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7 미스릴 반도체 : 케르베로스 =========================================================================
Z7은 500개의 슈나우저를 병렬 연결해 연산 능력을 극대화한 초수퍼컴퓨터다. 가상 모듈 제어를 통해, 각 슈나우저 안의 GPU까지 고속 연산 처리 작업에 할당했다.
덕분에 약 1,000페타플롭스(정확히는 998)의 연산 속도를 자랑하는 최고의 수퍼컴퓨터가 되었다. 그 이전 1위 수퍼컴퓨터가 93페타플롭스인 점을 생각하면, 무려 10배 이상 증가한 성능 차이였다.
전문가들은 슈나우저를 조금만 더 늘렸으면 엑사플롭스(1엑사 : 초당 100경 연산을 수행하는 단위, 1엑사는 1,000페타)를 달성했을 거라며 아쉬워했지만, 여기에는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었다.
바로 슈나우저의 병렬연결은 500개가 한계라는 것. 그 이상은 연결해봤자 성능 증가폭이 매우 낮다. SJ인더스트리 내부에서는 이를 ‘500의 한계’라고 부른다.
‘메인프레임 크기로도 이미 압도적인 성능을 달성해서 그러는 게 아닐까? 크기가 작으니까 전력도 적게 먹고 유지 보수에도 훨씬 좋잖아.’
세간에서는 제멋대로 그런 분석을 내놓았지만, 그런 비밀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케르베로스는 그런 제한이 없다. 동작 클럭만 10GHz에 달하는, 슈나우저보다 모든 면에서 뛰어난 종합컴퓨터 칩이라고 할 수 있다.
500개의 슈나우저를 묶은 Z7이 998페타플롭스를 달성했는데, 1만 개의 케르베로스를 묶은 타르타로스의 성능은?
“……믿을 수 없군. 50엑사플롭스라니.”
테스트 결과를 보고 니트론은 할 말을 잃었다. 수퍼컴퓨터 제조는 그의 전공이 아니지만, 이것이 얼마나 경이적인 수치인지는 알았다.
미국과 중국이 엑사플롭스급 컴퓨터 개발에 먼저 성공하려고 그렇게 안간힘을 쓰는데, 이걸 가뿐히 넘겨버리다니. 그것도 OS와 네트워크 최적화가 되지 않은 시제품으로.
“자네……. 정말 괴물을 만들었군.”
니트론 교수는 할 말을 잃은 채 바라보다가 문득 내뱉듯이 말했다.
“아마 훗날 자네는 21세기의 프랑켄슈타인 박사로 기억될 걸세.”
“……그리 말씀하시니까 무슨 제가 매드 사이언티스트 같잖아요, 교수님.”
“위험해, 너무 위험해.”
니트론은 신음하듯이 내뱉었다. 그의 얼굴에는 심각함이 가득했다. 이미 박효산과 정지원도 여러 번 했던 말이라 한서진은 가볍게 끄덕였다.
“저도 그래서 공개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타르타로스를? 아니면 케르베로스를?”
“둘 다입니다. 그래서 특허도 안 냈고요. 케르베로스의 설계도는 저만 알고 있죠.”
“하지만 실체품이 유출되면 역설계로 얼마든지 본래 설계를 알아낼 수 있지 않나?”
“제가 설계한 것들은 그게 안 됩니다. 이건 제가 장담할 수 있습니다.”
한서진은 자신만만했다.
실제로 사실이기도 했다. 많은 경쟁업체들이 슈나우저를 뜯어서 성능의 비밀을 알아내려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그들이 보기에는 특별할 것 없는 설계 회로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의미를 알 수 없는 더미 회로가 군데군데, 그것도 전체에 걸쳐 있는 점이 그들을 혼란스럽게 했다.
그 무의미한 잡음이 바로 에테르 반도체의 성능을 끌어내는 진짜 설계, 에테르 언어를 새긴 명령어인데.
한서진은 문득 궁금해졌다.
‘에테르 언어와 USL은 어떤 관계일까?’
에테르 언어는 기하학적인 기호에 가깝다. 얼핏 보기에는 자연계에 마구 그려진 불규칙한 무늬로 보인다. 그에 비해 USL은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의 형태에 가깝다.
“역설계는 그렇다 치더라도, 내가 말하는 위험은 전혀 다른 의미일세.”
“무슨 말씀이신지?”
“고성능 수퍼컴퓨터는 군사적인 가치가 높네. 핵융합 시뮬레이션을 정밀하게 수행할 수 있지.”
“…….”
“그뿐만이 아닐세. 케르베로스를 장거리 미사일에 탑재하기만 해도 그 성능이 비약적으로 증가할 걸세. 군함, 잠수함, 레이더, 군사위성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응용할 수 있지. 내가 위험하다는 것은 그런 의미일세.”
“그런…… 저는 그런 건 한 번도 생각은 안 해봤네요.”
“슈나우저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네. 기술도 공개되었고, 제품을 쉽게 구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케르베로스의 존재가 알려지고, 자료가 자네한테만 있다는 게 알려지면? 자네가 위험해질 수도 있는 거야.”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한서진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러나 생각만큼 가슴이 크게 떨리지는 않았다.
“일단 케르베로스와 타르타로스를 공개하지 않기로 한 건 잘한 결정이야.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보네. 아무리 자네가 500억 불의 잭팟을 터트렸다 해도.”
“예, 알겠습니다.”
한서진은 소형 원룸 냉장고만한 타르타로스를 조금 무거운 눈길로 주시했다.
일만 마리의 케르베로스가 으르렁거리고 있는 심연. 저 괴물을 세상에 풀어놓으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게 궁금했다.
한서진은 정지원에게 솔직하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의외로 그는 크게 심각하지 않은 어조로 대답했다.
「네가 공개만 하지 않는다면, 큰일은 없을 거다. 박효산 교수님이야 입이 무거우신 분이고, 니트론 교수님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외에 또 말한 사람이 있니?」
“없죠. 하정태 선배님한테도 말 안 했습니다만.”
「앞으로는 일절 말하지 말고. 그럼 괜찮을 거야. 사실 네가 신경 쓰일까 봐 말은 안 했는데, 무슨 일이 생겨도 미 정부가 보호해줄 거야. 그러니 마음 놓고 있어.」
“미국이 저를요? 아니, 왜요?”
한서진은 미 정부란 말에 놀랐다. 너무 의외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왜 그게 튀어나와?
「왜긴, SJ인더스트리는 미국 기업이니까.」
“…….”
「넌 한국인이지만 SJ인더스트리는 미국 기업이고, 너의 사업 기반은 미국에 있잖아. 만약의 경우 미 정부는 네 편을 들어줄 거야. 크렘 회장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여러 모로 신경을 써주고 있고. 그러니 걱정할 건 없어.」
정지원은 안심하라는 듯이 말했다.
「경호만 좀 더 신경 쓰고, 케르베로스만 잘 숨기면 돼.」
“저기, 갑자기 궁금해졌는데 혹시 미국이 케르베로스의 존재도 알고 있을까요?”
정지원은 한참의 침묵 끝에 가볍게 말했다.
「나는 알면서 모른 체 한다에 한 표.」
“……갑자기 별로 안심이 안 되는데요.”
아시아 반도체 학술회는 제법 괜찮은 분위기 속에서 치러졌다.
학술회에 참석한 중국과 일본의 저명한 학자들은 스코브리아늄으로 유명한 스탠포드의 니트론 교수가 참석한 것에 놀라워하는 한편 매우 기뻐했다.
한서진은 자국에서 이름을 날리는 석학들이 앞을 다투어 그에게 대화를 청하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봤다.
스탠포드에 있을 때도 느꼈지만, 니트론 교수는 가만히 있어도 빛이 난다. 그 빛이 많은 사람들을 주변으로 끌어들인다.
‘나는 저런 빛이 있을까?’
한서진은 문득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그때 누군가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돌아보니 박효산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냐?”
“아, 그냥 니트론 교수님은 참 많은 사람들이 우러러 본다, 그런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게 부럽냐?”
“그럼 교수님은 안 부러우세요?”
“나는 500억 달러가 더 부러운데. 아마 니트론 교수님도 그런 생각하고 있을 거다.”
“…….”
그러고 보니 박효산 교수는 스탠포드에서 니트론 교수한테 사사했다고 했지.
“근데 500억 불 생기니까 어떠냐? 정말 여기 저기 기부단체에서 사람들 몰려오고, 몰랐던 사돈에 팔촌 친척들까지 죄다 전화오고 그러냐?”
“아직 그런 일은 못 겪어봤네요. 제 신상 별로 노출된 것도 아니고. 주소도 아직 예전 집으로 되어 있거든요. 학교까지 찾아오기는 기부단체도 창피했나 보죠.”
“맞다, 좀 큰 집으로 이사했다고 했지. 근데 집들이는 안 할 거냐?”
“……이제는 해야죠.”
도심 공원을 개조해 만든 대저택. 예전이라면 몰라도 이제는 보여줘도 상관없을 것 같긴 하다.
4박 5일에 걸친 학술회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니트론 교수는 개인 연구 실적을 발표하진 않았으나, 조만간 큰 거 하나를 터트릴 거라고 넌지시 암시했다. 덕분에 학술회 분위기가 뜨겁게 불붙기도 했다.
“이렇게 헤어지는군.”
“즐거웠습니다, 교수님.”
니트론은 한서진과 헤어져야 한다는 게 못내 아쉬운지 힘들게 발길을 돌렸다. 한서진은 공항까지 그를 배웅 나갔다.
‘니트론 교수님도 USL과 미스릴을 같이 연구하면 더 좋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자신 혼자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고 니트론은 지금 몹시 바쁘게 매달리는 연구 주제가 있지 않은가.
“경호원을 좀 더 늘렸으면 하는데요.”
갑작스러운 한서진의 말에 집사 최수한은 별로 놀라지 않고 차분한 반응을 보였다.
“알겠습니다. 어느 정도로 경호 수준을 높이면 될까요?”
“음…… 지금 상시 경호원이 얼마나 되죠?”
“두 분을 근접 경호하는 인력 외에 저택을 지키는 경호원은 6명입니다. 2명씩 3교대로 일하고 있지요. 대부분은 CCTV 등 무인장비를 활용합니다.”
저택은 외곽 시설이 잘 되어 있어, 인력이 거의 없어도 좀도둑을 막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일반적인 도둑은 담을 넘기도 어렵거니와, 담 안에는 훔쳐갈 만한 것도 없다. 그렇다고 저택을 직접 침투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다.
“적어도 저택을 상시 경호하는 인력이 50명 이상은 되었으면 하네요. 보안 설비도 첨단 연구소 수준으로 높였으면 하고요.”
“알겠습니다.”
저택 규모를 감안해도 너무 과한 숫자다. 이상하게 생각될 수 있는 요구였지만 최수한은 순순히 끄덕였다.
그는 돌아서다 말고 문득 물었다.
“혹시 어제 5층에 들여온 그 물건 때문입니까?”
한서진은 가만히 끄덕였다.
한서진은 타르타로스를 완성한 후 집으로 가져왔다. 사무소에 두는 건 말도 안 됐고, 학교 연구소도 조금 불안했다. 그래서 집으로 가져온 것이다.
탁 트인 정원 중심에 있는 대저택. 외부 침입자가 5층까지 침투해서 타르타로스를 훔쳐가는 건 어려울 테니까.
무엇보다 사적인 공간이라는 점이 크게 주요했다. 보물은 내 집에 둬야 안심이 된다.
그는 티타늄 프레임으로 벽과 일체화된 금고를 만들고, 그 안에 타르타로스를 두었다. 몇 중으로 잠금장치를 달아 자신 외에는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저택 보안 수준도 높여주시고, 저와 지혜 근접 경호도 좀 높여주세요. 부탁합니다.”
“예, 알겠습니다.”
크렘 회장이 붙여준 사람이라 그런지 최수한은 일처리가 역시 재빨랐다. 경호 인력은 그날부로 즉시 늘렸다. 보안설비도 빠른 시일 내에 보강할 것이라 했다.
한지혜가 찾아와서 투덜거렸다.
“오빠, 무슨 일 있어? 갑자기 왜 경호원을 여섯 명으로 늘린 거야?”
“만약 네가 납치되면 내가 몸값으로 얼마를 내야 한다고 생각하냐?”
“얼마나 내줄 건데?”
“그거 내주기 싫어서 경호원 늘린 거니까 그냥 입 다물고 얌전히 다녀. 괜히 귀찮다고 경호원 따돌리거나 하지 말고. 어차피 밀착 경호도 아니잖아.”
“알았어.”
한지혜는 툴툴거렸지만, 500억 달러를 생각하면 오빠의 조치가 충분히 납득될 만한 것이었다. 물론 한서진은 500억 달러보다는 타르타로스 때문에 경호를 더 강화한 것도 있지만.
‘근데 진짜 미국에서 케르베로스를 알고 있을까?’
정지원은 ‘알고 있다’에 한 표를 건다고 했다. 그럼 왜 아무 조짐도 없는 건지, 한서진은 조금 이상했다.
영화에서 보면 막 접근하고 그러던데, 역시 현실은 영화와는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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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지금도 충분히 (미합중국을 위해) 잘하고 계셔서 굳이 안 나서는 건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