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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125화 (125/609)

00125  미스릴 반도체 : 케르베로스  =========================================================================

이용무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 혹시 잘못 들었나? 영어를 한 지 오래 돼서 히어링이 약해졌나?

“어때요? 그게 낫지 않겠습니까?”

자신만만한 정지원의 표정, 그리고 어처구니없어 하는 황기백 실장의 얼굴. 둘을 보니 아무래도 영어 실력이 녹슨 것은 아닌 모양이다.

속으로 분노를 삭이며, 이용무는 차갑게 대답했다.

“재고의 가치가 없는 제안입니다. 반도체 사업은 우리 회사의 아이덴티티입니다. 그것을 매각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저런, 아쉽군요. 지금 파시면 그나마 제값을 받으실 수 있을 텐데.”

“그리 유쾌한 제안은 아니군요, 정 이사님.”

“저 역시 그리 유익한 제안은 아니었습니다, 이 부회장님.”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태연히 받아친다. 이용무는 차가운 눈빛으로 주시했다.

계속 H반도체에 있었으면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났을 것이다. 그런 놈이 SJ인더스트리를 등에 업었다고 감히 자신과 맞먹으려 하고 있다는 것에, 이용무는 참을 수 없는 불쾌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런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협상에서 감정을 드러내는 것만큼 어리석은 건 없으니까.

“저희에게 위탁생산을 맡기신다면 최고의 조건, 최고의 품질로 해드릴 수 있습니다만.”

“생산 속도가 조금 부족한 것은 맞지만, 위탁생산을 맡겨야 할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정지원은 칼같이 잘랐다. 더 이상 파고들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이다.

이용무는 보이지 않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모멸감이 밀려왔다. 아버지 외 모든 이의 머리 위에 군림하는 재벌 2세로서 이런 치욕을 언제 또 느껴봤겠는가.

“부회장님.”

황 실장이 조심스럽게 만류했다. 순간 이용무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계약, 반드시 잡아야 해.’

AP에 이어 5nm공정 기술까진 그나마 괜찮았다. 그러나 메모리 시장까지 빼앗긴다는 건, 전진기지를 모두 잃은 뒤 본진마저 내주는 꼴이다.

진성전자 주가는 슈나우저 출시 전에 비하면 형편없는 수준까지 떨어졌지만, 아직 반등의 여지는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국내 시장에서는 황금주로 통했다.

시장과 투자자들은 그래도 믿고 있는 것이다. 세계 최고의 생산 능력과, SJ인더스트리의 고질적인 생산성 저하 문제. 진성전자는 그 사이에서 분명 돌파구를 찾을 것이라고.

만약 이 계약을 따내지 못하면 SJ인더스트리는 이익을 조금 덜 취하는 것으로 그치지만, 반면 진성전자는 회사가 공중 분해될 수도 있었다.

“제조 마진율을 0%로 해드리겠습니다.”

정지원의 입가에서 조소가 지워졌다. 뜻밖의 제안에 놀란 건지, 아니면 다른 의도에서인지는 드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황 실장이 기겁을 해서 바라봤다.

“원가로 위탁생산을 해주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단 1원의 마진도 남기지 않겠습니다.”

1원의 마진도 없는 원가 생산.

얼핏 보기에 진성전자로서는 손해도 이익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큰 무형의 이익을 취할 수 있다. 이익은 내지 못하지만, 꾸준히 공장을 돌릴 수 있고 시장의 신뢰를 유지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이만하면 귀사에도 이익이 아닙니까? 추가 비용 없이 원가로 생산할 수 있으니까요.”

정지원은 천천히 팔짱을 끼었다. 이용무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을 수가 없었다. 완벽한 표정 관리였다.

“현재 H반도체에 발주한 슈나우저 1차 물량이 1억 개입니다. 납품 완료에는 3개월 정도 걸린다고 하더군요.”

“우리 진성전자는 3개월이면 2억 5,000만 개 이상을 찍어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H반도체에 제조비용으로 개당 50달러를 지불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H반도체가 실제 제조에 지출하는 원가는 49.5달러라고 하더군요.”

H반도체가 남겨 먹는 건 개당 50센트. 겨우 500원 남짓한 돈으로, 숫자만 보면 매우 적어 보인다.

그러나 1분기 이익으로 치면 500억 원, 연간 이익으로 치면 2,000억 원이다. H반도체 규모에 비하면 많이 부족하지만, 위탁생산 이익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매우 크다.

“H반도체는 우리보다 생산 능력이 떨어지죠. 우리라면 개당 제조원가를 48달러에 맞출 수 있습니다.”

“그럼 46달러에 해줄 수 있습니까?”

자신만만하던 이용무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깨졌다. 그는 또 한 번 자신이 숫자를 잘못 들었나 싶었다.

“실례합니다만, 46달러라고 했습니까?”

“예, 46달러에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만.”

“최저 원가가 48달러입니다. 그 비용에 제조해도 우리는 마진이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왜 없습니까. 주가 하락을 저지하고 시장의 신뢰를 지킬 수 있을 텐데요.”

“…….”

정지원은 태연히 대꾸했다. 이용무는 보이지 않게 이를 악물었다.

진정한 의미에서 이익이 없는 것은 아니다. 위탁생산에서 남겨먹을 수는 없지만, 시장의 신뢰를 되찾을 수 있다는 무형적 이익이 남는다. 또한 생산공장을 지속적으로 돌릴 수 있다는 점도 큰 이익이다.

결정을 해야 했다.

‘오히려 2달러씩 줘가면서 생산까지 해줘야 하다니.’

연간 최대생산량은 약 10억 개. 연간 2조 원의 손실을 감당하면서 위탁생산을 맡아야 할까?

이용무는 결심을 굳혔다.

“좋습니다.”

정지원은 낯빛이 전혀 바뀌지 않았다. 마치 그럴 줄 알았다고 예견한 듯한 표정이다. 이용무는 그런 여유로움이 속으로 매우 거슬렸다.

“찍어낼수록 손해이실 텐데 감당하시겠다는 거군요. 좋습니다. 저도 그렇다면 계약하겠습니다. 지금 바로 계약서를 가져올까요?”

정지원은 어딘가로 전화를 했다. 잠시 후 늘씬한 백인 미녀가 영어로 된 계약서를 가져왔다. 이용무는 그제야 조금 놀랐다.

“지금 바로 말입니까?”

“귀사야말로 급한 게 아니었습니까?”

“실례, 정 이사님에게 그렇게 큰 권한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작은 오해를 하신 것 같은데.”

정지원은 피식 조소했다.

“저는 회사 오너의 대리인입니다. 영업에 관해서만큼은 제한 없이 모든 권한을 행사할 수 있지요.”

“…….”

문득 이용무는 SJ인더스트리의 설립 자본이 한국에서 나왔다는 말이 생각났다. 정지원은 알고 있던 것보다 사주로부터 대단한 신뢰를 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비로소 저 자신감이 이해가 갔다.

“H반도체와 맺은 계약서 초본에 숫자만 살짝 고친 형태입니다. 여기서 서명하셔도 되고, 가져가셔서 검토를 하셔도 됩니다. 유출은 하지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최종 검토와 조율이 필요하니,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아마 무리는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든지 그러시지요.”

황기백이 계약서 초안을 소중한 듯이 가방에 챙겼다.

찍어낼수록 개당 2달러씩 손해를 보는 계약. 그러나 임원들은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는 손해였다. 회생까지 시간을 벌기 위한 비용으로 생각하면 그만이다.

또한 위탁생산을 따냈다는 사실이 주가 폭락도 어느 정도 저지할 수 있다.

적어도 회사가 공중분해 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그룹의 모든 법률 전문가들이 달려들었고, 하루 밤을 꼬박 걸려 계약서를 최종 검토했다.

전혀 무리가 없는, 합리적인 내용의 계약이었다. 불이행을 대비한 위약금이 다소 강했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딱 하나, 찍어낼 때마다 2달러씩 손해를 보는 구조만 제외하면, 특별히 손해 볼 게 없는 계약이었다.

다음 날, 이용무는 SJ인더스트리를 찾았고 무사히 계약을 체결했다. 특별히 기자를 불러 대대적으로 홍보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이용무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서로에게 유익한 계약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계약을 마치고, 악수를 나눈 뒤 이용무는 곧바로 SJ인더스트리를 나섰다. 정문을 벗어나자마자 그의 표정이 험악하게 변했다.

“황 실장님.”

“예, 부회장님. 말씀하십시오.”

이용무가 속으로 얼마나 치욕스러워하고 있을지 이해하는 황기백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SJ인더스트리의 실제 오너가 한국에 있다는 소문, 사실입니까?”

“……초기 설립 자금이 한국에서 나온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소유주가 정말 한국인인지, 현재도 한국에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만.”

SJ인더스트리의 지분 86.5%를 보유한 에스코너는 북유럽 L국의 국적을 갖고 있다. 제2의 스위스라 불리는 L국은 외국 자본 유치를 위해 세율에 관대하고 보안에 엄격한 정책을 펼치고 있어, 조세 회피처로서 국제적인 악명이 높았다.

OECD 등에서 항의도 하고, 제재도 걸어보았지만 L국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한 번 찾아보세요. 누가 에스코너의 소유주인지.”

“……어렵습니다. L국의 투자자 보호 정책이 워낙에 엄격한지라.”

“그래도 하세요.”

이용무는 서늘한 눈으로 황기백을 주시했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피해만 보고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집 지키는 개와 말이 안 통한다면, 그 주인을 찾아 이야기를 나눌 수밖에.

한서진은 포르쉐 대신 레인지로버를 끌고 학교로 갔다. 학부 건물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리는데, 마침 지나가던 학생회장 조현석이 그를 발견했다.

“어, 형님? 오셨습니까.”

“응. 너도 와 있었구나.”

“근데 차 바꾸셨습니까?”

“아, 이거? 동생 차야. 내 차는 동생이 당분간 탄대.”

“와, 동생분도 좋은 차 타고 다니시는군요. 역시 금수저.”

“무슨 소리야. 포르쉐는 원래 상여금으로 받은 거고, 이 차는 내가 사준 거야.”

“그게 금수저지 뭡니까. 아무튼 역시 500억 불의 남자답습니다. 검색해 봐야지.”

가벼운 마음으로 차 모델명을 검색한 조현석은 멍한 얼굴이 돼서 돌아봤다.

“와, 이 차 기본 2억부터 시작하는 모델이네요? 역시 대단합니다. 혹시 대박 터트리기 전에 사주신 건가요? 그럼 진짜 금수저 인증인데.”

“그런 거 아냐. 나 스무 살에 대학 못 간 것도 집에 돈이 없어서 그랬어. 쌀도 동사무소에서 가끔 타먹었다고.”

“……아, 죄송합니다. 그랬었군요.”

“괜찮아. 어차피 지난 일이니까.”

“그럼요. 지금 이렇게 잘 나가시는데, 어린 시절 조금 가난한 게 뭐가 대수입니까?”

조현석은 얼굴을 풀고 얼른 맞장구를 쳤다.

500억 불의 자산가. 젊은 나이에 천문학적인 성공을 거두었으니, 어린 시절의 가난은 이제 추억으로 미화될 뿐이다.

강의실에 들러 레포트를 제출한 뒤, 한서진은 곧바로 차를 타고 반도체 연구소로 향했다.

연구실에 들어서자 최태규 등 연구생들이 반색을 하며 맞이했다. 안홍철은 장난스럽게 굽실거리기까지 했다.

“여, 500억 불의 남자. 오셨는가.”

“안 선배, 장난치지 마세요.”

“장난이라니, 500억 불 앞에서 내가 어떻게 장난을 칠 수 있겠어.”

안홍철은 한서진 앞에서 기도를 올리는 것처럼 합장을 했다.

500억 달러 대박을 터트린 이후, 연구실에 올 때마다 심심찮게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연구생들은 그전보다 한층 더 한서진을 조심스럽게 대했다.

마치 후배라기보다는 나이 어린 상사를 대하듯이 말투도 부드러워졌다. 안홍철만큼은 여전히 장난기가 넘쳤지만.

“서진이 너도 이따 저녁에 세미나 갈 거지?”

“세미나요? 오늘 그런 게 있었어요?”

한서진이 처음 듣는다는 듯이 반문하자 최태규는 의외라는 듯이 놀랐다.

“너, 몰랐어? 오늘 저녁에 아시아 반도체 학술 세미나 있잖아.”

“아, 몰랐어요. 그래서 교수님이 안 보이셨구나.”

“그래. 아, 스탠포드의 니트론 교수님도 온대. 난 그래서 너도 당연히 아는 줄 알았는데.”

“니트론 교수님이? 그게 정말이에요?”

한서진은 귀가 번쩍 뜨였다.

============================ 작품 후기 ============================

저는 비축분이 없습니다. 언제나 라이브로 1합니다.

그래서 정시 연재를 포기한 겁니다ㅠ

녹색동네 야만의 XX 마감이 이번주 금요일에 영원히 끝납니다. 완결이거든요.

그때가 되면 저도 좀 체력을 추스를 수 있을지..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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