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0 그리고 신년 =========================================================================
한서진은 암호화된 파일을 첨부해서 정지원에게 보냈다. 미스릴 네트워크 반도체 ‘칼라’에 관한 내용이 담긴 파일이었다.
늘 그렇듯이 메일을 보내자마자 수신 확인이 떴다. 정지원은 그가 보낸 메일은 때를 가리지 않고 즉시 읽는다. 심지어 잠자는 중에도 알람을 맞춰 둔다고 했다.
‘그럴 필요까진 없는데.’
아무튼 메일을 보내고 잠시 있으려니 곧 전화가 울렸다.
정지원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게 정말이야?」
“네, 물리적 성능은 얼추 테스트했습니다.”
「……스코브리아늄은 정말 대단한 물질이군.」
한서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스코브리아늄, 아니 미스릴이 다른 물질과는 차원이 다른 독특한 성질이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짚어내고, 끌어내는 것은 통찰안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칼라 칩의 무선 연결 성질도 통찰안이 아니면 구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에테르 언어를 회로로 새겨 넣어 끌어낸 반응이니까.
「……이건 너무 파급력이 큰데.」
“그래서 안 할 겁니까?”
「아니지, 해야지.」
“파일에 적은 대로 여기 국내 사업은 H그룹에 맡기기로 했어요. 이미 백철중 회장과 이야기가 됐습니다.”
「백철중 회장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 보구나. 저번에도 그러더니 이번에도 배려를 해주네.」
한서진은 속마음이 들킨 것처럼 뜨끔했다. 미국에서 사업에 정신없는 정지원이 자세한 사정을 알 리가 없지만.
“그래도 사람 자체는 재벌 중에서 좋은 분이잖아요. 같이 일해서 나쁠 건 없다고 봐요.”
「뭐, 네가 그렇다면야. 어차피 한국 시장은 없어도 그만이니.」
정지원은 늘 그렇듯이 큰 반대는 하지 않았다. 백철중이란 개인에 관해서만큼은 그도 융통성을 보이고 있었다.
「미국에서 당장 시행하기에는 어렵다. 워낙 사업 규모가 커서. 일단 특허부터 등록하고, 추진할게.」
“예. 뭣하면 미국에서는 칩 생산 위주로만 해도 좋습니다.”
「그건 안 되지. 이건 통신망을 손에 쥐는 게 중요한 사업인데. 칩이야 한 번 팔아먹으면 끝이지만, 통신료는 매달 받아먹을 수 있잖아.」
“그런가요. 아무튼 잘해 주세요.”
「걱정마라.」
전화를 끊으며 한서진은 문득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정지원은 설계 업무보다는 경영에 더 뛰어난 감각이 있는 것 같다. 실제로도 대리 경영인으로서 많은 역할을 해주고 있고.
실력도 있고, 또 깊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 무한한 신뢰는 통찰안으로 인한 자신감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통찰안만 있으면 세상에 두려울 게 하나도 없으니, 몇 가지 사업 아이템쯤은 그를 믿고 소소하게 전권을 위임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은 힘이 있어야 믿음도 생기는구나.’
새삼 느낀 깨달음에 한서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정지원이 바라보는 자신의 힘은 아마도 천재성이겠지. 세기의 대발명을 이미 몇 개씩이나 했으니까.
어떻게 보면 진실을 보여주는 통찰안의 힘은 천재의 직관성과도 닮아 있지 않은가. 물론 그 효능은 아득한 차이가 있다.
“내년 초에는 시범 서비스를 할 수 있으려나.”
한서진은 신년 계획을 짚으며 중얼거렸다.
칼라를 이용한 통신 시스템을 구축하는 건 어렵지 않다. 지금 사무소의 인재들을 밤낮으로 갈아 넣고 있으니까.
문제는 통신 사업을 따내는 것인데, 백철중이 알아서 잘 해줄 것이다. 이 나라에서 재벌의 이름은 프리패스나 마찬가지이니.
“이 통신 시스템 구축은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암호화 모듈과 보안 유지 기능, 다중통신 안정화 작업에 신경을 써주세요.”
“알겠습니다.”
소프트웨어 팀장, 김유빈이 머리를 가볍게 숙였다.
그는 특히 통신망 시스템 분야에 탁월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국내 최대 통신업체인 SKK통신에서 시스템 관리 팀장으로 오래 일했던 이력도 있었다.
소프트웨어 팀은 현재 칼라를 이용한 가상 통신망 시스템 구축에 한창 몰두하는 중이었다.
다만 그들은 칼라의 무선 연결 원리는 알지 못했기에, 차세대 통신망 구축 사업의 외주를 맡은 줄로 오인했다. 한서진은 보안 유지를 위해 일부러 그들의 오해를 내버려두었다.
“내일인가…….”
지시를 마치자 김유빈이 나갔다.
다시 혼자가 된 한서진은 달력을 보며 가만히 중얼거렸다. 크리스마스 이브가 벌써 내일로 다가왔다.
연말이라 그런지 누군가의 얼굴이 불현듯 생각난다.
“가족이랑 보낸다고 했지…….”
다른 이도 아니고 가족인데, 왜 괜히 아쉽다는 기분이 들까.
솔로들이 늘 그러하듯이 연말의 적적함에 젖어 있는데 문득 전화가 진동했다. 확인해보니 송하나가 보낸 톡 메시지가 와 있었다.
―오빠, 내일 바빠요?
―이브인데 바쁘겠어? 그냥 집에서 지혜랑 술 한 잔 하려고.
―지혜 언니는 이브인데 만날 남자사람친구도 없대요?
―몰라. 그냥 집에서 쉰대.
―저, 그럼 오빠 집 놀러가도 돼요? 셋이서 같이 놀고 싶은데.
―가족이랑 보낸다며?
―아빠가 출장 가신대요. 엄마도 친정에 가신다고 하고. 전 외가는 별로 가고 싶지 않아서요.
한서진은 속으로 환호했으나, 애써 침착하게 내려 눌렀다. 들뜬 것을 들키면 안 되니, 말투를 신중히 선별해야 했다.
―알았어. 그럼 내일 오후에 우리 집에 와. 준비해놓고 있을게.
―와, 신난다. 재밌을 것 같아요.
―응. 나도 기대된다.
그 뒤로는 건성으로 답톡을 마무리한 뒤, 대화가 끝나자마자 그는 부리나케 한지혜한테 전화를 걸었다.
“어디야? 뭐 하냐?”
「밖인데, 왜?」
“너, 내일 뭐 해?”
「말했잖아. 집에서 여유자적하게 발코니 온탕에 몸 담그고 치맥을 즐기면서 눈 내리는 이브를 구경할 건데. 싱글 친구들 불러서.」
“눈? 내일 눈 온대?”
「응. 80% 확률로 눈 온대.」
“너는 무슨 기집애가 이브 날에 만날 남자사람친구도 없어서 집에서 좌욕이나 즐기겠다는 거냐?”
「내가 언제 무슨 좌욕 한댔어!」
“됐고, 그냥 내일 나가. 집에 있지 마. 알았어?”
「……하나 집에 온대?」
한서진은 뜨끔했으나 태연하게 시치미를 뗐다.
“걔가 우리 집에 왜 와? 가족이랑 이브 보내겠지. 아무튼 내일 집에 있는 꼴 보이면 포르쉐는 압수다.”
「알았어, 알았어. 원래 친구들이랑 집에서 느긋하게 보내려고 했는데 하루쯤 비워주지, 뭐. 그래도 미성년자니까 벌써 건드리면 안 된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
물론 동생은 끝끝내 믿어주지 않았다. 야속하게도 속아주는 시늉조차 없었다.
크리스마스 전날 오후.
한서진은 약속한 장소로 나갔다. 송하나는 기사가 딸린 개인 차량을 이용하지 않고, 대중교통을 이용해 약속 장소로 나왔다.
“이브니까 기사님은 휴가 드렸어요.”
묻지도 않았는데 송하나는 먼저 대답했다. 괜히 기특했다.
한서진은 집으로 핸들을 돌렸다. 그리고 왼손으로는 송하나가 보지 못하게 빠르게 문자를 눌렀다. 수신인은 한지혜였다.
―준비한 대로 잘해라. 실수 없이.
―알았어.
들리지 않게 목청을 가다듬고, 그는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일부러 스피커폰 모드를 켰다.
잠시 후 한지혜가 전화를 받았다. 평소와 달리 살짝 간드러지는 비음이 섞였다.
「어, 오빠.」
‘으, 토할 것 같네.’
“응. 나 지금 하나 만나서 집에 가는 중이야. 파티 준비 다 세팅해놨지?”
「어? 내가 어제 말 안 했어? 나 오늘 그냥 친구들이랑 파티하기로 했는데. 밖에서.」
“뭐야? 그런 게 어딨어?”
「아, 진짜 미안. 내가 어제오늘 정신없어서 말한다는 걸 깜빡했나 보다. 하나한테는 내가 따로 말할게. 미안.」
“야야! 한지혜! 이런 게 어딨……!”
전화는 뚝 끊어졌다. 한서진은 낭패 가득한 얼굴로 송하나를 돌아보았다. 그녀도 조금 당황한 듯한 표정이었다.
“……어쩌지?”
“어쩔 수 없죠. 그냥 우리끼리 놀아요.”
“그, 그래도 괜찮겠어?”
“대신 저 일찍 들여보내주세요.”
“걱정 마.”
일찍 들여보내달라는 말에도 한서진은 전혀 섭섭하지 않았다.
‘난 신사니까, 당연하지.’
그때 송하나 쪽에서 가볍게 진동음이 울렸다. 그녀는 핸드폰 내용을 확인하고는 배시시 웃음을 머금었다. 남자라면 누구나 마음이 좋아질 수밖에 없는 미소였다.
“누구야?”
“지혜 언니요. 톡 보냈어요. 오늘 같이 못 놀게 돼서 미안하대요.”
“나중에 가만 안 둔다고 전해.”
“네, 알았어요.”
이것으로 무사히 마무리 된 것 같다. 근데 왜 쟤는 자꾸 피식피식 웃지? 대체 지혜가 뭐라고 했기에?
저택에 도착한 둘은 1층 응접실로 향했다. 최수한이 미리 준비를 해놓은 뒤였다. 주류 대신 음료와 맛있어 보이는 파티 음식이 준비돼 있었다.
“솔로들끼리, 메리 크리스마스.”
“네, 오빠도 메리 크리스마스.”
둘은 술 대신 콜라를 서로 부딪쳤다.
코트를 벗은 송하나는 두꺼운 겨울옷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볼륨감이 장난 아니었다. 벌써부터 여름이 기다려진다면 너무 속이 보이는 생각일까.
“아, 눈 와요.”
송하나가 탄성을 지르자 한서진은 시선을 돌렸다.
응접실 측면의 통짜 유리벽 밖으로 흰 눈송이가 소복소복 내려앉고 있었다. 느린 바람에 가볍게 휘날리며 차곡차곡 쌓이는 눈이 참 예뻤다.
“눈 되게 예쁘다. 그쵸?”
“그러게. 오늘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더니 정말이네.”
“이런 크리스마스 이브도 좋은데요. 음식도 맛있어요.”
송하나가 똑바로 눈을 보며 싱긋 웃었다.
그 뒤로는 가벼운 잡담과 수다였다. 주로 송하나가 말하고 한서진은 듣는 쪽이었다. 한서진은 턱을 괸 채 재잘거리는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적합.
통찰안이 느긋한 분위기에 살짝 찬물을 끼얹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는 저물어가는 오후의 흐름에 취해 있었다.
“……오빠?”
불현듯 그녀의 목소리가 그를 일깨웠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헛기침을 했다.
“응? 뭐라고 했어?”
“저 이제 가야 돼요. 벌써 7시예요.”
“아아, 그래. 데려다줄게.”
“괜찮아요. 차 타고 가면 돼요. 오빠도 피곤하실 텐데 주무셔야죠. 퇴원하신지도 얼마 안 됐는데.”
“아니야, 태워다줄게. 눈도 오는데 추워.”
송하나는 극구 사양했으나 한서진은 기어이 그녀를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차에서 내려 헤어지려는데 아쉬운 마음이 가슴을 맴돌았다. 한서진은 애써 그것을 감추고 태연히 말했다.
“들어가라.”
“네, 고맙습니다.”
아쉬운 마음을 누르며 등을 돌리는데, 문득 송하나가 다시 불렀다.
“오빠.”
“어, 응?”
“저 며칠 지나면 열아홉이에요.”
“응? 그거야 알지. 근데 왜?”
“그냥 그렇다고요.”
송하나는 의미 모를 웃음을 남기고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리고 그가 부를 틈도 없이 저택 안으로 사라졌다.
‘무슨 뜻이지?’
아쉬운 마음 반, 궁금증 반으로 바라보던 한서진은 눈이 쌓이는 차에 올라탔다.
“너는 아빠가 기다리시는데 왜 이렇게 늦었어?”
“왜, 일찍 왔잖아. 친구들이랑 노느라고 좀 늦었는데.”
“크리스마스 이브는 가족과 함께, 몰라? 다음부턴 늦지 마라. 아빠 오래 기다리셨어.”
“알았어.”
“밥은?”
“먹었어.”
“그래도 조금이라도 먹어.”
“싫어. 여기서 키 더 커지면 안 된단 말야.”
송지현은 놀라서 물었다.
“성장판 아직도 안 닫혔어?”
송하나는 투덜거리며 대답했다.
“몰라. 분명 마지막에 잴 때는 170.1이었는데 오늘 아침에 170.5로 나왔어.”
“키 더 크면 늘씬하고 좋지, 왜 그러니.”
롱코트를 벗어 눈송이를 털면서, 송하나는 살짝 불만스럽게 말했다.
“아무튼 안 먹어. 키도 문제고 살도 문제야.”
“어차피 살은 한 군데만 찌면서 무슨…….”
“그래도 안 먹어.”
자기 방으로 잽싸게 올라가는 송하나를 지그시 보면서, 송지현은 팔짱을 꼈다.
“애가 까칠하긴. 이제 지도 고3이라 이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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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혜가 송하나에게 보낸 톡은 과연 무슨 내용이었을까요...
다음 화부터 신년입니다!
캐릭터들이 한 살씩 더 먹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