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8 미스릴 반도체 : 케르베로스 =========================================================================
「SJ인더스트리, 진성전자에 반도체 위탁생산 발주!」
「연간 10억 개 발주, 진성전자 회생하나?」
「진성전자 반도체 생산 공장, 즐거운 비명 질러.」
진성전자와 SJ인더스트리의 합작이 헤드라인을 탔다. 슈나우저와 코카 스패니얼만 합쳐서, 1차 발주 물량만 자그마치 10억 개였다.
진성전자 주가는 다시금 고공행진을 했고, 언론은 진성그룹이 다시 살아났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둘을 합쳐 10억 개면 500억 달러짜리 계약이다. 겉보기에 H반도체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큰 건수였다.
게다가 SJ인더스트리의 생산 공장이나 다름없는 H반도체와는 달리, 진성전자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위탁생산이다. 자주성을 지킨 것이다.
“역시 진성그룹이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고, 투자자들은 앞을 다투어 진성그룹의 주식을 사 모았다.
만약 진성전자가 제품을 생산할 때마다 2달러씩 손해를 보는 구조라는 걸 알았으면,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잘했다.”
침대에 누워 있던 이창용 회장이 한참 끝에 내뱉은 말이었다. 감출 수 없는 노여움이 묻어나오지만, 그것은 이용무를 향한 게 아니었다. 당장의 수치를 감당할 수밖에 없는 그룹의 무력한 현실에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이용무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버님.”
“아니다. 누가 그 자리에 있더라도 그 이상의 결과를 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당장 반도체 사업부가 무너지는 것보다는 낫다.”
반도체는 다국적기업이라는 지금의 진성전자를 만들어준 효자 중의 효자 사업이다. 오너로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반도체를 포기할 수 없었다.
“사내 유보금만 30조 원이다. 연간 2조 원의 적자는 어떻게든 버틸 수 있다. 다른 곳에서 메우면 된다. 중요한 건 공장을 놀리지 않는 것이다.”
반도체 공장은 어느 때든 쉬지 않고 돌아가야 한다. 설비가 가동한다는 그 자체가 매출이고, 실적이며, 이익이다. 이창용 회장의 철칙이었다.
“유 실장. 보고해주게.”
“예, 회장님.”
오랫동안 이창용을 보필한 비서실장이 정중히 나서서 브리핑을 시작했다.
“SJ인더스트리로부터 제공받은 5nm공정설비와 슈나우저, 코카 스패니얼의 역설계 분석을 진행 중입니다. 다만 5nm공정설비의 경우에는 ADSC와의 경우를 생각하면, 주변기술 특허 확보를 시도하는 것 자체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이니 어쩔 수 없지. 사이가 나빠지면 곤란하니. 그리고?”
“슈나우저와 코카 스패니얼은 회로 분석이 매우 난해한 듯합니다. 진척이 없습니다.”
설계도는 이미 특허 등록이 되어 있다. 그러나 윈텔, IBM 등 다양한 경쟁사들은 특허 내용을 보고 불신을 금치 못했다.
심지어 윈텔의 수석 기술자는 특허를 보고 이렇게 화를 냈다는 말까지 전해지고 있었다.
‘이런 설계가 어떻게 그런 성능을 낸단 말인가! 이건 말도 되지 않는다!’
많은 경쟁사들은 위장 특허인가 싶어 실체품을 역설계하는 방식으로 SJ인더스트리의 기술을 맹렬히 분석 중이다. 그리고 진성전자도 그 중 하나였다.
“그래도 멈추지 말고 진행하게. 계속 파헤치다 보면 뭐라도 얻을 수 있겠지.”
모방은 선두 주자를 따라잡기 위한 첫 걸음이다.
이창용은 냉정한 눈으로 이용무를 주시했다.
“에스코너 소유자를 알아보고 있다고 했느냐?”
“예.”
에스코너. 북유럽 L국에 본사를 두고 있는 페이퍼 컴퍼니이자, SJ인더스트리의 최대 주주.
“나쁜 선택은 아니다. 하지만 그 자를 찾아서 무엇을 줄 생각이냐?”
“…….”
“그 자가 받을 만한 조건을 제시하지 못하면 찾아내도 의미가 없다. 그걸 염두에 두거라.”
“알겠습니다, 아버님.”
이용무는 인사를 마치고, 침실을 나섰다. 복도를 걷는데 저쪽에서 누나인 이서나가 또각또각 걸어오고 있었다. 그를 발견한 이서나가 일부러 속도를 늦췄다.
“아버지 만나고 나오는 모양이네?”
“누나는 어쩐 일인데?”
“딸이 아버지 보러 오는데 꼭 볼일이 있어야 하니?”
이서나는 생긋 웃으며, 이용무의 어깨를 가볍게 쓸었다. 다정해 보이는 손길이지만, 보이지 않는 가시가 느껴진다.
“요즘 많이 힘들다고 들었어. 힘내.”
“……참 고맙네.”
이용무는 보이지 않게 이를 악물고, 차가운 웃음으로 대답했다. 의무적인 인사를 마친 두 남매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냉정하게 휙 지나쳤다.
한서진은 설계 사무소를 옮겼다.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준공한 지 3년 밖에 안 된 신축 고층 빌딩이었다.
32층 빌딩의 최상층을 전부 임대한 터라 보증금과 임대료가 만만치 않게 비쌌다. 물론 500억 달러의 자산가에게는 무의미한 액수였지만.
사무소를 이사하는 날, 여직원 박수진은 새 사무실을 보고 매우 놀라워했다.
“여, 여기가 정말 앞으로 우리 회사 사무실이에요?”
“네, 그래요. 전망 좋죠?”
“세상에…….”
그녀는 눈을 비비고 몇 번이나 전망을 내려다보았다. 32층에서 내려다보는 도심 풍경은 마치 서울을 밟고 선 듯한 짜릿함을 안겨 주었다.
“그런데 우리 사무소는 사장님까지 해서 겨우 세 명이잖아요. 이렇게 넓은 사무실이 필요한가요?”
“그건 염려하지 마세요. 앞으로 직원을 더 뽑을 겁니다. 수진 씨도 이제 전보다는 좀 더 바빠질 거예요.”
박수진은 주먹을 꽉 쥐고,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시고 시켜만 주세요. 안 그래도 월급만 루팡하는 처지라서 조금 불안했는데 잘 됐다고 생각해요. 차라리 바쁜 게 나아요.”
“나중에 후회할 수도 있어요.”
한서진은 피식거리고, 이번에는 하정태에게 물었다.
“프로그래밍 공부는 좀 하고 계세요?”
“네가 지시한 이후로 열심히 하고 있어.”
“하긴, 일 없을 때 보면 매일 코딩만 보고 계신 거 같더라고요.”
“처음에는 막막했는데 막상 해보니까 회로 설계나 코딩이나 비슷한 것 같더라. 요즘 야간대에 다니면서 청강한다.”
“어, 우리 학교에는 야간대 없지 않아요?”
“그래서 연체대 다니잖아. 아무튼 월급 받는 값은 열심히 하고 있다.”
설계 사무소는 사실 일이 널널한 편이었다. 애초에 사무소 정체성 자체가 SJ인더스트리의 수석 개발자 한서진의 작업실이란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하정태는 그의 설계 업무를 보조하는 일만 하고 있었고, 박수진은 얼마 되지 않는 사무소 살림을 맡았다. 자연히 한가한 때가 많았다.
“반도체 설계는 사실 제가 혼자 다 할 수밖에 없어요. 어떻게 일을 맡겨드려야 할지 감이 안 와서요.”
“천재는 원래 다 그래. 천재가 하는 일을 어떻게 범재와 나눠서 하겠니.”
“……아무튼 앞으로는 우리 사무소에서 소프트웨어 설계 작업도 함께 하려고요. 물론 제가 설계한 설비에 들어가는 전용 소프트웨어 위주로 할 겁니다.”
“소프트웨어? 그건 차라리 실리콘밸리에 맡기는 게 낫지 않을까?”
하정태는 조심스럽게 우려를 나타냈다. 하드웨어이든 소프트웨어이든 실리콘밸리는 최고의 인프라와 인재들이 구축된 곳이다. 굳이 이곳에서 할 이유가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한서진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설계한 반도체에 가장 맞는 소프트웨어는 제가 가장 잘 만들 수 있거든요.”
“……아, 그래.”
“근데 소프트웨어 설계 작업을 제가 몽땅 다 할 순 없잖아요. 시간 낭비인데. 중심 뼈대만 제가 잡고 나머지는 직원들에게 맡기려고요.”
“아하, 그래서 큰 데로 이사했구나.”
하정태는 그제야 한서진의 뜻을 이해하고 납득했다. 동시에 왜 프로그래밍 공부를 하라고 지시했는지도 이해했다.
아마 그가 당장 자신에게 바라는 건 프로그래머로서의 능력보다는, 전용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간의 조율을 맡기기 위해서일 것이다. 어느 정도 지식은 있어야 조율이 가능할 테니.
“회로 설계 쪽과 소프트웨어 쪽 사람을 같이 충원하고 싶은데, 인재 공고 좀 올려주세요.”
“알았다. 대우는 어느 정도나?”
“소수정예제로 갑니다. 최고가 아니면 필요 없습니다. 누구든지 혹할 만한, 지금 당장 일하던 직장에서 미련 없이 나올 조건으로 하세요.”
하정태는 잠시 고민한 뒤 확인 차 물었다.
“그냥 업계 최고의 대우가 아니라, 최고의 인재들이 엉덩이에 불붙은 듯이 당장 뛰어올 만한 조건을 제시하자는 거지?”
“그렇죠.”
업계 최고 연봉이 2억이라 가정하자. 2억 5천을 제시한다 해서 과연 그 사람이 당장 직장을 그만두고 올까? 이것저것 고민하느라 결정에 시간이 걸리고, 심지어 급여 외의 다른 조건으로 포기할 수도 있는 것이다.
“조건을 보자마자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면 좋겠네요. 다른 생각이 전혀 안 들 만큼.”
“무슨 말인지 알았다. 지금 당장 전 직장 상사한테 욕을 싸지르고 오라고 해도 두말없이 튀어나올 조건을 제시하잔 거군.”
“중요한 건 사람과 시간이지, 돈이 아니거든요.”
“그래, 알았다.”
“선배님은 사내 최고 대우해드릴 테니 걱정 마시고요.”
“역시 창립 멤버가 참 좋구나. 눈물겹게 고맙다.”
하정태는 피식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는 두어 시간 정도 업계 대우 등을 자세히 알아보고 난 뒤, 조건을 정리해서 가져왔다.
“이 정도면 톱급 인재들이 뒤도 안 돌아보고 회사에 달려올 것 같은데.”
하정태는 조금 주저했다. 자신이 보기에도 조건이 많이 과하긴 했던 것이다. 업계 최고 대우가 아니라, 업계 최고 인재들이 뒤도 안 돌아보고 뛰쳐나올 만한 조건이었으니.
“기본 연봉 3억에 주4일제에 매일 5시간 근무 보장, 시간 외 근무시 추가 수당에 의료비와 자녀 교육비 지원까지 있군요. 여기 추가 수당이 시간 당 30만 원이라는 건 무슨 기준인가요?”
“일 년에 1,040시간을 일하고 연봉 3억이면 시급이 약 28만 원이거든. 1.5배로 하려다가 그건 너무 과한 것 같아서 추가 수당은 30만 원으로 한 거야.”
“그냥 1.5배로 하죠. 깔끔하게 추가 수당은 45만원으로.”
“저, 정말 이대로 해?”
하정태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반문했고, 오히려 한서진이 가볍게 타박했다.
“아니, 이거 선배님이 가져온 공고 조건인데 저한테 해도 되냐고 물으시면 어떡합니까?”
“네 말대로 조건을 설정하긴 했는데 내가 보기에도 너무 과한 것 같아서……. 마치 꼭 내가 이런 조건에서 일하고 싶어서 내건 것 같잖아.”
“제가 궁금한 건 이겁니다. 업계 최고 대우 받는 인재가 이 조건을 보면 과연 그 자리에서 상사한테 쌍욕 날리고 바로 달려올까요, 안 달려올까요?”
“쌍욕 날릴지 말지는 개개인 인성 문제니 나도 장담 못하고, 두 말 않고 달려올 건 확실하다.”
하정태는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덧붙였다.
“대신 비전과 신뢰를 줄 필요가 있어.”
“비전은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신뢰는 뭐죠?”
“회사가 이 조건을 계속 지켜줄 거란 신뢰지. 막말로 대기업도 해주기 힘든 조건이잖아. 너무 좋으면 지킬 수 있을지 오히려 불안할 수도 있거든.”
“5nm공정 개발자라고 어필하면 어때요?”
“500억 달러 재산가가 이 빌딩에 세들어 산다고 동네방네 떠들어도 상관없다면 괜찮다. 기부단체가 매일 문 앞에 죽치고 농성하면서 죽는 소리 하겠네. 출퇴근은 할 수 있을까.”
“……그럼 그건 기각하죠.”
한서진은 잠시 생각했다.
직원 채용하자고 SJ인더스트리의 주인이라는 걸 떠들 수도 없고, 5nm공정 기술 역시 마찬가지다. 지원자들에게 신뢰를 심어줄 만한 적당한 어필 요소가 뭐가 있을까?
“H반도체 특수 설계부서에서 사람 구한다고 공고 내세요. 설계 작업실만 여기로 뺀 거라고.”
“뭐? 하지만 우린 H반도체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그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상관이 없기는, 왜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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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출근하셨죠...?
업무 시작 전에 잠깐 적적함 달래시라고 한 편 올립니다. 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