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121화 (121/609)

00121  그룹의 선택  =========================================================================

“오빠가 하나를 어떻게 알아?”

한지혜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랍다는 듯이 반문했다.

한서진은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조금 난감했다. 어떡하면 오해 안 하게 잘 말할 수 있지?

“그게……옛날부터 알고 지내는 거래처 사장님 막내딸이더라고. 그래서 몇 번 봤거든.”

H그룹 총수가 졸지에 거래처 사장님으로 전락하는 순간이다. 한서진은 그를 향해 닿지 않는 사과를 했다.

다행히 한지혜는 별로 의심하지 않는 눈치였다.

“아아, 그랬구나. 난 또 괜히 이상한 오해했네.”

“오해라니?”

“솔직히 하나 걔, 생긴 거 완전 사기잖아. 그 나이에 그 얼굴에 그 몸매가 말이 돼? 걘 탈아시아급이라고.”

부정할 수 없다는 게, 아니 절실히 공감이 간다는 게 왠지 수치스럽다.

“그 얼굴에 그 몸매에, 들이대는 남자가 오죽 많은 줄 알아? 진짜 주제 파악도 못하면서 껄떡대는 애들 되게 많은 것 같더라. 나도 옆에서 봤는데 고역이겠더라고. 오빠는 그러면 안 돼.”

“야, 그래도 나 이제 선 시장 나가면 일등 신랑감이래.”

“아, 맞다.”

한지혜는 무안한 표정을 지었다. 25살에 500억 달러의 자산가, 알려지지 않았지만 실질적인 국내 최고 부자가 아닌가.

“그래도 안 돼. 하나 걔, 이제 고2잖아. 2년만 참아. 아니다, 일 년하고 몇 달만 더 참으면 되겠네.”

“야, 나 애초에 그런 생각 전혀 없거든? 그냥 하나가 너 안다고 해서 신기해서 물어본 것뿐이야.”

“왜, 난 둘이 잘 어울릴 거 같은데. 걔 착하고 예쁘잖아. 집은 좀 어려운 것 같지만, 그거야 오빠가 커버 가능하고.”

“…….”

백철중 회장 막내딸이 가난하다고? 대체 어떻게 이런 터무니없는 오해를 할 수 있는 거지?

한지혜는 잠시 옛날 생각을 떠올리다가 실소했다.

“요즘은 연락 안 한지 좀 됐어. 나 준석 오빠랑 헤어졌잖아. 하나 알게 된 것도 준석 오빠 통해서였거든.”

“…….”

“그래서 연락하기 조금 껄끄럽더라고.”

어쨌거나 한지혜는 송하나에게 좋은 감정을 갖고 있는 듯했다. 한서진은 그걸 확인하고 나자 조그맣게 안심이 되었다.

5nm공정 원천기술을 확보한 ADSC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SJ인더스트리와 비밀리에 제휴를 타결시키고, 곧바로 양산 계획을 발표한 것이다. 세기적인 대연합에 국제 시장이 크게 술렁였다.

SJ인더스트리는 내친 김에 새로운 메모리 반도체, 코카 스패니얼까지 발표해 버렸다.

명함 카드만 한 새로운 메모리의 등장. 슈나우저 때만큼은 아니지만, 컴퓨터 제조업계는 다시 큰 충격에 빠졌다.

“이 조그만 카드 한 장이 128GB의 램과 1TB의 SSD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단 말입니까?”

많은 이들이 믿지 못했다. 그러나 공개된 성능 앞에 그들은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램과 SSD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는 일체형 메모리, 그것도 기존의 성능을 아득히 뛰어넘은 제품이 아닌가.

“사실 코카 스패니얼의 사이즈는 원래 이보다 더 컸습니다. 그러나 5nm공정기술과 결합하여 크기를 더욱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었습니다.”

SJ인더스트리의 이사, 칼 루이스는 자신만만하게 포부를 밝혔다.

“슈나우저와 코카 스패니얼을 위한 새로운 메인보드는 이미 한창 개발 중입니다. 또한 보조 장착 슬롯을 통해 기존 메인보드에 연결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 경우 비록 메인보드의 성능에 따른 제한을 받겠지만, 우리 SJ인더스트리는 제품의 최고 성능과 호환성을 동시에 추구할 생각입니다.”

기자들은 칼 루이스가 터번을 두른 ADSC 사장과 나란히 악수를 나누는 모습을 정신없이 찍었다.

“슈나우저와 코카 스패니얼, SJ인더스트리의 모든 제품은 앞으로 5nm공정으로 제조됩니다. 파운더리 제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슈나우저2. 그리고 코카 스패니얼.

5nm공정 도입으로 SJ인더스트리는 날개를 각각 한 쌍을 더 달고 날아오르게 되었다. ADSC 역시 중동의 한계를 벗고, 단숨에 첨단 기술권 시장으로 진입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윈윈.

그러나 이 대연합에 크게 타격을 받은 이들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진성전자가 있었다.

“크윽!”

생방송 기자회견이 끝나자 이용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테이블을 내리쳤다.

5nm공정기술이 넘어간 것도 속이 쓰린데, ADSC가 발 빠르게 SJ인더스트리와 손을 잡다니. 이래서야 한서진을 통해 뭘 해본다는 발상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한서진, 그 친구한테 연락해봤습니까?”

“예, 이제 일정을 잡기만 하면 됩니다.”

“보류하세요.”

“예?”

“보면 모릅니까? 이미 판은 그 친구 손을 떠났어요. ADSC는 어차피 포괄적 독점 라이센스를 얻었고, 자기들 뜻대로 기술 운용을 시작했지 않습니까. 이제 와서 그 친구가 나서봐야 소용없습니다.”

이용무는 냉정히 말을 이었다.

“지금은 그 친구 접대가 아니라 이 사태를 극복하는 게 중요합니다. 알지 않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주가는 어떻죠?”

“……이미 하한가입니다.”

황기백 실장은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이용무는 작게 신음했을 뿐, 더 분노를 드러내지 않았다. 이미 기자회견이 끝났을 때 예상한 일이었다.

슈나우저로 반도체 사업이 큰 타격을 입었을 때, 그래도 돌파의 여지는 있었다. 진성전자의 주력 반도체는 AP와 D램, 그리고 SSD 저장매체였으니까.

팔 하나를 잃었지만, 그래도 두 발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러나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코카 스패니얼이 진성전자의 두 발을 한꺼번에 잘라내기 위해 달려든 것이다.

램과 저장장치의 일체형이라니. 성능은 진성전자와 비교조차 되지 않고, 심지어 5nm공정으로 만들어진다니.

“H반도체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ADSC가 5nm공정 기술을 제공하기로 했습니다. H반도체에서도 똑같은 설비로 슈나우저2를 제조할 모양입니다.”

“코카 스패니얼 제조 계획은 어떨 것 같습니까? 사실 SJ인더스트리의 자체 공정라인은 매우 부실하지 않습니까.”

SJ인더스트리의 생산능력은 H반도체의 1/20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부실하다.

지금 시장에는 사모펀드 S드론이 SJ인더스트리와 연관이 있을 거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SJ인더스트리가 H반도체의 생산설비를 탐내 벌인 기업합병이라는 것이다.

이용무는 바로 그 점, SJ인더스트리의 고질적인 생산 능력 부실에서 답을 보았다.

“코카 스패니얼을 슈나우저만큼 생산하려면 H반도체만으로는 어림이 없지요.”

그는 차갑게 웃었다.

“SJ인더스트리는 우리 공장을 몹시 탐내고 있을 겁니다. 거기서 방법을 찾아봅시다.”

“대표님, 이번 달 월급이 이상한데요. 입금이 잘못된 것 같아요.”

“왜요? 제대로 넣어드린 거 같은데.”

“아니…… 이천만 원이 더 들어왔더라고요. 그래서…….”

박수진이 머뭇거리며 말하자 한서진은 피식거렸다.

“제대로 넣어드린 거 맞아요. 상여금입니다.”

“상여금이요?”

“사무소가 이번에 좀 잘 됐거든요. 그래서 상여금 좀 넣어드렸어요.”

“가, 감사합니다.”

박수진은 좀처럼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설계 사무소라고 해봤자 마땅히 매출이 나는 것도 없는데 느닷없이 상여금이라니? 500억 달러 대박 사건을 모르는 그녀로서는 이해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500억 불의 대박 계약이 언론에 대서특필되기는 했지만, 세상은 한국대 재학생이라는 신분에만 집중했다. 그가 운영하고 있는 조그만 설계 사무소는 철저한 관심 밖이었다. 박수진도 한서진이 대박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조만간 사무소는 이사할 겁니다. 두 분 다 그렇게 알고 준비해 주세요.”

“이사요?”

“작업하기에 너무 비좁은 것 같아서요. 좀 더 넓은 데로 찾아보려고요. 여기 사무소보다 적어도 열 배 정도는 넓었으면 하네요.”

“알았어. 내가 한 번 찾아볼게. 생각해둔 위치는?”

“학교 근처가 좋을 것 같아요. 멀면 피곤하기만 해요.”

“오케이.”

“그럼 먼저 퇴근합니다.”

한서진은 지하 주차장에 내려가 차에 탔다. 시동을 걸고 잠시 스마트폰의 메신저톡을 뒤적거렸다.

친구 목록을 주르륵 내리는데, 문득 송하나가 눈에 띄었다. 보통 외모에 자신 있는 여고생은 셀카를 올려둘 법도 한데, 그녀는 한 번도 사진을 공개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이건…… 편육인가?’

송하나의 SNS에는 매일 다양한 요리 사진이 올라온다. 아마 맛집 탐방을 다니는 것 같다. 최근에는 이름 모를 화려한 궁중요리들이 잔뜩 올라왔는데, 다행히 오늘 요리는 알아볼 수 있었다.

‘역시 재벌집 딸이라서 맛있는 거 많이 먹으러 다니는구나.’

그래서 그렇게 발육이 좋은 건가?

스마트폰을 막 내려놓으려는데 갑자기 진동했다. 발신인은 바로 백철중 회장이었다. 한서진은 왠지 뜨끔했다. 마침 송하나의 SNS를 보고 있을 때 전화가 오다니.

“예, 회장님. 한서진입니다.”

「어, 날세. 혹시 바쁜가?」

“아뇨. 지금 막 집에 들어가려던 참이었습니다.”

「내가 입이 심심해서 그러는데, 같이 술 한 잔 할 텐가?」

“혹시 저번의 그것 때문이시라면…….”

백철중은 껄껄 웃으며 말을 잘랐다.

「그런 게 아니니 마음 편히 오시게. 정말로 순수하게 술 한 잔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걸세.」

“알겠습니다. 그럼 조금 있다가 뵙겠습니다.”

한서진은 전화를 끊으며 피식거렸다. 진짜로 순수하게 술만 먹으려는 것은 아니리라.

그러나 알면서도 속아주고, 같이 대작하는 게 이제는 아무렇지 않아졌다.

백세완 사건 이후, 백철중과 자신의 관계는 변했다. 대등한 관계로 성큼 올라섰다고 할까. 까마득한 나이와 신분 차이에도 불구하고, 백철중은 자신을 정중하게 대우해주었다.

한서진이 술자리를 극구 사양하지 않는 건, 그런 대접을 받는 게 기분 좋다는 이유도 있었다. 그리고…….

‘하나는 지금 집에 있을까?’

……이건 고이 마음 구석에 접어두는 게 좋겠다.

한서진은 곧장 한남동으로 향했다. 정문에 가까이 다가가자 저절로 문이 열렸다.

차를 세우고, 응접실에 들어섰다. 편안한 옷을 입은 백철중 회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게.”

“결례를 끼치러 왔습니다, 회장님.”

“결례는 무슨. 부른 건 난데.”

백철중은 껄껄 웃으며 등을 가볍게 두드려 앉기를 권했다. 그러다가 문득 물었다.

“그런데 오다가 하나와 안 마주쳤나? 마침 하교 시간인데.”

“송하나 학생, 기사 차 타고 다니지 않나요? 저와 마주칠 수가 없을 텐데요.”

“아, 하나는 학교 갈 때는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네. 내 딸인 거 학교에 알리기 싫어해서 말이야. 친구 떨어져 나간다고.”

“아, 그렇군요.”

“오다가 안 마주쳤나 보군.”

“네, 못 봤습니다. 길이 어긋났나 봅니다.”

그때 현관문이 열리며 송하나가 들어섰다. 신발을 벗던 그녀는 한서진과 눈이 마주치자 흠칫했다. 그러나 곧 표정을 지웠다.

“다녀왔습니다.”

새침하게 인사를 한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위층을 향했다.

“외간 남자가 집에 와서 부끄러운가 보군. 아직 감수성 예민할 때니 이해하게.”

“……아, 네.”

부끄러워하다니, 그건 절대 아닌 것 같은데요.

한서진은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삼켰다.

잠시 후 가정부가 술과 요리를 가져왔다. 진수성찬은 아니었고 가볍게 술 한 잔 하기에 적당한 안주 요리였다.

“한 잔 하지.”

“아, 네. 감사합니다.”

“요리가 부실해도 이해하게. 지금 메인 요리를 준비하고 있으니까. 이건 그냥 에피타이저라고 생각하게나.”

“아닙니다. 맛있는데요.”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적당히 술기운이 올라왔다.

빈 술잔을 다시금 채우고 난 직후, 문득 백철중이 진중하게 입을 열었다.

“사실 자네에게 사과하고 싶은 게 하나 있네.”

“네?”

“별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 말은 해야 할 것 같아서. 내가 예전에 자네한테 부끄럽게도, 선을 그은 적이 있지?”

“선을 긋다니요……?”

무슨 말인가 생각하던 한서진은 곧 기억해냈다. 송하나를 더 이상 만나지 말라던, 완곡하지만 분명한 거리를 두었던 일이.

백철중은 민망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내가 자네한테 못할 말을 한 것 같아서. 자네가 무슨 미성년자한테 흑심 품고 그러는 나쁜 친구도 아닌데, 아비로서 너무 설레발을 친 것 같단 말이지.”

“…….”

“그래서 그 말을 전부 취소하고 싶네. 우리 하나가 찾아가더라도 너무 박대하거나 그러지 말아주게. 그 아이도 은근히 외로움 많이 타는 아이라네.”

“그건 걱정 마십시오.”

“정말이지?”

백철중은 웬일로 집요하게 다짐을 요구했다. 별로 어려울 것도 없는 터라, 한서진은 순순히 끄덕여줬다.

“서운한 거 전혀 없습니다.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고맙네. 아, 드디어 메인 요리가 나오는군.”

가정부가 요리 카트를 끌고 다가왔다. 한서진은 무심코 차려진 요리를 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요리들이 왠지 눈에 익었던 것이다.

‘아, 잠깐만?’

하나같이 눈에 익은 궁중요리들. 최근에 송하나가 SNS에 올린 그 음식들이었다.

‘……맛집 탐방이 아니라 가정 요리사가 해주는 집밥이었구나.’

이건 좀 부러운데?

============================ 작품 후기 ============================

정말 요리사가 만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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