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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135화 (135/609)

00135  군중 제어  =========================================================================

“이제 다 뱉으셨나요?”

이재희는 순간 멍해졌다. 당연했다. 재벌가의 여식인 그녀가 언제 이런 무례한 말을 들어볼 일이 있을까.

떠받들어지는 것에만 익숙하고, 그게 당연한 인생이었다. 그녀는 마치 잠시 청각이 나간 것처럼,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인지하지 못했다.

약간의 시간이 흘러서야 그녀는 자기가 어떤 모욕을 당했는지를 인지했다. 얼굴이 분노로 급속도로 빨개졌다.

“다, 당신! 지금 나한테 뭐라고……!”

“언니! 그만……!”

어떻게든 뜯어말려야 한다. 이서나는 나서려 했지만, 그 순간 차갑기 그지없는 그의 눈빛을 보았다.

막지 말라는 눈빛, 그랬다가는 가만있지 않겠다는 경고.

그것은 먹잇감을 눈앞에 둔 채 굶주린 맹수였다. 만약 저 먹이를 뺏었다가는 그 이빨이 자신을 향할 것이다.

이서나는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고작 ‘방계’인 사촌언니를 위해서 자신이 손해를 뒤집어쓸 이유는 없다.

이미 활시위는 떠났고, 일단은 화살 궤적을 피해야 했다. 이서나는 조용히 두 발짝 정도 물러났다.

“이제 다 뱉으셨냐고요.”

“너, 너너……!”

“그럼 이제 내가 뱉을 차례인가 해서 그러는데, 내가 뱉어도 되죠?”

이재희의 경호원이 참다못해 매장에 진입하려 했다. 그러나 이서나가 다시 한 번 눈빛으로 제지했다.

평범한 서민이 모욕을 주려는 것이라면 당연히 경호원으로 막아야 한다. 그러나 상대는 그런 인물이 아니지 않은가.

500억 불이면 뉴월드그룹을 큰 곤혹을 치르게 만들고도 남는 힘이다. 그런 사람을 당장의 체면을 면하자고 경호원을 동원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 지혜가 어떤 몰상식한 여자한테 무슨 꼴을 당했는지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이건 경우가 아니지. 우리는 이 백화점에 손님으로 온 건데? 여기 백화점은 손님한테 이따위인가요?”

“오, 오빠.”

“넌 가만히 있어. 아니면 아직 미련이 남은 거야?”

“…….”

한지혜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미련이 남은 건 아니구나, 하고 한서진은 안심했다. 여전히 어머니라고 불러서 조금은 그런 게 있을 줄 알았는데.

“혹시 이런 말 알까 모르겠네. 큰돈에는 큰 예의가 따르는 법이다. 알아요, 아줌마?”

“아, 아줌마?”

이재희의 얼굴에 붉으락푸르락하게 변했다. 언제 또 이런 모욕을 당해본 적이 있을까.

“……너, 보아하니 어느 날 돈벼락 좀 맞은 모양인데, 내가 누구인지 알기나 해?”

“뉴월드백화점 주인이라면서? 그게 왜요?”

교묘하게 섞은 평대.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 멘트 하나하나가 이재희의 속을 제대로 후벼 팠다.

“아줌마.”

“감히 나한테 아줌마라니. 너, 진짜 미쳤……!”

“아줌마가 아들 애지중지해서 우리 동생 못마땅해 하는 것까진 이해하는데, 둘 이미 끝난 인연이잖아? 내가 알기로 둘이 만나는 거 못 봤거든요? 근데 왜 갑자기 우연히 마주쳤다고 시비죠?”

“이익……!”

“이익, 그런 말 밖에 할 줄 몰라요? 혹시 유학파예요? 한국어가 안 돼요? 그럼 내가 이해하고.”

구석에서 조마조마해서 지켜보던 매장 직원들이 보다 못해서 나섰다. 그들 입장에서는 이서나도 무섭지만, 백화점 주인인 이재희가 더 중요했다.

“손님. 매장에서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저희 영업에 지장이…….”

“오늘 장사 끝내요. 지금 이 매장에 있는 거 내가 다 삽니다.”

한서진은 카드를 꺼내 여직원의 손에 떨어뜨렸다. 여직원은 멍한 얼굴로 바라봤다. 이게 무슨 소리야?

“못 들었어요? 여기 진열품들이랑 재고들까지, 전부 살 테니까 이만 문 닫아요. 난 아직 이 아줌마한테 볼일 안 끝났거든.”

“오, 오빠!”

매장 직원들이 전부 굳어버린 가운데, 한서진은 한 걸음 더 이재희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흠칫 놀라 물러나다가, 진열대에 막혀 멈추고 말았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경호원! 뭘 보고만 있는 거야!”

그제야 경호원을 생각해낸 그녀가 외쳐서 불렀다. 고용주가 직접 부르자 경호원들이 부리나케 진입했다.

그러나 이서나가 다시 날카롭게 외쳤다.

“거기, 그만!”

“서나야? 너, 이게 무슨 짓이야?”

“언니야말로 무슨 짓이야? 여기 한 대표가 어떤 사람인지나 알고?”

“뭐, 뭐?”

이재희의 눈빛이 멍해졌다.

자기 경호원이 개입을 못하게 이서나가 막는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저 청년이 대체 뭐라고?

‘하필 건드려도 한 대표 여동생을.’

이서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사촌언니라 해도 비즈니스에 있어서는 매정하다. 뉴월드그룹이 범진성계 그룹으로 분류되지만 그래도 엄연한 방계. 직계에 손해를 끼치는 방계는 용납할 수 없었다.

“이게 무슨……!”

이서나의 반응에 이재희는 패닉에 빠졌다. 경호원들도 머뭇거리며 선뜻 나서지 못했다. 이서나가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제지하는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테니.

한서진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이재희만 간신히 들을 수 있도록.

“이봐요, 아줌마.”

“…….”

“한 번만 더 내 동생한테 그따위로 아는 체 했다가는 뉴월드백화점이고 뭐고 다 박살날 줄 알아. 알겠어요?”

“…….”

비에 젖은 병아리처럼 벌벌 떠는 모습이 썩 마음에 든다.

엄마뻘 되는 여자한테 쏘아붙였다는 부담감은 없다. 오히려 오랜 체증을 벗어버린 듯 상쾌했다.

백세완 때도 느꼈지만,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참는 것보다는 되갚아주는 게 훨씬 속이 시원하다는 것을.

등을 돌린 그는 경직돼 있는 매장 매니저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결제 부탁해요.”

이서나의 경호원들이 밖에서 적절히 통제한 덕분에 매장 안이 구경거리가 되는 것은 피할 수 있었다. 애초에 고급 명품 매장이라 일반객의 접근이 거의 없는 곳이기도 했다. 가방 하나에 기본적으로 천만 원이 넘어가는 것들뿐이었으니.

“이 주소로 배송하세요.”

이재희는 이서나가 데리고 나가버렸고, 매장 매니저는 아직도 반쯤 굳어 있었다. 그녀는 한서진의 카드를 벌벌 떨며 들여다봤다. 온통 은색으로 된, 특별한 점을 찾아볼 수 없는 디자인이다.

“4, 46억 2,300만 원입니다.”

이런 금액이 정말 긁힐까? 한도 초과에 안 걸리고?

근데 긁어졌다. 승인 완료가 뜨고 영수증이 출력되자 매니저는 기절초풍할 듯이 놀랐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영수증과 VIP 발급 카드를…….”

“됐고, 배송이나 잘해줘요.”

한서진은 더 볼 일 없다는 듯이 등을 돌렸다. 매장 직원들은 그제야 꿈에서 깨어난 듯 서둘러 입구까지 따라 나와서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한지혜는 혼백이 나간 듯한 얼굴로 따라왔다. 그녀는 이재희가 아무 말도 못하고 당한 것보다, 눈앞에서 46억이 날아간 것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

“46억이 이렇게, 허무하게…….”

“3층에 드레스룸 하나 꾸며놓지 뭐.”

“돈 안 아까워?”

“아까울 것 같아?”

“…….”

오히려 태연한 반문에 한지혜는 할 말이 없어졌다. 그녀는 잠시 할 말이 없다가 어색하게 웃었다.

“오빠는 진짜 다른 세상 사람이 됐네.”

“그 다른 세상 사람이 네 하나뿐인 가족이다.”

“와, 되게 든든하네. 그 무서운 준석 씨 어머님을 한 마디도 못하게 쏘아붙이고……. 자그마치 뉴월드그룹 회장님이신데.”

“아, 그랬어?”

어디 구멍가게 사장이라는 말을 들은 것처럼, 한서진은 아무렇지 않게 반응했다. 뉴월드그룹? 그래봐야 H그룹이나 진성그룹에 비하면 몇 끗발은 모자라다.

천천히 걸으며, 한서진이 입을 열었다.

“끝난 인연이다, 깨진 그릇은 붙여봤자 물이 샌다, 네가 자주 하던 말이야.”

“…….”

“네 결심 믿고 나도 쏘아붙인 거야. 그러니까 후회하면 안 돼.”

“……알아. 후회 안 해.”

한지혜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뭐? 그게 정말이야?”

자초지종을 듣고 난 이재희는 망연자실해졌다.

요즘 유명한 500억 달러 청년 재벌이 바로 그였다니. 어떻게 세상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우연이?

이서나는 서늘한 눈으로 바라봤다.

“ADSC가 5nm공정 독점 라이센스 갖고 있는 건 알지? 그 기술 하나에 지금 진성전자가 좌지우지 되고 있어. 그 기술의 특허권리자고.”

“어떻게 이런 일이…….”

“내가 그래서 말렸어, 언니.”

이재희는 어렴풋이 이서나의 의도를 이해했다.

반도체 기술이니 하는 건 잘 모르지만, 500억 달러의 현찰이 지닌 위력은 잘 안다. 그 돈이면 뉴월드그룹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어느 재벌 기업도 휘청거리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단독으로 50조 원의 현금을 쥔 개인. 그런 인물은 손해만 각오하면 이 나라 재계를 상대로 할 수 있는 게 참 많다.

차라리 그 자리에서 잠깐 깨지는 게, 제대로 전면전을 붙는 것보다는 나았다.

‘정리를 시킬 거면 깔끔하게 하던가.’

이서나는 다소 못마땅한 눈으로 이재희를 바라봤다.

사촌언니지만 엄연한 방계, 한 번도 자신보다 위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그 점은 이재희 스스로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아도 한 대표 힘이 필요한 판인데.’

진성그룹의 후계자. 그 야심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한서진의 힘도 필요하다.

그런데 하필 이재희와 친한 모습을 보이고 말았으니.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한다?

이서나는 팔짱을 낀 채, 눈을 가늘게 뜨고 이재희를 바라봤다.

‘결자해지.’

매듭을 묶은 자가 푸는 수밖에.

매장의 움직임은 신속했다.

바로 다음 날, 배송을 해준 것이다. 그것도 한국 지사 직원들이 물품 수송 차량에 직접 실어서 가져왔다. 일반 운송업체에 맡기지 않고.

동행한 직원 중에는 익숙한 얼굴도 있었다. 매장에서 봤던 매니저였다. 물론 그녀가 책임자는 아니었다.

책임자는 금발의 수염이 인상적인 중년 남자였다. 미국인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저희 물품을 구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백인 남자는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하며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직원들을 직접 진두지휘해서 물건을 운반했다. 한서진과 한지혜는 편안한 차림으로 한쪽에서 구경했고, 최수한이 직접 그들을 상대하며 물품들을 배치했다.

어제 본 매니저는 저택의 으리으리함에 적지 않게 놀란 눈치였다. 하기야, 국내에 이런 대저택이 있다는 것은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재벌 총수들도 이렇게 무식하게 큰 저택에서 살지는 않는다.

3층 한쪽에 순식간에 명품 매장이 꾸며졌다.

신기해하며 지켜보던 한지혜는 일이 마무리되어가자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저, 그런데 여러분들은 괜찮은가요? 어제 그 매장에서 이재희 회장님이랑 트러블이 있었는데…….”

“아아, 아무것도 문제될 것 없습니다. 고객님께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자신감 넘치는 대답에 한지혜는 납득한 듯이 물러났다.

그들이 돌아가고, 한서진이 물었다.

“그나저나 꽤 유명한 브랜드인가 봐? 헤르메스? 난 왜 처음 들어보지?”

한지혜는 조금 허탈해졌다. 46억을 그 자리에서 긁어놓고는, 매장 브랜드가 뭔지도 몰라?

“에르메스라고 읽는 거야, 바보.”

“어느 나라 브랜드인데?”

“프랑스. 아무튼 백화점 측과 입점 매장이 문제 생길까 봐 조금 걱정했는데, 그래도 다행이네.”

그녀는 작게 중얼거렸다.

“하긴, 그 지점 에르메스 매장도 백화점 측에서 싹싹 빌다시피 해서 입점한 거였지. 가장 좋은 자리까지 내주면서.”

한지혜는 상쾌한 얼굴로, 드레스룸으로 꾸민 3층 내부를 둘러보았다. 한쪽을 가득 차지한 명품들을 보니 뿌듯해졌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한서진은 모르는 번호인 것을 확인하고 무음으로 돌렸다.

그런데 전화가 끈질기게 왔다. 세 번째로 울리자 한서진은 가볍게 짜증이 나서 받았다.

“여보세요.”

「혹시 한서진 씨 번호가 맞습니까?」

모르는 남자 목소리다. 그런데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맞는데요, 누구십니까?”

「저 뉴월드백화점의 정준석이라고 합니다.」

============================ 작품 후기 ============================

자고 일어났는데 댓글 보고 무서웠습니다 쌰장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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