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0 그룹의 선택 =========================================================================
한서진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정황이 너무 확실했다.
‘그러고 보니 여기, 뉴월드백화점이잖아.’
장소가 같고, 남녀 두 명 모두 이름이 같다. 심지어 남자의 반응을 보라. 이보다 더 확실할 수가 있겠는가.
“지혜와 아는 사이라서요. 전 직장에서 정준석이란 사람과 사귀었다는 말이 생각나서 혹시나 해서 찔러본 건데, 참 이것도 우연이네요.”
“지혜와 대체 어떻게 아느냔 말입니다.”
목소리가 더욱 차가워졌다. 한서진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 누가 어금니 콱 깨물라고 외칠 판인데?
“아는 사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아는 사이.”
“그걸 따질 입장이던가요? 정준석 씨, 당신이?”
“…….”
차가운 일침에 정준석은 입을 다물었다. 불끈 쥔 주먹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인다. 남의 동생한테 상처를 준 주제에 무엇이 그리 분한 건지, 한서진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확 환불해버려?’
보아하니 백화점에서 상당히 높은 직급 같은데, 그가 다니는 직장의 매출을 올려줬다는 게 문득 짜증났다. 송하나가 손수 골라준 것만 아니었으면 즉시 죄다 환불했을 것이다.
“저기, 오빠. 약속장소 슬슬 가봐야 하지 않아요?”
그때 송하나가 조심스럽게 소매 끝을 잡아당겼다.
한서진은 찬물을 끼얹은 듯이 정신을 차렸다. 그래, 어차피 이미 끝난 인연이다. 당사자인 한지혜가 정리했는데, 자신이 그 뒤에 다시 나서서 왈가왈부하는 것도 좋지 않다.
“아무튼 이렇게 실제로 봐서 반가웠습니다, 정준석 씨.”
“…….”
“전 이만 가봅니다.”
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노려보는 눈빛이 이상하게 유쾌했다.
‘자기 쪽이 차놓고, 왜 저렇게 당당해?’
그렇게 속으로 어이없어 하는데, 옆에서 송하나가 슬쩍 질문을 던졌다.
“준석이 오빠하고는 어떻게 된 거예요?”
“넌 말해도 잘 모를걸.”
“왜 몰라요. 저도 지혜 언니 아는데.”
한서진은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그리고 놀란 눈으로 송하나를 돌아봤다.
“네가 지혜를 어떻게 알아?”
“한지혜 언니, 맞죠? 여기 뉴월드백화점에서 일하셨던.”
“전 직장이 뉴월드백화점은 맞는데…… 그게 이 지점이었어?”
“네. 준석이 오빠가 몇 번 소개해줬어요. 여자친구라고 얼마나 자랑을 했는데.”
“자랑을 해?”
“둘이 엄청 닭살커플이었거든요. 지혜 언니하고 저 지금도 가끔 연락해요.”
“지혜는 네가 H그룹 딸인 거 알아?”
“모를걸요. 제가 말 안 했으니까요.”
송하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시 물었다.
“오빠, 지혜 언니하고는 사이가 어떻게 돼요? 그러고 보니 성이 같던데.”
“동생이야.”
“아하, 그랬구나.”
송하나는 알겠다는 듯이 끄덕였다. 그 표정은 흡사 짐작하고 있던 사실을 확인해서 기분 좋은 것처럼 보였다.
“근데 오빠, 7시 약속이라면서요? 지금 6시 30분인데.”
“아, 빨리 가야겠다. 오늘 고마웠어.”
“파이팅. 승리하고 돌아오세요.”
송하나는 걸음을 멈추고, 작게 쥔 주먹으로 응원하는 시늉을 했다. 주차장까지 따라오지 않을 모양이었다.
“전 오늘은 여기까지만요.”
송하나와 헤어진 한서진은 정준석을 떠올리며 가만히 중얼거렸다.
“하나와 친한 거 보면, 그 놈도 있는 집 자식인가 보네.”
차에서 내린 이서나는 S호텔에 들어섰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감색 코트를 걸치고, 와인색 에르메스 버킨백을 든 모습은 귀부인처럼 우아했다. 두 명의 경호원이 좌우에서 그녀를 에스코트하듯이 섰다.
“그 친구는?”
“조금 전에 먼저 도착했습니다.”
“다른 손님은 없겠지? 소란스러운 건 싫거든.”
“오늘 하루 매장을 빌렸습니다. 방해받지 않고 대화 나누실 수 있을 겁니다.”
“잘했어요.”
이서나는 자신만만하게 고층 레스토랑을 향했다.
‘500억 달러의 행운아라.’
500억 달러. 엄청난 거액이다. 개인 자산만으로 치면 한서진은 압도적인 국내 부호 1위에 들 것이다. 진성그룹 회장 이창용, 그녀 부친의 공개 재산도 5조 원에 미치지 않으니.
그러나 이서나는 위축되지 않았다. 돈은 큰 힘이 분명하지만, 돈만으로 모든 걸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진성그룹은 돈과 경제, 인맥에 걸쳐 오랜 시간 동안 이 사회에 공고한 영향력을 뿌리내렸다. 그 무형적 네트워크가 내는 힘은 이 나라를 움직일 수도, 지배할 수도 있다.
괜히 이 나라가 진성공화국이라 불리는 게 아닌 것이다. 500억 달러가 대단한 것은 맞지만, 그런 무형적 힘에는 미치지 못한다.
‘결국 하루아침에 돈벼락 맞은 대학생일 뿐이지.’
그 점을 파고들면 어렵지 않게 뜻을 이룰 수 있으리라. 같은 대학을 나왔고, 또 저번에 같이 식사를 한 인연도 있지 않은가. 이서나는 여러 모로 자신이 있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다른 손님은 일체 받지 않는 터라, 모든 테이블은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다. 가장 전망 좋은 테이블에만 촛불이 켜져 있고, 약속 상대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이서나는 미소를 머금고 다가가다가 살짝 흠칫했다.
갑자기 찾아온 대박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서민 출신 대학생을 상상했는데, 눈앞에는 근사한 비즈니스맨이 앉아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웬만한 부자도 엄두를 못 낼 명품을 걸치고 있지만, 시계와 넥타이의 색 배합 하나하나까지 디테일하게 신경을 쓴 느낌이 살아 있다.
갑자기 큰돈이 생겼다고 흥청망청 좋은 명품만 사서 짜깁기한 게 아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문 상류층의 눈으로 신경 써서 맞춘 코디였던 것이다.
이서나는 지금까지 그에 대해 갖고 있던 평가를 접었다. 그것들은 더 이상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직감했다.
“내가 좀 늦었죠?”
“아, 선배님. 어서 오십시오.”
한서진이 깍듯하게, 하지만 지나치지는 않게 인사했다. 이서나는 흐응, 하고 그를 슬쩍 훑어보았다.
“역시 사람은 옷이 날개라더니, 한 대표가 이렇게 멋진 남자였나요? 몰라볼 뻔했어요.”
“감사합니다.”
“오늘은 내가 살게요.”
이서나는 자연스럽게 지배인을 불러서 주문을 마쳤다. 한서진은 집중해서 그녀의 몸짓 하나하나를 관찰했다. 최상류층으로 태어나 살아온 사람은 저렇구나, 하는 소감이 문득 든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이끌었다. 날씨와 경제, 사회 시사 등 가벼운 주제로 먼저 시작했다.
둘을 이어준 인연의 매개체가 백세완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은 전혀 입에 담지 않았다.
“한 대표가 이번에 대박 냈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선배로서 뿌듯하고, 또 축하해주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한 번 보자고 했던 거예요.”
“아,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500억 달러라니……. 난 상상이 안 가. 이제 한 대표가 명실공연한 우리나라 최고 부자로군요.”
이서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런데 제세공과금 문제는 어떻게 할 건가요? 500억 불이면 세금도 어마어마하게 나올 텐데. 그거 다 내려면 속이 엄청 쓰릴 거예요.”
“글쎄요. 저도 일단은 생각 중입니다.”
“우리 회계팀한테 한 번 물어봐줄까요? 세금을 최대한 낮출 수 있는 방법쯤 금방 찾아낼 거예요.”
“괜찮습니다. 어차피 세금은 해외에 낼 거라서요.”
“……해외?”
의외의 대답이었는지 이서나는 멈칫했다. 한서진은 시원스럽게 덧붙였다.
“앞으로 해외에서 사업을 할 생각이라 국내에는 생활비 말고 돈을 들여올 이유가 없거든요. 조세 협약 맺은 국가에 세금 내면 되니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보다 세금도 훨씬 싸고요.”
“착실하게 준비하고 있었네. 걱정한 게 민망해졌어요.”
“아닙니다, 염려 감사합니다.”
이서나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 대답에서 그녀는 확신했다. 상대는 일확천금으로 정신머리가 둥둥 떠 있는 대학생이 아니다. 이제 어엿한 억만장자 재벌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돈벼락을 맞은 행운아와 억만장자. 그 둘은 같은 500억 불을 쥐고 있어도, 서로 전혀 다른 종이라고 할 수 있다.
이서나는 인정했다. 상대는 재력으로도, 정신으로도 이 나라의 로열 클래스에 올라섰음을.
“한 대표는 동문 후배니까 내가 솔직하게 말할게요.”
“예, 편히 말씀하십시오.”
“이용무 부회장의 경영 능력, 어떻게 생각해요?”
“…….”
“나도 대강은 들었어요. 5nm공정 기술을 겨우 이천억에 사겠다고 제시했다면서요? 내가 그걸 듣고 얼마나 기가 찼던지, 상인이라면 무릇 물건이나 권리의 가치를 냉정하게 책정하는 게 기본 아닌가요?”
“……그렇긴 하죠.”
“그래도 한 대표가 큰 손해 안 보고 권리 매각 잘 마무리해서 다행이라 생각해요. 하지만 더 이상 용무한테 그룹을 맡겨둘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반도체 사업 부문도 작년부터 계속 죽을 쑤는 중이고……. 다른 사람을 내세워야 할 것 같아요.”
“다른 사람?”
“제가 맡는다는 건 아니니 오해 말아요. 회사는 실력이 뛰어난 전문 경영인한테 맡겨야 한다는 게 내 신조예요. 그런데…… 내가 힘이 좀 없어요.”
이서나는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나 좀 도와줄래요?”
한서진은 묘한 짜릿함을 느꼈다.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을 꿔다 논 보릿자루처럼 시큰둥하게 대하던 그녀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부탁을 하다니.
두 재벌 2세 남매가 경영권을 놓고 서로 사이가 나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한서진은 이걸 어떻게 이용하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그런 궁리에 몰두하는 자신을 깨닫고 살짝 놀랐다.
쓴웃음을 지우고, 그는 이서나를 똑바로 주시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립서비스를 진지하게 들려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큰 변화인 것일까.
“오빠 왔네.”
본채를 들어서는데, 1층까지 내려온 한지혜가 반갑게 맞이했다. 실실 웃으며 몸을 살짝 배배 꼬는 게,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또 차 빌려달라고?”
“응, 내일 하루만 더. 아니, 그냥 내일부터 일주일 정도 빌려주면 안 돼?”
“그럴 거면 애초에 컨버터블로 사지 그랬어. 내가 사준다고 했을 때.”
“아이, 지금 차도 좋아. 근데 오빠 차 한 번 타보니까 엄청 좋더라고. 차에서 내릴 때마다 사람들이 다 쳐다보는 시선이 너무 짜릿해.”
“……그 맘 내가 정말 잘 알지.”
남매간에 격렬한 공감대가 형성되는 소감이다. 이거 빌려주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겠다.
“알았어, 빌려줄게. 기왕 빌려주는 거 그냥 질릴 때까지 타고 다녀.”
“어, 정말 그래도 돼?”
“나도 대형 SUV 타고 다니니까 생각보다 편하더라고. 다음 차는 오프로더로 살까 봐.”
키를 던져주자 한지혜는 재빠르게 허공에서 낚아채고는 배시시 웃었다. 부드럽기 그지없는 분위기, 한서진은 문득 부모님이 여기에 함께 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상상의 끝 맛은 결코 좋지 않았지만.
‘차라리 없는 게 나아.’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낳아주신 것은 고맙지만, 그것 외에는 본받을 게 없는 부모였다. 우습게도 남매 둘만 남아 행복해지자 비로소 그것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같이 있을 때는 불행하다는 것을 몰랐다. 없어지고 나니 그게 불행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못된 생각이지만, 돈을 들고 도망친 어머니한테 차라리 고마운 마음까지 들었다.
한 가지 바라는 게 있다면, 앞으로도 지금까지처럼 쭉 나타나지 않았으면 하는…….
포르쉐 키를 쥐고 히죽거리는 한지혜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한서진은 문득 물었다.
“너, 정준석이 그 친구한테는 정말 아무 유감없는 거지?”
“응? 뭐, 그렇지. 다 털어냈어.”
조금은 어두워질 줄 알았는데, 한지혜는 마치 저녁 식사를 질문 받은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오빠도 나 쿨한 거 알잖아?”
“어지간히 못된 놈이었나 보네.”
“그건 아니고, 어머니 되시는 분이 너무 냉혈이시더라고. 사람 가슴에 비수도 참 잘 꽂아 넣으시고,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그냥 정리했지.”
“나 같은 오빠 있다는 거 알면 그 집도 생각이 달라지지 않을까?”
진심이 아니라 시험처럼 던져 본 것이었다. 한지혜가 아직도 미련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그야 그렇겠지만, 뭐 하러? 원래부터 내가 갈 길 아니었던 거야. 그래도 준석 씨는 좋은 사람이니까, 참하고 돈 많은 집안 아가씨랑 맺어지기를 빌어주고 있어. 그게 전부야.”
통찰안이 사람의 마음까지 들여다볼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한서진은 그런 아쉬움을 느꼈다. 그래도 겉으로 만큼은 완벽히 극복한 것처럼 느껴진다.
“근데 지혜 너, 송하나하고 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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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디션이 최악이라 하루 종일 누워 있었지만 오늘 하루도 무사히 딱지를 수거하기 위해 절뚝이면서 이렇게 왔씁미다.