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6 미스릴 반도체 : 케르베로스 =========================================================================
“흐흐, 내가 온 줄 모르고 있을 테니 깜짝 놀라겠지?”
한국행을 결심한 니트론 교수는 사전에 통보하지 않고 몰래 찾아왔다. 그가 흠모하는 ‘한 교수’를 깜짝 놀라게 해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학교 행정실을 찾아간 것부터 제대로 꼬이고 말았다.
“여기 한서진 교수라고 있지 않소?”
“네? 한서진 교수님이요? 교수 중에 그런 분은 없는데…… 어, 잠시만요? 혹시 스탠포드의 니트론 교수님?”
학생이 바로 알아보자 니트론은 당황해서 부정했다.
“어, 사람 잘못 보셨소. 나 그런 사람 아니오.”
“맞는데요? 교수님, 저번 여름방학에 제가 스탠포드에서 교수님하고 같이 사진도 찍었는데, 제가 어떻게 몰라보나요! 꺅! 니트론 교수님이다!”
좋아서 어쩔 줄 모르며 방방 뛰는 여대생 앞에서, 니트론은 그렇게 시작부터 정체를 들켜버렸다.
소식을 듣고 이공계 교수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찾아왔다. 스탠포드의 간판이자 살아있는 전설을 보기 위해서.
“아니, 니트론 교수님 아니십니까?”
“니트론 교수님! 영광입니다!”
“논문은 전부 읽어봤습니다! 제5의 힘의 존재에 관한 가설이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팬입니다, 교수님!”
스탠포드의 간판이나 다름없는 스타 교수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스코브리아늄을 통해 자연계 제5의 힘의 존재까지 주장했다. 과학계에 몸을 담은 이 치고,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혹시 이번에 우리 학교에서 열리는 아시아 반도체 학술회에 참가하러 오신 겁니까?”
총장까지 찾아와서 눈을 반짝이며 묻는데, 니트론 교수는 할 말이 없었다. 왠지 아니라고 했다가는 저 선망에 찬 눈동자들이 죄다 실망으로 변할 것 같았다.
“그, 그렇습니다.”
“아아! 역시!”
“이번 학술회가 더욱 빛나겠군요. 스탠포드의 니트론 교수님까지 참석한 학술회라니!”
교수 한 명이 참석했을 뿐인데, 학술회의 격이 두어 단계쯤은 상승하는 셈이다. 교수들은 기뻐서 부랴부랴 코앞에 당면한 학술회 일정을 조절한다고 난리였다.
분위기가 어느 정도 진정될 무렵, 비로소 니트론은 이곳에 온 목적을 꺼낼 수 있었다.
“그런데 이 학교에 한서진 교수라고 있지 않소?”
“한서진…… 그런 교수는 없는데.”
“누구 한서진 교수 아는 사람?”
“한서진이라면…… 혹시 얼마 전에 대박 터트린 반도체공학부 그 친구 말하시는 거 아닙니까?”
“아, 그 친구는 알지.”
500억 달러의 대박을 터트리고 일약 대학의 스타가 된 몸인데 모를 리가 있나. 오죽하면 자기 담당교수님 이름은 몰라도 한서진은 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니트론은 반색했다.
“아, 500억 달러? 혹시 5nm공정 기술을 ADSC에 팔았던 그 일을 말하는 거요?”
“그렇습니다. 역시 니트론 교수님도 그 학생을 아시는군요.”
니트론은 황당한 얼굴로 되물었다.
“학생이라고요? 교수가 아니라?”
“네, 학생입니다. 이제 1학년이죠.”
니트론은 혀를 내두르며 놀라워했다.
“허어, 대단하군. 겨우 대학원 1학년생이 그렇게 출중한 지식을 쌓았을 줄이야. 이거 내 젊은 시절이 다 창피해지는군.”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슈나우저의 개발자가 교수도 아닌 대학원생이라니.
그렇게 또 다른 착각에 빠져 있는데, 어느 교수가 조심스럽게 나섰다.
“저어, 니트론 교수님. 한서진 학생은 대학원생이 아니라 학부생입니다.”
“뭐라고요?”
“올해 입학한 1학년 학부생이란 말입니다. 기사에서도 나왔을 건데요, 1학년 학생이 500억 불의 청년 재벌이 됐다고.”
니트론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입을 쩍 벌렸다.
“그게 정말이오?”
“교수님!”
한서진은 반가운 얼굴로 다가갔다. 그를 보는 니트론 교수의 표정은 다소 복잡했다. 물론 긍정적인 면이 더 강했다.
“한 교수…… 아니, 한 군이라고 해야 하나?”
“네? 한 교수라니요?”
한서진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반문하다가, 퍼뜩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전에 통화할 때 자신을 한 교수라고 부른 적이 있었지. 그때 미처 짚어주지 못했었다.
“전 교수가 아닙니다. 아직 배우는 학생입니다만.”
“자네 같은 인재가 아직도 학생이라니, 이 학교는 대체 괴물들의 소굴인가?”
“그, 그렇진 않습니다. 너무 저를 높이 보시는 겁니다.”
“슈나우저와 5nm공정기술의 개발자 말고, 그럼 대체 누구를 높게 보란 말인가?”
“…….”
그 말에는 한서진도 할 말이 없었다. 그는 머쓱해져서 괜히 시선을 피했다.
니트론은 아직도 그저 놀랍다는 표정이었다.
“대단하군, 정말 대단해. 1학년의 몸으로 그런 엄청난 기술들을 연이어 개발하다니.”
“과찬이십니다. 그런데 아시아 반도체 학술회에 참석하러 오셨다고요?”
니트론은 다소 난처한 듯이 말을 흐렸다.
“음…… 실은 그런 게 있는 줄도 모르고 왔네만.”
“예?”
“난 한 교수, 아니 한 군에게 말해줄 게 있어서 찾아온 거라네. 반도체 학술회가 있다는 건 오늘 와서 알았어.”
“그럼 교수님이 학술회에 참석하신다는 건…….”
“여기 학교 측에서 오해한 거지만 어쩔 수 없지. 이리 된 이상 잠깐 얼굴이라도 비추는 수밖에.”
“잘 생각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가볍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한 한서진은 문득 그가 스치듯이 한 말에 주목했다.
“그런데 제게 말해줄 게 있다니요?”
“혹시 듣는 귀가 있을까 무섭군. 다른 곳으로 가세나.”
니트론은 갑자기 주위를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여간 신중한 태도가 아니었다.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이기에? 한서진도 호기심이 치솟았다.
니트론은 한서진을 데리고 사방이 훤히 뚫린 공터로 갔다. 이 정도면 누가 엿듣고 싶어도 불가능할 것이다. 초소형 드론으로 감청을 하지 않는 한은.
“실은 내가 연구에서 성과가 있었다네. 전부 자네가 만든 Z7 덕분이야. Z7 덕에 연구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었지.”
“어떤 성과입니까?”
한서진은 기대감이 한껏 들었다. 얼마나 대단한 성과이기에 스탠포드 간판 교수가 한국까지 직접 찾아와서 놀래주려 했을까?
“제5의 힘의 규명에 한 걸음 더 다가갔네. 사실 나한테는 이게 더 중요한 일이지만, 자네에게는 실감이 크게 나지 않을 거야. 아직 실체화된 실적이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다만 그 연구 과정에서 중요한 부수 효과를 얻었네. 자네한테는 아주 흥미로울 거야.”
“그게 뭔가요?”
한서진은 기대감이 더욱 고조되었다. 대체 어떤 것이기에 이렇게 서두가 긴 것일까?
니트론은 에헴 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 부수 효과란 바로, 스코브리아늄 반도체 대량 양산의 실마리를 찾았다는 거지.”
“…….”
“제5의 힘의 작용을 이용하면 스코브리아늄을 무리 없이 반도체 부픔으로 가공할 수 있을 거야. 이미 시제품도 나왔…… 근데 자네 얼굴이 왜 그런가? 별로 안 기쁜 거 같은데.”
한서진은 맥이 빠진 한편, 매우 난감했다.
겨우 그거였어요, 라는 소감이 가슴을 맴돌았지만 멀리 미국에서 날아온 교수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는 어떡하면 니트론이 상심하지 않을까 고민했다.
“저어, 교수님. 실은 얼마 전에 스코브리아늄 반도체를 완성했습니다.”
“뭐, 뭐야?”
“성능 테스트도 마쳤고 기대한 것 이상의 성능도 냈습니다. 기존 공정설비로도 양산이 가능하고요.”
“허어…….”
니트론은 매우 허탈한 표정이었다. 딴에는 정말 기뻐할 거라 여기고 미국에서 날아왔는데, 상대가 이미 성공했다니.
그러나 니트론은 곧 상심을 떨쳤다.
“내 연구 목적은 애초에 스코브리아늄 반도체 양산에 있지 않았으니 크게 상관은 없네. 만약 그랬으면 맥이 빠져서 통곡했을지도 모르지. 어디까지나 이건 제5의 힘을 검증하다가 발견한 부산물이니까.”
“예, 그렇지요.”
“그나저나 양산에 성공했다니 정말 대단하군. 어떻게 가능했는지 말해줄 수 있겠나?”
“죄송합니다만, 그건 기밀이라서요. 아직 특허도 내지 않았습니다.”
“그럼 시제품이라도 보여줄 수 있겠나?”
한서진은 잠시 생각한 뒤에 끄덕였다. 다른 이는 몰라도 니트론 교수에게는 숨길 이유가 없었다.
“안내하겠습니다.”
한서진은 반도체 연구소로 향했다. 보안 장치를 통과해서 연구실 가장 깊숙한 곳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오로지 박효산 교수만 출입 가능한 공간이 있었는데, 최근에는 한서진도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연구소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호오.”
니트론 교수는 출입통제 구역 중심에 놓인 조그만 금속 프레임 구조물을 보고 작게 감탄했다.
“벌써 컴퓨터 제조에 들어갔나? 정말 빠르군.”
“내부를 보시지요.”
한서진은 프레임의 한쪽 케이스를 열어서 내부를 보여 주었다. 1미터 높이의 금속 프레임 내부에는 카드만한 반도체 칩이 수도 없이 빽빽하게 꽂힌 아키텍처가 들어 있었다.
대강 내부를 살핀 니트론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내가 컴퓨터 전공은 아니지만, 이건 참 대단해 보이는군. 그나저나 벌써 메인프레임 제작에 들어가다니, 아니 이건 소형이니까 워크스테이션을 구축하고 있나?”
“그게, 실은 워크스테이션이 아니고요.”
“그럼 메인프레임? 그런 것치곤 너무 작은데. 소형화가 한결 쉬워졌나 보군.”
“이래 보여도 수퍼컴퓨터 구축 중입니다. 하드웨어 상으로는 Z7을 넘어설 겁니다.”
“뭐?”
니트론은 황당한 듯이 눈을 크게 떴다.
가정용 대형냉장고 만한, 슈나우저를 이용해 만든 ‘소형’ 수퍼컴퓨터 Z7은 이미 세계 최고의 수퍼컴퓨터로 각광받고 있다. 앞으로 5년 안에는 Z7을 넘어설 수퍼컴퓨터가 나오지 못할 거라는 말까지 나돌 정도다.
그런데 Z7을 공개한 지 몇 달이나 됐다고, 이런 걸 또 만들어?
한서진은 조심스럽게 케르베로스를 보여주었다.
“이게 새로 개발한 스코브리아늄 반도체입니다. 일만 개 정도가 들어가는데, 보다시피 카드만한 크기라 가능합니다.”
“이건 슈나우저 같은 TPU인가?”
“아닙니다. 컴퓨터입니다.”
“……뭐라고?”
“카드형 컴퓨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CPU와 GPU, 램과 스토리지, 그리고 기본 아키텍처까지 다 욱여넣었습니다. 그냥 얘 자체가 하나의 일체형 컴퓨터 본체라 보시면 됩니다.”
“…….”
니트론은 안색이 창백하게 굳었다. 이미 더 놀랄 힘도 없는 듯이 보였다.
“대충 성능은 슈나우저, 코카 스패니얼을 합친 것보다 서너 배 정도쯤 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저도 한계치는 아직 확인을 못 해봐서 그 정도로만 일단 말씀드립니다.”
“서너 배 정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잖나! 그만한 기능을 어떻게 카드 한 장에 전부 담았단 말인가!”
“되더라고요. 스코브리아늄이잖아요.”
“…….”
니트론은 할 말을 잃은 채 우두커니 굳어 있었다. 그의 눈은 케르베로스가 빽빽하게 꽂힌 컴퓨터 내부를 멍하니 주시했다.
프레임 내부에 그늘진 명암이 마치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혼돈의 심연처럼 보였다.
한참 후 그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이 반도체…… 이름은 지었나?”
“네, 케르베로스라고 지었습니다.”
“이 수퍼컴퓨터 이름은?”
“아뇨, 아직.”
니트론은 진지한 얼굴로 한서진의 양 어깨를 잡았다.
“그럼 내가 이 놈의 이름을 지어줘도 괜찮겠나?”
“예? 아, 물론입니다. 교수님이 지어주신다면 저야 영광이죠. 좋은 이름이라도 생각나셨나요?”
“타르타로스, 어떤가?”
타르타로스, 그리스 신화에서 지하에 있다고 알려진 명계.
일만 마리의 케르베로스를 품은 수퍼컴퓨터에게 이보다 더 어울릴 이름은 없을 것이다.
============================ 작품 후기 ============================
케르베로스 일만 마리로 구축한 개 목장이라니.
으악 상상하기도 싫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