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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131화 (131/609)

00131  미스릴 네트워크  =========================================================================

한서진이 생활하는 5층 한쪽에는 격실이 있다.

격실 문은 단단한 합금으로 되어 있고, 아날로그와 전자식 안전장치가 이중으로 되어 있다. 열쇠와 비밀번호가 없으면 열지 못하는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이다.

격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작은 공간이 나온다. 가로세로가 각각 4미터로 된, 방으로 된 금고나 마찬가지인 보안방이다.

보안방 한쪽에는 타르타로스가 설치되어 있다. 본체는 티타늄 재질의 프레임으로 단단히 고정되어 있어, 보안방에 침투한다 해도 타르타로스를 꺼내가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또한 프레임의 전면이 강화 유리로 되어 있어 내부의 타르타로스를 훤히 들여다볼 수 있다.

다른 한쪽에는 육중한 합금으로 된 캐비넷형 금고가 있다. 금고의 크기는 타르타로스 본체보다 훨씬 크다.

금고 앞에 선 한서진은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문을 열었다.

안에 든 것은 크게 특별하지 않았다. 고작 투명한 용기 네 개가 전부다.

그 중 셋은 투명한 액체가 가득 담겨 있다. 각 용량은 약 4리터쯤 될까.

다른 한 용기에는 푸르스름한 빛을 내는 액체가 소량 들어 있었다.

바로 엘릭서, 그를 말기암에서 구원해준 놀라운 신의 물질이다.

“이 정도면 엘릭서 재료로는 충분하겠지.”

한서진은 엘릭서 조제 재료가 담긴 다른 세 용기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저것들은 박현준이 회사의 눈치를 피해 만들어온 화합물들이다. 합이 12리터의 화합물을 대가로 그는 무려 20억을 챙겼다.

하지만 그는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저 화합물이 지닌 진정한 가치는 20억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것을.

“미리 잔뜩 만들어둘 필요는 없고. 만약을 위해서 1인분만 있으면 충분하겠지.”

어차피 엘릭서는 언제든 만들 수 있다. 그러니 미리 만들어서 유출의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 위기 상황을 대비해서 1인분만 있으면 충분하다.

엘릭서를 보고 있으니 마음이 저절로 뿌듯해진다. 한참을 들여다보던 그는 금고 문을 닫고 돌아섰다.

“간만입니다. 그간 건강하셨습니까?”

한서진은 편안한 옷을 입은 백철중을 보고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그가 인자하게 웃는 얼굴로 맞이했다.

“어서 오게.”

“잘 왔어요. 편히 쉬다 가요.”

송지현도 옆에서 웃는 얼굴로 대했다.

백철중이 정정하고 젊어 보이는 편이라지만, 송지현도 30초중반으로 보일 만큼 젊은 터라, 두 사람은 도저히 부부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실제 나이 차이가 30살이 넘던가?

‘참 대단하시지.’

30살 이상의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여배우랑 재혼을 한 것으로도 모자라 늦둥이까지 보다니. 어떤 의미에서는 존경스러웠다.

“근데 하나는 어디 갔나?”

“하나는 조리실에 있어요. 한 대표 온다니까 자기가 직접 대접하려나 봐요.”

“저런, 요리도 못하는 아이가 너무 열의만 넘치는군.”

한서진은 살짝 어이가 없었다. 그게 요리 못하는 거라면, 대체 백철중 회장의 입맛은 얼마나 높은 걸까?

“자, 앉게.”

응접실에 마주 보고 앉고, 가정부가 술을 가져왔다. 소주부터 시작해서 와인, 위스키, 보드카 등 종류가 다양했다.

“매번 내가 먹고 싶은 것만 먹는 듯해서…… 자네가 먹고 싶은 걸로 고르게나.”

“감사합니다.”

한서진은 조금 고민하다가 위스키를 골랐다. 백철중이 껄껄 웃으며 병을 열고, 술을 따라 주었다.

“사무소 확장한 거 축하하네. 아주 좋은 자리로 이사 갔다고 들었네.”

“예,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그런데 채용 공고에 H반도체 이름을 빌렸다고 들었는데…….”

“정지원 이사님한테 양해를 구했습니다. 그분과 제가 인연이 깊어서요.”

“그랬구만.”

정지원 이름이 나오자 백철중은 조금 씁쓸한 눈빛으로 천천히 잔을 비웠다.

“회사가 좀 더 잘했어야 했는데. 아까운 인재들을 놓친 걸로도 모자라 척까지 졌어.”

“…….”

정지원을 원망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한서진은 그런 반응에 왠지 안심이 되었다. 물론 이건 꼭 그가 송하나 부친이라서가 아니라…….

“내 제안은 생각을 해봤나?”

한서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반도체 사업을 일으키게 도와달라는 제안, 한서진도 꽤나 길게 고민했다.

사업적인 측면에서 보면 경쟁자를 도와주는 꼴이다. 그러나 백철중과 더 이상 멀어지고 싶지 않다. SJ인더스트리 등 지금까지 숨긴 비밀만 알려져도 백철중은 크게 실망할지 모른다.

“요리 나왔습니다.”

가정부가 커다란 접시를 가져와서 내려놓았다. 4인분은 족히 됨직한, 야채와 잘게 썬 고기를 향기롭게 볶은 요리다. 전체적으로 고소하고 새빨갛게 물든 양념이 먹음직스러워 보인다.

한서진은 문득 시선을 느끼고 눈길을 돌렸다. 조리실에서 송하나가 살짝 몸을 내밀고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손을 조금 흔들며 방긋 웃어보였다. 그리고 다시 쏙 몸을 숨긴다.

“자, 들지. 우리집 여자들이 요리는 참 잘한다네.”

“그렇군요. 정말 부럽습니다.”

안주는 정말 맛이 좋았다. 맛에 취해 술을 붓다 보니 어느덧 금세 취기가 밀려왔다.

한서진은 아까 질문에 대한 대답을 꺼냈다.

“회장님도 아시겠지만 슈나우저와 코카 스패니얼은 이미 거스를 수 없는 대세입니다.”

“음.”

백철중은 나지막한 신음소리를 냈다. 그도 뒤집을 수 없는 파도라는 것은 인정하고 있었다.

다만 포기할 수 없었을 뿐이다. 지금까지 반도체에 그룹의 미래를 걸었기에.

“제가 반도체 설계 그 자체보다 공정기술 개발과 수퍼컴퓨터 제작에 눈을 돌린 것도 그런 이유에서고요.”

적당한 거짓말을 둘러대면서, 한서진은 내심 찔렸다. 속편하게 다 털어놓고 싶은 마음까지도 들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가.”

백철중은 침울한 듯 중얼거렸다.

거인의 힘없는 모습에 한서진은 조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반도체가 아니어도 H그룹은 자동차와 조선, 카드 등 수많은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다. 그런데 왜 백철중은 유독 반도체에 집착할까.

한서진은 그를 위해 준비한 작은 선물을 풀어놓을 때라는 것을 느꼈다.

“실은 제가 구상을 한 사업이 하나 있습니다. 컴퓨터용 반도체 쪽은 아닙니다만.”

“그게 뭔가?”

백철중은 눈을 번쩍 뜨며 관심을 드러냈다. 맛있는 고기를 앞에 둔 맹수와도 같은 표정이다.

“통신과 네트워크입니다.”

“통신?”

백철중의 표정이 조금 미묘하게 변했다. 자신의 예상과는 조금 달랐기 때문이다.

한서진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CPU와 GPU, 램, 그리고 스토리지는 이미 극한의 성능을 이루었습니다. Z7은 분명 최고의 수퍼컴퓨터입니다. 하지만 각 부품의 성능을 온전히 100% 발휘하고 있지는 않죠.”

“어째서인가?”

“네트워크 속도 문제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슈나우저끼리 정보를 주고받는 속도가 정작 슈나우저의 연산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100% 성능을 내지 못하고 있죠.”

“음…….”

“저는 여기에 답이 있다고 봅니다. 수퍼컴퓨터 제작에 착수한 것도 그런 면을 고려한 것도 있고요. 네트워크 성능이야말로 수많은 연산장치를 병렬 연결하는 수퍼컴퓨터의 핵심이니까요.”

어느새 백철중은 취기가 싹 날아간 얼굴이었다.

“그럼 혹시 우리 그룹과 함께 해줄 수 있겠나?”

“어렵지 않습니다만…… 단 조건이 있습니다.”

“얼마든지 말해보게. 우리 하나를 달라는 거라 해도 들어주겠네. 아, 물론 내년까지는 힘들겠지만.”

“그, 그런 건 아닙니다. 저도 염치가 있는 사람입니다.”

“농담이니까 너무 경직하지 말게. 그만큼 각오가 되어 있다는 뜻이라네. 뭐든지 들어줄 수 있다는 각오 말일세.”

백철중은 농담이라며 개의치 말라는 듯이 웃었지만, 한서진에게는 그렇게 마음 편히 웃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솔직히 살짝 혹하기도 했다.

그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나중에 제가 회장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일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때 한 번은 잊어주십시오.”

“심기가 불편한 일이 있어도, 잊어 달라?”

백철중은 뭔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리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껄껄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난 또 뭐라고. 걱정하지 말게. 자네가 내 뺨을 때려도 웃으면서 넘어가줄 테니까. 그거면 되나?”

“예, 그렇습니다.”

시원스러운 승낙을 얻어내자 한서진은 마음이 놓였다. 이제 SJ인더스트리에 얽힌 문제가 알려져도 빠져나갈 구멍이 생겼다. 설마 자기 입으로 약속해놓고, 뒤에 가서 화를 내지는 않겠지.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사업의 계약 조건이 아니라, 일을 함께 하기로 한 것에 대한 도의적인 대가였다. 비즈니스가 아니다.

“수익이라든가 지분 같은 자세한 사업 조건은 나중에 다시 논하지. 하지만 자네에게 유리하게 맞춰줄 테니 마음 내려놓고 있게. 오늘은 술이나 마시세.”

근심을 덜어놓은 백철중은 그 어느 때보다 표정이 밝았다.

“회장님 잘 부탁합니다.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우리 바깥양반이 너무 오래 붙들고 있었네요. 조심히 들어가요.”

정신을 잃고 뻗은 백철중을 대신해서 송지현이 그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송하나가 슬리퍼를 신고 따라 나왔다. 그녀는 하늘색 민소매 나시에 분홍색 핫팬츠를 입고 있었다. 안 그래도 큰 키에 핫팬츠까지 입으니 늘씬하고 긴 다리가 더욱 눈이 부셨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려는데, 송하나가 물끄러미 바라보는 게 느껴진다. 한서진은 왠지 어색한 분위기에 멈췄다.

“오빠는 별로 안 취하신 거 같아요.”

“아냐, 많이 취했어.”

“그래요? 얼굴 되게 멀쩡한데. 우리 아빠보다 술 잘하시는 분 처음 봐요. 우리 아빠 정말 술 잘 드시거든요.”

빈말이 아니라 백철중은 술을 정말 잘했다. 소주 10병은 혼자서고 거뜬히 넘기는 주량을 자랑했다.

그런데 매번 끝까지 살아남는 것은 한서진이다. 그렇다고 백철중이 평소보다 적게 마시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기분이 좋다며 더욱 많이 마신다.

“근데 아빠랑 무슨 이야기 하셨어요?”

“응, 일 얘기.”

“아빠 회사와 같이 일하기로 하신 거예요?”

“조금 비슷해.”

“왜요? 왜 같이 일하세요?”

“…….”

조금 따지는 듯한 말투에 한서진은 할 말이 없었다. 이 아이, 혹시 H그룹과 내가 손을 잡는 게 싫은 건가?

송하나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오빠들과 언니들은 죄다 욕심꾸러기들인데.”

“…….”

“같이 일해 봤자 오빠만 손해 볼 거예요.”

한서진은 쓰게 웃었다. 오빠와 언니, 아마 배다른 형제와 사촌형제들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들에게 송하나는 혼인신고도 하지 않은 계모의 딸일 뿐이다. 유산을 강탈해갈 수도 있는 잠재적인 경쟁자. 절대로 좋은 사이는 아니겠지.

‘H반도체 경영도 엉망이었고 말이야. 그리고 백세완도…….’

백철중도 여러 번 입버릇처럼 말했다. 믿고 사업체를 맡길 만한 자식이 한 명도 없다고.

“걱정할 것 없어. 나도 속 곪아가면서 일할 마음은 없거든.”

“……?”

송하나가 의아한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는 피식거리며 그녀의 한쪽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스킨십을 할 용기가 어디서 났는지 몰랐다. 이것도 술기운인가?

“사업 파트너라든가 그런 조건이 안 맞춰지면 안 해. 아마 회장님도 잘 아실 테고, 그래서 맞춰주실 거야. 그러니 걱정할 것 없어.”

“……네. 전 그냥 걱정돼서.”

“실은 내가 회장님한테 조금 미안한 게 있거든. 그래서 작은 선물 하나 드리려는 거고.”

“선물…….”

작게 중얼거리던 송하나는 문득 밝게 웃으며 물었다.

“그럼 저도 나중에 대학 들어갈 때 선물 주실 거예요?”

갑자기 대학 선물 이야기가 나오자 어리둥절했지만 한서진은 흔쾌히 끄덕였다.

“당연히 줘야지. 근데 아직 일 년도 더 남았다?”

“그럼 일 년 동안 찬찬히 생각하죠, 뭐.”

“그래, 천천히 생각해 봐. 내가 줄 수 있는 걸로.”

“네에, 그건 걱정 마세요.”

송하나는 방긋 웃으며 두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오빠, 조심히 들어가세요.”

============================ 작품 후기 ============================

케르베로스 간의 원활한 연결을 위해 손댄 네트워크 기술이 나중에 알고 보니....(속닥속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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