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4 그리고 신년 =========================================================================
진성호텔.
백철중의 장남 백형진은 가족과 함께 그랜드볼룸에 먼저 도착한 상태였다. 오늘은 부친인 백철중의 생일이었기에, 직계와 방계를 가리지 않고 전부 모일 예정이었다.
백형진은 넥타이가 목을 조이는 듯해, 조금 느슨하게 풀면서 가볍게 물었다.
“세완이는? 온대?”
“못 오죠. 아버님이 그렇게 노여워하셨는데. 요즘은 연락도 잘 안 돼요.”
“설마 아버지, 평생 제주도에 가둬둘 생각이신가. 작은 아버지 하나뿐인 피붙이라고 그렇게 귀여워하셨으면서.”
“자세한 내막을 아는 사람이 있어야죠. 세완이도 도통 입을 열지 않으니.”
백세완이 그룹에서 내쳐진 것은 일가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지만, 자세한 연유를 아는 이는 없었다. 백철중 회장이 철저한 함구를 지시했고, 또 백세완 본인도 절대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백형진의 처, 최수정은 팔짱을 낀 채 말했다.
“뭐 때문에 아버님이 그렇게 노여워하셨는지 참.”
“세완이 형이 H반도체 일로 뭔가 할아버지 심기를 건드린 거 같더라고요. 뭐 큰 실수를 했나 보죠.”
장남, 백진현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입구를 흘끔 살폈다.
“하나는 또 할아버지와 같이 오려나 보네요. 아직까지 안 온 거 보면.”
“아버님 앞에선 말조심해. 고모라고 꼬박꼬박 붙이고.”
“죽겠어요. 이제 고3인데 고모라고 하려니 영 어색해요.”
“그래도 해. 아버님 눈 밖에 나고 싶니?”
“에휴. 아, 전 저기 작은 아버지네 좀 갔다 올게요. 그래도 인사는 하고 와야죠.”
백진현은 그 자리를 벗어나, H자동차 백호진 가족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차갑던 얼굴에 인위적인 미소가 어렸다.
그는 백호진 앞에 서서 꾸벅 인사했다.
“작은 아버지, 작은 어머니. 안녕하세요.”
“오, 진현이 왔구나. 간만에 보네.”
“진현이 형.”
“간만이다, 수호.”
백호진의 아들, 백수호가 반갑게 맞이했다. 백진현은 백수호의 어깨를 툭툭 치며 옆에 앉았다.
“대학 결과 나왔다며?”
“응, 간신히 일류대 턱걸이했네. 삼수는 안 해도 될 것 같아. 용돈 안 깎여서 다행이지, 뭐. 그쵸, 아빠?”
백호진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카드 압수는 안 하마.”
“들었지, 형? 우리 아빠가 이렇게 엄격하시다니까.”
“왜, 듬직하신 아버지잖아.”
백진현은 피식거리며, 지나가는 여직원이 든 쟁반에서 칵테일 잔을 집어 들었다. 백수호가 물었다.
“하나는 아직 안 왔어?”
“니 고모야, 인마.”
백진현은 조금 전에 모친에게 들은 말을 그대로 해주었다. 백수호가 툴툴거렸다.
“나보다 2살 어리잖아. 근데 고모는 무슨.”
“할아버지 앞에서 자신 있게 하나야, 해보던가. 그랬다간 사단이 벌어질 걸?”
“그나저나 할머니는 안 오시나? 그래도 가족 행사인데.”
“이혼하고 두 분 사적으로 안 보신지 오래 됐는데, 이런 자리에 오시겠어?”
연회 시간이 가까워짐에 따라 친인척들이 계속 모였다. 진성호텔 중에서 가장 큰 그랜드볼룸이었지만, 직계와 방계만 수십 명이 넘고, 또 그룹 내 고위 임원들까지 모이다 보니 살짝 비좁은 느낌마저 들었다.
그때 백수호가 입구를 흘끗거리고는 입을 열었다.
“그 여자 왔다.”
“송지현?”
백진현은 아무렇지 않게 이름을 부르며, 입구 쪽을 돌아보았다. 그 순간 약속이라도 한 듯이 홀에 정적이 찾아왔다.
로비 입구에는 화려한 검은 드레스를 입은 송지현이 들어서고 있었다.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도도한 눈빛으로 걸음을 내딛는다.
마흔 초반이라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는 늘씬한 몸매와 세월을 잊은 얼굴. 후하게 쳐주면 이십대 후반으로도 봐줄 수도 있을 듯한 얼굴이다.
“휘유, 역시 왕년에 잘나간 대여배우다운데. 누가 저 얼굴을 마흔 줄로 보겠어?”
“저러니 할아버지를 꼬셨겠지. 평생 그렇게 여자문제 없으시던 분을.”
“그때 할머니한테 재산분할로 일조 원인가 주셨었지? 19년 전에 일조 원이면 대체 얼마야.”
멀리 송지현은 지배인의 안내를 받아 지정석에 앉고 있었다. 백진현은 그 모습을 차갑게 응시하며 말했다.
“그 일만 아니었음 지금 재계 1위는 우리 H그룹이었을걸.”
19년 전, H그룹은 자타공인 굳건한 재계 1위였다. 대통령조차 감히 H그룹의 위세를 건드리지 못할 만큼, 확고부동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 재벌 1위 그룹 총수가 젊디젊은 24살 여배우한테 눈이 멀어 조강지처를 저버린 사건은, 당시 온 나라를 들썩이게 만든 희대의 스캔들이었다.
스캔들도 스캔들이지만, 이혼 당시 1조 원에 달하는 재산 분할을 해준 일은 아직도 재계에서 두고두고 회자되는 일이었다.
지금도 나이 많은 재벌 인사들은 말하곤 했다. 그 일만 아니었으면 지금까지도 H그룹은 재계 1위였을 거라고.
물론 이견도 존재했다.
백철중 회장 부부사이는 이미 파탄에 이르러 있었고, 송지현과 본격적인 관계를 시작한 건 이혼 직후라는 것이다. 백철중의 담백한 인품을 믿는 임원들은 이 설을 지지했지만, 정작 백씨 일가 중 그것을 믿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 송지현은 몸뚱이 하나로 그룹 총수이자 가주를 유혹한 창녀였고, 송하나는 유산을 노리는 더러운 여자의 딸일 뿐이었다.
“임원들하고 인사 좀 하고 오마. 여기들 있거라.”
“네, 작은 아버지.”
백호진 부부가 자리를 떴고, 테이블에는 백진현과 백수호 둘만 남았다. 그때 백수호가 머리 뒤로 깍지를 끼며 말했다.
“어, 송하나 왔다.”
“그래?”
백진현은 흘끔 돌아봤다.
어깨가 드러나는 와인색 원피스를 입은 모습은 단아하면서도 예뻤다. 늘씬한 각선미와 숨길 수 없는 볼륨감, 그리고 성숙한 얼굴이 대번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백수호가 나지막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휘유, 역시 하나 송은 언제 봐도 치명적이라니까. 피가 이어져 있다는 게 참 아쉬워.”
“유산을 노리는 여자의 딸일 뿐이야.”
“남자로서 말해 봐. 형도 아쉽단 생각 안 해?”
“말조심해라. 할아버지 눈밖에 벗어나고 싶지 않으면.”
백수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가볍게 킬킬거렸다.
“솔직히 꼴리잖아. 저게 어딜 봐서 미성년자야? 역시 지 어미 닮아서 몸뚱이 하나는 타고 났어. 아, 보기만 해도 맛있어 보인다. 한 입에 삼켜도 비린내 안 날 것 같아.”
“듣는 귀 많다. 말조심해.”
송지현이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송하나는 연회장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전혀 의식하지 않고, 모친이 있는 테이블로 또각또각 향했다.
기지개를 켜던 백수호가 이상한 것을 발견한 듯 흠칫했다.
“어, 근데 형. 뭔가 이상한데.”
“뭐가?”
“송하나 쪽 테이블, 빈 의자가 두 개야.”
“뭐?”
백진현은 의아했다.
원래 이런 가족 행사에서 백철중 회장이 앉는 테이블은 언제나 의자가 세 개였다. 백철중, 송지현, 송하나를 위한 자리였다.
그런데 빈 의자가 하나 더 있다고?
백진현이 의아해하고 있는데, 입구 쪽을 확인한 백수호가 별안간 입을 열었다.
“잠깐, 저 남잔 누구지? 처음 보는 얼굴인데?”
백진현의 시선도 그쪽으로 향했다.
과연 백수호의 말대로 처음 보는 청년이 들어왔다. 제법 반듯한 옷차림, 하지만 짚이는 바가 없는 얼굴이다.
나이를 보면 사장이나 임원은 아니고 분명 어느 재벌가의 직계일 텐데, 전혀 알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가만. 형, 저 남자 송하나하고 아는 사인가 본데.”
“혹시 약혼자?”
“그럴 수가 있어? 우리가 전혀 모르는 얼굴인데?”
재계 순위권 젊은이라면 그 둘이 모를 수가 없다. 평소에도 돈독히 교류하며 우애를 다지기 때문이다.
백수호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진짜 보통 사이 아닌가 본데. 같은 테이블에 앉았어.”
이 순간 연회 참석자들은 대부분 같은 생각을 했다.
의문의 빈자리가 저 낯선 청년을 위한 것이었단 말인가?
“잘 왔어요.”
송지현이 웃는 얼굴로 맞이했다. 한서진은 다소 민망해하며 빈자리에 앉았다. 착각인가? 왠지 사방에서 이쪽 테이블만 쳐다보는 것 같은데?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생일파티가 제가 생각한 것하고는 차원이 다르네요.”
“그룹의 가장 큰 이벤트 중 하나이기도 하니까요. 창립기념일, 그리고 회장님 생일.”
“그냥 부담 없이 놀다 가면 돼요, 오빠.”
송하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이런 자리에서 어떻게 부담을 안 느껴.’
그러고 보니 두 모녀의 옷차림이 심상치 않다. 그냥 보면 연말에 레드카펫 밟는 여배우로 오인했을 정도로 화려하다. 옷뿐만이 아니라 외모 역시 그런 착각에 한몫을 했다.
“한 대표, 옷이 참 잘 어울려요. 이렇게 보니 정말 근사한 청년 기업가네요.”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하나가 골라줬다고 들었는데.”
“아, 예. 저번에 H백화점 청담점에서 골라줬습니다.”
송지현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거짓말.”
“예?”
“그 의류 브랜드, 그 지점에 입점 안 한 거예요. 내가 사장인데 모를 수가 있나요.”
“그, 그러시군요.”
예리한 눈썰미에 한서진은 진땀을 살짝 뺐다. 이거 괜히 거짓말을 했나 싶다.
송하나가 태연하게 말했다.
“원래 우리 백화점 안 가려다가 오빠가 가자고 해서 간 거야. 그래도 엄마가 운영하는 거니까 좀 팔아줘야 한다면서.”
“내가 언…….”
순간 한서진은 구두에 느껴지는 작은 충격에 입을 다물었다. 이건 아무리 봐도 힐로 찍은 건데?
‘하나야?’
혹시 송하나가 그랬나 싶어 봤지만, 얼굴색이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이쪽이 착각한 건가 싶을 정도다.
“어머, 그랬어요? 고마워요. 그래도 역시 한 대표밖에 없네. 다음에 혹시라도 가족끼리 오면 나 불러줘요. 내가 최선을 다해 코디해줄게요. 이래봬도 옷 보는 눈은 좀 있거든.”
“아…… 감사합니다.”
“폰 이리 줘 봐요. 내 번호 찍어줄게요.”
한서진은 엉겁결에 송지현과 전화번호를 교환했다.
번호 교환을 마치고, 그는 빈자리를 힐끔 보며 물었다.
“회장님은 아직 안 오셨나 봅니다.”
그 말에 송하나가 스마트폰을 확인하고는 대신 대답했다.
“회장님 조금 늦는대요. 단톡방에 막 올렸네요.”
“그래?”
송지현도 그 말에 톡방을 확인했다. 한서진은 조금 어리둥절했다.
“단톡방이요?”
“가족 단톡방 있어요. 셋만 있는.”
“……아, 그러시군요.”
뭔가 오늘 백철중 회장의 의외의 면모를 본 것 같은데? 그 연세에 단톡방 같은 걸 한단 말인가?
‘그래서 젊어 보이시나?’
사실 백철중은 본래 나이에 비해 십 년 이상 젊어 보이는 정정한 타입이긴 하다. 그래도 칠십이 넘은 그 연세에 톡방 활동이라니……. 요즘 유행한다는 신세대 노년층, 뭐 그런 건가?
“오셨어요, 작은 할머니.”
그때 낯선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송지현의 얼굴에서 순간적으로 웃음이 사라졌다가, 다시 미소가 나타났다. 워낙 빠른 변화라 한서진은 눈치 채지 못했다.
그곳에는 말끔하고 잘생긴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송지현이 웃으며 인사했다.
“그래요, 진현 군도 잘 지냈나요?”
“네, 염려해주신 덕분에요. 하나 고모도 안녕?”
“……안녕.”
한서진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지금 송지현을 할머니라고 불렀어? 송하나한테는 고모라 부르고? 아무리 봐도 20대 중반은 되어 보이는데?
인사를 마친 백진현은 미소를 지으며 한서진을 돌아봤다.
“작은 할머니, 저 이쪽 분도 소개시켜주세요. 전 처음 보는 얼굴인데.”
한서진은 앉은 채로 가만히 그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깨달았다.
‘닮았네. 백세완하고.’
그와 똑같은 뱀의 미소가 눈에 익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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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편도 공을 들여 썼스빈다.
전 이런 장면이 좋아여. 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