆에서 차분히 중재했다. 물론 그녀의 눈빛에 백진현을 향한 호의는 없었다.
‘사이가 안 좋군.’
한서진도 또렷이 느낄 수 있는 공기였다.
전처의 자손들과 후처의 자손이 서로 사이가 좋기는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보통 집안도 아니고, 재계 2위의 그룹 오너 일가이지 않은가.
가진 게 많은 만큼 다툼도 많을 것이고, 후처와 그 자손에게 호의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백세완을 닮은 뱀의 눈빛.
한서진 역시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속마음을 숨기고 태연히 일어나 악수를 청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한서진이라고 합니다.”
“백진현이에요. 혹시 은호그룹 쪽 분이신가요?”
한씨란 말에 백진현은 혹시 은호그룹 쪽인가 해서 물었다. 한씨 성의 재벌 중에서 재계 순위가 제일 높은 곳이다.
“아닙니다. 재계하고는 크게 상관이 없습니다.”
“아, 그러시구나. 그런데 하나 고모하고 친한 것 같던데.”
“친한 동생이죠. 저뿐만 아니라 제 동생도 하나와 무척 친합니다.”
“혹시 명함 한 장 받을 수 있을까요?”
“명함이라고 할 만한 게 없습니다. 아직 대학생입니다.”
희미한 조소가 뱀의 입가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한서진은 놓치지 않았다.
“그러시군요. 그래도 제 명함은 받아두시죠.”
백진현은 태연히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H그룹 모 계열사의 이사라고 박힌 명함이었다. 한서진은 명함을 받아서 일단 지갑에 넣어두었다.
그때 분위기가 술렁거렸다. 백진현은 입구 쪽을 흘끗 돌아보았다.
“회장님 오셨나 봅니다. 저는 이만.”
“네, 들어가시죠.”
“작은 할머니, 이만 가볼게요. 하나 고모도 이따 봐.”
“그래, 들어가요.”
“…….”
송지현은 상냥하게 대답했고, 송하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백진현은 보란 듯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백수호가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누구야? 좀 알아봤어?”
“옷은 좋은데 재계 사람은 아닌 거 같다. 이런 자리도 익숙하지 않아 보이고. 약혼자는 아닌 거 같고, 할아버지나 송지현이 아니라 송하나와 친한 것 같던데.”
“그렇다고 저 자리에 앉힌단 말이야? 할아버지도 같이 앉으시는 자리에?”
“할아버지가 늦둥이 얼마나 끔찍하게 여기시는데 자리 하나 못 내주겠어. 아직 대학생이래.”
연회장에 들어선 백철중은 성큼성큼 자신의 자리를 향해 가고 있었다. 초대받은 임원들은 하나같이 기립한 채 백철중이 앉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백진현과 백수호도 그쪽을 바라보다가 별안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어, 지금 할아버지…….”
“그 놈을 껴안은 거야?”
놀랍게도 백철중이 매우 반갑다는 듯이 한서진을 가볍게 껴안은 것이다. 그룹 총수의 스킨쉽이 가지는 의미를 보면 예사로 넘길 일이 아니다.
두 재벌 3세의 안색이 동시에 심각해졌다.
“형, 재계 사람 아닌 거 확실해? 정말 그냥 대학생 맞아?”
“아무래도 약혼자가 맞나 본데. 혹시 하나가 좋아 죽겠다고 매달려서 할아버지가 허락하신 건…….”
“할아버지가 어디 그럴 분이야? 급에 안 맞는 놈팽이랑 하나 엮어주려고 하겠어? 절대 허락 안 하실걸.”
“그럼 뭐야, 대체.”
생일 행사가 시작되었다.
다른 이도 아닌 그룹 총수의 생일이다 보니, 그룹 정식 행사에 준해서 진행되었다. 중후한 유명 남자 배우가 행사 진행을 맡고, 백철중은 단상에 올라가 축사까지 했다.
그룹의 비전을 제시하며 계열사장 및 임원들의 분발을 촉구하는 목소리에는 힘이 넘쳤다.
송하나는 옆에 앉은 한서진을 흘끔 보고는 물었다.
“오빠, 조금 지루하죠?”
“아니. 신선하고 재밌네. 난 그냥 일반 생일 파티 생각하고 왔는데, 이건 마치 그룹 창립기념일 같아.”
“창립기념일 행사하고 완전히 똑같아요. 케이크 촛불 끄는 것만 추가된 거죠.”
“그렇구나.”
잠시 후 호텔 직원들이 높이 1미터가 넘는 5단 케이크가 실린 카트를 끌고 왔다. 케이크에는 백철중 회장의 나이만큼 촛불이 켜져 있었다.
백철중이 입김을 불어 촛불을 끄자 우레와도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귀청이 떨어져 나갈 듯한 박수소리에 한서진은 얼떨떨해서 돌아봤다.
‘재벌 총수는 생일 파티도 범상치가 않구나.’
케이크를 자르는 등 주요 행사는 얼추 끝났다.
이제 연회 분위기는 각자 식사와 대화를 즐기는 흐름으로 넘어갔다. 한서진은 저 멀리 임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백철중을 흘끔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빠, 어디 가시게요?”
“잠시 손 좀 씻고 올게.”
자리에서 일어난 한서진은 화장실을 찾았다. 간단하게 세수를 하고, 손을 씻은 뒤 종이 타월로 손을 닦았다.
그때였다.
“음식은 입에 맞나요? 난 여기 호텔 음식 영 별로던데.”
언제 와 있었는지, 백진현이 손을 씻으며 태연히 말을 걸었다. 한서진은 손을 닦다 말고 그를 흘끔 돌아봤다.
“전 맛있더군요. 입맛이 까다롭지 않아서 그런가 봅니다.”
“할아버지와 친밀한 것 같던데, 하나가 그쪽을 많이 좋아하나 봅니다. 재계 사람도 아니라면서 어떻게 할아버지 마음을 얻었어요? 그게 조금 궁금하네.”
“회장님과 인연이 약간 있죠.”
“약간이 아닌 것 같던데. 전 할아버지가 하나 말고 그렇게 누군가를 껴안는 건 참 오랜만에 봤습니다.”
한서진은 피식 웃었다. 거울을 통해 그 미소를 본 백진현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웃어? 내 앞에서?’
한서진은 태연히 말했다.
“하나가 아니라 하나 고모라고 불러야 하는 거 아닌가요?”
“…….”
“그리고 엄밀히 따지면 난 고모 친구인데. 이렇게 편히 대해도 되는 건가?”
백진현은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뱀의 입가에 여유 넘치는 미소가 어렸다.
“요즘 세상에 누가 나이 어린 고모한테 깍듯하게 굽니까. 그것도 불륜으로 안방마님 자리 꿰찬 여자 딸한테.”
“…….”
“몰랐어요? 송지현 그 여자, 몸뚱이로 할아버지 유혹해서 지금 자리 얻어낸 거예요. 할아버지 유산에만 관심 있죠.”
허물을 벗어던지듯이, 뱀의 미소가 본색을 드러냈다.
“할아버지가 아무리 애지중지 해도 결국 세월 못 이겨요. 지금 그룹에서 송지현 그 여자 인정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한테 돌아갈 건 H백화점 정도가 다란 말이죠.”
“당신이 하나 싫어하는 건 알겠는데.”
한서진의 말이 짧아졌다. 백진현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어디 두고 보자, 라는 여유가 그의 온몸에 넘쳐흘렀다.
“처음 보는 나한테 이러는 이유는 뭐지?”
“그냥. 궁금해서.”
백진현의 말도 함께 짧아졌다. 그는 태연히 팔짱을 끼며, 개수대 옆에 천천히 기댔다.
“살펴봤는데, 하나가 당신 보는 눈빛에서 애정이 뚝뚝 흘러넘치더라고. 그 도도한 아이가 말이야.”
“…….”
“어떻게 꼬셨어? 그 무서운 할아버지까지 인정할 만큼?”
한서진은 피식거리며 그를 주시했다.
뱀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가벼운 경고 하나 해줄까? 할아버지가 스킨쉽했다고 전부가 아니야. 할아버지가 그룹에서 제일 무서운 분인 건 맞지만, 유산 분배를 모두 마음대로 하시진 못해. 겉으로야 정정하시지만, 이미 연세도 고령이시잖아?”
“그런데?”
“주제 파악을 하라는 말이지. 그룹에 발 디딜 생각은 하지 말라고.”
한서진은 문득 궁금해졌다.
백진현과 자신은 오늘 처음 본 사이다. 심지어 그는 자신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 그런데도 왜 그는 이렇게까지 나오는 것일까.
백진현이 다시금 친절하게 웃었다.
“그쪽이 혹시 분위기 모르고 물 흐릴까 봐, 내가 좀 참견맞게 나서봤어요.”
“…….”
“명심해요. 우리 그룹, 만만하지 않아요. 그룹 내에서 송하나 편은 할아버지 말고 없습니다.”
갑자기 한서진은 크게 웃었고, 백진현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그 웃음소리가 마치 자신을 비웃는 듯이 거슬렸다.
이윽고 웃음을 그친 한서진은 아직도 여운이 남은 눈으로 백진현을 주시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알겠네요. 그러니까 내가 하나 꼬셔서 그룹에 비비려고 들어온 놈처럼 보였고, 그게 거슬려서 초면에 이러시는 거다?”
“뭐, 그렇다고 해둡시다. 내가 원래 거슬리는 건 못 참는 성격이라.”
“젊은 친구가 행동력이 넘치네. 그건 좋아요. 좋은데, 좋은데 말이지.”
한서진은 즐거운 듯이 킬킬거렸다.
백진현이 왜 이렇게 나오는지 깨달았다. 그는 지금 자신을 아래로 낮춰 보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게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회장님한테 뭐라고 할 건 걱정이 안 되나 봐?”
“할아버지가 대단하신 거지, 그쪽이 대단한 건 아니잖아? 고자질하고 싶으면 해보던가. 겨우 이 정도 기세싸움에 울면서 쪼르르 달려 오냐고 할아버지가 실망하실걸.”
그걸 믿고 이렇게 나오는 것이었나. 한서진은 키득거리며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내가 이런 잔챙이랑 뭐 하는 짓인지.’
말을 더 섞기도 귀찮아졌다. 백세완에 비하면 이놈은 뱀의 축에 들지도 못하는, 새끼 도마뱀일 뿐이다. 뱀이라고 여겼던 것도 착각이었다.
그는 등을 돌렸다.
“백진현 씨, 인터넷에 내 이름 검색해 봐요. 아, 근데 내 이름은 기억하고 있나?”
“……뭐?”
“한국대 한서진, 뭐 이렇게 검색해봐.”
한서진은 그 말만 남기고 화장실을 떠났다.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바라보던 백진현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런데 검색어를 다 입력하기도 전에 연관 검색어가 떠올랐다. 주르륵 뜨는 기사 목록을 보고 백진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 잠깐?”
그제야 그는 아까부터 한서진을 대할 때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를 확인했다. 놀랍게도 그는 작년 500억 달러의 잭팟을 터트린 청년 재벌이었던 것이다.
백진현은 혼자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망할.”
“오래 걸렸네요.”
“아, 새끼 도마뱀 한 마리가 귀찮게 해서.”
“새끼 도마뱀이요? 호텔에요?”
송하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워하자 한서진은 가볍게 쓴웃음만 지었다.
“겁 줘서 쫓아냈으니까 이제 안 달려들 거야.”
한서진은 태연히 앉아 식사했다. 송지현과 송하나와 셋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음식을 즐겼다.
주변을 둘러보니 오너 일가와 임원들은 자유롭게 섞여 음식을 즐기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이쪽 테이블에는 다가오지 않았다.
말은 하지 않지만 분명한 거리감. 그러나 한서진은 이쪽이 오히려 편했다. 송지현 모녀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잠시 후 백철중이 살짝 취한 채 테이블에 왔다.
“여어, 다들 밥은 맛있게 먹고 있나?”
“술이나 계속 드시지, 여긴 왜 왔어요?”
송지현이 툴툴거리듯이 말하자 백철중은 껄껄 웃었다.
“나 대신 한 대표가 두 숙녀분을 잘 에스코트하고 있는 것 같아서 일부러 안 왔지. 왜, 이 서방님이 그렇게 보고 싶었나?”
“징그러. 한 대표도 있는데 그러지 말아요.”
백철중은 기분 좋게 웃으며 한서진에게 잔을 내밀었다. 한서진도 술잔을 들어 가볍게 건배했다.
“와줘서 고맙네. 불편한 건 없었나?”
“아니오, 전혀 없었습니다. 새끼 도마뱀 재롱도 봤고요.”
“새끼 도마뱀? 이 호텔도 요즘 위생 관리가 엉망이군.”
한서진은 피식거렸다.
신기하게 아까 백진현의 태도가 조금도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운 기분만이 가슴을 맴돌았다.
‘이런 게 여유란 거구나.’
처음 겪는 생일 파티. 색다른 경험과 특이한 사람들.
한서진은 진심을 담은 미소로 말했다.
“이 자리, 정말 즐거운데요.”
============================ 작품 후기 ============================
“혹시 명함 한 장 받을 수 있을까요?”
“명함 없는데.”
“푸훗, 그러시구나. 그래도 제 명함은 받아두시....”
“가서 내 이름으로 구글링해봐. 병시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