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2 그룹의 선택 =========================================================================
“반도체는 그룹의 숙원 사업이었네.”
꽤 취한 백철중은 본심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한서진은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심정으로 들었다.
“컴퓨터, 핸드폰, TV, 모니터, 스피커, 하다못해 가전제품에도 반도체 제품이 들어가지. 그룹이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높이 뛰어오르기 위해서 반도체 산업은 반드시 이뤄야 할 숙명이었네. 그래서 난 오래 전부터 반도체에 투자했다네.”
“그러시군요.”
백철중의 남다른 반도체 사랑은 한서진도 알고 있었다.
그는 반도체 사업으로 흥한 진성전자도 결국 포기한 CPU 개발에 지속적으로 투자한 인물이다. 일찍이 한서진이 근무했던 설계2팀도 CPU 개발팀이었다.
“하지만 그 꿈이 이제 끝난 것 같네.”
“…….”
“S드론에 H반도체 지분 51%가 넘어간 이상 더는 손을 쓸 수가 없네. 이름만 H반도체지, 이미 H그룹 계열사가 아니야.”
H반도체는 이미 그룹과는 선을 딱 긋고 움직이고 있었다. 계열사 간의 협력이나 교통정리 같은 것은 기대할 수도 없었다. H반도체는 H그룹 계열사를 철저히 타회사 대하듯이 했다.
“H반도체는 이미 SJ인더스트리의 생산 공장이 됐어.”
한서진은 그의 넋두리에 뭐라고 말을 하면 좋을지 몰랐다. 그래서 애꿎은 술만 계속 마셨다.
문득 백철중의 눈빛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도 난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을 걸세. 반도체 산업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어. 만약 H반도체를 되찾지 못하더라도, 다시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할 걸세.”
뜨거운 열정이 또렷이 느껴진다. 이 나이 먹어서도 이렇게 열정이 넘치는데, 젊어서는 얼마나 대단했을까. 그러니 두 주먹만으로 지금의 H그룹을 만든 거겠지.
“부디 자네가 도와줬으면 하네.”
“제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아니야, 자네는 그럴 힘이 있어. 500억 불짜리 반도체 기술을 혼자서 뚝딱 만들어내는 천재 아닌가. 자네라면 내 숙원을 이룰 수 있을 거라 믿네.”
“…….”
그 믿는 도끼가 H반도체를 빼앗은 주범이라는 걸 알면, 소주잔이 바로 얼굴에 날아오려나?
아무래도 SJ인더스트리의 주인이 자신이라는 걸 평생 말 못할 것만 같았다. 무서워서 어떻게 말을 꺼내?
“회장님이 많이 취하셨네요.”
회장 사모님, 송지현이 혀를 차며 백철중을 흔들었다. 백철중은 깊이 잠이 든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회사 일 때문에 요새 많이 속상한 것 같던데, 정확히 무슨 일이 있던 거예요?”
송지현이 물었다. 송하나 모친 앞이라니까 괜히 긴장이 됐다. 생긴 것만 보면 영락없이 나이 차이 좀 나는 누나인데…….
“H반도체가 외국에 넘어갔다는 건 들었는데. 정말인가요?”
“아, 네.”
“그렇군요. 회장님도 참……. 회사가 그거 하나뿐인 것도 아닌데.”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회장님 깨시면 말씀 좀 잘 전해주세요.”
한서진이 고개를 숙여 보인 그때, 옆에서 송하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가시려고요?”
그는 얼른 돌아봤다. 내내 코빼기도 안 비치다가 이제야 모습을 보여주다니. 살짝 서운했다.
송하나는 노출이 거의 없는, 헐렁한 원색 박스티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가볍게 하나로 묶어서 뒤로 넘겼다.
“엄마, 제가 모셔다 드리고 올게요.”
“응, 그래.”
“아니야. 나 바로 가면 되니까, 바로 지하 주차장 내려가면 돼.”
“그럼 입구까지만.”
한서진은 신발을 집어 들고 응접실 한쪽에 있는 주차장 입구로 향했고, 송하나는 슬리퍼를 끌고 따라왔다. 신발을 신고 있는데 그녀가 문득 물었다.
“안주 맛있었어요?”
“응? 아, 엄청 맛있던데. 좋겠다. 너는 맨날 그런 거 먹고 사는구나.”
“그거 제가 만들었어요.”
“……어, 정말?”
“네, 그리고 매일 먹진 않아요. 만드는데 시간 많이 걸리고 손도 많이 가서요.”
송하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한서진은 속으로 내심 놀랐다. 한정식 요리사 뺨칠 솜씨던데, 그런 재주가 있었어?
“이야…… 요리 정말 잘하네. 정말 몰라봤어.”
“별 거 아니에요. 조심히 가세요.”
“응. 진짜 잘 먹었어.”
송하나는 손을 흔들었고, 한서진은 계단을 통해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저택에 상주하는 운전기사가 이미 차 옆에서 대기 중이었다.
한서진은 그에게 어색하게 인사했다.
“아, 잘 부탁드립니다. 제가 많이 취하진 않았는데, 술을 먹어서요.”
“걱정 마십시오.”
한서진을 배웅하고 돌아서던 송하나는 흠칫했다. 송지현이 바로 뒤에 서 있었던 것이다.
팔짱을 낀 엄마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봤다.
“무슨 거짓말을 그렇게 자연스럽게 하니? 요리는 엄마가 다 했고, 데코레이션만 도왔으면서.”
“내가 만들었다고 했지, ‘다’ 만들었다고는 안 했어.”
송하나는 새침하게 대답하고는 송지현을 지나쳐 위층으로 올라갔다. 송지현은 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스코브리아늄의 반응성을 이용한 5nm공정은 복잡한 설비 추가 과정이 없었다. 그래서 빠른 시간 안에 투입이 가능했다.
H반도체가 전 공정라인을 5nm공정으로 교체하는데 불과 2주도 채 걸리지 않았다. 교체 작업을 마친 H반도체는 5nm공정이 적용된 슈나우저2를 무차별로 찍어내기 시작했다.
SJ인더스트리는 급한 대로 코카 스패니얼의 생산까지 H반도체에 맡겨 버렸다. 슈나우저2와 코카 스패니얼을 각각 1억 개씩 당장 생산해야 할 처지에 놓인 H반도체는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메인보드 제조사 아서스와 애스록이 드디어 차세대 메인보드 개발을 마쳤다.
슈나우저와 코카 스패니얼에 특화된 메인보드로, 그 크기는 고작 어른 손바닥에 지나지 않았다.
조금 큰 스마트폰만 한, 워크스테이션급 데스크톱 컴퓨터가 드디어 구현된 것이다.
“이게 스마트폰으로 보이십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컴퓨터입니다. 그것도 최신 기종을 훌쩍 뛰어넘는, 고성능 게이밍 컴퓨터입니다.”
슈나우저는 기이할 정도로 발열이 낮기 때문에 강력한 쿨랭 시스템이 필요 없었다. 덕분에 획기적으로 크기를 줄일 수 있었다.
8GHz의 CPU와 최고급 성능의 GPU, 128GB의 램과 1TB의 스토리지를 조금 큰 스마트폰만 한 크기에 집적시킨 것이다. 그러면서도 성능은 기존의 어느 컴퓨터보다 뛰어났다.
소비자들은 이 놀라운 제품에 열광했고, 게이밍 노트북은 1kg 이상은 쳐다보지도 않는 시대가 되었다.
게다가 슈나우저는 컴퓨터뿐만 아니라 스마트폰에도 사용된다. 원하는 곳이 사방에 널렸다. 개인 컴퓨터, 대형 컴퓨터, 수퍼컴퓨터, 스마트폰 등 다양한 시장이 슈나우저와 코카 스패니얼을 원했다.
H반도체를 인수했지만, 여전히 SJ인더스트리는 생산에 허덕이고 있었다.
“요즘 엄청 잘 나간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며칠 만에 연구실에 얼굴을 비추자 박효산 교수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한서진은 민망해서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연구에 소홀했죠.”
“나야 괜찮은데, 현진국 교수님이 조금 서운해 하시는 눈치다. 네가 돈에만 정신 팔려서 정작 USL과 미스릴 연구에 소홀히 할까 봐 걱정하신다.”
“그럴 일은 절대 없습니다.”
USL(Unidentified Scobrianuim Language). 그리고 미스릴.
그 둘은 미지의 힘, 에테르의 비밀을 풀 수 있는 단서다. 한서진은 절대 USL과 미스릴 연구에 소홀히 할 마음이 없었다.
비글, 슈나우저, 그리고 코카 스패니얼. 그 셋은 결국 에테르의 힘을 빌린 반도체였으니까.
‘그리고 그 이상한 꿈도…….’
한서진은 신비한 꿈을 떠올리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미스릴, 에테르, USL.
그것들은 결국 통찰안과 그 꿈에 얽힌 비밀까지도 닿아 있을 것이다.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USL은 언어학적 법칙에서 매우 비효율적인 언어야.”
현진국 교수는 더 이상 한서진에게 말을 높이지 않았다. 후배를 대하듯 편안하게 대했다.
“언어 패턴이 일정하면서도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어. 비전문가가 보기에는 아무 의미도 없는 기호의 나열에 불과하지. 이것을 언어로 사용하는 종족이 있다면, 그 종족은 매우 고등한 지능을 가졌거나 아니면 단순한 기계에 가까울 수 있어.”
“어째서죠?”
“사람이 배우기에는 너무 어렵기 때문이지. 적어도 일상생활에서 사용 가능한 언어는 아니라고 봐.”
한서진이 USL에서 정확히 뜻을 알려준 단어는 고작 미스릴과 에테르, 그리고 엘릭서. 이렇게 단 세 개뿐이다. 그 외는 자신도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진국은 그 세 단어만 가지고 USL이 지닌 수많은 언어학적 의미를 알아냈다. 과연 국내 최고의 언어학자다운 실력이었다.
무엇보다 패턴과 법칙 분석에 수퍼컴퓨터를 적극 활용하는 것도 놀라웠다. IT와는 상관없는, 70이 다 되어가는 학자가 자기전공 전문연구에 첨단장비를 적재적소로 활용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사실은 사람보다는 기계가 사용하기 위한 어떤 명령어 같다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드네.”
“기계가…… 명령어요?”
“적어도 사람 간에 의사소통을 하기 위한 언어로 보이지는 않는단 말일세. 만약 이런 언어로 의사소통을 한다면, 그 종족은 매우 지고하거나 혹은 기계에 가까운 사고회로를 지니고 있겠지. 아까 말한 건 그런 의미라네.”
“……기계.”
한서진은 알파벳을 닮은 USL을 멍하니 들여다보며, 현진국의 말을 조용히 뇌까렸다.
뭔가 떠오를 것 같기도 했다. 그런 근질근질한 느낌이 참을 수 없이 뇌를 괴롭혔다. 속 시원하게 떠올랐으면 좋으련만.
그때 박효산이 말했다.
“USL2를 3차원 모형으로 변환한 모습이 미스릴과 거의 흡사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USL과 USL2는 미스릴에 어떤 작용을 하기 위한 명령어는 아닐까요?”
미지의 언어 USL은 알파벳, 즉 언어와 유사한 형태를 하고 있다. 그리고 USL2는 USL을 이진법으로 변환한 것을 말한다.
인간이 보기에 USL2는 의미 없는 1과 0의 나열이다. 그리고 그 USL2를 수퍼컴퓨터로 3차원 모형으로 변환한 모습은, 미스릴을 확대한 모습과 놀랍도록 닮았다.
한서진은 불현듯 머릿속을 울리는 충격을 받았다.
‘미스릴에 작용한다고?’
기계. 명령어. 미스릴. 그리고 에테르.
USL과 USL2.
에테르 반도체에 새긴 의미 불명의 회로.
‘잠깐, 그렇다면?’
두 교수가 던진 화두는 아주 단순한 발상이었다. 그러나 그 작은 발상은, 한서진의 머릿속을 간지럽히기만 하던 사념들을 단숨에 의미 있게 엮어냈다.
“한 군?”
한서진은 급히 미스릴의 전자현미경 사진을 꺼내 확인했다.
신기하게도, 미스릴을 구성하고 있는 은빛 선의 흐름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에테르 반도체에서 보였던 황금의 선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이건 바로……. 에테르의 흐름?’
그는 깨달았다.
에테르. USL. 그리고 미스릴.
그 셋은 별개가 아니라, 하나로 엮어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서진아?”
“교수님! 뭔가 알 것 같습니다! 잠시만요!”
한서진은 컴퓨터를 꺼내, 미스릴의 전자현미경 사진 위로 슥슥 도면을 덧칠해 그렸다.
화면에는 자신에게만 보이는 은빛 회로가 가득 넘실거렸다. 그는 단순히 회로를 그리는 게 아니라, 미스릴 안에 갇힌 에테르의 진정한 흐름을 끄집어내고 있었다.
몇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신들린 듯 그리던 한서진의 손이 마침내 멈췄다. 축구 운동장만 한 전자현미경 사진에는 그가 그어나간 회로가 가득했다.
박효산이 의아해서 물었다.
“너, 갑자기 왜 반도체 설계도는 그리고 그래?”
“교수님, 이건 반도체 설계도가 아니에요.”
“그럼 뭐냐?”
“일단 이걸 USL2로 전환하고 다시 USL로 바꾸겠습니다.”
통찰안으로 읽을 수 있는 USL의 단어는 얼마 되지 않는다. 미스릴, 에테르, 엘릭서 정도가 고작이다.
그러나 미스릴 안에 감춰져 있던 또 다른 형태의 미스릴을 인식한 순간, 한서진은 통찰안의 시야가 한결 넓어진 듯한 착각을 느꼈다. 부디 이 착각이 거짓이 아니기를 빌었다.
세계 최고 수퍼컴퓨터, Z7이 맹렬히 변환 작업을 시작했다.
한서진이 그린 은빛 도면은 일정 공식에 따라 1과 0의 집합으로 변환됐고, 그것은 다시 알파벳을 닮은 USL로 바뀌었다.
최종 결과물은 겨우 A4 15장 분량에 불과한 미지의 언어, USL 문단이었다.
본래라면 저 세 단어를 제외하고 읽을 수 없어야 한다. 그러나 한서진은 떨리는 손으로 출력된 종이를 붙잡고, 읽어 내려갔다.
“……이와 같이 미스릴은 에테르의 어머니로, 그리고 오리할콘은 아버지로 비유할 수 있다.”
============================ 작품 후기 ============================
실탄의 ㅅ은 성실의 ㅅ
반박 못하실 거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