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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139화 (139/609)

00139  군중 제어  =========================================================================

송하나는 퇴원할 때까지 매일 병문안을 왔다. 한서진은 어느덧 그녀의 방문이 익숙해졌다. 오히려 평소보다 조금 늦으면 오늘은 안 오나 하고 서운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매일 달라지는 패션을 보는 것도 은근한 즐거움이었다.

발랄한 10대와 성숙한 20대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걸친 스타일에서 당당한 커리어 우먼 패션까지. 한 번은 누가 봐도 재벌가 여식이라는 걸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화려한 코트를 입고 갖은 치장을 했는데, 한서진은 그런 면모가 있는 줄 처음 알았다.

그때 송하나는 수줍게 반응했다.

“오늘 친척 모임이 있어서요.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아냐, 괜찮아. 어차피 너 재벌 딸인거 다 아는데. 그런 옷도 많이 있겠지.”

송하나는 병문안을 오면 보통 3시간 이상은 앉아 있다가 가곤 했다. 둘만 있는 특실에서 참 다양한 이야기를 했다. 학창 생활, 대학 진학, 심지어는 경제와 미래 변화에 관해서도.

송하나는 이것저것 사회에 왕성한 호기심을 갖고 있었지만, 의외로 연예계에 관해서는 흥미가 없었다.

“김주원이요? 누구더라…….”

그녀는 잠시 스마트폰을 검색을 한 다음에 아 하고 감탄했다.

“아, 기억나요. 얼마 전에 종영한 그 비밀정원 남자 주인공이네요. 백화점 사장 했던.”

“옛날엔 그런 생각 많이 했어. 저렇게 생긴 애들은 얼마나 세상을 편하게 살까, 하고.”

“별로 안 잘 생겼는데, 왜 부러워하세요?”

“…….”

입에 발린 위로가 아니었다. 진심이었다. 진심으로 톱스타 남배우를 잘생기지 않았다고 여기고 있는 눈이었다.

이때 한서진은 처음으로 깨달았다. 송하나가 외모를 보는 눈은 무지막지하게 높다는 것을.

“그, 그럼 어느 정도 되어야 잘생긴 거야?”

“전 잘 생겼다고 느낀 사람 본 적이 없어요. 다 고만고만하게 느껴지던데.”

“…….”

너무 예쁘다는 건 이런 부작용도 있구나.

나흘을 입원한 끝에 한서진은 퇴원했다. 사실 조금 더 입원하고 싶은 마음에 살짝 아쉬웠다. 송하나가 찾아오는 시간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송하나는 퇴원하는 날에도 찾아왔다. 옷을 다 갈아입고, 퇴원 준비하느라 짐을 싸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

“바로 집에 가세요?”

“응. 너도 집에 갈 거지?”

“저, 오빠 집 구경해도 돼요?”

“우, 우리 집?”

“네. 안 돼요?”

“안 될 건 없는데…… 뭐, 지혜도 오랜만에 보고 좋겠네.”

그 말에 송하나는 살짝 놀란 듯했다.

“지혜 언니 지금 오빠 집에 있어요?”

“응. 같이 살거든.”

“어, 이사하셨어요? 전에 오피스텔에 사신다고…….”

한서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오피스텔, 몇 달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오랜 추억처럼 느껴진다. 그만큼 지금 사는 집에 익숙해졌다는 것이리라.

“얼마 전에 이사했어. 그래서 지혜랑 합쳤고.”

“아아, 그러시구나. 좋아요. 저도 오랜만에 지혜 언니 보고 싶어요.”

“가자.”

퇴원 절차를 마친 한서진은 주차장에 세워둔 차에 올랐다. 송하나가 조수석에 탔다.

차를 출발시키기 전, 한서진은 한 번 더 인터넷 기사를 체크했다. 뉴월드백화점에 관해 특별히 뜬 기사는 없었다.

‘진짜 그냥 우연이었나?’

뉴월드 4시간 사건.

그것이 혹시 자신의 저주에서 비롯되었나 하고 생각한 한서진은 시험 삼아 틈이 나는 대로 같은 말을 내뱉었다. 손님 한 명 찾지 않고, 영업은 망해버리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뉴월드백화점은 4시간 사건 이전에 비해 40% 가까이 줄어든 매출로 고전하고 있긴 했지만, 어쨌든 정상적으로 영업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정말 우연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바로 다른 의심이 치고 올라왔다.

‘그때는 엄청 앓았는데, 이번에는 앓지 않았어.’

혹시 저주의 남용에는 뭔가 체력적인 대가가 따르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지금은 대가를 치를 여력이 없어서 저주가 발동이 되지 않는 건 아닐까?

한서진은 진실이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통찰안 외에 다른 신비한 힘이 생긴 거라면, 그리고 그 힘을 통찰안처럼 자유자재로 쓸 수 있다면 얼마나 든든할까.

“여기가…… 오빠 집이라고요?”

재벌 막내딸을 집으로 초대했는데, 집을 보고 경악하는 반응을 기대할 수 있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적어도 국내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도심 공원을 개조해 만든 대저택은 H그룹 막내딸이라 해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위용을 자랑했다.

실제로 외부인들은 이게 개인 저택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어떤 큰 회사나 조직의 시설물로 오인하고 있을 뿐이다.

서울에서 이만한 개인 저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마 한서진뿐일 것이다. 선물 받은 것이긴 해도.

“응. 여기가 우리 집.”

“……정말 놀랐어요. 집 진짜 좋아요. 저희 집은 비교도 안 되네요.”

재벌 딸이 그런 이야기를 하니 뭔가 웃기다.

한서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차를 세웠다. 본채에 들어서니 1층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던 한지혜가 반갑게 맞이했다.

“오랜만이네, 송하나.”

“언니! 반가워요!”

송하나는 쪼르르 달려가서 한지혜의 품에 안겼다. 한지혜도 여자치고 큰 편이지만, 170인 송하나보다는 조금 작다 보니 안긴 모양새가 조금 이상했다.

“죄송해요. 제가 연락 자주 드렸어야 했는데.”

“아니야. 준석 오빠 때문에 우리 사이가 좀 애매했잖아. 아무래도 그 오빠 통해서 친해졌으니까.”

“이제 다시 서진 오빠 통해서 친해졌으니까 괜찮은 거죠?”

“그럼. 편하게 연락해. 자주 놀러오고.”

“와, 그래도 돼요?”

“그럼. 잠깐만, 집주인 허락은 받고.”

한지혜는 자연스럽게 한서진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래도 되지?”

“그, 그럼. 누가 막는대?”

“들었지? 그래도 된대.”

“고마워요, 오빠. 언니.”

송하나는 배시시 웃었다. 그 나이 대의 소녀처럼 순수해 보이는 미소에 한서진은 괜히 흐뭇했다.

날이 추운 까닭에 1층에서 간단히 요리를 차려놓고 파티를 벌였다.

“우리끼리 이렇게 있으니 나름 연말 송년회네.”

“그러게요. 저도 언니와 같이 있어서 좋아요. 그나저나 정말 집 보고 놀랐어요. 집이 너무 좋아요.”

“그렇지? 나도 여기가 우리 집이라고 해서 처음에 오빠가 나한테 장난하는 줄 알았다니까.”

“진짜 잘 됐어요. 재희 아줌마가 이거 알면 땅을 치고 통곡을 할 거야.”

“어디 땅만 치실까. 가슴도 치시겠지.”

한지혜는 맥주캔을 따며 깔깔 웃었다. 송하나는 콜라가 담긴 잔을 들어 짠하고 건배했다.

이재희를 입에 담으면서도 한지혜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정말 가슴에서 떨쳐냈구나 싶은 모습에 한서진은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하나 너, 크리스마스이브에 뭐해?”

“가족이랑 같이 보낼 거 같아요. 아빠가 그런 거 엄격하시거든요.”

“아아, 그렇구나. 솔로 동지끼리 뭉쳐 보려 했는데, 이거 참 아쉽네.”

“저도 아쉬워요. 아빠한테 한 번 말해볼까요?”

“됐어, 가족 행사라며. 가정 문화는 존중해야지.”

두 여자의 수다에 한서진은 도무지 끼어들 틈이 없었다. 하지만 소외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옆에서 조용히 수다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크리스마스라. 한서진은 문득 백철중 회장이 생각났다. 더불어 자신이 그에게 했던 말도.

‘이쪽 사업을 맡을 계열사는 하나한테 주십시오.’

‘크리스마스 깜짝 선물이거든요.’

백철중은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조금 긴장도 되고, 배짱도 생긴다.

한서진은 맥주캔을 입에 대며 즐거워하는 송하나를 지그시 주시했다. 문득 시선을 느낀 그녀가 이쪽을 바라보며 눈이 마주친다.

그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송하나가 먼저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다시금 한지혜와 수다에 집중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이쪽이야말로 잘 부탁하네.」

H그룹은 은밀히 통신 사업을 추진했다. 그룹 내에서도 백철중 회장이 신뢰하는 극소수만이 알고, 참여하는 사업이었다. 장남인 백형진은 물론이고, 백씨 일가는 이 사업에 일절 참여시키지 않았다.

그룹이 첨단 사업 시장으로 뛰어들 수 있는 사실상 마지막 기회라 여긴 백철중은 작은 변수도 허용하지 않았다.

잠정적으로 H통신이라 불리게 될 사업체는 궁극적으로는 송하나가 받게 될 예정이었다. 물론 본인은 정작 그 사실을 모르고 있지만.

‘미스릴 통신망이라…….’

이제는 사업을 보는 눈도 상당히 날카로워진 터라, 한서진은 이게 초대박이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서로 동기화된 미스릴 중계칩은 거리와 출력에 제한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데이터를 주고받는다. 전파를 일절 사용하지 않기에 정부에 주파수 사용 간섭을 받을 일도 없다.

남은 것은 복잡하게 얽힌 통신망 시스템을 어떻게 구축하느냐와 보안 유지 기능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전공이 아니었다.

“정 팀장님 요새 많이 바쁘실 텐데…… 그래도 할 수 없지.”

그가 막 전화기를 들려는 찰나였다.

똑똑, 하고 노크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박수진이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대표님,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손님? 예약이 되어 있나요?”

“아닙니다. 그런데 손님이 그…… 뉴월드그룹 회장님이십니다.”

상대가 워낙 거물이다 보니 박수진의 말투도 조심스러웠다.

한서진은 살짝 어이가 없었지만, 불쾌함을 누르고 일어섰다. 그는 박수진을 지나치며 말했다.

“휴게실로 모셔요.”

“예, 알겠습니다.”

잠시 후 화사한 코트를 입은 이재희가 들어섰다. 그녀는 몸에 배인 도도함을 버리진 못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한서진을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반가워요, 한 대표. 일전에는 내가 실례했어요.”

“그렇습니까.”

한서진은 대놓고 딱딱하게 반응했다. 이재희는 조금 무안했지만, 입술을 살짝 깨물고 말을 이었다.

“들었어요. 한 대표가 두 사람 사이, 반대한다고…….”

“…….”

누가 먼저 반대를 했는데? 한서진은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그녀를 주시했다.

이재희는 한숨을 푸욱 내쉬더니, 훨씬 누그러진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

“미안합니다. 내가 다 잘못했어요.”

“…….”

“내가 내 욕심에 되도 않는 과욕 부리고, 그 아이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어요. 그래도 우리 준석이, 순정 하나는 올곧은 아이입니다. 그러니 반대하지 말아줘요.”

“정준석 씨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나요? 그래서 회장님을 여기로 보냈습니까?”

“준석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어요. 집에서 저와 일절 대화를 피합니다. 여기 온 건 오로지 내 뜻이에요.”

“…….”

“그 아이한테 내가 잘못한 거, 평생 갚아나가겠습니다. 그러니 한 대표는 나의 모자람을 용서하고, 반대만 하지 말아줘요. 지혜 그 아이 앞에서는 내가 따로 사죄하고 용서 구하겠습니다.”

한서진은 가만히 주시했다.

벌레 보듯 하던 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마치 얼굴만 똑같은 전혀 다른 사람이 눈앞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다.

상상을 초월한 태도 전환, 아마도 500억 불의 힘이리라. 가진 게 많은 사람일수록 오히려 압도적인 차이에 쉽게 승복할 수 있는 것일까. 한서진은 차갑게 웃었다.

“누굽니까? 이서나 대표님인가요, 아니면 이용무 대표님인가요?”

그 말에 이재희는 움찔했다.

“짐작은 가지만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이렇게 전해주십시오. 뉴월드그룹은 진성그룹과 별개이고, 동생으로 인한 사심을 비즈니스에 반영할 마음은 없다고 말입니다.”

“그…….”

“일전의 무례는 사과하지 않겠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정당방위니까요. 뉴월드그룹에는 나쁜 기억만 있지만, 그걸 구체적으로 실행할 정도로 화가 남은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돌아가시고, 앞으로는 얽히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재희는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였다.

이서나는 분명히 경고했다. 뉴월드그룹의 일로 진성그룹에 피해를 끼치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고. 비록 자신이 연장자이지만, 그룹의 일에 관해서 직계의 뜻은 곧 법이었다.

때문에 그녀는 한서진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온갖 굴욕을 각오하고, 이 자리에 왔다. 어떻게 해서든 이 결혼을 성사시킬 작정이었다. 가능하다면 무릎을 꿇어서라도.

그러나 대화에서 이미 충분히 느꼈다. 돌이킬 수 있는 가능성은 일절 없음을.

그녀는 끝내 억누르지 못한 아쉬움에 그만 질문했다.

“정말…… 나 때문에 진성전자와 척지지는 않을 거죠?”

“회장님 같은 분과 사돈지간을 맺지 않아서 정말 감사하고 있는데, 제가 왜 그럴 거라 생각하시죠?”

분명한 모욕, 그러나 이재희는 화가 치민다기보다는 여기서 일을 봉합할 수 있음에 마음을 놓았다.

“배웅해드리죠.”

“아, 고마워요.”

화해라고 생각한 것일까. 이재희는 배시시 웃다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전 그가 뿌린 하얀 소금에 얼굴이 굳었다.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그는 시원하게 손을 털고, 사무소로 돌아갔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ㅜㅜ

제가 좀 즈질 체력이라... 하루에 3연참도 하고 싶고 막 그렇긴 한데 힘들어서 엄두가 안 나네요. 매번 시도는 하고 있습니다.ㅜㅜ

뉴월드그룹 에피소드는 이렇게 정리됐습니다.

좀 더 자세히 쓸 수도 있었겠지만 그럼 또 저를 호시탐탐 노리는 적들로부터(제가 적이 좀 많습니다ㅠ) 억지 분량 늘리기라고 쪽지 테러 등 물어뜯기가 들어올까 봐... 그리고 정준석과 한지혜가 주인공은 아니니까 이 정도로만 살짝..ㅎㅎ;;

차후에 등장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더 이상 관련 에피소드는 없습니다.

보다시피 한지혜가 정준석과 맺어질 일은 없고요.

애초에 저는 맺어줄 생각도 없었습니다.

깨진 그릇에는 물을 안 담는다가 제 신조라서..ㅎㅎ

다음편은 조금 오후 늦게 올릴게요. 지금 너무 힘들어서요.ㅠ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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