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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143화 (143/609)

00143  그리고 신년  =========================================================================

“회장님 생신?”

왜 그걸 본인이 직접 말하지 않는지 의아해하는데, 송하나가 얼른 덧붙였다.

“아빠가 대신 초대해 달랬어요. 직접 말씀 전하기에는 조금 민망해하셔서…….”

“아아, 그렇구나. 알았어, 회장님 생신인데 가야지.”

한서진은 시원스럽게 승낙했다.

어느덧 차는 청담 부근의 H백화점에 도착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둘은 내렸다. 송하나가 가볍게 툴툴거렸다.

“그나마 여기가 H그룹 백화점 중에선 제일 낫더라고요.”

“나한텐 다 똑같은 백화점일 뿐인데.”

“매장 입점한 거 보시면 확 차이가 나요. 백화점마다 공략 소비층이 다르거든요.”

송하나는 그의 소매 끝을 슬쩍 잡아당기며 앞장을 섰다. 그 바람에 손끝이 살짝 부딪쳤고, 한서진은 괜히 민망해졌다. 하지만 그녀는 의식하지 않는 눈치였다.

‘여기 구조를 잘 아네. 하긴, H그룹 소유지.’

H그룹 막내딸이 H백화점 본점 구조를 잘 아는 게 특별한 일은 아니리라.

송하나는 신관 명품관으로 한서진을 끌고 갔다. 화려하게 치장된 명품 매장이 즐비한 로비 복도, 예전에는 낯설지만 지금은 당연하게 느껴지는 풍경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매장에 들어서자 직원이 전담을 위해 옆에 붙었다. 둘은 진열품을 천천히 구경했다.

“오빠, 가방 별로 없죠?”

“응? 아, 응.”

“그럴 것 같더라. 일단 가방부터 천천히 둘러봐요. 의류는 마지막에 보면 돼요.”

송하나는 팔짱을 낀 채 매장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여기 지점에서 마음에 드는 건 못 찾을 거예요.”

가차 없는 혹평에 저절로 쓴웃음이 나온다.

천천히 매장 여러 군데를 돌아보며, 남성용 가방을 6개 샀다. 3개는 백팩, 다른 3개는 서류 가방이었다.

안내 데스크에 배송 서비스를 부탁하고, 둘은 마저 쇼핑을 계속했다.

“아, 잠시만요. 저 엄마한테 전화 왔어요.”

송하나는 양해를 구하고 잠시 거리를 두며 통화를 했다. 한서진은 스마트폰으로 웹 기사를 검색하며 기다렸다. 잠시 후 그녀가 미안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오빠. 저 엄마가 마침 지금 여기 백화점에 왔대요.”

“그래?”

“아빠 생신 선물 사러 왔다는데 같이 좀 골라 달래요. 그래서 잠깐만 다녀와도 돼요?”

“그렇게 해.”

“금방 갔다 올게요. 저쪽에 가면 시계 매장 있으니까 거기서 시간 잠깐만 보내세요.”

조금 아쉬웠지만, 한서진은 송하나를 순순히 보내주었다.

그는 명품관을 거닐다가 어느 매장에 들어갔다. 이왕 온 김에 동생에게 줄 선물도 고를 생각이었다. 지갑 정도면 적당하겠지.

손님이 조금 많은지, 직원이 바로 붙지 않았다. 한서진은 차라리 그게 편했다. 그는 천천히 지갑을 둘러보았다.

‘장지갑이 좋을까, 단지갑이 좋을까.’

조금 고심하던 중 그는 한지혜에게 톡을 보냈다.

―장지갑이 좋냐, 단지갑이 좋냐.

―지갑 사주게? 어느 매장 거?

―지금 에르메스 와 있는데.

―꺅! 아무거나 좋아! 긴 것도 좋고 짧은 것도 좋아!

―그럼 나 꼴리는 대로 고른다.

한서진은 피식거리며 천천히 지갑을 골랐다. 장지갑과 단지갑을 놓고 고민하던 중, 인기척이 느껴졌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살펴보시는 게 있으신지요?”

공손하면서도 나긋나긋한 목소리. 그 순간 한서진은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짜릿한 충격을 느꼈다.

잠시 굳어있던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단아한 옷차림의 여직원이 웃는 얼굴로 바라보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경악으로 굳어졌다.

절대 잊을 수 없는 얼굴이다.

떨리는 성대를 비집고 힘들게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서영아.”

“……오빠.”

“여기에서 일하고 있었어?”

“오빠가 여기는 어떻게…….”

임서영은 꽤 큰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한서진은 언제나 가난한 삶에 허덕이는 남자친구였다. 한 번도 가난하지 않은 적이 없는, 초라함에 찌든 인생이었다.

기본 디자인의 지갑 하나가 수백이 넘어가는 이런 고급 매장에 올 사람은 아닌 것이다. 뜻밖의 곳에서 의외의 포지션으로 만난 덕분인지, 임서영은 좀처럼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요즘 많이 좋아졌나 보네. 잘 됐다.”

가까스로 그녀가 꺼낸 말이었다. 웃고 있지만, 억지로 자아낸 표정임이 또렷했다. 3년을 사귀었기 때문에 바로 알 수 있었다.

“……조금 살만 해. 너는 백화점으로 이직했구나.”

“……응.”

“결혼식에 못 가서 미안하다. 내가 그때 좀 아팠거든.”

“괜찮아.”

췌장암에 걸려 죽음을 앞두고 힘들게 용기를 내어 전화했을 때, 차갑게 끊어내던 게 생각났다. 뚜, 뚜, 거리던 전화기만 한참 붙잡고 있던 자신이 기억났다.

조금 신기했다.

그때의 슬펐던 감정이 기억나지만, 그게 마치 자신이 아닌 타인인 듯 담담하게 관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가난한 사랑은 자신 없다며 이별을 통보했던 여자. 사무친다거나 가슴이 미어진다거나 하는 감정은 없었다. 오히려 오랜만에 만난 동창처럼 반가운 느낌만 들었다.

한서진은 제품을 고르며 말을 이어 나갔다. 3년 만에 보는 옛 애인, 순간 가슴이 뛰긴 했지만 잠깐이었다.

“지혜 줄 선물 고르러 왔어.”

“……그렇구나. 지혜는 잘 지내?”

“그럼 잘 지내지. 아, 지혜 올해부터 다시 대학 다녀.”

“등록금 비쌀 텐데.”

“사립대 등록금이 비싸 봤자지. 그래도 하나뿐인 동생인데 그 정도도 못해줄까.”

제품을 고르며 말을 이어나가면서도, 거듭 신기했다.

다시 만난 임서영 앞에서 이렇게 차분할 수 있구나, 아무렇지 않을 수 있구나.

한서진은 깨달았다. 자신의 안에 더 이상 그녀에 대한 원망이나 미련이 없다는 것을. 남은 것은 약간의 반가움만이 전부라는 것을.

“이것들 전부 포장해줄래?”

“……벌써 이천만 원 넘었어.”

“괜찮아.”

“오빠, 정말 잘 됐나 보구나. 무슨 일 하는데?”

“그냥 작은 사업 하나 하고 있어.”

“……작은 사업 정도가 아닌 거 같은데.”

힘들게 짓는 웃음이 느껴진다. 한서진은 지금 상황에 대한 우월감보다는, 그녀가 지난 3년을 어떻게 살았는지 조금 궁금해졌다.

“결혼 생활은?”

“그럭저럭 잘 살고 있어. 남편도 성실하고 착하거든.”

“남편은 뭐 하는데?”

“그냥 공돌이야.”

“별다른 일은 없지?”

“그럼. 나름 잘 살고 있어. 집 대출금에 조금 허덕이고 있긴 하지만, 그거야 어느 신혼부부나 마찬가지고.”

한서진은 계속 물건을 골랐다. 벌써 구매금액이 일억 원을 넘어갔다. 임서영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동생 선물로 일억 원을 하루 만에 아무렇지 않게 쓸 수 있는 사람이 대한민국에 과연 몇이나 될까. 천억 대 이상 자산가가 아니면 불가능할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무리한 것이든가.

“……오빠, 무리할 것 없어.”

“무리?”

한서진이 의아해서 반문하자, 임서영은 입술을 깨물며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빠 잘 된 거 잘 알겠으니까, 내 앞에서 너무 과시하지 않아도 돼.”

“…….”

“오빠가 잘 사는 거 충분히 축하하고, 또 부러워하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너무 무리하지 않아도…….”

“그런 거 아닌데?”

한서진은 다소 복잡한 눈으로 주시하다가 말을 이었다.

“난 그냥 오랜만에 너 만난 게 반가워서, 그래도 너니까 이왕이면 많이 팔아주려고 한 거뿐인데.”

“…….”

“너한테는 그게 그런 식으로 느껴졌구나.”

“……미안해. 내가 오해했나 봐.”

아무런 원망도 없다. 그녀를 대할 때면 설렜던 기억도 이제는 희미했다.

어차피 동생 선물 고르던 중이었고, ‘아는 사람’이 매장 직원이라 반가운 마음에 더 많이 팔아주려던 것뿐인데, 그런 식으로도 받아들여질 수 있구나.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임서영의 눈높이는 겨우 그 정도에 머물러 있을 뿐이라는 것을. 한때는 자신도 그녀와 같은 높이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으리라.

그걸 생각하니 씁쓸한 맛이 입안을 맴돈다. 더 이상 구매할 마음이 사라졌다.

“이만 살게. 계산한 건 배송해 줘.”

“……알았어. 고객 등록은 되어 있지?”

“아마 되어 있을 거야. 브랜드를 일일이 기억하진 못해서.”

임서영은 카운터에서 고객 조회를 하다가 흠칫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누적구매금액이 50억 가까이 육박했던 것이다.

“결제는 몇 개월로…….”

“일시불로.”

“예, 알겠습니다.”

옆에 다른 고객이 있어서인지 임서영은 정중히 대답했다.

결제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옆에서 팔꿈치를 툭툭 치는 손길이 느껴졌다. 흠칫 놀라 돌아보던 한서진의 얼굴이 풀어졌다.

언제 왔는지, 송하나가 생글거리면서 서 있었다.

“오빠, 여기 있었어요?”

“아. 지혜 선물 고른다고. 근데 난 어떻게 찾았어?”

“밖에서 오빠 닮은 뒷모습이 딱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혹시나 해서 봤는데 정말 오빠인 거 있죠. 오래 기다렸죠?”

“다 골랐어. 이제 가자.”

“네.”

근처에 다른 손님이 없는 걸 확인하고, 임서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자친구야? 되게 미인이네.”

“그런 건 아니고, 친하게 지내는 동생.”

“아아, 그렇구나. 잘 어울린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

“……오빠. 아는 분이에요?”

송하나가 힐끔거리며 묻자, 한서진은 조금 머뭇거렸다. 사실대로 이야기하기에는 뭔가 꺼려졌다.

“친한 동생이야. 결혼하고 연락 잘 안 됐었는데, 오늘 여기서 우연히 딱 만났더라고.”

“아아, 그러시구나. 안녕하세요. 저 송하나라고 해요. 서진이 오빠 친한 여동생이에요.”

“……임서영입니다.”

“오빠 지인이시니까 제가 우리 엄마한테 잘 부탁드린다고 말씀드려 놓을게요.”

“……네? 어머니요?”

“우리 엄마 이름이 송지현이거든요.”

순간 임서영의 눈빛이 살짝 굳어졌다. 한서진은 왜 그러는지 물어보고 싶었으나, 송하나가 이만 나가자는 듯이 그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저 배고파요. 우리 간단한 거라도 먹어요.”

한서진은 그녀에게 끌려 매장을 나섰다. 그녀는 임서영을 조금도 의식하지 않는 듯 밝은 얼굴이었다.

“아까 그 말은 왜 한 거야? 어머니한테 잘 부탁드린다니?”

“엄마가 백화점 사장이에요.”

“…….”

“백화점 사업체 엄마 위해서 아빠가 해주신 거거든요. 그래서 제가 가급적 여기는 안 오려고…….”

“우리 그냥 나가자.”

송하나는 배시시 웃으며 물었다.

“오빠도 여기 더 있기 싫어졌죠?”

“……아니, 그건 아니고. 아무튼 나가자.”

사실 맞다.

“서영 씨. 방금 그 고객님, 아는 분이야? 서로 친한 눈치던데.”

한서진이 나가자마자 매니저가 호들갑을 떨며 물었다. 임서영은 씁쓸히 웃으며 대답했다.

“네, 좀 오래 된 지인이에요. 최근 몇 년은 연락 끊어졌다가 우연히 이렇게 만났네요.”

“슬쩍 봤는데, 저 분 누적 구매금액이 50억 가까이 되더라? 나 그거 보고 생각났어. 얼마 전에 뉴월드백화점에서 매장 셔터 내린 그 손님이잖아.”

“아, 정말요?”

임서영은 놀라서 반문했다. 매장에 있는 모든 진열품과 재고품을 그 자리에서 한꺼번에 사버린 고객 이야기는 이미 유명했다. 아무래도 같은 브랜드다 보니 소문이 더 빨리 퍼졌다.

매니저는 부러움을 주체 못하는 표정이었다.

“선남선녀가 따로 없네. 여자도 보니까 장난 아니던데, 난 무슨 연예인인 줄 알았어. 서영 씨는 저렇게 잘 나가는 남자랑 어떻게 알게 된 사이야?”

“그냥…… 좀 많이 친했어요.”

임서영은 가라앉은 얼굴에 억지로 미소를 띠었다.

“그래도 잘 사는 거 보니까…… 저도 마음 놓이네요.”

그게 진심에서 우러나온 건지는, 그녀 스스로도 자신감이 없었다.

============================ 작품 후기 ============================

한국드라마 감상으로 창작을 배워서 연출이 이 모양입니다.

만약 이게 싫다면 어쩔 수 없지요. 제가 변할 순 없으니....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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