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3 그룹의 선택 =========================================================================
“드디어 주문을 읽을 수 있게 되었소.”
왕은 깨어나자마자 몹시 기뻐하며 말했다. 노신하도 눈을 크게 뜨며 기쁜 감정을 드러냈다.
“경하 드리옵니다, 폐하.”
“이제 주문의 언어를 읽을 수 있게 되었으니, 잘하면 마법을 구현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소.”
에테르는 모든 힘의 근원이자 기초다. 마력 역시 에테르로 구성되어 있다.
주문은 마력을 사용하기 위한 마법 언어를 말한다. 에테르를 직접 움직이는 진언만큼의 위력은 낼 수 없지만, 마법을 구현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꿈속에서 큰 이점이다.
왕은 문득 아쉬워했다.
“진언을 좀 더 제대로 사용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한서진은 주문은 전혀 읽을 줄 몰랐지만, 어설프게나마 진언을 사용할 줄 알았다. 물질에 진언을 새겨 에테르를 간접 활용하는 방식이다. 그가 설계한 반도체는 모두 그런 식으로 만들어졌다.
어설프게 진언을 사용하지만, 정작 그 의미는 모른다. 그 점이 늘 안타까웠는데, 이제 드디어 주문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사고가 넓어진 것 같소. 덕분에 통찰안으로 볼 수 있는 범위도 늘어났소.”
“다행입니다, 폐하.”
“전의 직접 개입이 아마도 어떤 영향을 준 것 같소. 왕실의 미스릴과 오리할콘을 모두 쏟아 부은 보람이 있소.”
“기왕이면 통찰안 외의 권능도 옮겨갔으면 했습니다만, 아주 결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로군요.”
통찰안은 진실을 보여주지만,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어떠한 진실을 보여줘도, 권능주가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면 의미가 없다. 또한 사용자의 역량, 기호에 따라 볼 수 있는 범위도 축소된다.
“그럼 이제 꿈속에서 마법을 터득할 수 있겠군요.”
한서진은 이제 주문의 언어를 읽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통찰안이 보여주는 주문을 습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할 수 있을 거요.”
왕은 잠시 멈칫했지만, 곧 진중하게 끄덕였다.
설마 불가능하진 않으리라 믿으며.
“이, 이게 어떻게 된 거냐?”
현진국과 박효산은 경악해서 쳐다봤다. 갑자기 한서진이 USL을 술술 읽기 시작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 내용도 심상치 않았다. 에테르가 모든 힘의 근원이라니? 현대 물리학과 전혀 매치되지 않는 논리였다.
“너, USL을 읽을 줄 알았던 거냐?”
“아뇨, 정확히는 조금 전까지 몰랐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알 것 같네요. 어떻게 읽는지를.”
“이게 대체 어떻게…….”
박효산은 좀처럼 믿을 수 없는 눈치였다. 그동안 전혀 읽을 줄 몰라서 쩔쩔매던 언어를 갑자기 수월하게 읽을 수 있게 되다니, 지난 몇 개월간의 고생이 허탈해지지 않는가.
한서진은 고민을 좀 하다가 있는 그대로 털어놓았다. 갑자기 읽을 수 있게 되었다고.
거짓말을 할 수도 있지만, 조금 전에 그 자리에서 술술 읽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는가. 조금 경솔했나 싶기도 하지만, 어차피 오래 숨길 일도 아니어서 과감히 말해버렸다.
놀라워하는 박효산에 비해 현진국은 좀 더 신중한 눈치였다.
“으음…… 어쩌면 한 군, 자네는 어렸을 때부터 이 언어를 알고 있었던 건지도 몰라.”
박효산이 의아해서 반문했다.
“현 교수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USL은 한 군 집안에 있던 고문서에 적혀 있었다고 하지 않았나? 한 군이 어렸을 때 USL을 배웠을 수도 있어. 누군가가 가르쳤을 수도 있고, 옆에서 자연스럽게 익혔을 수도 있네. 원래 어린아이는 언어를 직관적으로 빨리 배우니까, 보고 듣는 것만 함께 해도 습득이 가능하지.”
“그럼 그동안은 왜 읽지 못한 걸까요?”
“어떤 충격에 의해 무의식에 잠재돼 있다가 방금 토의하면서 얻은 어떤 암시나 발상 때문에 이제야 생각난 걸 수도 있네. 언어 인지에서는 종종 그런 현상이 발견되니 크게 이상한 건 아니야.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한 군이 USL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일세.”
현진국은 한서진이 어떻게 USL을 읽을 수 있는지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보다 USL 그 자체에 집중했다.
“자, 한 군. 그럼 자네가 처음 나한테 가져온 이 USL에는 뭐라고 적혀 있는 건가?”
현진국은 그 점이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작년, 한서진이 가져왔던 문구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
“예, 지금 확인해 보겠습니다.”
한서진은 패기 넘치게 나섰다. 안 그래도 그 역시 궁금했다.
통찰안이 암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보여준 미지의 언어. 그 안에는 어떤 방법이 적혀 있을까. 엘릭서 제조 외에 암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은 대체 무엇일까.
한서진은 한국어로 번역하지 않고, USL의 발음 그대로 읽었다.
“Kreppiano din midder fiil terrn…….”
그는 끝까지 읽어 내려갔다. 현진국과 박효산은 조마조마한 눈으로 쳐다봤다.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지만, 발음만 봐도 알려진 언어는 아니었다.
그가 마침내 낭독을 끝내자, 현진국은 다급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래, 무슨 내용이 적혀 있던가?”
“어, 음…….”
한서진은 조금 난처했다. 그 안에 담긴 뜻이 상상을 벗어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솔직히 말했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지……. 마치 무슨 제사나 의식에 쓰는 주술 같은데요.”
“제사? 주술?”
“대충 핵심만 간추리자면, 신성한 에테르를 통해 만병을 치유하리라, 뭐 그런 내용입니다. 딱히 구체적인 행동 지침이 아니라 웅변 낭독 같은 느낌이 납니다.”
“에테르?”
“흐음, 그러고 보니 USL은 지속적으로 에테르를 다루고 있지. 아까 서진이 네가 갑자기 휘갈긴 USL에도 그런 내용에 담겨 있었고. 미스릴은 어머니, 오리할콘은 아버지라고 했나?”
박효산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미스릴은 스코브리아늄을 말할 테고, 오리할콘은 대체 뭐지? 무엇을 뜻하는 거지?”
현진국도 나름대로 고민에 잠겼다.
“주술이라……. 전혀 엉뚱하군. USL은 초과학 문명의 산물이라 생각했거늘, 갑자기 주술이라니.”
“저는 잠시 영감을 정리 하겠습니다.”
한서진은 고민에 빠진 두 교수를 놔두고, 조용히 컴퓨터 앞에 앉았다. 지금 폭발처럼 떠오르는 이 아이디어를 서둘러 정리해야 했다.
‘이건 대박이다! 정말 대박이야!’
그는 신들린 듯 도면에 설계도를 그려나갔다. 수없이 많은 모듈을 작성해서 조합하고, 다양한 논리 회로를 선이 가는 대로 죽죽 그어나갔다.
마치 대자연을 보고 쏟아지는 영감에 어쩔 줄 몰라 하는 화가처럼, 머릿속에 떠오르는 발상을 고스란히 설계 도면에 담았다.
얼마나 깊게 빠져서 작업을 했는지 모른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현진국 교수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박효산 교수가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현진국은 방해하지 않으려고 조용히 돌아간 모양이었다.
그는 뿌듯한 마음으로 완성된 설계 도면을 확인했다. 5nm공정으로 이 녀석을 만들면, 대체 어떤 괴물이 나올까?
‘가만?’
한서진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설계 도면을 실리콘이 아닌, 미스릴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미스릴 반도체가 가능할지도?’
미스릴, 즉 스코브리아늄은 아직 반도체로 공정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일반적인 대량 생산 설비를 이용해, 안정적인 품질로 생산할 수 있는 방법을 못 찾은 것이다.
열산화 공정 과정에서 산화막이 형성돼서 본연의 성질을 잃어버리는 것도 있고, 그 밖의 다른 문제도 수두룩하다.
그러나 실험실 단계에서 확인한 반도체로서의 성능은 실리콘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우수했기에, 지금도 전 세계 수많은 과학자들이 매달리고 있었다.
‘니트론 교수님은 반도체 그 자체보다는 제5의 힘에 더 열심이신 것 같지만.’
니트론이 제5의 힘이라고 부르는 것. 그것은 에테르를 말하는 것이 틀림없다.
‘미스릴은 에테르의 어머니…….’
미스릴은 어머니, 오리할콘은 아버지.
미스릴 그 자체에서 에테르가 나온다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어떤 비유적인 표현 같다.
그리고 오리할콘은 대체 어떤 것일까?
“아, 내가 깜박 잠들었네.”
꾸벅꾸벅 졸던 박효산이 눈을 비비며 정신을 차렸다. 현진국과 달리 그는 한서진이 반도체 설계를 시작하자 옆에 남았다. 전공자로서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뭔가 신들린 듯이 설계하던데, 완성된 거냐?”
“네, 교수님. 저, 근데 이 설계도는 스코브리아늄에 적용해서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스코브리아늄? 우리 연구소에 있는 제조 설비는 일반 반도체 공장에서 쓰는 거랑 똑같아. 스코브리아늄으로 반도체를 찍어내도 제대로 작동 안 할 텐데.”
아직까지 스코브리아늄 반도체는 대단히 비싼 실험실 설비로만, 그것도 소량씩만 제작이 가능했다. 한국대에는 그 설비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서진은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한 번 해보려고요. 왠지 느낌이 좋거든요.”
“열산화 문제야 해결했다지만 그래도 제대로 작동이 안 될 게 뻔한데……. 알았다, 한 번 해보는 거야 뭐 손해 안 보니까.”
둘은 즉시 반도체 제작에 착수했다. 한서진은 레이아웃을 뜬 설계도를 기계에 입력하고, 들뜬 마음으로 기계를 조작했다.
마침내 시제품이 나왔고, 박효산 교수도 신기한 듯이 그것을 바라봤다.
“되게 작구나. 딱 슈나우저만하네.”
“네, 그렇지요?”
“근데 설계도면을 제대로 확인 못했는데…… 이건 어떤 반도체냐? 슈나우저 같은 연산 장치? 아니면 메모리 계열?”
“굳이 말하자면 종합 반도체라고 할까요?”
“종합?”
무슨 말인가 의아해하던 박효산은 화들짝 놀라서 바라봤다.
“너, 설마?”
“그냥 바이오스와 CPU와 GPU, 램과 스토리지까지 아무튼 전부 다 욱여 넣었습니다.”
“이 작은 게 컴퓨터라고?”
카드만 한 크기의 반도체 부품에 컴퓨터 자체를 집적시킨 제품은 이미 윈텔에서 만든 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카드만한 컴퓨터’를 구현했다는 상징성이 있을 뿐, 성능 자체는 당연히 물리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왜 이런 쓸모없는 걸 만들었냐?”
박효산의 반응이 정상이었다. 아무리 한서진의 실력이 대단해도, 이만한 크기의 컴퓨터는 한계가 있는 법. 심지어 이건 카드보다 더 작은, 손톱만한 크기의 칩이 아닌가.
그러나 한서진은 나지막한 웃음소리를 냈다.
“과연 그럴까요?”
그는 자신감이 넘쳤다. 상징성만 있는 부품에서 벗어나, 실용적인 쓸모를 보여줄 거란 믿음이 있었다.
그는 곧바로 성능 테스트에 들어갔다. 이건 단순한 부품 칩이 아닌, 하나의 완성된 컴퓨터다. 즉 키보드와 모니터를 먼저 연결해야 했다.
하지만 손톱만한 칩에 전원 공급 장치, 키보드와 모니터 단자를 연결하려니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연결 잭을 새로 만들어야 했다.
두 시간 동안 납땜을 한 끝에 겨우 연결 잭을 만들고, 전원을 연결했다. 키보드와 모니터, USB 같은 입출력 장치도 연결했다.
펌웨어 설치 작업까지 완료한 한서진이 USB단자에 윈도우즈 설치 USB를 꽂는 걸 보고 박효산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물었다.
“그게 거기에 깔리기나 하겠냐? 용량이 얼만데.”
“이렇게 보여도 설계상 용량이 꽤 됩니다. 자세한 건 저도 일단 컴퓨터 켜고 확인을 해봐야……. 어?”
한서진은 당황했다.
부팅을 하고 설치를 시작했는데, 설치 속도가 죽죽 올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USB의 읽기 속도를 한계까지 끄집어내서 데이터를 빨아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설치가 완료되었습니다. 윈도우즈를 사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 20초 만에?”
박효산은 경악했다.
USB의 최고 전송 속도가 초당 약 100메가 정도다. OS 설치 프로그램의 용량이 20GB인데, 설치 완료까지 20초 밖에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노신하는 왕이 그렇게 침울해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질문을 던지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폐하, 무슨 문제라도…….”
“……중급 마력석을 만들었소.”
“…….”
“심지어 그것도 미스릴로.”
“……그 귀한 마법 물질로 겨우 중급 마력석을 만들었단 말입니까?”
============================ 작품 후기 ============================
"자, 이것으로 너에게 절대 주문을 가르쳐주었... 가만, 너 지금 뭐 하는 거냐!!"
"내 곡괭이는 아직 부족해! +1000억 강화를 더 해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