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4 군중 제어 =========================================================================
“또 하나의 권능이 옮겨간 것으로 추정됩니다.”
노신하가 고심 끝에 조심스럽게 말했다. 왕은 그렇냐는 듯이 끄덕였다. 큰 감흥은 없는 얼굴이었다.
“어차피 지금 상황에서 더 큰 권능은 있으나 마나요. 통찰안의 권능만으로도 충분한 것 같소만.”
꿈속 문명사회에서는 무력이나 마법보다는 통찰안의 권능이 더욱 효율적이었다. 왕의 입장에서 아쉬운 것은, 통찰안을 좀 더 개화했으면 하는 바람이랄까.
‘적어도 본래 수준의 절반만이라도 발휘했으면.’
꿈속에 잠시 강림했을 때, 왕은 통찰안을 잠시나마 ‘꿈속 세계’에 대고 발휘해보았다.
그러나 특별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왕의 통찰안이 아닌, 한서진의 통찰안이 발동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 둘의 격차는 아득한 수준이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미스릴로 중급 마력석을 만들고 있는데 전능한 힘이 주어진들 뭐가 달라지겠소. 꿈속의 짐에게 기대하기는 틀렸소. 이곳에서 어떻게든 해볼 수밖에.”
“……상심이 크신 모양입니다, 폐하.”
“왜 안 그렇겠소.”
왕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 표정 하나하나에서 실망감이 뚝뚝 떨어졌다.
미스릴, 그 귀하디귀한 마법 물질로 만든다는 게 고작 중급 마력석이라니. 그때 입은 상심에서 왕은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자네의 배려, 잊지 않겠네.”
백철중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그룹 측근들이 봤으면 기함했을 것이다. 다른 이도 아닌, 재벌 총수가 새파랗게 어린 한서진 앞에서 고개를 숙이다니.
그러나 한서진으로부터 얻은 배려를 생각하면, 고개를 숙인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오히려 값싸게 퉁쳤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하나는 아직 미성년자라네. 그 점은…….”
“그건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당분간 전문경영인에게 맡길 거 아닙니까.”
“그렇지.”
“자녀분들 사이에서 말이 나올 것을 우려하시나 보군요.”
백철중은 쓴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끄덕였다.
한서진의 장담대로 된다면, 새 사업부는 그룹 내에서 가장 알짜배기 계열사로 거듭날 것이다. H자동차를 금방 추월할지도 모른다.
그런 사업체를 막내딸, 그것도 미성년자에게 준다면 당연히 성인 자녀들이 크게 반발할 것이다. 그들이 나이가 적은 것도 아니다. 장남 백형진만 해도 벌써 오십줄이다.
한서진은 별 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어차피 그룹 내 누군가와 지속적으로 얽혀야 한다면, 저도 기왕이면 하나인 게 편합니다. 친하거든요.”
“……그렇군.”
백철중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눈치였으나, 망설임 끝에 입을 다물었다.
“하나가 자네를 많이 따르는 것 같아서 요즘 내가 미안하군. 예전에 그 일 말일세.”
선을 긋던 것을 말하는 것인가. 한서진은 보이지 않게 작게 실소했다.
“저도 하나 같은 동생이 생겨서 좋더군요. 제 동생은 아주 영악해서 정이 안 가거든요.”
“영악…… 우리 하나는 그런 거 하나도 모르는 아이라네. 자네가 친오빠처럼 좀 아껴주게나.”
백철중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같이 쇼핑을 하재?”
조수석에 오르면서 한지혜가 물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얼굴에는 좋아 죽겠다는 감정이 가득했다.
“그냥 연말이고, 너 옷도 별로 없는 거 같아서 몇 벌 좀 사주려고.”
“와, 웬일이래. 역시 돈 버니까 사람이 달라지는구나.”
“뭐래, 이게 내 본모습이거든?”
“본 모습은 무슨. 예전에는 치킨 날개 하나 가지고 죽을 때까지 싸웠으면서.”
“야, 돈은 사람을 변하게 하는 게 아니라 본모습을 찾게 해줄 뿐이라는 말이 있어. 즉 지금의 이 관대한 내 모습이 바로 내 진짜 모습이라는 거지.”
“아이고, 그러셔?”
한지혜는 킬킬거리면서도, 쇼핑을 한다는 게 즐거운 듯했다.
“나 그럼 오늘 풀옵션으로 쫙 뽑아도 돼?”
“얼마든지. 니 오빠가 돈이 얼마나 많은지 알면 너 아마 기절할걸?”
“잘 알지. 그렇게 신문에 났는데. 500억 불의 억만장자잖아. 개인적으로는 우리나라 최고 부자라며?”
한서진은 작게 피식거렸다.
SJ인더스트리의 기업가치가 5,000억 불이다. 그 회사의 지분 86.5%에 비하면, 공개된 재산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불현듯 한지혜가 씁쓸히 중얼거렸다.
“혹시나 그 여자가 신문 기사 보고 연락할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없네.”
“…….”
“아마 동명이인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그 여자가 아는 오빠는 한국대생도 아니고, 똑똑한 천재도 아니었으니까.”
“지혜야.”
“미리 말해두는데, 만약 연락 온다고 절대로 받아주면 안 돼. 무조건 나한테 넘겨, 알았어?”
“알았어.”
한서진은 씁쓸히 덧붙였다.
“걱정하지 마. 나도 이제 엄마란 생각은 안 들어.”
“말은 그렇게 해도 오빠는 정이 은근 많아서, 막상 얼굴 보면 흔들릴 것 같아. 그래서 신경 쓰여.”
“안 그런다니까.”
“됐고, 혹시라도 찾아오면 무조건 나한테 넘겨. 내가 중간에 처리할 테니까.”
“알았다니까 그러네.”
한서진이 거듭 다짐하자 한지혜는 기분이 좋아져서 물었다.
“근데 어디 갈 거야?”
“뉴월드백화점.”
“…….”
“걱정하지 마. 다른 지점 갈 테니까. 너 본점에서 일했다고 했었지?”
“본점만 아니면 뭐…… 상관없겠지.”
한지혜는 가만히 끄덕였다.
남매는 뉴월드백화점 근처 지점으로 향했다. 본점은 아니지만 본점 못지않은 매장들이 갖춰져 있었다.
한서진이 명품관으로 데려가자 한지혜는 조금 흠칫했지만, 곧 밝은 얼굴로 따라갔다.
“이거 어때? 색이 좀 그런가?”
“살짝 스타일이 올드하긴 해. 나랑은 안 맞을 거 같아.”
“그럼 이건?”
“오, 그거 괜찮다.”
가방만 다섯 개를 샀다. 구두도 몇 켤레 사고, 코트도 몇 벌 사고 나니 어느새 둘 다 쇼핑백이 양손에 가득했다.
일단 1차 쇼핑물품을 레인지로버에 실어놓고, 남매는 근처 한정식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눈이 튀어나오게 비싼 코스 요리를 앞에 놓고 젓가락질을 하던 중, 한지혜가 갑자기 쿡 웃었다.
“갑자기 왜 웃어?”
“아니, 아까 명품관에서 오빠 모습이 생각나서.”
“그게 왜?”
“남들 일년치 월급을 부어야 겨우 살 수 있는 가방들을 무슨 도떼기시장에서 양말 고르듯이 하던 게 좀 웃긴다.”
“…….”
“이제 오빠는 그런 자리가 자연스러운 사람이 됐구나.”
턱을 괸 채 지그시 바라보며 한지혜는 가만히 말했다. 질투나 부러운 감정보다는, 꿈을 꾸는 듯한 눈빛에 가깝다. 그의 성공을 진심으로 다행으로 여기는 듯이.
“그러게.”
“그 여자가 알면 눈 뒤집어지겠네. 돈 때문에 자식도 버렸는데, 그 자식이 이렇게 성공했으니.”
“……그 이야기는 그만하고. 다 먹었지? 이제 일어나자. 후반전 돌아야지.”
“잠깐, 이것만 마저 먹고.”
“그러다 돼지 되겠다.”
“난 돼지여도 날씬한 돼지가 될 거야, 꿀꿀.”
점심 식사를 마치고, 둘은 다시 백화점으로 돌아왔다. 오늘 단단히 뽕을 뽑기로 작정한 듯, 한지혜는 눈을 빛내며 맹렬히 목표물을 찾아다녔다.
어느 매장에 들어섰을 때였다.
“아, 한 대표?”
“……이 대표님?”
“여긴 어쩐 일이에요. 쇼핑 왔나요? 이거 참 이런 우연도 다 있네요.”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시계를 고르고 있던 이서나가 반갑다는 듯이 웃었다. 회색 롱코트를 입고, 남색 버킨백을 든 모습은 나이를 초월한 기품이 넘쳤다.
이서나의 눈이 자연스럽게 한지혜에게 향했다.
“옆은 혹시 애인?”
“동생입니다.”
“아아, 그러고 보니 닮았네요. 미안, 내가 이런 착각을.”
이서나는 여유 있게 웃으며, 한지혜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요. 저는 이서나라고 해요. 한 대표한테 대학 동문 선배가 됩니다.”
“……한지혜라고 합니다.”
한지혜는 조심스럽게 악수에 응했다. 말투를 포함해 온몸에서 교양과 기품이 뚝뚝 흘러넘치는 중년 여자, 심지어 여기는 남들 연봉을 넘어가는 명품이 즐비한 매장 아닌가. 그녀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혹시 동생분 선물 사주러 왔어요? 아니면 한 대표가 쓸 만한 것을 고르려고?”
“둘 다 입니다만……. 사실 시계는 잘 볼 줄 몰라서 그냥 적당히 사려고요.”
“그럼 내가 조금 도와주고 싶은데, 나도 일행이 있어서 안 되겠네요.”
“일행이요?”
이서나는 잠시 뒤를 돌아보고는 다시 이쪽을 보았다.
“사촌 언니와 같이 왔는데, 잠시 전화하러 갔어요. 이제 곧 올 거예요.”
“아아, 그러시군요. 즐거운 쇼핑 되십시오.”
“우리 언니와 인사라도 하지 그래요?”
“인사요?”
한서진이 다소 머뭇거리자 이서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인사해둬서 나쁠 게 없을 텐데. 앞으로 더 쾌적한 쇼핑을 즐길 수 있을 거예요. 뉴월드백화점 주인이니까.”
그 순간, 옆에서 한지혜가 소매를 강하게 당겼다. 한서진은 의아해서 돌아보다가, 창백하게 굳은 동생 얼굴을 보았다.
동생이 그렇게 당황하는 얼굴은 처음 보았다.
왜 그래, 하고 물으려는 순간이었다.
“미안해. 전화가 좀 길어져서…… 근데 누구야?”
“아, 언니. 여기는…….”
이서나가 막 소개를 하려는 찰나였다. 그녀의 사촌언니, 이재희의 눈빛에서 웃음이 사라지며 날카롭게 변했다.
순간적으로 속도를 올리며, 이재희가 성큼 다가왔다.
“얘야, 네가 왜 여기에 있니?”
이재희의 시선이 향한 곳은 한지혜였다. 그녀는 굳은 채로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내가 분명 다시 볼 일 없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혹시 준석이랑 같이 온 거니? 아, 그건 아니구나.”
“……언니, 아는 사이야?”
이서나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그러나 이재희는 대답 대신 가늘게 휘어진 시선을 한서진에게 돌렸다.
“그새 또 하나 물었네. 내가 전혀 모르는 얼굴인데, 이번엔 어느 집안 졸부를 물었구나? 그래, 너 같은 애한테는 차라리 이런 남자가…….”
“어머니. 저는…….”
“그렇게 부르지 말랬는데, 그새 잊었니?”
“언니. 잠깐만.”
이서나가 황급히 끼어들었다. 그제야 그녀는 완전히 상황을 파악한 것이다.
“언니, 혹시 준석이가 만나고 다닌다던 여자가…….”
“그래, 이 아이야. 참 당돌한 아이지.”
이재희는 비스듬하게 팔짱을 끼고, 꾹 참고 있는 한지혜를 가만히 쏘아봤다.
“주제도 모르고 내 아들을 넘본.”
“언니! 그만!”
이서나의 목소리가 다소 날카로워졌다.
그때까지 묵묵히 듣고 있던 한서진이 반 발짝 앞으로 나섰다.
당황해서 가만히 있던 것도, 무슨 영문인지 몰라서 지켜보고 있던 것도 아니다.
오히려 언제 나서야 하는지를 칼같이 재고 있었다.
지금이 바로 나서야 할 타이밍이다.
금방이라도 부딪칠 만큼 이재희와 거리가 가까워지자, 그녀는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섰다. 매장 밖에 있던 개인 경호원들이 그걸 보고 다가오려 했으나, 그걸 본 이서나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제지했다.
“……당신, 뭐예요?”
이재희는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며, 당황해서 쏘아붙였다. 한서진은 다시 부딪칠 듯이 거리를 좁히며 한 발짝 다가섰다. 이재희는 엉거주춤 뒤로 물러났다가, 어이없다는 듯이 쏘아보았다.
“지혜 친오빠인데요.”
“치, 친오빠?”
“할 말도 많고, 물어볼 것도 많은데, 지금 당장은 궁금한 것부터.”
당황에 물든 이재희의 망막 위로 차갑게 응시하는 눈빛이 맺혔다.
“이제 다 뱉으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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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세완의 존재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멘트를 습득...
실탄은 한국드라마 매니아라고 합니다.
...그렇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