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3 미스릴 네트워크 =========================================================================
새 시제품은 전기 배선 회로의 외곽 일부에 금 대신 미스릴이 들어간다. 전기가 흐르는 회로에 단순히 배치된 게 아니라, 에테르에 관섭하는 일정한 공식을 따른 형태다.
이 미스릴 회로 덕분에 어떠한 매질의 도움 없이 무선으로 연결되어 데이터를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다.
물리적으로 말도 안 되는 현상, 세상에 발표하면 노벨상도 노릴 수 있을 만큼 어마어마한 발견이었다.
“이걸로 스마트폰 만들면 되게 잘 팔릴 거 같은데.”
정작 교수와 개발자는 이 위대한 발견에 대형 컴퓨터 네트워크 장비 소형화가 가능하겠다며 좋아하다가, 송하나의 말에 가슴을 푸욱 찔린 것이다.
박효산은 쪽팔려하면서도 송하나의 지적에 생각지도 못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래…… 가용 거리와 감도에 따라서 통신 장비로 이용할 수 있겠는데.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저도 개발할 때부터 서버 네트워크 구축 시스템으로만 생각하고 있어서, 거기까지는 생각이 안 닿았네요.”
“나도 미처 생각 못한 건 마찬가지다. 참 선입견이란 게 정말 무섭다니까.”
이 칩의 개발 목적은 처음부터 여러 컴퓨터나 연산장치 간의 데이터 중계 처리 역할이었다. 데이터가 지나다니는 통로이자, 교차점이었다.
이 칩끼리 매개체 없이 무선으로 연결된다는 것은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그렇다 보니 송하나처럼 모바일 통신 장비로 이용할 수 있다는 발상을 하지 못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아주 간단한 발상의 전환일 뿐인데.
“하나야, 고마워. 좋은 거 지적해줬네.”
“정말요?”
한서진이 감사를 나타내자 송하나는 뿌듯한 얼굴로 기뻐했다.
박효산이 팔짱을 풀며 말했다.
“스펙 체크를 처음부터 다시 해야겠네.”
성능 테스트 목적이 180도 달라졌다.
근거리 네트워크 중계 장치가 아닌, 장거리 모바일 통신 장치로서 성능 테스트를 시작한 것이다.
“한국에서는 일단 전혀 문제 없고.”
놀랍게도 강원도 고성에서 제주도 최남단까지 통신이 연결되는 것을 확인했다. 대량의 데이터를 송수신하는 과정에서 아무런 지연 현상도, 데이터 손실도 발생하지 않았다.
“전파를 쓰지 않는 건 확실하다.”
전파가 간섭할 수 없는 밀폐 공간에서 데이터를 송수신하며 전파의 움직임을 체크했다. 그러나 측정기에는 아무런 전파의 잡음이 잡히지 않았다.
심지어 서로 연결된 칩을 각각 두꺼운 납으로 된 상자에 넣었어도 데이터 통신은 원활하게 이뤄졌다.
“이거 주파수 세금은 안 내도 되겠네.”
전파는 공공재다. 통신사업자는 특정 주파수를 이용하는 비용을 정부에 지불해야 한다.
하지만 이 칩은 전파를 사용하지 않는다. 어떤 원리에서 이런 게 가능한지 그저 혀가 내둘러질 지경이다.
물론 한서진은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에테르를 이용해 연결되는 게 틀림없어.’
현 기술로는 감지가 불가능한 힘, 에테르. 니트론 교수도 간접적으로 그런 힘이 존재하는 것을 증명했을 뿐, 직접적으로 힘의 존재를 추출한 것은 아니다.
‘미스릴을 일정한 공식에 따라 배선하면, 그 칩들이 서로 연결되는 거구나.’
단순히 회로배선에 미스릴을 쓴다고 서로 연결되는 게 아니다. 에테르를 통해 연결을 시키는 특정 공식대로 그려야 한다. 통찰안의 힘이 없는 이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더미 회로에 지나지 않는다.
“다녀오마.”
“조심히 다녀오세요, 교수님.”
박효산은 우루과이 수도 몬테비데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최대 통신거리를 측정하기 위해, 아예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간 것이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지구 정반대 지점에서도 통신 저하가 일어나지 않았다. 대량의 데이터를 주고받는데 속도나 안정성에서 아무 문제가 없었다.
“이건 통신계의 대혁명이다.”
우루과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박효산은 진지하게 말했다.
“통신사들 망하는 소리가 벌써부터 들리는구나. 통신관련주 죄다 팔아야겠다.”
“뭐만 하면 주식부터 판다고 하시는군요. 교수님은 대체 손 안 대는 분야가 뭡니까?”
“주식은 사랑이란다, 제자야.”
언제까지 통신 칩이라고 부를 순 없으니, 이름을 정해야 했다. 한서진은 고심 끝에 이름을 정했다.
“칼라라고 부르겠습니다.”
“어감은 좋구나.”
그렇게 통신 칩은 칼라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성능은 대단하지만, 박효산의 얼굴은 썩 펴지지 않았다.
“통신계의 대혁명인 건 사실인데, 그대로 발표하면 파급효과가 장난 아니겠구나. 너도 알다시피 국제적으로 통신 회사들 입김이 장난이 아니어서.”
“상관없어요.”
한서진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이제 제 기술, 충분히 지킬 수 있는 힘이 있거든요.”
“하긴, 비공식 세계 제일 부자니까.”
공식적인 한서진의 재산은 5nm공정기술 특허 라이센스 계약금으로 받은 500억 달러다. 이것만 해도 한국 최고의 부자인 것은 물론, 세계적인 부자 반열에 들어간다.
그러나 알려지지 않은 비공식 재산, 기업가치 5,000억 불에 달하는 SJ인더스트리의 지분 86.5%를 고려하면, 실로 무시무시한 재력가라 할 수 있다.
‘어차피 팔 수도 없는 그림의 떡이지만.’
모든 통신업체들이 악귀처럼 물어뜯기 위해 달려들어도, 충분히 맞서 싸울 힘은 있다는 소리다.
한서진은 잠시 백철중을 생각했다.
‘원래 회장님을 도우려고 시작한 일이지만.’
기술의 가치가 너무 어마어마하다. 쉽게 나눠줄 만한 파이가 아닌 것이다. 심지어 자신은 성인군자도 아닌데.
마음의 빚을 갚는다는 수준을 아득히 초월했다. 편안한 마음으로 손을 잡기에는 이미 틀렸다.
한서진은 작은 결심을 하고, 송하나에게 연락했다.
“잠시 볼 수 있을까?”
「네. 어디로 갈까요?」
“너희 집 근처에서. 내가 거기로 갈게.”
「네.」
한서진은 송하나와 따로 만났다. 그녀는 짧은 스커트에 스타킹, 짙은 남색 코트를 걸친 모습이었다.
“칼라 칩 말인데, 아무한테도 말 안 했지?”
“네, 오빠가 비밀 지키라 하셨잖아요. 아빠한테도 말 전혀 안 했어요.”
“난 개인적으로 회장님을 좋은 분이라 생각해. 마음속으로 존경하고 있고, 나한테 베풀어주신 것도 많고.”
“…….”
송하나는 차분히 주시하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런 침착한 모습이 한서진은 참 보기 좋았다.
“실은 난 회장님한테 작은 마음의 빚이 있어. 이번에 그걸 갚는다는 마음으로 일을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너무 커져버렸네.”
“없던 일로 하셔도 전 이해해요. 너무 큰 초대박 아이템이잖아요. 아빠도 이해하실 거예요.”
“없던 일로 하자는 건 아니고.”
한서진은 조금 뜸을 들였다.
가슴에 품은 자그마한 흑심, 이것을 어떡하면 오해 없이 전달할 수 있을까.
“넌 회장님을 잘 알 테니까 물어보는 건데, 만약 통신사업을 한다면 회장님은 어떻게 하실 거 같아?”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어요.”
“회장님은 결국 그룹 내에서 누군가에게 통신 사업을 맡길 거 아냐. 그게 누가 될 것 같은데?”
송하나는 잠시 생각한 뒤 대답했다.
“아빠는 정이 깊으셔서, 가급적 혈육이나 가족한테 뭐든 주려고 하시는 분이에요. 그게 단점이죠. 원래 저한테도 H반도체를 주신다고 하셨거든요.”
“…….”
한서진은 순간 가슴이 엄청나게 찔렸다. 아니, 그럼 이 손으로 송하나의 장래 유산을 망쳐버린 거 아닌가?
“솔직히 이런 말씀드리기 창피한데……아마 저한테 맡기실 것 같아요.”
송하나는 몹시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살짝 가렸다.
“사실 욕심 낸 것처럼 보이긴 싫거든요. 근데 어차피 아빠는 재산 관련해서 제 말은 안 들으세요.”
“넌 욕심 없어?”
“별로요. 유산 때문에 형제들끼리 싸우고 멸시하고 그러는 건 이제 지긋지긋해요. 신물이 나요.”
처음으로 송하나의 표정에 그늘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음영은 금방 사라졌다.
“그러니까 그냥 없던 일로 하세요. 전 오빠랑 어색해지는 거 싫거든요.”
“무슨 말인지 알았어.”
한서진은 결심을 확고히 굳혔다.
송하나는 자신이 평사원으로 알려져 있던 시절부터 시작된 인연이었다. 다른 목적으로 다가온 여자가 아니다. 애초에 아쉬울 게 하나도 없는 환경이고, 또 어리지 않은가.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만나본 여자 중에서 유일하게 적합이 뜬 여자라는 것.
「적합.」
지금 이 순간에도 적합이란 판정이 생생히 보인다. 통찰안은 그녀에게 긍정적인 판단을 주었다.
‘솔직히 나도 조금 끌리고.’
조금이라고 말할 수준이 아니지만.
지금까지 겪어본 여자 중 가장 매력 넘치고 끌리는 건 사실. 어쩌면 자신은 그녀가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제한을 두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것만큼은 분명했다.
‘잘해주고 싶어.’
송하나에게 잘해주고 싶고, 잘 보이고 싶다는 것.
“제가 굉장히 좋은 기술을 하나 개발했습니다.”
한서진은 대뜸 그렇게 선공을 날렸다. 백철중 회장은 잠시 반응을 못하다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자신만만하군. 기대가 크네.”
“정말 대단히 좋은 기술입니다. 빈말이 아닙니다.”
“…….”
거듭된 강조, 백철중 회장의 안색이 조금 심각해졌다.
한서진은 자기 자랑을 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오히려 가진 능력에 비해 자기 어필이 약하다.
그는 심각히 물었다.
“어느 정도 가치인가?”
“5nm공정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물론 컴퓨터 반도체 관련 기술은 아닙니다. ADSC와 사업이 겹칠 일은 없습니다.”
“어느 분야인가?”
“통신 쪽입니다. 전 세계 통신 시장을 집어삼킬 수도 있을 겁니다. 물론 기득권 통신업체들이 순순히 당해주지 않을 테니, 반발을 이겨내야겠지요.”
“그럼…… 우리 그룹과 손을 잡는 건 어렵겠군.”
백철중은 살짝 체념한 듯이 말했다. 한서진이 자신만만하게 기술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것에서 불길한 예감을 받은 것이다. 그렇게 좋은 기술을 굳이 자신과 나눠야 할 이유는 없으니.
하지만 한서진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기술을 나눠 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작은 도움을 드릴 순 있을 것 같습니다.”
“작은 도움? 말해주게.”
“제품을 생산하려면 어차피 공장이 필요합니다. 생산과 유통을 H그룹에 맡기고 싶습니다. 그 과정에서 나오는 마진만 해도 충분할 거라 생각합니다.”
“통신사업에서의 생산과 유통이라…….”
백철중은 침음을 흘리며 생각에 잠겼다.
H그룹은 통신사업과 무관하다. 모바일 제조업이나 이동통신사업에 얽힌 계열사가 없다.
그야말로 밑바닥부터 투자하고, 시작해야 한다. 한서진은 그에 대한 대가를 지급한다는 것이리라.
“사업 확장의 첨병이 되어달라는 거군.”
한서진의 말대로 통신 시장을 집어삼킬 만한 아이템이라면, 기술을 나누지 않아도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넘친다.
“그렇습니다. 일단 미국과 유럽 시장을 생각하고 있는데, 그전에 국내 시장에서 시험적으로 운영을 해보려고 합니다.”
“미국이라. 반발이 장난 아니겠는데. 그쪽 통신 카르텔도 굳건하지 않은가.”
“적을 ‘더’ 만들기는 당장은 꺼려져서요.”
백철중은 이해하지 못하는, 의미심장한 뜻이 담긴 말이다.
슈나우저와 코카 스패니얼은 단일 제품이기에 성능 하나만으로 모든 걸 씹어 먹을 수 있었다. 기존 반도체 제조사들이 죽는다고 아우성을 피워도 무시할 수 있었다.
제품을 선택하는 것은 결국 소비자들이기에.
그러나 통신사업은 조금 다르다. 전파 이용에 따른 정부의 이익 침범 등 다양한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H그룹은 그 골치 아픈 부분을 맡는 대신, 적당한 부스러기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대신 이쪽 사업을 맡을 계열사는 하나한테 주십시오.”
백철중은 멈칫했다가 부드럽게 물었다.
“왜 하나인가?”
“크리스마스 깜짝 선물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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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주력 사업장은 미국이니까 조그만 불반도 시장쯤은 없어도 괜찮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