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6 군중 제어 =========================================================================
“저주의 힘으로, 폐하의 의식은 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왕은 눈을 감은 채, 정좌를 하고 앉아 있었다. 허리를 꼿꼿이 편 채, 두 손은 양쪽 무릎에 각각 올려놓았다.
노신하는 왕의 주변을 크게 원을 그리듯이 천천히 걸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저주는 폐하의 의식이 꿈에 개입하는 것을 차단하고 있습니다.”
꿈속의 아서, 한서진.
그가 세상을 의심하면 저주의 힘이 약해진다.
그가 세상을 부정하면 저주의 힘이 붕괴한다.
“이전에 행한 대마법은 그 의식의 통로를 한층 강화한 것. 이제 폐하께서는 깨어 있는 동안에도 꿈을 꿀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왕의 몸이 희미한 황금빛으로 뒤덮였다. 노신하는 그걸 보고 미소를 지으며, 걷는 속도를 더욱 낮췄다. 왕의 반응에 공명하듯이 그가 든 지팡이의 수정구도 강한 빛을 뿜었다.
“생각하십시오. 현실과 꿈, 그 이면의 실체와 연결고리를. 그리고…….”
눈부신 섬광에 파묻힌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진동했다.
“강제로 끄집어내십시오.”
“정준석 씨?”
한서진은 차갑게 내뱉었다. 그 이름을 듣고 한지혜가 흠칫 놀라서 바라봤다. 눈이 마주쳤지만 한서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검지를 세로로 입술에 댔다. 끼어 들지 말라는 뜻이다.
“제가 한서진이 맞습니다만, 무슨 일이시죠?”
「뵙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가 그럴 사이는 아니잖아요?”
몇 살이라고 했더라. 이십대 후반이라고 했으니, 자신보다는 몇 살 연상일 것이다. 하지만 존중해주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도 꼭 뵙고 싶습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지혜한테도 할 이야기가 있고요.」
어딘지 절박함까지 느껴지는 목소리지만 배려해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한서진은 더욱 차갑게 말했다.
“그럼 여기로 오시죠. 지금 당장.”
「어딘지 알려주시면 바로 달려가겠습니다.」
한서진은 저택 주소를 불러 주고 끊었다. 한지혜가 조금 멍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매듭은 깔끔하게 지어야지.”
“그게 아니라.”
“미련 남은 건 아니랬잖아?”
한지혜는 작게 툴툴거렸다. 숨소리가 조금 가쁜 것 같긴 한데, 그 이상의 동요는 없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면 감추고 있던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정준석이 도착했다. 정문을 통과했다는 보고에 한서진은 한지혜를 돌아봤다.
“같이 나갈래?”
“……응.”
한서진을 먼저 앞장을 섰다. 본채 앞에 나가자 저 멀리서 고급 외제차 한 대가 달려오고 있는 게 보였다.
본채 앞에 정지한 차량에서 정준석이 내렸다. 그는 다소 어리둥절해서 둘러보다가 이쪽을 똑바로 주시했다.
“무슨 일로 보자고 했습니까?”
“그게…… 혹시 여기가 지혜 너희 집이야?”
무겁게 바라보던 한지혜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정준석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너, 이런 집안이었으면 진작 말하지 그랬어. 그럼 어머니도 반대하지 않았을 텐데.”
“지금 그 이야기 하러 왔습니까?”
팔짱을 낀 채 한서진이 냉담하게 말을 잘랐다. 정준석은 아직도 혼란스러운 듯이 보였으나,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말을 꺼냈다.
“어제 백화점에서 어머니와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 점을 대신 사죄하러 왔습니다.”
“…….”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곤란을 겪어서. 정말 사과드립니다.”
정준석은 고개를 크게 숙였다. 한서진은 여전히 냉담하게 바라봤다.
재벌 후계자가 고개를 숙이다니. 흔치 않은 모습이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훅하지도 않는다. 선을 긋고 바라본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싶다.
고개를 든 그가 한지혜를 바라보며 간절히 말했다.
“지혜야, 둘이서 잠시 이야기할래?”
“…….”
“잠시면 돼, 응?”
“……매듭 짓고 와라.”
한서진은 그 말만 남기고 자리를 비켜 주었다.
3층 서재에 틀어박힌 채 헤드셋을 끼고 음악을 틀었다. 일부러 밖을 내다보지도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에 그는 헤드셋을 빼며 뒤를 돌아봤다. 한지혜가 눈이 다소 빨갛게 된 채 서 있었다.
“갔어?”
“응.”
“넌 눈이 또 왜 그래?”
“울고불고 매달리는 거 밀어내니까 나도 좀 아프더라고.”
“…….”
“그래도 이건 길이 아니라고 말해줬어.”
한지혜는 작게 실소하며 덧붙였다.
“기어이 길로 만들고 싶었으면 진작 뭐든지 했어야지. 지금은 너무 늦었지. 그 말도 해줬고.”
“…….”
“내가 길이 아니라고 느꼈던 건 사실…… 어머니 반대보다는, 그 반대에 끝까지 맞서 싸울 의지가 없는 준석이 오빠 모습 때문이었거든.”
어떤 광경이었을지 상상이 간다.
대저택, 그리고 자신의 재력을 보고 이제는 괜찮을 거라고 설득했겠지. 하지만 만약 이런 조건이 없었다면, 그가 지금이라도 연락을 했을까?
“이제 연락 안 올 거야. 나 좀 먼저 쉴게.”
“그래.”
한지혜는 4층으로 올라갔다.
혼자 앉아 있던 한서진은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동생과 술이라도 한잔 할까 싶었다.
그런데 4층 벨을 누르려는 순간, 희미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문 너머에서 전해지는 흐느낌, 그는 우두커니 굳어버렸다.
잠시 후 그는 조용히 돌아섰다.
불현듯 동생을 벌레보듯 하던 이재희의 눈빛이 떠올랐다. 속에서 울화가 치밀었다. 말로만으로는 부족했나. 어디 다리 하나라도 부러뜨려줄 걸 그랬나?
그런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주먹을 꽉 쥔 채 중얼거렸다.
“뉴월드백화점인지 뭔지, 그냥 다 망해버렸음 좋겠네. 손님이라고는 한 명도 못 받고 그렇게.”
그 순간, 보이지 않는 울림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아무도 느끼지 못하게.
“결제 도와드리겠습니다, 손님.”
무려 800만 원짜리 여자 가방. 아마 특별한 기념일이라서 남자가 큰 마음 먹고 선물을 하려나 보다. 한 시간을 넘게 꼼꼼이 고르는 것을 보니.
매니저는 웃으면서 결제를 준비했다. 그때 별안간 여자 쪽이 나섰다.
“오빠, 그냥 나가자.”
“응? 왜? 맘에 안 들어?”
“아니, 가방은 맘에 드는데 별로 사고 싶지가 않네. 백화점 나가서 뭐라도 사먹자.”
“그럴까?”
커플 손님은 자연스럽게 매장을 빠져 나갔다. 매니저는 다소 허탈했지만, 장사를 하다 보면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닌지라 금방 마음을 접었다.
불현듯 매니저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매장 안에 손님이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바로 직전까지만 해도 다섯 팀은 있었던 것 같은데?
“이상하네? 곧 있으면 피크 타임인데…….”
매니저는 중얼거리며, 곧 몰려들 손님을 대비했다.
저녁에 아슬아슬하게 걸치는 늦은 오후, 황금 시간이 찾아왔지만 매장을 찾는 손님은 없었다. 정신없이 바쁠 것을 대비하던 직원들이 의아한 듯 서로 바라봤다.
매니저는 매장 밖을 슬쩍 살피다가, 다른 매장 직원들과 눈이 마주쳤다. 매니저는 순간 깨달았다. 그들도 자신과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아까부터 묘하게 신경을 긁어댔던 위화감. 그것이 무엇인지 이해한 것이다.
‘한 명도 없어?’
거짓말처럼, 그 넓은 백화점 로비에 손님이라고는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SNS 죄다 체크했어? 트위터라든가, 페이스북이라든가, 인스타그램이라든가! 우리 백화점 이야기 올라온 거 없냐고!”
「없습니다. 지금도 전산팀이 샅샅이 체크 중입니다만, 우리 백화점 내용은 일절 안 보입니다. 있어도 그냥 통상적인 수준의 내용들입니다.」
“젠장, 그런데 왜 손님이 없느냔 말이야! 뭔가 사건이 터졌으니까 군중 심리에 우르르 밀려난 거 아니냐고!”
「죄, 죄송합니다.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뉴월드백화점 A지점 사장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약 30분 전 받은 보고가 지점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현재 백화점에 손님이 한 명도 없다는 내용이었다.
문자 그대로 단 한 명의 손님도 없었다. 현재 백화점에 있는 사람들이라고는 백화점 직원이나 혹은 협력업체 직원들뿐이었던 것이다.
있을 수 없는 현상에 사장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혹시 지점 근처에 대형 사고라도 났나?’
그래서 직원들을 닦달해서 그 점도 알아봤다. 하지만 그런 일은 전혀 없었다고 했다.
오히려 백화점 바깥 대로에는 평소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건, 그들 중 단 한 사람도 백화점으로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장실에서 내려다보면서도 사장은 이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 아닌가.
“허참,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백화점을 지나치는 저 많은 사람들 중에, 단 한 명도 손님이 없다고? 그것도 이 황금 쇼핑 시간대에?
그는 퍼뜩 생각나서 전화기를 들었다. 통화 상대는 바로 사거리 블록 하나를 두고 있는, 경쟁관계이자 상생관계인 라테백화점 사장이었다.
「어, 박 사장. 무슨 일인가?」
“최 사장. 장사는 잘 돼?”
「장사야 뭐 잘 되고 있지. 원래 이 시간이 피크잖아. 근데 그건 왜?」
“아, 아닐세.”
간단한 몇 마디를 더 주워섬긴 뒤, 박 사장은 전화를 끊었다. 혹시나 해서 그는 꼭대기부터 계단으로 직접 내려오며 백화점 전층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손님 한 명 보이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사태에 놀란 매장 직원들만 보였을 뿐이다.
그는 이를 악물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를 몰고 라테백화점으로 향했다.
라테백화점이 가까워지면서 그는 신음했다.
‘말도 안 돼…….’
주차장 입구부터 진입하려는 차량으로 북새통이었다. 차를 주차하고, 그는 각 층 매장을 돌았다. 어느 층을 가도 손님으로 매장이 바글거렸다.
이해할 수 없는 허탈함이 가득 밀려왔다. 그는 사장실에 전화를 걸었다.
“난데, 아직도 우리 백화점에 손님 없나?”
「……예. 한 명도 없습니다.」
“그냥 구경하는 사람도? 하다못해 급히 화장실 이용하려는 손님도?”
「전혀 없습니다. 현재 백화점에 있는 건 백화점 관계자들 뿐입니다.」
“……자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
어디 근처에 대형 사고가 난 것도 아니다. 아니, 설령 사고가 났다 해도 올 손님은 왔을 것이다. 이렇게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다못해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조직적인 불매 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아니, 그것 역시 말이 안 된다.
아무리 그런 불매 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져도, 올 손님은 결국 오는 법이니까.
어떠한 조짐도 없고, 손님이 단 한 명도 오지 않는다. 그것도 쇼핑의 황금 시간대에.
그리고 바로 옆에 있는 라테백화점은 지금도 성황리에 영업을 하고 있다.
이게 과연 수학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일인가?
“허억!”
눈을 감고 있던 왕은 거칠게 숨을 토해냈다. 노신하가 걸음을 뚝 멈췄다. 고통스러워 하는 왕의 모습에, 멀리서 지켜보던 신하들이 크게 걱정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군주, 그가 저리도 고통스러워 하다니. 그 통증의 크기가 대체 어느 정도이기에.
“후우…….”
왕의 호흡이 가라앉았다. 그는 눈을 뜨고, 작게 비틀거리면서 일어났다. 노신하가 조용히 다가와서 고개를 숙였다.
“성과는 있으셨는지요.”
“아직이오.”
“…….”
“작은 수확은 있었소. 저번 대마법 시전 때 꿈에 넘어간 권능이 무엇인지 알 것 같소.”
왕은 오랜만에 만족한 듯 미소 짓고 있었다. 노신하도 기쁜 얼굴로 물었다.
“무엇이옵니까?”
“그 세상에서는 통찰안보다 이런 게 더 필요할 수 있겠지. 바로 왕명이오.”
============================ 작품 후기 ============================
최강의 CC, 대규모 군중 제어술을 얻었습니다.
물론 남발은 어렵습니다. 그랬다가는 다음편에 소설 끝나요ㅠ
소제목을 '군중 제어'로 바꾸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