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7 군중 제어 =========================================================================
왕명.
레노지안의 군주가 보유하는 권능이다. 소수의 특정집단이 아닌 불특정 대다수의 군중을 대상으로 절대적인 ‘지침’을 내리는 힘이다. 통찰안과 더불어 세상에 치세에 필요한 권능이다.
통찰안으로 군주가 추구해야 할 진실을 짚어내고, 왕의 어명으로 그것을 따르게 한다. 이것이 바로 레노지안이 평화롭게 번창할 수 있게 만드는 양대줄기다.
왕명은 오롯이 왕만이 직접적으로 그 힘을 행사할 수 있다. 이 권능은 왕이 의지를 품는 그 순간 발동하며, 그 지침을 널리 퍼뜨린다.
“언령까지 쓸 수 있으면 더 좋았겠지만…….”
언령. 특정체를 대상으로 절대적인 명령권을 발동하는 힘.
왕이 언령으로서 명령하면, 그 상대는 죽으라는 명령조차 거부하지 못하고 기쁘게 실행한다.
특정한 대상에게 매우 강력한 지령을 실행시키는 힘이 바로 언령이다. 이는 생물과 비생물을 가리지 않는다. 심지어 자연의 법칙이나 질서에도 적용된다.
언령으로서 명령하면, 당장 함박눈이 멎고 기온조차 변한다.
그에 비해 왕명은 비특정 ‘군중’만을 대상으로 효력을 발휘하며, 힘의 밀도가 낮은 일반적인 지침만을 퍼트릴 수 있다.
많은 백성들을 부지런하게 만들거나, 홍수 장소에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거나 하는 일은 가능하지만, 집단 자살을 강제하지는 못한다.
개개인의 생존본능을 깨부수며 죽음을 강요할 만큼 강한 세뇌력을 지닌 게 아니기 때문이다.
비특정 군중을 대상으로 일반적인 지침을 강력하게 퍼트려 지키게 하는 힘.
그것이 바로 왕명이었다.
“문제는 얼마나 힘을 낼 수 있느냐 하는 거로군.”
통찰안이 꿈을 거치며 약해졌듯이, 왕명이 지닌 권능 또한 약해졌을 테니까.
“콜록! 콜록!”
그날 한서진은 밤새도록 고열을 내며 앓아누웠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정도로 괴로웠다. 온몸에서 땀을 흘리며 고통에 발버둥쳤다.
뒤늦게 발견한 한지혜가 놀라서 최수한을 불렀다. 최수한은 한밤중에도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나타나, 한서진을 차에 태우고 병원으로 향했다.
마침 저택 울타리 외곽에서 4차선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대학 병원이 위치해 있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집 앞에 대형 병원이 있었던 것이다.
높이 치솟는 열과 발한에도 의료진은 제대로 된 병명을 내놓지 못했다. 그저 심한 몸살의 일종으로만 생각했다. 검사에서는 유해 항원이 발견되지 않았다.
밤새도록 고열과 발한에 시달리던 한서진은 아침이 되어서야 겨우 차도를 보였다. 열은 정상에 가깝게 내리고, 발한도 줄어들었다. 어느 정도 주변을 돌아볼 수 있을 만큼 정신도 차렸다.
“야…… 왜 이렇게 힘이 없냐.”
“누가 보면 내가 아니라 오빠가 실연한 줄 알겠네.”
“물 좀 줘.”
“여기.”
한서진은 끄응, 하고 몸을 일으켰다. 머릿속에 잿더미가 남은 것처럼 어지럽고, 뿌얬다.
가만히 바라보던 한지혜가 조용히 말했다.
“걱정하지 마. 확실히 정리했으니까.”
“…….”
“옛날 준석 오빠가 나 안 잡았을 때 이미 끝난 거였어. 그니까 오빠,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어제 일로 신경을 쓰다가 아픈 줄 아는 모양이다. 한서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병을 얻을 정도로 정준석 일을 걱정하지는 않았는데.
‘타이밍 한 번 참 기가 막히네.’
그래도 이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생색을 내기로 했다. 한서진은 짐짓 가슴을 펴며 말했다.
“너 때문에 스트레스 받다가 내가 이렇게 아프잖아. 그러니까 앞으로는 처신 똑바로 해, 알았냐?”
“알았다니까 그러네.”
순순히 대답하던 중 한지혜는 뭐가 생각났는지 혼자 피식거리며 웃었다.
“왜 갑자기 실없이 웃어? 실성한 사람처럼.”
“아니, 앞으로 준석 오빠 어머니도 준석 오빠 때문에 마음 고생 꽤나 하겠다 싶어서. 그거 상상하니까 웃긴 거 있지.”
“왜 마음 고생을 해?”
“왜긴, 내가 마지막까지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남았으니 준석 오빠 마음이 얼마나 무너지겠어. 그 원망이 다 어디로 갈까?”
“…….”
“자존심 상하지만 마지막까지 착한 척 불쌍한 척 좀 했거든. 어제 준석 오빠 펑펑 울면서 매달리다가 돌아갔어. 앞으로 모자간에 사이 꽤나 험악할 거야.”
“……와, 사악하다.”
한순간이나마 정준석이 불쌍해질 정도로 눈앞의 여동생이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저거 혹시 요물이 아닐까.
한지혜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머니한테 당한 게 있잖아. 이 정도 시한폭탄은 별 것도 아니지, 뭐.”
“너 혹시 돈 보고 좋아한 건 아니지?”
“아니거든! 재벌 아들인 거 알았으면 처음부터 사귀지도 않았을 거라고! 그냥 적당히…… 조금 잘 사는 집인 줄만 알았지.”
한지혜는 한숨을 푸욱 내쉬며 말을 이었다.
“준석 오빠한텐 미안하지만…… 아, 씨! 몰라. 그냥 이제 생각 안 할래.”
한지혜 때문에 모자지간에 돌이킬 수 없는 틈새가 벌어졌다면, 앞으로 그 틈을 메우기가 요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서진은 그래도 내 동생이 아주 당하기만 하는 바보는 아니구나 하는 생각에 안심이 되었다.
“밤새도록 옆에서 간병했는데 뭐 없어?”
“그렇게 받고도 뭘 또 바라는데? 용돈이라도 줘?”
“아니, 주변에 괜찮은 남자 없냐고.”
“재입학 준비나 해. 네가 지금 무슨 연애야. 좋은 남자 같은 건 나중에 성공하면 알아서 굴러들어온다.”
한서진은 그렇게 타박했다.
지옥같은 오후였고, 저녁이었다.
늦은 오후부터 뚝 끊어진 고객. 그것은 뉴월드백화점 A지점에만 일어난 게 아니었다. 전국에 있는 모든 뉴월드백화점에서 같은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단 한 명의 손님도 찾지 않은 지옥의 4시간. 당연히 그룹 전체에 비상이 걸렸고, 임직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이 초유의 사태를 분석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고객이 갑작스럽게 끊어진 건 오후 3시 57분 경입니다. A지점에서 3시 57분 32초에 결제된 것을 마지막으로, 고객들이 추가적으로 구매한 내역이 잡히지 않습니다. 그 직후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고객들이 백화점을 빠져나갔습니다.”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손님들이 갑자기 끊어진 시간은 전 매장이 거의 비슷했다.
‘조직적 불매 운동?’
이 사실이 그룹 경영진에게 불신과 의심을 강하게 불어넣었다. 누구라도 음모론에 주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비슷한 시간에, 전 매장에서 손님들이 뚝 끊어지다니. 평소의 그 많던 손님들이 한 명도 찾지 않다니. 그것도 인근 상가는 전혀 지장이 없다니.
이게 수학적으로 실현 가능한 일인가?
“트위터를 비롯한 모든 인터넷의 SNS 활동을 체크했습니다만, 우리 그룹에 대한 어떤 조직적인 불매 운동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몇 몇 블랙 컨슈머가 지속적으로 불매 관련 글을 올린 것이 잡히긴 했습니다만, 조회수를 볼 때 이번 사태에 어떤 유의미한 영향을 끼쳤다고는 보기 어렵습니다.”
“그게 정말이야? 정말이냐고.”
이재희가 서슬퍼렇게 물었다. 전무는 쩔쩔매면서 보고했다.
“정말이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산술적으로 그런 잔챙이 블랙 컨슈머의 영향략이 이런 사태를 불러오기는…….”
“알았어. 그만해.”
이재희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시계를 바라봤다.
8시. 이제 곧 폐점 시간이 다가온다.
그러나 손님이 방문했다는 보고는 올라오지 않았다. 어느 지점이든 간에 손님이 들어오는 즉시 회장실로 직통 보고를 하라고 지시해뒀는데, 아직까지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지하철 유동인구는 어때?”
“평소와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게 말이 돼? 그 많은 유동 인구 중에서 심심해서라도 우리 백화점을 찾아오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고?”
“…….”
임원들이라도 별 뾰족한 답을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하다못해 부실공사로 뉴월드백화점 어느 한 지점이 붕괴해서 대형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해도, 이렇게 손님이 갑작스럽게 뚝 끊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히 원인이 있어야 할 텐데 그 원인이 무언지조차 알 수 없으니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아니면 정말 아무런 원인도 없는 것인가? 그냥 모든 사람들이 우연히 백화점을 찾지 않은 거라고?
“기자들이 곧 냄새 맡고 몰려들겠네. 적절한 대응 준비해요. 그룹과 백화점 이미지에 손상 가지 않도록.”
“예.”
“뉴마트는 아무 문제 없죠?”
“예, 아무 문제 없습니다.”
뉴마트는 뉴월드그룹에서 운영하는 프랜차이즈 초대형 유통마트였다. 전국 곳곳에 뉴마트 매장이 없는 곳이 없다.
다행히 이번 사태가 뉴마트까지 번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안심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뉴월드그룹에 대한 악의적인 조직적 움직임이 없다는 증거 아닌가.
“백화점 내부에 있는 뉴마트를 제외한 다른 모든 마트들이 정상 영업 중입니다.”
“오늘 다들 퇴근할 생각은 말아요. 대책을 세우란 말입니다. 나도 퇴근하지 않을 테니.”
“예.”
“다들 가서 일보세요.”
임원들이 우르르 빠져 나가고, 이재희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눌렀다.
안 그래도 어제 있었던 일 때문에 치가 떨리는데, 이런 일까지 벌어지다니. 그야말로 설상가상 아닌가.
‘한서진이라고…….’
대학생이 500억 불의 대박을 터트리고 청년 재벌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말이 500억 불이지, 국내에서 그의 1/10의 현금이라도 단독으로 보유한 재벌이 어디 있을까.
‘그냥 허락할 걸 그랬어.’
그런 오빠가 있는 줄 미리 알았으면, 웃으면서 허락했을 것이다. 다른 재벌가 여식 못지않게 애지중지 소중하게 대했을 것이다.
‘방계 때문에 직계까지 피해를 보는 건 아버지도 원하지 않을 거야. 언니가 한 대표한테 사과해.’
이서나가 건넨 조언. 아니, 그것은 조언이 아니라 이미 분명한 경고였다.
‘준석이가 잘 달래줘야 할 텐데.’
그래서 아들을 보냈다. 결혼을 허락하겠다는 말에 아들은 기뻐하면서 달려갔다. 철없는 아들 녀석이 그래도 사랑에 눈이 멀어 끔찍하던 여자였으니, 부디 좋은 소식을 가져오기를.
“애는 왜 이렇게 연락이 없어.”
이재희는 오지 않는 아들의 전화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날 밤, ‘뉴월드의 기현상’이란 제목으로 이 전대미문의 현상이 대대적인 보도를 탔다.
「YBN 박현 기자입니다. 오늘 오후 4시 경부터, 전국의 모든 뉴월드백화점에서 손님이 일제히 끊어진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놀랍게도 폐점을 할 때까지, 그 어떤 매장에도 단 한 명의 손님이 찾지 않은 게 확인되었습니다. 어떤 조직적인 불매 운동이 의심되는 이 현상에, 뉴월드그룹 경영측은 아직까지 코멘트를 아끼고 있으며…….」
기사가 보도되자 SNS를 비롯하여 인터넷 여론은 난리가 났다.
―헐, 대박.
―와, 소름 돋는다. 나 마침 그때 집에 가고 싶어져서 그냥 백화점 나왔는데, 나만 그랬던 게 아니었단 말이야?
―이게 확률적으로 가능한 일이라고 보냐?
―말도 안 되지. 절대 불가능하다.
―나도 원래 그때 백화점 앞까지 갔었는데, 갑자기 왠지 안 내켜서 옆에 있는 라테백화점으로 갔거든. 근데 그런 일이 있었구나. 와, 되게 신기하네.
―나도 갑자기 안 내켜서 그랬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저 ‘불매 운동’에 기여한 셈이네. 전혀 그런 생각 없었는데.
―춥다……. 이거 겨울이라서 그런 거겠지?
그룹 측에는 길고 긴 밤이었으리라.
날이 밝고 개점 시간이 다가왔다. 뉴월드그룹 관계자들이 모두가 조마조마하게 기다린 익일 영업이 드디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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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능력은 제가 봐도 dog10 사기 같습니다.
그래서 소모 MP도 좀 크게 늘리고, 쿨타임도 좀 크게 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