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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124화 (124/609)

00124  그룹의 선택  =========================================================================

“말도 안 돼.”

정밀 성능 테스트를 마친 박효산은 처절하게 신음했다. 개별 부품의 성능, 그리고 종합 성능을 테스트한 결과가 나왔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수치였다.

CPU의 작동 클럭이 무려 10GHz를 넘어선다. 다중연산 수행 능력과 그래픽 성능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면에서 슈나우저를 넘어섰다. 1시간 넘게 최대 과부하의 70% 수준으로 가동시키고 있는데도 온도가 30도를 넘지 않는다.

여기에 256GB의 메모리 성능, 그리고 2TB의 스토리지 공간. 데이터 전송 속도도 초당 10GB까지 나왔다.

신용카드만한 컴퓨터에 이 모든 성능이 구현되었다니. 박효산은 지금 세상이 자신에게 사기를 치는 게 아닌가 싶었다.

한서진 역시 놀랐다.

“어…… 이렇게 좋은 놈이 뽑힐 줄이야.”

보는 사람이 맥이 빠지게 하는 반응이었다. 박효산은 그저 어이가 없었다.

“스코브리아늄의 물리적 한계치가 높은 거냐, 아니면 네가 설계한 도면이 대단한 거냐.”

그는 망연자실해서 중얼거렸다.

“아니, 둘 다인가.”

그저 놀랍기만 했다.

아직 해결책을 찾지 못한 스코브리아늄 반도체 양산 제조가 설계 도면으로 해결된 것도 놀라운데, 그 결과물은 상상을 아득히 초월하지 않는가.

지금 시중을 휩쓸고 있는 슈나우저와 코카 스패니얼로 만들어진 컴퓨터보다 훨씬 뛰어난 성능이, 겨우 카드만한 크기에 구현된 것이다.

박효산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너, 암살이나 납치당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에이, 설마요. 제가 무슨 대량학살무기를 만든 것도 아닌데 무슨…….”

“대량학살무기보다 더 흉악한 걸 만들었지. 이걸 내놓는 순간 SJ인더스트리는 전 세계 공공의 적이다.”

“아니, 무슨 좀 좋은 컴퓨터 하나 개발했다고 전 세계 공공의 적이 됩니까?”

“이게 좀 좋은 컴퓨터 정도가 아니지 않냐?”

좀 좋은 컴퓨터란다. 박효산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뒷목을 잡을 뻔했다.

“컴퓨터 제조업에 발을 걸친 업체가 얼마나 많은지 아냐? 슈나우저와 코카 스패니얼까지는 사실 그럴 수 있어. 근데 이놈은? 출시하자마자 컴퓨터 제조업 종사자들은 다 굶어죽을 걸? SJ인더스트리만 빼고 말이다.”

“…….”

“당장 메인보드와 파워 서플라이만 봐도 들어가는 부품이 얼마나 다양한데, 그거 만드는 애들은 다 사업 접어야지. 이 정도 크기면 케이스도 당연히 필요 없을 테고, 전선 케이블도 크게 필요하지 않을 테고, 또 쿨러 같은 것도 일절 필요 없고.”

컴퓨터를 카드 만하게 집적시킨다는 것은 그만큼 제조비용을 획기적으로 절감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제조에 종사하는 업체들의 생산성 저하를 야기한다는 단점도 있었다.

적당한 성능이면 모르겠는데, 이놈 하나로 모든 PC를 대체하고도 남지 않는가.

“최신형 게임을 풀옵으로 10개 이상도 거뜬히 돌리고도 남는 성능인데, 소비자들이 당연히 이놈만 찾지. 컴퓨터 시장 망하는 건 필연이고, 넌 어마어마한 원성을 들을 거다.”

“…….”

“그리고 ADSC 문제도 있고. 500억 불이나 주고 산 특허 라이센스가 하루아침에 쓰레기가 됐잖아.”

“어차피 이거 만드는데도 5nm공정 기술을 쓰는 터라, ADSC가 가져갈 몫이 있는데요.”

“그래도 ADSC 입장에서는 이익이 터무니없이 줄어들겠지. 제조 과정이 신용카드처럼 단순해져 버렸으니. 500억 불이나 썼는데 참 퍽이나 좋아하겠다.”

“그, 그래도 미국은 제 편이지 않을까요?”

“글쎄, 미국 내에서도 컴퓨터나 반도체 업체들 로비가 장난 아닐 텐데, 워싱턴에서 얼마나 좋아할지는 나도 장담을 못하겠다. 뭐, SJ인더스트리는 일단 미국 기업이니까 끝까지 막나가지는 않을 테지만.”

박효산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아니, 반박이 불가능한 주장이었다.

새로 개발한 카드형 컴퓨터는 그 성능이 너무 월등하다. 전 세계 컴퓨터 시장이 망하는 건 필연이고, SJ인더스트리가 모든 것을 독점할 것이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그런 현상을 반기지 않을 것이다. 단순히 경쟁자가 도태되는 게 아니라, 컴퓨터 시장이라는 생태계를 박살내버리는 것이니까.

그 생태계에 서식하는 이들이 과연 눈물을 머금고 포기할까? 아니면 극렬하게 저항할까?

또 500억 불을 주고 5nm공정의 독점 라이센스를 산 아부다비 기업, ADSC는?

“……일단 회사와 의논해 보겠습니다. 설계도는 챙겨 갈게요.”

“유출 안 되게 조심해라.”

“보안 관리는 철저히 하고 있으니 안심하세요.”

한서진은 설계도가 담긴 노트북을 챙겨 연구실을 나섰다. 레인지로버에 탑승하고, 정지원한테 전화를 걸었다. 일이 바쁜지 정지원은 한참이나 신호가 가고 나서야 전화를 받았다.

「어, 무슨 일이야?」

정지원의 목소리는 활달했다. 이쪽이 저절로 기분이 좋아질 만큼.

“좋은 일이 있으신가 봐요?”

「구글이 데이터센터를 차세대 서버로 전면 교체하려고 하잖아? 덕분에 슈나우저와 코카 스패니얼을 일단 각각 10억 개씩 주문 받았다. 약 3,000억 달러짜리 계약이다.」

“…….”

큰 계약했다고 되게 좋아하고 있었구나. 이럴 때는 무슨 표정을 지으면 좋지?

「역시 구글이 통이 커. 2,000억을 그 자리에서 계약 대금으로 먼저 지급하더라고. 대신 자기들 물량을 최대한 맞춰 달라고. 우리가 공장 확보에 허덕이는 걸 배려해준 거지.」

3,000억 달러짜리 계약이니 마진을 15%로만 잡아도 450억의 이익을 취득할 수 있다. 한서진이 번 500억 달러에 버금가는 돈을 계약 한 방으로 확보한 것이다.

정지원으로서는 신이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구글뿐만이 아니라 데이터센터를 가진 업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차세대 서버를 달라고 아우성이다. 뿐만 아니라 서버 제조업체들은 자기들한테 계약을 맡겨달라며 손을 벌리고 있고. 무슨 좀비에 둘러싸인 기분이야. 하하.」

“저어, 팀장님. 사실은 제가 오늘 막 새 제품 하나를 개발했어요.”

「오, 벌써? 이번엔 어떤 건데? 설마 정말 차세대 배터리 같은 걸 만든 건 아니지?」

CPU와 GPU를 합친 슈나우저. 메모리와 스토리지를 묶어놓은 코카 스패니얼.

보드야 대만 제조업체에서 이미 개발을 완료했고, 이제 필요한 것은 노트북의 사용 시간을 늘려줄 고성능 배터리였다.

“자세한 스펙 설명은 메일로 보내놨으니, 지금 확인하시면서 이야기하시겠어요?”

「그럴게.」

정지원이 즐거운 듯이 대답하고, 잠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메일을 확인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정지원의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저어, 팀장님?”

「……이거 뭐냐.」

“……보신 바와 같이 일체형 카드 컴퓨터입니다.”

「농담 삼아 노트북 배터리나 만들어 보라고 했더니, 아예 전기를 거의 안 먹는 노트북을 만들었어?」

한서진은 잠시 생각했다. 그게 그렇게 되나?

무거운 한숨이 들려온다. 정지원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이건 특허 내지 말자.」

“왜요?”

「내가 말은 안 했는데, 우리 SJ인더스트리는 지금도 사방에 적이 많아. 우리 때문에 밥그릇 뺏긴 업체들이 한두 군데가 아니거든.」

그건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당장 진성전자와 H반도체만 봐도 그 피해자가 아닌가.

「윈텔과 IBM이 로비를 장난 아니게 걸고 있어. 우리 때문에 손해 본 미국 업체들도 여기에 가세하고 있다. 물론 우리 덕분에 이익을 본 업체들도 있어서 균형이 맞춰지고 있지만.」

“…….”

「100명 중에 50명이 적이면 그런대로 할 만한데, 그 100명 전원이 적이 되면 골치 아프다. 안슐 왕자도 이미 크게 한 발 담그고 있잖아. 이미 우리는 초거대 공룡 기업인데, 너무 급하게 나가는 건 좋지 않아.」

“그럼…….”

「이건 봉인해뒀다가 차후에 출시하자. 지금은 때가 아니야. ADSC가 최소한 500억 달러는 벌게 해줘야지.」

“알겠습니다. 그게 맞는 것 같네요.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한서진은 선선히 수긍했다. 박효산과 정지원은 비슷한 이유를 들어 우려를 나타냈고, 한서진도 납득이 갔다.

“그럼 특허 공개는 하지 않고 제가 따로 사적인 용도로만 제조해서 사용할게요.”

「유출 안 되게 조심해라.」

“걱정 마세요. 보안 관리는 철저하니까요. 그리고 만약 유출되면 더 좋은 거 만들죠, 뭐.”

「…….」

그 대답에는 정지원도 할 말을 잃었다. 그게 허튼소리가 아니라는 점이 더 무시무시했지만.

「근데 이름은 정했냐?」

“네. 정했습니다.”

한서진은 씩 웃었다. 이미 이 녀석을 구상할 때부터 머릿속에 떠오른 이름이 있었다.

“케르베로스입니다.”

“과연 도도하기 그지없어.”

이용무 부회장은 세련된 SJ인더스트리 사옥을 올려다보며 차갑게 조소했다. 아무리 SJ인더스트리가 미국 기업이라지만, 진성전자의 후계자가 친히 연락을 하고 날아왔는데도 시큰둥한 반응이라니.

“SJ인더스트리 실세가 한국인이라고 그랬던가요?”

“예, 정지원 이사라고, 전에 H반도체에서 일하던 친구라고 들었습니다. H반도체에서는 팀장급이었다고 합니다.”

“독립해서 모회사의 뒤통수를 친 거로군요.”

정지원은 SJ인더스트리의 창립 멤버였고, 현재 H반도체는 SJ인더스트리에 사실상 인수된 상태다. 기업가로서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결국 임원급도 아닌 일개 평사원에게 배반당해서 잡아먹힌 꼴 아닌가.

“SJ인더스트리가 며칠 전 구글로부터 총 20억 개의 슈나우저, 코카 스패니얼 주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대략 3,000억 불짜리 계약입니다.”

“역시 세계적인 기업이라 그런지 단위가 다르군요. 우리도 한 발 걸칠 수 있어야 할 텐데요.”

이용무는 여유를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곤두박질치고 있는 그룹 주가를 생각하면 마음이 흔들리지만, 결코 거기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그래서는 올바른 경영 판단을 할 수 없다.

SJ인더스트리에 입장한 이용무는 어렵사리 정지원을 만날 수 있었다. 무려 2시간을 꼬박 기다려야 했던 그는 슬슬 짜증이 나려고 하던 참이었다.

“멀리서 오셨는데 미안합니다. 제가 워낙 바빴습니다.”

유창한 영어. 이용무는 잠시 멍해졌다.

유학파인 그가 못 알아들을 리는 없지만, 상대가 대뜸 영어로 말을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차갑게 머릿속을 식히고, 그도 영어로 말을 받았다.

“아닙니다. SJ인더스트리가 요즘 바쁜 건 알고 있습니다. 단숨에 세계적인 기업으로 거듭난 회사 아닙니까.”

“양해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그런데 혹시 미국에서 오래 거주하셨습니까?”

왜 같은 한국인끼리 불편하게 영어를 쓰느냐. 그런 뉘앙스를 넌지시 담은 말이었다.

정지원은 피식 웃었다.

“제가 미국인이라서요.”

“…….”

“한국어를 잊은 건 아니지만, 미국에서는 영어만 쓰려고 합니다. 그게 당연한 거 아닐까요? 어차피 평생 살 곳인데 자꾸 써버릇해야 늘지 않겠습니까.”

“이미 충분히 유창하신 듯한데요. 미국 토박이라 해도 믿을 정도입니다.”

“아직 발음이 많이 모자랍니다. 그래서 임직원들과 소통할 때 가끔 애를 먹기도 합니다.”

“그러시군요.”

이용무는 협상이 쉽지 않을 듯한 예감을 받았다. 동시에 살짝 불쾌해졌다. H반도체에서 일개 연구팀장이던 인물이 진성그룹의 후계자인 자신과 대등하게 나란히 앉아 있는 현실에.

그러나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정지원은 지금 SJ인더스트리라는 괴물을 등에 업고 있지 않은가.

“저는 좋은 제안을 하러 왔습니다. 귀사와 우리 진성전자, 서로가 윈윈할 수 있는 거래입니다.”

“흠, 들어보지요.”

말투는 정중하지만, 그 말은 마치 어디 말해보라는 뉘앙스가 느껴졌다. 이용무는 심히 불쾌했지만, 중요한 협상을 망치지 않기 위해 감정을 숨겼다.

“귀사는 현재 생산 속도 부족으로 물량을 맞추지 못해 난감해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반도체 사업부의 생산능력은 단언컨대 세계 1위입니다. 우리 회사에 위탁생산을 맡겨주시지 않겠습니까?”

“제가 역으로 제안을 하지요.”

정지원은 차가운 조소를 짓고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귀사의 반도체 공장을 우리 회사에 매각하지 않겠습니까?”

============================ 작품 후기 ============================

귀하의 딱지를 저에게 매각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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