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130화 (130/609)

00130  미스릴 반도체 : 케르베로스  =========================================================================

타르타로스의 하드웨어는 한서진이 통찰안의 모든 역량을 집중해서 빚어낸 걸작이다.

일만 개의 케르베로스는 스코브리아늄 회로로 구성된 아키텍처에 꽂혀, 빠른 속도로 상호간 데이터를 주고받는다. 최상의 병렬 처리 능력을 고안하여, Z7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놀라운 고속 처리 능력을 보인다.

최적화 커스터마이징이 되지 않은, 디폴트 상태에서 보인 성능이 무려 50엑사플롭스다. 이는 초당 5,000경 번의 연산이 가능하다는 의미였다.

공식적인 세계 2위 수퍼컴퓨터인 미국의 타이탄B가 93페타플롭스, 마찬가지로 공식적인 세계 1위인 Z7이 998페타플롭스인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경이적인 능력이다.

설계 사무소 직원들은 타르타로스의 놀라운 성능에 흠뻑 빠졌다.

“수퍼컴퓨터가 좋긴 정말 좋네.”

“그냥 수퍼컴퓨터인가. 세계 1위 아냐, 1위.”

“시스템 리소스 조금 할당받은 게 이 정도면…… 풀 파워로 사용하면 대체 어떨까? 상상이 안 가네.”

의도한 것은 아닌데, 팀원들을 뽑고 보니 대부분 한국대 출신이었다. 30명 중에서 무려 22명이 한국대 출신이었던 것이다.

휴식 시간에 차대웅이 농담처럼 말했다.

“회사 올 때마다 느끼는 건데, 무슨 동문회 오는 기분이야.”

“에이, 그래도 학부는 다양하잖아요.”

“한국대 동문회라니, 섭섭합니다. 여기 K공대 출신도 있다구요.”

“P공대도 있습니다.”

옆에서 K공대와 P공대 출신 직원들이 볼멘소리로 말했다. 한국대와 더불어 국내 이공계 톱3를 차지하는 대학들이다.

“근데 대표님은 어떤 분이죠? 차 팀장님은 H반도체에서 같이 일하셔서 잘 아실 거 같은데.”

“비글은 알지? 그거 개발팀에 있던 분이야. 그때는 신입사원이라서 거의 개발에 관여 안 했다고 하는데, 모르지. 알고 보니 비글도 대표님이 설계한 반도체일 수도.”

“어,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 싶네요.”

“아무튼 천재라고 느꼈어. 백철중 회장까지 관심 가지고 지켜볼 정도였으니까.”

“와, 재벌 회장님까지?”

“그래서 당시 대표님도 모양 좋게 회사에서 독립했다 들었는데, 요새는 어떤지 모르겠다. 아직도 H그룹이랑 사이좋으려나?”

“H반도체 경영진과 이야기했다는 거 보면 아직 좋게 지내는 거 같은데요.”

휴식을 마치고 들어가려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최상층은 설계 사무소가 통째로 쓰는지라, 직원들은 회사 손님인가 하고 돌아봤다.

그리고 일제히 굳었다. 손님은 바로 상상을 초월하는 미인이었던 것이다.

“안녕하세요. 여기가 한설계사무소 맞나요?”

늘씬하고 비율 잡힌 키에 하얗고 오밀조밀한 얼굴, 성숙한 미모를 물씬 풍기는 여자가 상냥히 웃으며 물었다. 터질 듯한 볼륨감은 긴 코트로 감추고 있어도 눈에 띈다.

버벅거리던 차대웅이 헛기침을 하고 나섰다.

“예, 맞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는지?”

“혹시 한 대표님 안에 계시나요?”

“아, 대표님 손님이시군요. 예, 지금 안에 계십니다.”

차대웅은 얼른 사무소 문을 열어주었다.

여자, 송하나는 고맙다고 깍듯이 인사하고는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들어섰다.

꾹 눌러 참고 있던 호흡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직원들은 서로 돌아보며 웅성거렸다.

“와, 끝내주는데.”

“누구지? 대표님 여자친군가?”

“그럴 수도. 선물 포장지 든 거 보니까 사무소 개소 축하하러 온 것 같은데.”

“억만장자는 저런 여자친구를 사귀고 다니는군. 좋은 걸 알았어. 역시 열심히 돈을 벌어야…….”

차대웅이 손뼉을 치며 분위기를 정리했다.

“자자, 들어가서 일합시다.”

“안녕하세요, 오빠.”

송하나가 눈웃음을 치며 인사하자 한서진은 살짝 당황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이사했는데 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어?”

“아빠한테 물어서 알았어요. 아빠도 이사한 거 이미 알고 계시던데요.”

“아, 그래?”

“조금 서운해 하세요. 사무소 확장하고 이사도 했는데 안 불러 주셨다고.”

“요즘 바빠서 정신이 없었거든. 지금도 일하는 중이야.”

“저, 앉아도 돼요?”

“아, 당연하지.”

송하나는 코트를 벗어서 옷걸이에 걸쳤다. 스커트 아래로, 커피색 스타킹에 가려진 다리가 이색적인 느낌을 준다. 두꺼운 코트를 벗자 가려져 있던 볼륨감이 모습을 드러낸다. 추운 날씨다 보니 옷을 두껍게 입었음에도.

“아참, 여기 선물.”

“아, 고마워.”

“손 별로 안 타는 선인장이에요. 오빠는 물 주는 거 깜박하실 거 같아서. 그래도 꽃 피면 예뻐요.”

한서진은 피식거리며 선인장 화분을 책상 한쪽에 놓았다. 삭막했던 책상이 조금 아기자기해진 느낌이다.

어쩌다 보니 소파에 옆으로 나란히 앉게 되었다. 송하나는 무릎에 다소곳하게 두 손을 올려놓고, 생글생글거리는 얼굴로 빤히 바라보았다.

‘얘 혹시 나 좋아하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지만, 금방 부끄러워졌다. 자문자답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운 내용이다.

그는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학교는?”

“기말 끝나서 이제 오전만 수업해요.”

“와, 좋을 때네. 나 때는 그런 거 얄짤 없었는데.”

“우리 겨우 일곱 살 차이거든요? 아저씨처럼 그렇게 말씀하시면 어떡해요.”

“그러고 보니 곧 겨울방학이네.”

“오빠는 방학 때 뭐 하실 거예요?”

“사장이 방학이 어딨어.”

“사장이기 전에 학생이잖아요. 대학생.”

송하나는 강조하듯이 ‘대학생’이란 말에 억양을 실었다.

“어디 리조트라도 안 가세요?”

“스키 탈 줄 모르는데, 리조트라. 흠…….”

“만약 그러시면 제가 가르쳐 드릴게요. 저 스키 잘 타요.”

“아, 그래?”

“운동 엄청 좋아하거든요.”

요리도 잘해, 운동도 좋아해. 참 빠지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운동 좋아하는 여자들이 그렇게나 좋다는데…….

‘내가 무슨 생각을.’

한서진은 얼른 스스로를 꾸짖었다. 그리고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뭐, 시간 나면 그럼 가르쳐 줘. 근데 내가 시간이 날지 모르겠다. 요즘 엄청 바쁘거든.”

“사업 확장하셔서요?”

“그런 것도 있고, 요즘 수퍼컴퓨터 개발에 한창 매달리고 있거든.”

“수퍼컴퓨터요?”

송하나는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서진은 그런 반응에 왠지 뿌듯해졌다.

“응, 세계 최고 수퍼컴퓨터를 만드는 게 목표야.”

“와, 대단하세요.”

사실 하드웨어는 이미 만들었고, 소프트웨어 최적화가 안 됐을 뿐이다. 한서진은 입이 근질근질했다. 타르타로스의 우아하고 멋진 자태를 이 여자한테 딱 보여주고 싶은데.

송하나는 30분 정도 이런저런 잡담을 한 뒤 일어섰다. 한서진은 바쁜 와중에도 왠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다시 한 번 사업 확장 축하드려요.”

“고마워.”

“아빠랑 약주하러 오시면 제가 또 요리 만들어드릴게요.”

“어, 그럼 꼭 가야겠네.”

송하나는 생글거리며 말했다.

“시간 날 때 오세요. 아빠는 언제든 환영하실 거예요.”

빌딩 1층 로비까지 송하나를 배웅하고 돌아왔는데, 직원들의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한서진은 얼굴에 뭐가 묻었나 싶어 당황했다.

“대표님, 능력 있으시던데요. 여자친구 미모가 참 대단합니다. 무슨 연예인 온 줄 알았네요.”

그래도 전 직장에서 상사였다고, 차대웅이 능글맞게 먼저 말을 걸었다. 한서진은 피식거리며 대답했다.

“그런 거 아닙니다. 친하게 지내는 동생이에요.”

“원래 다아 그렇게 시작합니다.”

“진짜 아니라고요. 나이 차이가 얼만데.”

“한 스물셋 되어 보이던데요. 대표님 올해 스물다섯 아니셨던가요? 그럼 얼마 차이 안 나네요.”

“스물셋은 무슨, 저래 봬도…….”

한서진은 말을 하려다가 멈췄다. 18살이라고 말하면 왠지 도둑놈 취급을 받을 분위기다. 그는 애써 말을 얼버무렸다.

“아무튼 그런 사이 아니에요.”

소프트웨어부서 팀장 김유빈이 예언처럼 말했다.

“내년에도 그런 사이 아닐지는 두고 봐야 알겠죠.”

“다들 일 안 하세요?”

회사 운영하랴, 학교 다니랴, 한서진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연말을 보냈다. 수업에 참석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했고, 심지어 몇 과목은 시험도 건너뛰어야 했다.

F를 예상했는데 교수를 찾아가 양해를 구하자 다행히 교수는 C를 주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 뭘요. 일하느라 바쁜 학생인데 학교에서 이 정도 배려는 해줘야지요.”

낙제가 발목을 잡는 일은 다행히도 면할 수 있었다.

‘정말 번개처럼 지나간 한 해였네.’

통찰안을 얻은 작년이 잊을 수 없는 인생의 큰 획이었다면, 올해는 잊을 수 없을 만큼 정신없이 바쁜 한 해였다.

한국대 입학, 슈나우저 개발, SJ인더스트리, 백세완, 그리고 송하나…….

돌이켜보면 참 많은 일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SJ인더스트리를 설립한 게 일 년도 채 되지 않았다는 게 놀라웠다. 까마득한 옛날 일 같은데.

TX인더스트리를 1억 200만 달러에 인수해서 설립한 SJ인더스트리는 투자기관에서 책정한 초기 기업가치가 3억 불이었다. 그러던 것이 연말에는 5,000억 불로 껑충 뛰었다.

슈나우저와 코카 스패니얼, Z7 등의 브랜드 파워가 기업 가치를 순식간에 천 배 이상으로 부풀린 것이다.

어디까지나 투자기관에서 책정한 가상 가치고, 주식이 실제로 거래되는 일은 없었다. SJ인더스트리의 모든 지분은 각 주주들이 꽁꽁 쥐고 있었다.

‘타르타로스 커스터마이징이 문제인데.’

시스템 안정화 작업은 예상보다 쉽지 않았다.

직원들은 타르타로스 안정화 작업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구매한 슈나우저와 코카 스패니얼로 수퍼컴퓨터를 만드는 작업인 줄 알고 있었다. 타르타로스의 정확한 하드웨어 성능을 알지 못하니, 업무가 가끔 꼬일 때도 있었다.

한서진은 나름대로 열심히 프로그래밍과 수퍼컴퓨터 OS 체계를 공부했지만, 공부량 부족으로 아직까지 사내에서 가장 실력이 떨어졌다.

그래서인지, 통찰안을 활용해도 썩 괜찮은 결과물이 나오지 않았다. 통찰안은 해당 분야에 관해 이해도가 높을수록 더 정확한 진실을 보여주기에.

‘이거 아무래도 부전공으로 컴공도 파야겠네. 일단 청강으로라도 들어야겠어.’

「귀 요원의 요청은 거절되었다.」

조이 박은 눈살을 찌푸렸다. 못마땅한 감정이 속에서 치솟아 올랐으나 그는 심호흡으로 다스렸다.

“어째서? H는 미국의 안보와 국익에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경호 수준을 지금보다 세 단계는 더 높여야 한다.”

「현 수준을 유지한다. 그것이 상부의 뜻이다.」

“상부가 잘못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책상에 앉아서 펜대만 굴리는 녀석들은 상황 판단이 둔할 때가 많다. 그러니 현장의 감각을 무엇보다 중요시해야 한다. 그것이 조이 박의 신념이었다.

“중국과 러시아, 일본 등 타국이 언제 H의 존재를 의식할지 알 수 없다. 아니, 이미 어느 정도 의식하고 있다. H가 SJ인더스트리의 소유주라는 것을 그들이 알게 되면, 그때 가서 뒤늦게 수습에 나설 생각인가?”

「이건 상부의 뜻이다.」

“그 상부가 지금 잘못된 판단을……!”

「그 상부가 바로 워싱턴이다.」

“…….”

워싱턴이란 말에 조이 박은 입을 다물었다. 워싱턴, 그것이 내포한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미합중국 전체의 뜻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것이다.

「H의 사업기반은 미국에 있고, 단지 거주만 한국에서 하고 있을 뿐이다. 워싱턴은 섣불리 H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걸 원하지 않는다.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최상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니 무모한 접근으로 상황을 악화시키지 말고, 지금처럼 원격 경호 수준을 유지하도록.」

“……알았다. 하지만 한 가지 중요한 것을 보고하겠다. H가 최근 특별한 컴퓨터를 제작한 것으로 추측된다. 경호 수준이 낮아 정확한 사정은 파악하지 못했지만, 확인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보고는 하겠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통신은 끊어졌다.

조이 박은 뚜뚜 소리만 나는 수화기를 우두커니 내려다보다가 치 하고 이를 갈았다.

============================ 작품 후기 ============================

모든 독자들은 딱지를 착용했으며, 그 중에는 딱지를 닦아주는 노예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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